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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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학이 무척 바쁘다. 철학이 바빠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들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철학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을 때 철학에 기대기도 한다. 철학이 바쁠 만도 하다.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는 제목이 너무 뻔해서 식상할 정도다. 철학이 영화도 만나고 예술도 만나고 바쁜 생활 속에 이번에는 당연히 만나야 할 ‘삶’을 만났다. 철학의 역할과 기능을 따져 볼 필요는 없다. 학문적 대상으로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버린 철학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철학자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라 생활인이다. 우리들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새로움과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주고 고정관념을 하나 둘 쯤 깨뜨려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다 철학자다. 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생활 속에서 당연히 마주치는 일들이 많다. 그 마주침과 부딪힘 속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르게 바라보고 거기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 우리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면 가장 훌륭한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하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아니 어떤 관점에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점이나 시점은 세상을 보는 전제 조건에 해당한다. 전제가 잘못될 경우 전체가 틀려버린다. 물론 다양하지 못한 하나의 관점은 가장 경계해야할 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다양한 논의들도 재미없다. 뚜렷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런 책을 만나는 건 독자에겐 축복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들을 통해 철학의 흐름을 짚어주고 2부에서는 사랑과 가족 이데올로기 그리고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일상에 매몰되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거시적 조망이다. 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매일 가족과 부딪히면서 그것들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어긋나거나 부자연스러울 때는 이유를 모른채 불만에 가득 차거나 화가 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얘기들을 건넨다. 그 말들이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다면 금상첨화다. 저자는 쉬운 말로 독자와 대화를 시도한다.

쉽다는 것이 가볍거나 얇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숨많은 철학자와 고전을 쉽게 풀어 인용하고 씨줄과 날줄로 묶어 절적하게 배치하는 것은 당연히 저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거기에 자신의 철학적 성찰까지 담아내야 한다. 가벼운 내공으로 만만하게 시작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철학, 삶은 만나다>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마지막 3부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과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그리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철학사를 안다고 해서 철학책을 읽었다고 해도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쓸데없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국밥이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타자’라는 놀음판의 ‘따짜’와 다르다. 철학에서 사용하는 타자의 개념을 몰라도 좋다. 다만 ‘타자는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많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데리다는 선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진정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 내와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은 살아 숨쉬는 동안 끊임없이 해야하는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하면서 산다는 것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방법을 찾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생각들이 가슴과 다리로 이어진다면 좋겠다. 생활 속에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참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06122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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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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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제도는 기회를 평등하게 한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분을 독점하고 말았다. - P. 29

시대를 초월해서 냉정하고 정확한 진단과 비판은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말들이지만 시대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결코 만만찮은 선견지명을 느끼게 된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21세기 더욱 유효한 울림으로 들린다.

세상에 학교를 없애자면 참 많은 사람들이 일단 굶어 죽는다. 학교에 기대거나 기생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쯤 될까? 잘못 접근하면 일리히의 주장이 반문명론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행복은 자건거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학교 없는 사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전일제 출석에 의한 획일적인 공교육를 실시하는 학교의 폐지를 주장하는 저자를 과격하게 볼 수도 있으나 이 책에서 조목조목 분석과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학교는 할말이 없어 보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에 몸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황당하게 들릴만한 저자의 주장은 뼈아픈 자기 반성이며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기초한다. 학교가 굴러가는 시스템이나 비효율적 보수적 관리 체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학교 교육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교육을 ‘인적 자원’의 양성으로 보는 수단적 개념으로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학교교육의 맹신은 사회화 과정에서 배제와 수용이라는 결정적인 칼자루가 된다. 60년대 실천적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창한 아비투스와 더불어 학교교육도 사회의 계급을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부르디외나 아비투스가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겹침점이 많다. 특히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라 일컬던 시대에 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계급 상승을 꿈꾸었겠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지금과 같다.

