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미래가 놓여 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는다. 겹침점이든 누빔점이든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물론 소설이 미래지향적이거나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읽는 사람에게 주어질 미적 가치와 감수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것이므로.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일단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결정하는 문체가 확실하지 않으면 내용이 목에 걸린다. 환상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입담은 소설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소설가도 많이 있다. 개인적으로 성석제의 소설은 문체가 먼저 보이고 내용은 그 다음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소설가는 행복하다. 성석제가 그런 경우다. 그의 소설 <참말로 좋은 날>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순 없지만 성석제의 소설이다. 그러나 조금 달라졌다.

7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은 성석제를 미래를 예견한다. 만약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전제하에. 재치와 농담 속에 진한 페이소스를 담아내던 그가 조금 변화한 듯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그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시킨 신무기는 아니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의 변화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다. 고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했지만 생활의 모습과 패턴이 달라져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끔 지나버린 시간들을 되짚어 보는지도 모르겠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박태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가진 ‘숭고한 삶’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굳게 믿고 지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생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특별한 경우지만 박태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상과 현재의 극단을 드러낸다. 사회적 관심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소설 장르다. 그런면에서 성석제도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80년대를 정점으로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소설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뛰어난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 주목한다. 한 개인과 가정이 확대된 모습이 그대로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법과 규칙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안쪽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어떤 방식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도 개인차이겠지만 위의 두 단편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속에서 인간이 배제되고 법과 규칙들이 선행할 때 생기는 불안과 고통은 당연히 지금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내용은 당연히 책을 읽고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이 소설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은 소설 중의 하나가 <고귀한 신세>와 <악어는 말했다>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했던 영화 <숨바꼭질>을 보다가 10분 만에 결말을 예견했던 것처럼 <고귀한 신세>는 시작 부분에서 결말을 상상했더니 그대로다. 일상에서 만나는 뻔한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산다는 것을 이렇게 유쾌한 비극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만만찮은 소설가의 내공이 필요하다. 특히 <악어는 말했다>는 지루한 술자리 장면이라는 내용없는 지루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군데 군데 드러나는 재치와 마지막 한 마디가 인관 관계의 단면을 희극적으로 풍자한다.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성석제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이야기꾼이다. 아쉬운 면이 있다면 이제 긴 호흡의 장편을 통해서도 만나고 싶다. 깊이과 넓이를 더할 수 있는 작가의 장편을 기다려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같은 말들 속에 진저리를 쳐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성석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렴없이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에 대한 오독이라 할지라도. 홍수 처럼 쏟아지는 풍성한 말의 잔치와 그물처럼 촘촘한 법의 규칙들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과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기울이고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다.


070105-0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미쳤다는 표현 속에 이렇게 많은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심쩍은 눈초리와 의심스런 생각을 갖긴 했다. 질병으로서 미쳤다는 표현과 흔히 일반적인 용어로 미쳤다는 말은 차이가 많다.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일상에서는 미쳤다고 표현한다. 현대 의학에서 미쳤다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뇌의 이상이나 다양한 정신질환자를 우리는 흔히 미쳤다고 표현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면 미친 것이다. 그럼 나는 정상일까? 우리는 모두 정상의 범주 안에 놓여있나?

흔히 의미있는 작업들이라고 하면 인간 사회에 충격을 주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 언급하는 책들이 야간 산행에서 만난 등불처럼 반갑다. 누가 처음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은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고전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원제를 줄여서 번역했지만 특정 시대의 ‘광기’에 집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광기의 역사>로 읽어도 무난하다. 이 책은 책 자체가 갖는 의미와 저자의 명성을 무시하고 읽을 수 없어서 책을 읽는 내내 빛의 간섭현상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감시와 처벌>로 번역된 ‘감옥의 역사’로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푸코의 사유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고전주의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광기’가 어떻게 다루어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처리되었는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들여다보는 또다른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광기가 19세기와 어떻게 다른가?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는 광기는 무엇인가?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밑줄을 치며 잠깐씩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쉽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광기는 종교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에서 접근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이 아닌 비이성의 관점이냐 도덕의 관점이냐가 중요하다.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광기에 대한 태도와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지 관점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도 처리 방법이 전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 사회가 지닌 ‘광기’에 대한 태도는 인간 이성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구빈원에서 출발해서 현재의 정신병원에 이르기까지 푸코가 추적하고 싶었던 광기의 역사는 ‘인간 이성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지혜에 비하면 인간의 이성은 광기일 뿐이었고, 사람들의 얄팍한 지혜에 비하면 신의 이성은 광기의 본질적 움직임 안에 놓여 있다. 큰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광기일 따름이고, 작은 차원에서는 전체가 그대로 광기이다. - P. 92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나는 미쳤나, 정상인가.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광기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지만 현재의 관점에서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 의미와 태도가 달라졌을 뿐 광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을 뿐이다.

