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1년 선배 형은 신의 존재에 대해 괴로워했다. 신학 대학에 입학 한 후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 형의 고민의 일단에 ‘기아’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배불러 죽는 사람과 굶어죽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 전 기억이지만, 신의 존재와 무관한 이야기지만, 21세기가 되어서도 세상에 태어나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장 지글러는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실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굶주림에 관한 보고서이다. 2005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1명 꼴로 굶어죽고, 3분에 1명 꼴로 비타민A 부족으로 실명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8억 5천만 명이 극단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 보고서를 믿고 싶지 않았다. 한 해 음식 쓰레기 처리 비용이 얼만지 아느냐고 아우성 치는 이야기들은 머나먼 행성의 이야기로 들린다. 한 쪽에서는 영양의 과잉 공급으로 비만과 웰빙 바람이 불고,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상은 원래 그런거라고?

  저자인 지글러의 아들 카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J. 네루가 감옥에서 딸에게 <세계사 편력>을 썼듯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자신의 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진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사례와 경험들이 녹아 있는 아버지의 설명은 아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기에 충분하다. 내 배가 부르니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이기적인 태도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에서 쓸데없는 분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도저히 외면하거나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게 된다.

  전 인류의 20배쯤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지구의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도 8억 5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현실이 놀랍다기보다 황당하기까지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현실의 원인이다. 장 지글러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여기에 있다. 이 원인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과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지 못했지만 행동하는 지성으로 자신의 경험과 직접 체험을 통해 분명하게 제기하는 문제점에 대해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던 사람들은 할 말이 없어진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결합되어 80년대 이후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상들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선진국의 식민주의에 뿌리를 둔 역사적인 이유와 거대자본을 통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곡물 회사, 네슬레를 비롯한 다국적 기업의 횡포 등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원인들이 혼재하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콕 찝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단순히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이타심의 부족이라는 감상적인 접근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동정심에 호소하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기부금을 통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시킬 위험이 있다.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책의 결정 과정과 농산물에 대한 견해 차이, 유엔이 가지고 있는 제3세계 ‘기아’에 대한 관심과 정책들에 따라 해결방법은 여러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2000년과 2005년의 통계를 비교했을 때 거의 변화가 없다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비난과 원망에 가까운 이유뿐만 아니라 미흡한 대책 마련과 구조적인 모순과 문제점들에 대한 접근 방식이나 노력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이 그의 아들 ‘카림’에게 제대로 이해되었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울컥하고 목이 메여 한동안 하늘을 보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 P. 23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 P. 170

  저자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한 줄 때문이리라. 그러나 누군가에게 신이 있느냐고 묻기 전에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인간일까 하는 회의를 품게 된다. 그렇다는 믿음과 희망만이 전제되어야 우리에게 미래가 존재한다. 어떤 미래를 꿈꾸느냐 하는 것도 물론 바로 여기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의 태도와 의식의 변화에서 출발하겠지만. 이 따스한 햇볕 아래 굶어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07040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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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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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순한 진실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실은 드러난다고 하는데 이 말도 믿을 수 없다. 단정적인 어법이 가진 위험성을 감내하고서 이렇게 선언하는 사람들의 용기는 인정해야 한다. 그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한 노력과 시간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다. 특히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소시민들의 경우 스스로 고개를 들고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고정관념과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화가 불가능한 사고 방식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화석처럼 굳어버린 생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고종석의 새 책 <바리에떼>는 프랑스어로 다양하다는 말이다. 영어의 버라이어티가 주는 어감이나 이미지를 피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책의 구성에는 시비를 걸어야겠다. 한 개인이 발표하는 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매체는 얼마든지 ‘바리에떼’할 수 있지만 책으로 묶이고 보면 난삽하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마지막에 시집의 서평이나 소설가의 산문집 뒤의 발문까지도 함께 묶여있으니 난감하기까지 하다. 독자더러 어쩌란 말이냐?

  시사 평론과 문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고종석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기자, 시인, 소설가,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고종석을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하지만 그가 엮어내는 글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더라도 뭐든 함께 묶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다. 1부와 2부와 3부의 글들은 커다란 의미 영역을 구분하거나 생각의 틀과 관점을 바꿔 놓는 구분이 아니라 억지로 한 권의 책을 묶어 놓기 위한 분량 채우기같은 느낌이다. 기이한 느낌의 이 책은 한 권으로 묶기기엔 아무리 후하게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국어의 속살>에서 보여준 감수성과 문학적 언어에 대한 화려한 수사는 이번 책에서 제외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단상들이나 산문들이 내뿜는 향기와 탄탄한 문장들이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문학 계간지나 인물과 사상에 발표했던 글들이 묶여 제목처럼 다양성에서 우러나는 특별함을 독자에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책을 잘 쓰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 저기 발표했던 글들을 묶어 책을 낼 경우에는 특히 더 조심하고 편집에 유의하며 한 권의 책으로 빛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읽으라고 독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특히 구체적인 정치 현안과 관련되 문제들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김빠지 맥주같은 느낌을 준다. 당시의 상황과 느낌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글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차분하고 이론적인 글보다는 시론에 맞춘 글들이 시간이 흐른 후에 묶였을 때는 읽는 독자 입장에서 감정 처리가 난감하다. 나만 그런가?

