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스캔들 창비청소년문학 1
이현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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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혹은 1318세대라고 하는 구분과 명칭은 모호하기만 하다. 학생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그저 나이를 기준으로 13세부터 18세까지를 같은 집단으로 묶기도 어렵다.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데 공통점이나 특징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성향을 파악하기 어렵다. 좌충우돌, 아노미, 질풍노도, 사춘기 등 전통적으로 청소년 시기를 명명하는 수많은 말들도 결국에는 성장의 과정에 있는 변화무쌍한 시기를 지적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국적과 세대를 불문하고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 가장 혼란스런 시기이며,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성장통을 겪는 세대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왔으며 유사한 갈등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보았기 때문이다. 아련한 추억과 부끄러운 기억들, 두근거리는 떨림과 가슴 벅찬 희망이 뒤섞여 자기 생의 주체로 홀로 서야 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의 과거이며 미래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창비 청소년 문학’의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이현의 <우리들의 스캔들>은 장편소설을 통해 이 시대 청소년들이 겪는 갈등과 고민의 단면을 보여준다. 장편임에도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이유는 특정한 사건에 얽힌 단순한 문제를 다양하고 다채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식상하지만 가장 중요하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학생이며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는 관료 조직인 학교의 생리와 모순들은 변화에 민감하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학생들에게 억압과 통제의 수용소로 인식된다. 학교 자체가 가진 순기능을 주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어이없는 일들과 마주치면 할 말을 잊는다. 학교는 늘 학생들의 중심에 놓인다.

  여기서 학교 밖의 아이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간 아이들, 대안 학교의 아이들과 직업을 가진 청소년들은 문학에서도 소외된 느낌이다. 물론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학교에 다니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민이 가장 심각하겠지만 식상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과 혼란스런 가치관의 문제에 직면한 청소년들의 문제를 좀더 깊이 있게 다루어주는 본격적인 청소년 문학을 기대한다. 기성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와 주제에 대해서는 소홀한 편이다. 소홀한 것이 아니라 관심 밖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 <지와 사랑>, <수레바퀴 아래서> - 은 한동안 밤잠을 설치게 했다. 사춘기의 혼란스런 시절들을 문학과 함께 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풍부한 감성과 깊은 사색은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들의 희망이며 미래이다. 단순하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과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과정은 마련해주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왜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는지 대안을 찾아보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들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교육은 그러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이 소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오로지 정해진 규칙과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현주소이다. 미래의 학교가 궁금하다. 이대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학교의 관료성은 상명하달과 의사소통 구조의 단절에 있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를 교육의 주체라고 이야기하지만 주체적인 힘이 발휘되거나 소통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학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학생과 교사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학부모는 학교를 불신하며 교사는 학생을 믿지 못한다. 그들의 눈높이가 다르고 교육과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와 마음이다. 사회의 시스템과 학교에 요구하는 일반인들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 상급학교의 진학을 위한 발판이나 취업을 위한 수단으로, 혹은 보다 많은 돈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로 학교가 전락해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사회의 요구에 적응해야 하는 학교는 교육의 방향과 앞날을 위해 제 몸을 바꿔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은 빛의 속도로 소통하고 어른보다 먼저 느낀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한 학급의 카페가 운영되고 그 과정에서 교생과 담임 교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학교와의 불화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일상과 같은 것이다. 이런 내용이 하나로 묶이면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서 하나 하나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며 반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충분히 학생들에게 공감을 얻을만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면밀한 조사가 아쉽다. 한참 사극을 보는데 저 멀리 배경이 된 도로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과 같은 부분이 있다. 디테일을 놓치면 좋은 그림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동 문학도 아니고 성인 문학도 아닌 ‘청소년 문학’이라는 미개척 분야에 대한 창비의 본격적인 도전은 관심과 결과가 주목된다. 보다 다채롭고 적극적인 기성 작가의 참여와 해외 문학 작품의 발굴도 필요하다고 본다. 어른과 청소년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을 기대한다. 그 작품들을 통해 세대 간의 공감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입장과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청소년 문학도 분명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07061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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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읽었던 책들이 평생의 밑거름이 되지 않나 싶게
저도 그 시절에 많은 책을 읽었어요.
저는 데미안을 읽고 한동안 멍해있었죠.
이제 그때처럼 마음이 짠해지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더군요.

sceptic 2007-06-1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살 이전과 이후의 독서는 질적으로 다르니까요...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던 시절이죠...
 