저자는 학교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한다. 극단적 선언으로 들린다. 현실성이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그가 말하는 비판의 초점을 눈여겨 보고 반성적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인의 능력과 인간적 본성을 떠나 학벌 위주의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모든 ''위선적인 공익사업'' 중에서 학교는 가장 교활하다. 고속도로망은 자동차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뿐이었으나, 학교는 스펙트럼의 우측 끝에 몰려 있는 일군의 근대적 제도 전체를 창출해낸다.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낭만적이라고 일축할 정도로 끝내주는 것이겠지만 학교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즉시 냉혹하다든지 또는 제국주의자라고 공격받는다. - P. 106

날선 칼날 위에 서서 미래를 조망해 보아야 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 소모되는 사교육비와 전 생애를 통해 학교교육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따져보자. 공부를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그에 대한 대안은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자. 국가의 존재처럼 학교의 존재는 무소불위의 권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기형적으로 교사의 권위와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문제와 처방은 다양하게 논의되겠지만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은 우리들이 학교 밖에서 학습한 것이다. 학교 아동은 교사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때때로 교사가 있을 때라도 대부분의 학습을 자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단히 비극적인 일은 대다수의 사라들은 전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결국 학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
누구나 학교 밖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교사의 개입 없이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느끼는 것, 노는 것, 저주하는 것, 정치에 관여하는 것 및 일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 P. 58

아동들이 학습한 것의 대부분은 결코 교사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다. - P. 59

어떠한 훌륭한 교사라도 잠재적 교육으로부터 학생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 P. 64


교사의 역할과 한계를 단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저자의 지적은 단호하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교사의 역할이 축소되는 이유와 저자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학생들이 교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회의에 공감한다. 책임 회피의 차원이 아니라 극단적인 신뢰도 철저한 불신도 모 위험하다.

현대의 학교를 기초로 하여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역설적이다. 학교의 교사가 재판관, 이데올로기스트 및 의사의 기능을 한 몸에 다 갖추어 가질 수 있?때 사회의 기본적인 양식은 원래 인생을 위한 준비과정 자체에 의해 왜곡되게 된다. - P. 62

어떠한 제도도 학교만큼 능숙하게 참가자들에게 현대 세계에 있어 사회의 원리와 사회의 현실 사이에 있는 깊은 모순을 은폐할 수 있는 장치는 없을 것이다. 학교는 세속적이며 과학적이고 또 죽음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합세하고 있다. - P. 80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 없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학교를 폐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렇다면 매년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현실과 끊임없이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에 대한 방법들이 학교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년대계인 교육에 관한한 모두가 전문가이다. 그렇다면 학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관심은 당연하지 않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의 목적과 개인의 행복과 유리된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제기를 통해 개선될 것인지 아니면 경쟁과 이기적 욕심으로 버텨 볼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결정에 달려있다. 단순한 시선과 지엽적인 해결책으로 한방에 풀어낼 수 없더라도 현실적인 대안들을 내놓아야 할 시기는 벌써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도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0612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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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획기적이네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이가 적응을 못하고 겉돌때마다 제가 생각했던 내용들이 들어있어요.
우리 애한테 과연 학교나 선생님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생각해왔고
과감히 학교를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학교에 안가면 큰일나는줄 알아요.
그런 사회에서 저도 살아왔기에 아이의 두려움을 잘 알지요.

짱꿀라 2006-12-2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자체와 선생님은 필요하다고 보여지는데........
아이들이 가정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생활이라고 할까요.

