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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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은어처럼 윤대녕의 소설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새롭다. 최근작 <제비를 기르다>에 이어 초기 작품집 <은어낚시통신>을 읽는 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보았다. 물론 소설가에게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서 그 흐름에 맞춰 소설이 국수 가락처럼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온 강물처럼 한 작가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윤대녕의 ‘은어’을 읽다가 ‘음력 삼월 삼일에 강남에서 왔다가 구월 구일에 돌아간다죠?’라는 구절을 보고 ‘제비를 기르다’를 떠올렸다. 윤대녕의 작품 세계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돌고 돌아 찾아온 곳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생의 비밀들을 찾아내지 않을까 싶다.

 은어와 제비는 돌아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의 초기작들은 ‘은어낚시통신’에서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존재의 시원’을 찾아 떠나는 머나먼 여정으로 보인다. 이후 펼쳐지는 다양한 시도들과 소설들이 보여주었던 작업들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거나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말해질 수 없는 순간, 혹은 찰나의 감정들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 순간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말해질 수 없는 부분들을 부단히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이후 사회적 관점이나 자본에 대한 치밀한 세부에 접근하기 힘겨웠던 90년대의 소설은 사소설에 가까운 흐름들을 보여왔다.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윤대녕의 소설은 사회적인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자칫 감정의 과잉 토로나 시대의 유행에 민감했던 소재들의 끼워넣기가 부작용으로 드러날 수 있으나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흐름은 무난하게 비껴가고 있다.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린다. 점치는 여자의 이력과 점집을 찾아가는 세 명의 젊은이(?)들의 모습이 90년대 초반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서 사회로의 확장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모든 균형감각과 폭넓은 주제와 시야를 한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특징없는 백화점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윤대녕은 이제 반환점을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은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문체와 행간에 숨어있는 모호한 환상들은 작가 특유의 개성이 된다. 윤대녕스러운 이야기 전개와 어법들이 주는 매력은 언제나 은근하다. 뜨겁게 달아오르거나 열광할 수 없는 목소리지만 쉽게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은어낚시통신,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카메라 옵스큐라’ 등에서 보여주는 현실과 환각 사이의 거리감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은어, 국화옆에서’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를 보여준다. 엉뚱하게도 철저하게 자본의 힘과 논리 현실 사이의 감시망이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을 나는 인상깊게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그의 소설들을 현실과의 거리감이라고 보는 것은 망원경으로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보여지는 현실과 인물의 내면 풍경은 생활과 거리가 멀다.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광고 카피처럼 그의 소설에서 나는 생활의 냄새를 맡기 어렵다. 아쉬움으로 보아야 하나 작가의 특징이자 매력 혹은 장점으로 보아야 하나?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다.

 처음과 현재를 확인하고 거는 기대는 더욱 크다. 내가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에 대해 개인적으로 갖는 관심은 물론 ‘제비’에서 비롯됐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미래는 진행될 것이고 윤대녕의 작품들은 더욱 흥미롭게 전개될 것이라 믿는다. 맥없이 주저앉아 그대로 쭉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어떤 ‘느낌’ 때문이다.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지만, 벌써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버일 수 있겠지만 어쩐지 다음이 더 기대된다.


0702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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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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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20년만에 사랑니를 또 하나 뺐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였으니 그 고통과 통증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또 뽑을 용기를 냈다. 인간의 기억은 그만큼 간사하다. 지나간 시간들을 지워버리는 화학물질을 분비하지 못하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은 현재이다가 과거였다가 미래일 것이다. 그 오래된 미래 속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비루한 삶이다. 날카롭게 자른 생의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어쩌자는 것일까? 소설은 보여주기만 할 뿐 답은 없다. 미처 바라보지 못한 부분들과 구석구석을 헤집어 보여주는 소설은 흥미롭다. 늘 바라보는 대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혹은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새롭다. 그렇다면 윤대녕의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물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다. 보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져지지 않으니 느낄 수 없고 보이지 않으니 인식될 수도 없다. 그런데 뭔가 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내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이다. 정지화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질 때 생기는 파문.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긴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켜온 그의 무늬와 빛깔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새로움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 소설집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길어올린다. 소설이 되지 않을 것들을 소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편 ‘못구멍’은 서사 구조가 뻔하다.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적어 놓은 몇 줄의 글귀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랑의 의미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반전의 효과는 미미하다. 이런 구절들을 살펴보자.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P. 227 ‘못구멍’중에서 