  한 시대의 진실과 한 세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책을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용과 형식이 따로 국밥으로 놀아 답답하기까지 하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책으로 기억될 것들이 단편적인 고종석의 ‘글’로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안타깝다.

진실은, 그것이 단순하든 복합적이든, 어딘가에 분명히 있겠지만, 사람들이 바로 그 속까지 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P. 55

  객쩍은 소리를 해봐야 그렇고 본문 내용 중에 ‘진실’에 관한 한 마디가 목에 걸려 적어 본다. 쉽지 않을 일을 쉽게 해 버리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단순하든 복합적이든 도달하는 것이 어렵다. 쉽게 결론 내리고 단정짓는 버릇은 건강에 해롭다. 거기 그 너머에 앉아 있는 너, 거울을 보라.


07040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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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0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훌륭한 서평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4-0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바리에떼식 편집인가 보군요. 추천합니다.

sceptic 2007-04-03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clausly님 매번 덕담만 남기고 가시네요...^^

배혜경님...추천할만한 책은 아닙니다.

makee 2007-04-1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식님의 불편한 편집에 대해 깊이 공감 했어요.
2부 정치의 둘레편은 논리적 비판이 개인적으로 돋보였어요.

sceptic 2007-04-12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습니다. 2부에서 얻은 공감들을 다른 곳에서 많이 잃었죠.
 
루카치 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 심설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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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권의 소설이 전하는 위력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알 수도 없다. 문학에서 소설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은 논란이 있겠지만 문학을 단순히 소설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소설이 현실 세계에서 갖는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클수도 있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만큼 많다.

  소설 무용론을 주장했던 과거의 조선 시대 선비들도 있었지만 서사 구조가 탄탄한 소설의 매력은 여전하며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의 내용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소설이다. 인간이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는 쾌락 욕구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서 소설을 읽는다는 견해를 밝힌 비평가도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설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력과 꿈을 심어주기도 하고, 비참한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소설을 통해 울고 웃었던 많은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920년에 발간된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소설의 역할과 의미를 짚어낸 고전이다. 문학이론을 다룬 책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이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책이다.

  하지만 용어 자체가 낯설고 문장의 구성과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편을 번역했던 반성완의 85년도 번역본으로 역자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역자 스스로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음을 군데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 독일어 원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문학 전공자들이나 철학 전공자들도 반쯤 읽다가 던져버린다는 책의 소개가 무색하다.

  문학을 전공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철학적 관점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은 또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며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지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루카치가 이야기했던 소설 특유의 구체성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우매한 독자로서 시대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확인했다.

삶이란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하듯 스스로를 넘어서 있는 일체의 초월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상대적인 독자성과 그러한 초월적 구속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불가피성과 필요불가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P. 50

  하지만 이렇게 소설과 무관하게 삶에 대해 선언하는 부분들이나 그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작가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만한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예술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지만 역사와 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소설은 여전히 제멋대로 혹은 이 모든 것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버텨내고 있다.

서구의 문화 세계는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의 불가피성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논쟁적 태도 이외의 방법으로 이들 구조에 마주 서서 대항할 능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 P. 166

  서구 사회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논쟁적 태도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문화적 토대와 학문의 성향이 달라서일까?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진다는 ‘학계의 금기’를 넘어서는 일도 중요해 보이지만 그들과 다른 우리 소설의 구조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외연과 내용을 확장시킬만한 동력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건과 역량을 갖춘 많은 작가들을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독자로서의 욕심만은 아닐 것이다.

  루카치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예술과 삶의 관계는 쉽게 말해질 수 없다. 애증의 관계로 이별할 수 없다면 항상 사이 좋은 연인관계일 수는 없지만 그들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 일탈일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그 모든 이론들을 잊어버리고 술에 취하듯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닐까?
 
예술은 삶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의 태도를 취한다. - P. 77


07033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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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시선 273
최종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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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따먹고 나면 비로소 너는
의미를 떠나 상징을 벗어버리고
하나의 실재가 된다,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가 된다.                                                         - ‘따먹다’중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포장하고 꾸며대지만 최종천 시인은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언급한다. 도대체 되먹지 않은 사랑 타령은 그만두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따먹고 나야 상징을 벗고 ‘실재’가 된다는 논리는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선하게 만들어 준다. 비실재와 실재는 관념론과 유물론만큼의 간극을 보인다. 특히 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빚어내는 언어의 힘에 기대다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손에 잡히는 대상에 대한 직설법에 인색해지게 마련이다.

