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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데이즈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27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평점 :
바람이 불며 부는대로 세상에 거스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선악의 가치 판단을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선망하거나 부러워 하는 삶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말이다. 문학에 있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시를 쓰는데 있어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언어는 생경한 풍경을 만들고 목에 걸린다. 모호한 에너지를 사소한 말장난에 쏟아붇는다는 무식한 비난에 상처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 언어들이 울려주는 깊은 말맛이나 감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비판에서 시인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시인의 약력을 들여다 보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려지기 시작했다.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의 경우 처음이라서 혹은 젊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과 완고하 저항감으로 심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시들이 있다.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굳은 마음이 있거나 다양성과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휘파람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치,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쓰다만 시처럼 허무하게 혹은 ‘상관없이’ 떠도는 언어처럼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는 무심하게 다가온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과 언어로 표상되는 것들 사이의 간극을 찾아 읽는 재미를 선사하기에는 아직 서툴고 시어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긴밀한 알레고리를 찾아내기에도 버겁다. 하지만 ‘휘파람’과 같은 시로 시집을 여는 젊은 시인의 시집에는 겉멋이나 감정의 질퍽함은 묻어나지 않아 다행스럽다.
세대와 연륜과 무관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동시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동시에’도 마찬가지다. 한 권의 시집을 통해 하재연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무심함 속에서 일상에 던져진 것들과의 거리감. 혹은 일상속에 틈입된 시간과 공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동시에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그러다가 문득, 봄날의 당신은 안녕하냐고 묻다가 만다. 그 안녕이 ‘안녕?’인지 ‘안녕……’인지 알 수 없다. 쉼표를 찍고 있지만 마침표보다 완고해 보인다. 안부를 묻는다기보다 작별을 고하는 안녕은 봄날의 인사치고는 서늘하다.
봄날의 인사
당신은 경비행기를 타고
젖소들은 앉았다 섰다
자동차들은 클랙슨을
로즈마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나의 눈동자는 눈동자의 마음대로 굿바이
헬로, 당신의 프로펠러가
내 뒤뜰의 나무를 망가뜨렸답니다
당신은 대기 속에 있지 않고
나는 땅 위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대로
당신의 머플러가 나의 구름을
흩어버렸답니다
봄날의 당신은 안녕,
이별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이별할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의 자유이다.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안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이별 선언은 가능하다. 다만 그 무모한 가능에 도전하지 않을 뿐이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자세와 그 말을 듣는 당신의 태도가 문제일 뿐이다. 시인에게 안녕이라는 선언이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희망없는 메아리처럼 메마르다.
때때로 시를 읽다가 답답하거나 허무할 때가 있거든 시인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시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푸른 하루다.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일은 가운데서 만나자,
껌처럼 늘어지는 불빛들을 눈으로 가리며
너는 입술이 삐뚤어지게 웃는다
네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가는 차들의 광속 너머로
붉은 머리를 치켜든 라이트 사이로
너는 뛰어간다
네게는 무대도 코러스도 없다
등을 구부렸다 곧게 펴고서 너는 곧잘
평균대 위에서 선 아이처럼 팔을 벌린다
바람은 너의 냄새를 흩어버린다
네 맥박이 뛸 때만 너는 움직인다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네 발목은 금방 잡힐 것만 같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
07042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