숱한 역사적 자료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푸코의 사유를 통해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단숨에 읽어야 한다. 호흡이 끊기거나 단절되고 나면 하나로 집중하기 어렵다. 니체와 고흐, 아르토를 예를 들며 책의 ‘인간학의 악순환’으로 책을 끝내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예술에서 나타나는 광기가 사회적인 부분과 어떻게 다르게 수용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사회가 수용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에 따라 광기의 운명은 갈라진다. 광기를 어쩌자는 것도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조건인 ‘이성’에 반해 ‘비이성’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광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재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푸코가 고민했던 생각의 끄트머리를 짐작할 수 있다.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 같았던 역사를 돌아보면 정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미친게 미친게 아니라 정상이 비정상인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고민은 어떤 것인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용어와 개념이 낯선 부분들과 심각한 번역투의 문장(우리말 구조와 어순이 망가져버린)들이 문맥을 흐려놓고 이해를 방해하는 부분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은 부분들도 어렵게 느껴지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다. - P. 96

광기는 ''착각''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 P. 105

광기는 이성의 완전한 부재인데, 사람들은 광기를 ''이성적인 것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것으로 곧장 인식한다. - P. 317

광기는 진실과 인간의 관계가 혼란되고 흐려지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광기가 일반적 의미와 특별한 형태들을 띠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파괴와 동시에 이 관계로부터이다. - P. 400

광기는 설령 보호시설 밖에서 결백을 선고받는다 해도 어김없이 보호시설에서 처벌받게 된다. 광기는 오랫동안,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도덕의 세계에 유폐되어 있다. - P. 767


광기에 대한 무수한 정의들과 분석들을 통해 푸코가 생각하는 광기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해 왔던 광기의 역사를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광기도 결국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070103-0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 2005 페미나상 상 수상작
레지스 조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푸른숲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인간은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살을 했을 것이다. - P. 107

다소 도발적인 주인공의 고백이 이 소설의 내용을 압축한다. 어떤 고전 소설을 인용하든 사랑에 관한 가장 확실한 정의는 없다. 규정지을 수도 결론 내릴 수도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도 미래에도 사랑에 관한 소설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또 읽는다. 이번에는, 이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연애소설을 읽는다. 비록 그것이 시간 낭비일지라도.