  시간의 개념을 무화시키는 어느 봄날의 오후 소나기와 먹구름은 순차적인 선적 순환구조를 무너뜨린다. 공간에 대한 지각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시가 자리잡고 있다는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다. 대낮에 알몸을 드러내듯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언어들의 충돌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가 보여주는 진정성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형성되는 지점에 있다. 언어가 보여주는 투명함과 낯선 이미지의 현란함이 또 다른 시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최종천은 오랜만에 ‘몸’의 시를 읽어준다.

  몸을 통해 노동을 이해하고 삶을 깨닫는 생활은 실재적이다. 여기에 다른 무엇이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다. 그 과정을 인식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나를 확인하는 작업은 고통스럽기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해보인다. 내 손의 주인은 나다. 가엾은 자신의 손만 들여다보아도 자아를 찾게 된다.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 ‘가엾은 내 손’중에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 조작에 전념하고 있다’는 말에 등골이 오싹하다. 평생 실재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내 손을 들여다 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게으름과 먹물의 상징이다. 노동의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른다. 가슴보다 머리로 부대끼며 살아온 것은 아닌 지……

상징은 배고프다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한권의 시집이 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징은 늘 배가 고픈가보다. 생존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상징일까? 살기 위해 시집이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순간의 아득함을 상상해 본다. 극단적인 비유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희망을 꺼놓자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무작정 희망을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실.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는 지구에 사는 일은 힘겹다. 희망을 반사해서 빛을 발하는 절망을 없애기 위해 희망을 꺼두자는 빈약한 논리에도 공감할 수 없다. 희망도 절망도 동의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가려움.

희망을 꺼놓자

인간이 희망을 켜놓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므로
희망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은 인간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으로는
식물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꺼버리면 어떨까요?
절망은 희망의 위성 같은 것으로서
희망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기에
희망을 꺼두면 절망도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가 사막화하고 있는 것은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070328-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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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세상은 환상이다. 영화 ‘일루셔니스트’에서 마술사 아이젠하임이 물속에 빠져 죽은 황태자의 약혼녀 소피를 발견한다. 물속에 뛰어들어 사랑하는 그녀를 안아 올리기 전의 그 장면, 하늘을 보고 나무 가지 사이에 걸린 채 물속에 떠 있는 장면은 밀레이의 ‘오필리어’를 그대로 재현했다. 문학이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영화에서 다시 재현된다.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혹은 환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우리는 늘 꿈을 꾼다.

 그림을 읽는다고 표현하면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스키마의 작용에 따라 같은 그림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것들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서양의 그림들은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과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인문학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단편적인 인상 비평과 감각적인 느낌이 전부가 된다. 그런 면에서 이택광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는 읽을만한 그림에 관한 책이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바탕과 배경 지식은 그림을 한층 풍부하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택광은 철학과 문화이론을 전공한 학자로서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림을 이야기한다.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서양 예술 전반을 아우르거나 폭넓은 시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깊이있고 집중력있게 몰두 할 수 있었다.

 서양 미술을 ‘근대’라는 관점과 주제로 풀어내는 방법은 인문학과 그림의 만남을 의미한다. 쓸데없는 배경지식과 감각적으로 접근해야할 그림의 결합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특별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거나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과의 결합이거나 일반적인 시각적 이미지와의 결합이다. 그림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하고, 그 이상을 관객들이 읽어내기도 한다. 결국 그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는 비관론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읽은 그림과 타인이 읽은 그림 사이에는 분명히 공유할 수 없는 간극만큼 뚜렷하고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도 숨어 있다. 이 책은 그것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내 맘대로 권법에 따라 주관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면 그 뿐이라는 태도를 지닌 사람에게는 무용한 책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저자는 ‘근대’의 풍경 속에서 인상파가 등장한 배경과 특징들을 짚어내고 있다. 라파엘전파와의 비교를 통해 두 유파를 분석하는데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고 가벼운 어법으로 그림의 주변 풍경들을 이야기해 준다. 주관적인 감상에 치우치거나 객관적인 사실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의 꼼꼼한 설명을 듣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신 중심 사회의 붕괴와 산업혁명을 통한 노동 계급의 형성, 그리고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림과 정치를 연결시키려는 인위적 의도가 아니라 급격한 사회 변화는 당연히 모든 예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림 속에 숨은 화가들의 정치적 성향들을 찾아내고 숨은 의도를 읽어내는 일이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저자의 그림 읽기에 동참할 만하다.

마음속의 이미지는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집단에 의한 것이다. …… 마음속의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미지이다. - P. 23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일은 언어의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언어가 보여주는 세계의 유한성을 극복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림이라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예술의 형태를 제공했다. 오래된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들어보는 것도 의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저자의  말투는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독자에게 속삭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때로는 입말의 어법이 지나쳐 거슬리기도 하지만 오래전 추억을 더듬듯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눈으로 더듬어 보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근대의 그림 속을 걷는다는 것은 현재 이전의 저 너머를 바라보기 위한 기초 작업이며 우리의 지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기준이 제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이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한 번 쯤 편안하게 우리의 지난날들을 아니 서양의 과거를 추억하며 읽어 볼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070326-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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