드팀전 2007-03-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익숙하여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학교.
학교라는게 선구적 비판자들에 의해 기존 체제를 안정화 시키고 반란의 싹을 가라앉히고 순응하는 자들의 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또한 계급의 재생산 역할까지...오늘 한겨레 신문에도 농촌 아버지와 강남 아버지의 학력 비교기사가 실렸지요.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내용인지라...
딜레마가 좀 있어요.학교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무정부주의적 방식으로 교육제도를 거부하기 힘들다는 점이지요.좀 더 자유로운 세계를 위해 결국 공교육이 개선되야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국가 기구의 양보를 담보해야하고 양보라는 형태로 또 다른 포섭이 이어지는 것이니까...

sceptic 2006-12-2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래 집단과의 사회화나 교사의 역할 모델도 중요하긴 하지만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집단적 학교교육에 대해 일리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타협과 양보라고 할 순 없지만 지금 학교교육 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반성적 성찰은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오늘 아침 한겨레에서 이 관련 기사를 봤습니다. 학교교육을 통한 계급의 고착화가 가장 큰 문제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도 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팀전 2006-12-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얽힌 실타래입니다.교육문제는.
(<미국민중사>를 읽다보니 이반 일리치의 <디스쿨링 소사이어티>.위의 책이 언급되더군요.70년대 교육계에서 시도된 탈제도화 논의 중 한권으로..)
^^ 그냥 웃는 이야기인데 '제도 변화를 통해 해법을 찾자'는 -표현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말을 저 역시 도망갈 때 없으면 생활 현장에서 가끔 쓰는데...쓰면서도 참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님의 말씀이 틀렸다거나 이상하다는게 아니라..그 표현을 제가 가끔 쓰면서 혼자 속으로만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이야기군' 하며 꿀꿀해 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이야기해봤습니다.

sceptic 2006-12-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하신 이야기지만 웃을 수 만은 없는 지적 맞습니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개인의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모두의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공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실적 대안을 찾고 온몸으로 모든 문제들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적당한 핑게가 아니라 모두가 안고 있는 서민들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사한 문제가 터지거나 작은 참여나 실천의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의견을 보이는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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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무늬들’ 중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일종의 마술이다. 그래서 난 시인들을 마술사라고 부른다. 그리움의 두께와 무게를 유리창에 낀 먼지로 보여준다. 밀어내도 잘 밀리지 않는 미련과 아쉬움을 시인은 물자국으로 표현한다. 손끝으로 만져보지 못한 내밀한 시간을 견뎌본 사람들은 안다.

이병률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은 손을 베일만큼 날선 감수성으로 벼려져 있다. 생활 속에서 만져지는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고 시간의 두께를 벗어난 언어들은 살아 숨쉰다. 우리들 마음이 가 닿는 곳과 가 닿지 않는 곳을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 ‘봉인된 지도’ 중에서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저녁의 습격’ 중에서


시집을 읽다가 문득 눈길을 멈추고 심호흡을 가다듬는 구절이 나오면 사방은 정막하다. 시인의 보여주는 소실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목구멍으로 밥을 떠넣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시간들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어떻게 비춰지는 것일까? 시인의 눈에 투영된 모습들은 ‘낯설게 하기’가 아니라 ‘아프게 하기’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적 유희와 다른 언어를 통한 사유와 사고의 확장은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의 몫이 된다. 해박한 이론과 관념적 이해가 아닌 호흡과 숨결을 만나게 된다면 행복하다. 어떤 독자라도 웃으며 그 시와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된다. 이병률의 시는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면서 쉽게 규정될 수 없을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눈발을 통해 비명 소리가 재워지고 뒷모습이 희미해지며 들리지 않게 고백하고 만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아침, 창밖의 나뭇가지에 쌓인 흰 눈의 무게만큼만 무거워지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돌아본다. 그 시절 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배후를 알고 싶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선언은 ‘봄날은 간다’이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당신’이라고 명명된 존재는 봄날과 함께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당신이 건설한 제국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히는 이 시 너머에 오롯이 앉아 있는 너의 모습을 본다.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연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06121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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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시와 님의 글이 잘 어울렸어요.
또 한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에요.

sceptic 2006-12-1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운 멘트를...-_-
 
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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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념이 없다. 군대나 사회에서 개념이 없다는 말은 욕이다. 어떤 일의 순서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거나 엉뚱한 짓거리를 일삼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보통 ‘개념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런 개념은 일반성,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진짜 개념이 없는 것인가는 따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반적인 잣대로 말하자면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에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논리학에 따르면 개념이란 ‘한 무리의 개개(個個)의 것에서 공통적인 성질을 빼내어 새로 만든 관념(觀念).’이라고 정의한다. 언어의 추상성이 바탕이 된 공통 분모가 개념이다. 그러나 국어 사전의 정의는 좀 다르다.