레지스 조프레가 쓴 <스물 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는 우선 제목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나이에 관해서라면 연령을 불문하고 다들 한마디씩 하고 싶어진다. 특히 스물 아홉은 더 그렇다. 내 경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아직도 핸드폰 벨 소리로 쓸만큼 지겹게 듣고 있으며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를 읽으며 스물 아홉을 보냈다. 누구에게나 나이에 관한 충격이 한번쯤은 온다. 이 소설이 스물 아홉에 관한 소설은 아니다. 나이와 무관한 소설을 제목으로 뽑은 출판사 편집자의 능력에 일단 감탄한다. 원제(Asiles de fous)는 불어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혼합 시점을 사용한다. 서른 한 살의 남자 다미앙은 평소와 다름없이 영국으로 출장을 떠난다. 그리고 느닷없이 다미앙의 아버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낡은 수도꼭지를 교체하고 아들을 대신해 스물 아홉 지젤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아들의 물건과 옷가지를 챙기며 끊임없이 쏟아놓는 독백들을 진저리를 치며 들어야 하는 지젤은 이 믿기 어려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나 줄거리는 거의 없다. 지젤의 시점으로 이별의 순간과 남자친구의 아버지에게 대신 이별을 전해 듣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다미앙의 아버지가 진술한 후 남자친구의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과 남편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다음은 다미앙이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와 상황을 묘사한다. 다시 지젤의 입장으로 돌아와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고백과 독백 형식이다. 대화 장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독자들을 향한 독백이든 내면의 고백이든 상관없이 마치 판소리 사설처럼 요설적이고 직설적이서 말의 홍수 속에 갇혀 버리는 느낌이다. 미끈한 비유와 은근히 비꼬는 방식으로 소설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즐거움을 전해준다. 영화와 소설의 형식상 차이는 이런 소설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화로 만들기 어려운 소설이다. 어쨌든 스토리 위주의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사랑 자체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랑을 둘러싼 상황만 주변을 언급한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알랭 드 보통식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 특히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과 위선 -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성을 실감나게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는 그대로 폭력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타자화되지 못하고 혈연관계 그 이상을 넘어 설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사랑할 때 가족을 고려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물 아홉 ‘지젤’이라는 평범한 여자가 겪는 일상과 사랑은 누구나 한 번 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사랑을 하면 이별을 하게 된다. 그 이별의 과정도 각자 다르겠지만 이런 특별한 이별을 통해 그리고 이후의 관계에 대해 지젤은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랑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 P. 145

당신들에게 진실을 말하자면 사랑은 정말이지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고심해본 적이 없으며, 무신론자들이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무심코 ''오, 하느님''을 외치듯 그저 기계적으로 사랑을 말할 뿐이다. - P.241


그녀에게는 미래가 있다. 지나버린 시간들과 주어진 현재를 넘어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희망’이라는 마약의 다른 형식이다. 꿈꾸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그래서 우리는 한 해를 뒤돌아 보고 다가올 2007년을 어떤 형태로든 ‘미래’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행복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렸다. 마치 멋진 기억을 되새기듯. - P. 257


061230-14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2-3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사랑이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일 뿐 가슴 속에 감정이 있어 그걸 증명할 수는 없죠.
그리고 입에서 내뱉는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그게 진짜인지 말하는 동안,듣는 동안 확신이 안 설 수도 있어요.
모호한 감정들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고 있게 만드는 수단으로 보여질 수도 있구요.
스물 아홉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남자든 여자든 새로운 나잇대에 접어든다는건 그만큼 기대보다는 두려움과 책임이 생기니까요.
저한테 스물아홉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서른 아홉때는 서른즈음에를 끼고 살 정도로 혼란스러운 해였어요.
생각을 많이하게 하는 책이네요.
 
이오덕 삶과 교육사상 - 교사를 위한 국어교육의 길잡이
이주영 지음 / 나라말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환산할 수 있을까?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다보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상상한다. 세상을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회를 변화시킨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개인적 삶을 넘어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주영의 <이오덕 삶과 교육사상>을 읽으면서 숙연해졌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오덕 선생님이 가르치려고 했던 바른 우리말과 글 속에는 그 분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다. 한 인간이 신념을 갖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삶이다. 더구나 개인적 이익에 반하고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이기적 욕망들을 버려야 하는 일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오덕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그런 면에서 선명한 빛깔로 미래를 제시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빛바랜 낡은 사상도 있고 시대를 앞선 생각들도 많이 있다. 이오덕 선생님은 이 땅의 교육 민주화와 글쓰기 교육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숱한 후배 교사들에게 진정한 선생의 모습을 몸소 실천하셨다. 석사학위 논문으로 쓰여진 글을 수정해서 출간한 이 책은 단순한 이오덕 선생에게 바치는 헌사와 다르다.