남녀가 웬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관계에 속도가 생기게 마련이다. 사소한 절차는 서로 비껴가는 일종의 지혜를 터득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좀 더 담백해진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 P. 237 ‘못구멍’중에서

 설혹 사과를 하더라도 두고두고 잊어버려지지 않는 일이라는 게 있다. - P. 246 ‘못구멍’중에서

  책,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주관을 개입시킨다. 내가 살아온 경험과 내 정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본다. 아직도 소설에 줄을 그어가며 읽느냐고? 그래, 그렇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렇게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전달하는 방식의 새로움이든 문체의 특징이든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큰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결국 소설은 인생에 대해 그저 한 번쯤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아직도 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너무 진부해서 다루기 곤란할 것 같지만 이 문제를 빼고 나면 문학은 개점 휴업 선언을 해야한다. ‘연’과 ‘못구멍’, ‘마루 밑 이야기’는 사랑에, ‘낙타주머니’와 ‘편백나무숲 쪽으로’, ‘고래등’은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비를 기르다’와 ‘탱자’는 두 가지가 섞여있다. 거칠게 나누었지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내용이 아니라 소리와 빛깔에 주목해야하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행간에 숨은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무슨 수학책이나 이론서적도 아닌데 숨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는 없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안 느끼면 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작년 봄 강화도에 갔을 때 가능포들에 몰려와 있던 제비떼를 본 순간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문희는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날부터 하늘에서 길을 잃은 철새처럼 방황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 P. 70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따지고 보면 사랑한다는 말처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말도 없잖아요. 그 말은 상대의 모든 걸 원한다는 뜻이니까요. 사실 모든 건 안되죠. - P.81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문희에게 다가왔던 생의 한 순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설명하는 작가의 목소리와 문희가 직접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숱한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돌아보는 인생은 어떨까? 작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갖는 기대와 희망의 대부분은 알고 보면 타인에게 애써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를 객관적인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 186 ‘고래등’중에서

 삶은 뜻하지 않은 각도로 사람을 바꿔놓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계기로 작용해 생의 전모를 바꿔놓는 수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이자 저마다 이면에 감춰진 속박이자 굴레이기도 하다. - P. 187 ‘고래등’중에서

  결국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돈에 목숨 걸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단순하게 인생을 정리하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삶에는 여자의 내부처럼 함부로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열어보게 돼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데 열지 말 것을 열게 되면 대개 뜻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다. - P. 212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이 곧 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몸과 마음은 자웅동체로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 P. 216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이 가난했으므로 피워야만 했다. - P. 217 ‘낙타 주머니’중에서

 열어보지 말아햐 할 판도라의 상자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공감한다. 작가는 ‘낙타주머니’를 통해 생의 비애 혹은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들 생의 굴레일 뿐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생의 다양한 부분들을 헤집고 들여다 보고 때로는 우울과 희망을 버무려 놓아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생이라면.

 뚜렷한 기억 속에 정확한 연도와 날짜와 시간을 적는 방법은 독자들에게 과거를 확인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생을 증거하는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는 이야기 방식과 캐릭터와 맞지 않는 대화들은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 상황에 맞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뱉어내는 앵무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허공에 발딛고 서 있는 듯한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특별한 직업과 생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작가의 많은 소설 속에서 보여 주었듯이 불친절하게 던져주는 희망과 삶에 대한 인식은 찰나적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사회적인 관심이나 거시적인 담론들을 다루고 싶지 않을 리 없겠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주제로 내세워 작가의 대표작이나 특별한 작업에 매달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써야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작가의 미래를 짐작하기 보다는 기다리며 즐기는 것이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070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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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
함민복 지음 / 풀그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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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 본문 ‘흔들린다’ 중에서

 사람은 자연을 닮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산과 물과 바람과 돌은 언제나 스스로 그러한 몸짓으로 거기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든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달라지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일 뿐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가난한 시인이라고 설명하면 함민복 시인이 기분 나쁠라나? 강화도 바닷가에서 고욤나무 옆에 땅에 누워 하늘을 덮고 사는 시인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 속에는 물론 ‘자본’이 숨어 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니 너무나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가난한 시인은 바닷가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의 두 번째 산문집 <미안한 마음>은 읽은 사람을 참 미안하게 만든다. 참 부끄럽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제공되는 책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한 번쯤 눈길을 던져보는 생활이 아니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바닷가에서 시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이야기들은 경의롭기만하다.

 시인이 아닌 바닷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팍팍하며 시인의 생활은 아름답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경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고달프고 신산스런 생활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이며 여린 감수성이며 따스한 손길이다. 오감이 열린 채 섬세하게 발달한 감각세포로 길어올린 이야기들은 그대로 산문이 시가 된다.