개념 [槪念]
[명사]
1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2 <사회> 사회 과학 분야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사실들에서 귀납하여 일반화한 추상적인 사람들의 생각. 예를 들어 사람들이 많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을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할 때,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3 <철학>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서 얻은 하나의 보편적인 관념. 언어로 표현되며, 일반적으로 판단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나 판단을 성립시키기도 한다.


‘종횡무진’시리즈로 잘 알려진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은 과연 진짜 ‘개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에는 상식도 정보도 없다. 다만 저자가 나름대로 공부하고 이해하고 정리한 개념들이 넘쳐난다. ‘사전’이라는 제목을 붙이기 위험할 정도로 ‘주관적’인 시각과 접근 방법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책에 대한 판단과 감상도 지극히 주관적이겠지만 장정일의 <공부>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각자 이런 ‘개념어 사전’ 한 권씩을 만들 수 있다면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 있다. 힘들겠지만 나만의 ‘개념어 사전’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만드는 책이다.

국어 사전적 의미로 보면 이 책은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한 지식’과 ‘사회 과학 분야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사실들에서 귀납하여 일반화한 추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만 애써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 멋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이 이 책의 원제목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다. 주관과 객관에 대해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기준은 모호하며 이해 방식과 설명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면 이 책이 주관적이라는 데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세상에 넘쳐나는 사전과 인터넷 정보들을 놔두고 누가 이런 종류의 개념어 사전을 찾아 볼 것인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인문학 용어에 대한 개괄적인 접근과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나처럼 잡다한 지식들로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남경태는 스스로 편향적이며 주관적인 용어 정리라고 말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다 걸러서 본다. 거름장치는 독자들의 몫이다. 둘째, 감수성 위주의 문학작품이나 실용적 독서에 뭔가 염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인문학은 사람과 관련된 학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와 그 사람들이 걸어온 역사 그리고 그들의 생각인 철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의 독자로 적합하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주관적 용어 정리에 거부감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 하나의 <개념어 사전>을 기대해 본다. 이런 생산적(?) 논쟁과 모호했던 개념들에 대한 관심과 정의는 사람들의 인식 틀을 확고하게 해 줄 수 있으며 사고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하나의 대상과 현상에 대한 모호했던 관념들을 확인하고 스스로 재정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 바탕 위에서 한 사람의 세계관이 확립되고 수정되며 발전하고 개선된다. 그 개념들이 어떠한 것이든 그래서 우리에겐 끊임없는 정진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가?

과학 용어처럼 분명하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원랙 복합적인 의미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문학 용어에 대해 저자는 “개념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의 분명한 지식과 확고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독자들은 가라. 하나의 용어와 개념이 탄생하기까지의 복잡하고 역사적인 배경들과 그 주변적 지식들을 통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오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모호했던 경계와 이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고 보다 적극적고 능동적인 인문학 공부를 위해 꼭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쨌든 사전인데 이렇게 성의 없는 제본과 표지는 들녘이 반성해야겠다. 시집도 아니고 얇은 겉표지는 두 번 이상 뒤적이면 본책과 분리되고 찢어지거나 더러워져 검은 속 표지의 제목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061216-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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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리뷰를 읽어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짱꿀라 2006-12-17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 읽어보니 금방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놓고 읽지를 못해서.....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마늘빵 2006-12-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전문가들 평이 별로더라구요. 너무 주관적이고 맞지 않는 해석이 많다구. 저도 살까 하다가 말았어요. 출판사서 너무 띄우는거 같던데.