이오덕 선생님의 삶을 통해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앞세워 출범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사상적 배경까지 읽어낼 수 있다. 단순한 이익 집단으로 볼 수 없는 단체의 출범은 이오덕 선생님의 생각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분이 걸어온 길과 민주화를 선언한 교육계의 목표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을까. 과연 민주 교육은 무엇인며 삶을 가꾸는 교육인 인간화 교육은 무엇인가.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그 질문들에 대해 선생님의 삶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배운다.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느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학교교육의 가장 큰 단점이다.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에 맞춰 교사들이 가르치는 내용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우리의 배움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부모는 물론이지만 교사의 역할은 얼만큼 중요한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 사람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 스승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망망한 대해에서 밝은 등대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우리에게 그런 선생님이 계신가 돌아보게 된다. 이오덕 선생님은 충분히 그러한 존재이다.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2003년에 타계하신 후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한 개인의 작은 노력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 선생님의 뜻을 기리고 존중하며 그 가르침을 이어가는 노력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모든 분들의 바람과 마음들이 이 책을 통해 전해진다. 수많은 단체들에 관여하면서도 개인적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참교육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후학들은 알 것이다.

‘논술’이라는 괴물이 온 나라를 흥분시키고 있다. 이오덕 선생님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 권만이라도 제대로 읽어본다면 우리가 지향해야할 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듣고 말하는 것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국어 교육의 내용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형식이다. 국어지식과 문학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오덕 선생님이 평생을 지켜온 생각이 아닌가 싶다.

밝고 화려하게 빛나는 등불이 아니라 희미하지만 어둠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길을 밝혀 주는 이오덕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이 땅의 수많은 후배 교사들과 교육자들 그리고 선생님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질 것이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같이 걸어가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다. 그 길은 이제 시작은 아니다. 선생님이 걸어간 길을 넓고 단단하게 하는 일이 남겨져 있다. 참다운 인간 교육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과 교육자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내용이다.


061228-14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6-12-2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sceptic 2006-12-3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새해 맞으세요.
 
임사체험 상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윤대석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 간다는 말이다. 분리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우리는 늘 분리된 세계로 인식한다. 불연속적 세계관이나 통합된 하나의 눈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일직선상에 놓여 질 수 없다. 죽음과 어깨동무하고 늘 곁에 두고 함께 걸어가지만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침에 헤어지는 가족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 있다.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과는 다르다. 모든 순간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다. 이 순간을 사랑하고 싶다.

죽어본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과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혹은 잠시 죽음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 그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체험을 임사체험이라고 한다. 죽음의 경계까지 가본 경험, 거의 죽었다고 판단되었지만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 그것을 임사체험이라 부른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간혹 들어본 적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었다. 기억될 만한 책이다.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서술도 마음에 들었고 정확한 취재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전개도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비주의 관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전해주는 책도 아니고 과학의 시선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책도 아니다.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만큼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고 있다. 왜?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단순히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익숙한 세계인 이 세상과의 이별때문일까. 소유한 것들에 대한 욕심일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련일까.

죽음 저편으로 갔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이쪽으로 보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영원한 수수께끼고, 영원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하) P. 401

정확하지 않지만 다치바나의 이 말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직접 취재를 통해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은 죽음 이후에 대해 설명한다.

임사체험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연구자들의 사례를 통해 터널체험과 체외이탈 등 공통적인 경험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 책은 죽음의 세계에 접근하기 시작해서 실제 사례를 통해 임사 체험의 최대 쟁점인 ‘뇌내 현상설’과 ‘현실 체험설’에 대해 모두 점검한다.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서술되는 저자의 주장은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주관적이진 않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논거들 속에는 항상 반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런면에서 다치바나의 방법은 신뢰할 만하다. 어느 쪽에도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학이든 아니든 기준도 관점도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마지막 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삶의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을 찾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인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을 하든, 종교를 갖든 버리든 상관없이 결국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된다. 죽음을 맞는 태도와 죽음 이후에 대한 자세도 삶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삶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죽음이야말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김열규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나 죽음 자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보다 생에 대해 환멸을 느끼거나 삶의 목적과 방향이 모호한 나같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늘 우리 몸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을 두려워말자.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이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결국 죽음도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에 충실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본다.

‘네가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진짜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너와 죽음이 만나는 일은 없다. 죽음에 대해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하) P. 404


061225-142(상), 061227-143(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2-2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한 해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댓글도 썼다 지웠다 했답니다.
마음이 심란해지는 책이네요.

sceptic 2006-12-2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란 늘 그런 느낌이지만 다른 태도와 방법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어요. 저물어 가는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