 낭만과 거리가 먼 바다의 높은 파도와 먹을 것 부족하고 편리한 시설과 거리가 먼 시골 생활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을까. 도시의 문명과 유리된 시인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불경스럽다. 박제된 수채화가 아니라 시인은 그대로 강화도 바닷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선이 형과 석양주를 나눠마시고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시를 쓰는 생활이 고결한 종교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생활 속에서, 그의 시선에서 생의 진정성을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사나라는 사치스런 질문 대신 고추밭에 물을 주고 쓰러진 옥수수대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고욤나무가 건네는 이야기를 듣는 시인의 생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답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니다. 겸손하고 침작하게 지금 현재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시가 주는 강렬함보다 산문이 주는 잔잔함은 때때로 훨씬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짤막한 산문들을 삽화와 더불어 예쁘게 꾸며낸 출판사의 솜씨는 별로 칭찬하고 싶지 않다. 본능적으로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진 마음을 흐리게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울씨의 일일>에서 보여주었던 가난의 힘과 자본의 힘을 넘어 이제는 고개 숙여 겸손하게 보이는 모습이 <말랑말랑한 힘>을 보여준다.

 이쁜 색시 만나 장가도 가고 아이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사는 모습이 자발적인 행복의 최전선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쨌든 강화도에 갈 때 마다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는 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리얼리스트로서 치열하게 부딪힐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소유한 시인의 자연 귀의가 아쉽고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함민복의 몫이 그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모습과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타당하겠다. 시인의 말대로,

현재란 시간의 섬이다. 세월이 가는 길, 세상 모든 ‘멈춤들’의 정거장인 시간은 현재의 물이다. - P. 41


070129-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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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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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한 상황에 마주하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 평소에 보여주던 사회적 가면들을 껍데기에 불과하다. 타인에 대한 태도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을 일상 속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다. 그것이 나이든 타인이든 상관없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과 나의 태도 그리고 실제로 벌어지는 행동 사이에서 인간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극한 상황은 물론 전쟁이다. 가장 잔혹한 종인 인류는 전쟁의 역사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처절하고 비참한 시간들을 보내왔고 보내고 있다. 전 인류의 트라우마로 일컬어지는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은 20세기의 잔혹사를 대표한다. 숱한 영화와 책을 통해 만나고 또 만나도 인간에 대한 회의가 없어지지 않는다. 이해되지도 않고 상황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전달받을 뿐 비판이나 해석이 불가능하다. 일제 군국주의에 의한 생체실험이나 잔인한 고문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나치스에 의한 대량 학살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증언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일 수 없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프리모 레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1%. 살아남을 확률만으로도 그를 감탄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수용소에서 보낸 생생한 기록이다.

 단순한 호기심과 증언을 넘어선 자리에 이 책이 놓여야 할 것 같다. 레비는 화학자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수용소 경험이 아니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서술 태도는 독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레비는 객관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 한다. 수용소로 이송될 때인 1945년 12월부터 러시아의 공습으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돌아오기까지인 1947년1월까지의 기록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소설도 수필도 일기도 아니다. 미친 시간에 대한 기록이며 증언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 P. 201

 아마도 이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레비는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레비가 아닌 누군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수백만 명의 영혼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살아 돌아온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이탈리아 유대인이었던 저자의 특수성과 나치에 의한 수용소라는 공간이 만나 탄생한 이 책은 그 기록의 생생함에 놀라게 된다. 지나간 이야기를 더듬는 회고록의 형식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놓은 메모들의 연결이다. 비루한 생을 이어가는 것보다 희망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슬픔보다 숙연함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군대 신병 훈련소를 가장 근사치로 생각해보겠지만 비교도 할 수 없다. 참담하지만 인류의 역사였고 지나간 과거라고 묻어버리기엔 그 상처가 너무 크다. 스물 넷의 나이에 수용소에 끌려갔던 레비는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생의 막장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어지지만 특별한 만남으로 도약하거나 좌절한다. 기억에 남을 만큼 감사와 도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이 식은 죽 먹기처럼 쉽다. 단번에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은 그에게 미래를 빼앗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생의 목표와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레비는 살아가면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썼지만 인간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는 여기에 동참하게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여기에서 출발된다.