sceptic 2006-12-1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santaclausly님 즐거운 책읽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프락사스님 개인적으로 전 전문가들을 믿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전문가들이 이 책을 제대로 평가할 리 없다고 봅니다. 출판사도 먹고 살아야죠. 그렇다고 제가 들녘에서 받아먹은건 없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을때 전문가들의 평을 들여다보게 되겠죠.
때로는 자기와 생각이 비슷할 수도 있고 아님 다를 수도 있고..
중요한건 책을 읽고 난 후 본인의 느낌일거에요.
님이 쓰신 리뷰는 님 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sceptic 2006-12-1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독서라는 행위가 1차적으로 극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해서 2차적으로 객관적, 사회적 의미를 찾거나 효용을 따지거나 하니까요. 지멋대로 책읽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marine 2007-01-0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말이 옳은지 제가 직접 읽어 보고 싶네요 ^^
종횡무진 시리즈를 재밌게 읽어서 저자에게 호감이 갑니다

sceptic 2007-01-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만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갑니다...괜찮던데요...^^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1. 표지와 디자인

하드 커버의 책은 두 종류다. 적은 분량을 벌충하거나 선물용으로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 또 하나는 두고두고 오래 볼 수 있는 소장 가치가 있거나 두꺼운 분량을 잘 지탱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는 전자에 해당된다. 황금빛 햇살이 눈부신 사막과 낙타, 사람들의 모습이 음영으로 처리된 감각적인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낙타의 길게 늘어진 목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제자도 멋스럽다.  제목이 <성자가 된 청소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무관한 책이다.

2. 주관적 평가

그러나 돈을 주고 이런 책을 사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나는 절대 사지 않겠다.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없다.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듯이 ‘나무에 대한 예의’가 없는 책이다. 구매 등급 ★★

3. 내용과 의미

노벨상을 탔다고 해서 책을 사보거나 경외감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문학상이 그렇듯이 노벨상이 주는 권위와 객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거부한 작가들에 대한 생각도 일조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기행 수필 정도로 볼 수 있는 책이다. 아주 오래된 도시의 이국적 풍경들에 대한 감상과 작가 특유의 사유가 나타나 있다.

영화 촬영을 위해 1954년에 모로코를 찾은 작가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라기보다 이국적인 것들에 대한 관찰에 치중하고 있다.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카네티도 주머니에 돈을 들고 다니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관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철저하게 여행객, 혹은 관광객의 입장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문화적 우월감으로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진지한 성찰과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내용에 공감할 수 없다. 모로코에의 낯선 풍경, 특히 낙타와 관련된 일화로 시작되지만 그것 이상은 얻지 못했다. 문명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삶이 단순히 희망적이지도 강한 생명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번역된 문장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울림도 없다. 극히 주관적인 것이 책에 대한 인상 비평들이겠지만 적어도 내겐 메마르고 서걱이는 불협화음으로만 들린다. 특히 1968년의 책을 2002년에 다시 출판할 정도의 의미를 찾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어떤 문화든 그들 고유의 삶에 방식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그들 나름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있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많다.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세상에 대한 고정된 눈을 점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문명에서 조금 벗어나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있는 그대로를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경건함으로 다가온다. 현대인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눈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이다. 그 시선을 거꾸려 돌려 문명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일 뿐이다.


06121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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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수상하면 주가가 올라가는 건 사실이에요.
저같은 사람들이 눈여겨 보기 때문이겠죠.

짱꿀라 2006-12-1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아주 괜찮은 책입니다. 인식의 힘의 리뷰도 정말로 멋지구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책만 읽고 덥어 두었는데 다시 한 번 책을 보고 리뷰를 써야 할 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sceptic 2006-12-1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노벨상이 주는 의미가 크지는 않은거죠?

santaclausly님 저는 이 책의 내용도 의미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별 감동없는 책이었습니다. 님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비로그인 2006-12-1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을 화재의 인물로 만들고 상금도 주잖아요.
시선이 집중된다는 것만큼 의미도 크겠죠.
노벨상 받은 작품이 다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