070127-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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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1-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네요...
1.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말에 참 동감입니다. 극한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힘든 상황에 처하면 인간의 본성이 조금씩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좋을 때야 누구나 좋으니까요.
2. 아우슈비츠 학살에 대해서는 항상 이중적인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희생자가 지금의 학살자로 되어 있는 현실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 같네요.

sceptic 2007-01-2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은 아우슈비츠와 나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상관없다고도 있다고도 할 수 있죠. 무엇인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왜 이런 과정을 겪고 있으며 역사에서 배울 수 없는건지 아이러니죠.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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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능력과 말하는 능력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이 많은 선생과 잘 가르치는 선생이 다르듯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글을 쓰는 능력은 사유의 폭과 넓이, 상상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플러스 알파가 전제마저도 무력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진중권의 글은 적어도 내게 흡인력이라는 면에서 손 꼽을만하다. 숟가락을 허공에 든 채 만화 영화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어린 아이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이론과 예리한 시선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공허하게 들린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현실적인 공감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코미디 프로 보다 더 낄낄거리며 읽었다. 예를 들어 ‘포토샵, 일주일만 하면 황우석만큼 한다’는 인용문을 보고 대략 2분간 미친듯이 웃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전달하는 방식이 새롭다.

 근대화에서 전 근대성 그리고 탈근대가 아닌 미래주의라는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인간개조에서 된장남과 된장녀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한국 사회를 요리한다. 독일에서 유학했던 경험이 이 책에서는 진중권의 제3자로서의 시각으로 돋보인다. 이 후 한국 사회에 돌아와 한국 사회의 특수성과 개성들을 날카롭게 그리고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국은 이래서 안된다’는 유의 책들과 다르고 ‘한국인은 이래서 뛰어나다’는 민족적 우월성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차분하지만 예리한 칼날로 단면을 드러낸다.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들춰내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드러내는 날카로움은 저자 특유의 글솜씨로 마무리된다. 강준만의 <인간사색>과 비교해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은 아니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화상을 그려내는 데 서투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거울의 역할을 한다. 라캉의 말대로 거울을 통해 자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발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리고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대중적인 글쓰기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라서 다양한 측면의 분석과 해석은 미흡하고 지나치게 주관적인 관점으로 서술되는 아쉬움은 상쇄될 만하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군대다’라는 책이 나올만큼 기계화된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의식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다.

창의성이 생산력이 되는21세기에 대한민국은 자신의 미래를 군대 훈련소에서 찾고 있다. 모자라는 상상력을 사디즘으로 보충하는 변태들이 너무 많다. - P. 37

 거침없는 표현과 실날한 비판의 메스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독자에게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넘어 우리들의 자화상을 어떤 모습으로든 새롭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저자의 시선 속에서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우리들의 모습 사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국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단편적인 이슈와 거시적인 담론의 틈바구니에서 마주치는 이 책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전해준다.

같은 달력을 사용한다고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 P. 110

 갈등의 근본 원인 중 하나를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진단은 정확해 보인다. 같은 달력을 사용하면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내용은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하늘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 일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할 때가 있다. 코레아니쿠스의 축소된 자아가 나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나는 아니라고 외치는 대신 큰 거울을 들여바 보는 일도 의미있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제 거울을 들여다 보았으니 어쩐다. 머리를 빗을까? 아니면 화장을 할까?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릴까? 너는 누구냐고 외쳐 볼까? 각자의 몫이다.

07012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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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1-3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진중권의 책은 인기가 많군요...리뷰 잘보고 보관함에도 넣었습니다.지금 당장 읽을 것은 아니지만.진중권이 그동안 냈던 -미학책을 제외한-책들 또는 계간지들에 올렸던 글들과 유사할 듯 합니다.갈등의 원인을 한국사회의 근대와 전근대의 병존으로 보는 것은 여러차례 썻던 글인가 같기도 합니다.엘리아스와 푸코의 예를 들면서 그 둘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단계론적 방식에 대한 거부. 근대와 전근대,탈근대가 공존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기때문에 비단 한국 사회에만 적용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저자의 지적이 정확하다기 보다는 '8월에 물조심하라'말 만큼 보편적이라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럼에도 진중권의 책을 읽는것은 재미있습니다.

sceptic 2007-01-3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에 물조심하라'는 비유가 적절합니다. 이 책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방식을 제 나름대로 읽어낸 거니까 진중권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겠지요. 관점이 새롭거나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드팀전님의 지적대로 저자의 지적이 정확하다기보다 말하기 방식이 재미있지요. 읽는 맛은 별미에 해당하니 저로서는 잘 참아지지 않습니다. 대리만족이든 대리배설이든 일단 시원하니까요. 대안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겠죠. 누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