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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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최근에 본 전쟁에 관한 영화는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최초의 영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로버트 드 니로의 <디어 헌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플래툰>이나 <풀 메탈 쟈켓>, <씬 레드 라인>, <진주만>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전쟁 영화들은 꽤 많다. 헐리웃 영화의 경우 베트남 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았고, 당연히 지고 나서 징징거리는 내용이었다.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공식화된 영웅담으로 흐르는 뻔한 내용들이다. 그것을 전쟁의 전부라 믿었고 미국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정말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헐리웃 전쟁 영화들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량스런 깡패 국가 미국의 모습이 감추어진 채 포장된 모습과 피상적인 추측만이 가능하던 시절의 친미 성향을 가진 정치와 역사의 관점에서 교육 받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모아진다. <뮤직 박스>, <쉰들러리스트>, <베를린 천사의 시>를 비롯해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어 영화팬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위력을 마음껏 뽐내며 스크린 앞에서 좌절과 분노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안도감과 행복을 만끽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독일은 여전히 깊이 머리 숙여 반성하고 있고 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과거는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 가고 현실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틈이 없다. 그러나 현재는 단지 과거의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루비박스에서 나온 <잊혀진 병사>는 일단 책의 두께가 중량감을 보여준다. 735페이지를 한 권으로 묶어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쟁이든 역사든 사람들은 결과와 영웅만을 기억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다. 이 책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16세의 나이로 1942년에 전쟁에 뛰어든다. 고등학교 1학년쯤 되는 나이에 군에 자원 입대하는 소년의 생각은 불을 보듯 뻔하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전쟁에 대한 환상과 넘치는 에너지의 발산을 위해 뭔가 흥분된 자극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랑스계 독일인 저자는 아버지가 프랑스인이고 어머니가 독일인이다. 이런 중간자적 혈통은 포로가 된 후 결정적으로 석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름없는 무명 용사 기 사예르가 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는지 무엇이 그를 전쟁터로 이끌었는지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16세 소년이 전쟁에 투입되어 1945년 포로가 되어 석방될 때까지 러시아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부 전선에서 보낸 3년간의 비망록이다. 그 기록들의 생생함에 입을 다물기 어렵다. 전쟁에 관한 어떤 책보다 더 생생하게 전쟁의 순간들을 포착했고 묘사한다. 뛰어나 글솜씨나 달변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 참혹한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피비린내나는 현장을 보여준다. 전쟁에 과한 어떤 분석이나 자료들도 2차 대전의 원인이나 그 결과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그치고 있다. 몇 명이 죽었거나 다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전쟁의 순간들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내고 있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이데올로기나 국가적차원의 이유나 접근, 설명도 필요없다. 단순히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의 숭고함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순간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며 전쟁을 반대하거나 몸담았던 시간들에 대한 반성과 회의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 상세하고 구체적인 상황들과 그 현장에서 인간이 느껴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이렇게 이해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전쟁터에 생각없이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전쟁에 대해서 배운다. 그들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발을 불가에 뻗고 평소처럼 다음 날 일할 준비를 하면서 베르‰窩犬?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읽기만 한다. - P. 366


  장교가 아닌 병사의 입장은 전쟁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이 다르다. 죽고 죽이는 현장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이 앞서기도 하고 전우의 죽음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전쟁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개될 뿐이다. 위정자들의 오판과 권력에 대한 욕망, 교묘한 정치적 선동과 대중들의 야합은 인류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여전히,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인간에 대한 연구와 대중 심리나 아우슈비츠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조차도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주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에게 ‘전쟁’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책장을 넘기면서 손에 피를 묻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군대와 ‘전쟁’에 관한 피상적인 개념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만다. 인간의 절규와 죽음의 아비규환 그리고 영하 30도의 추위와 굶주림은 살아야겠다는 본능 이외에 그 어떤 욕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처절했던 전쟁의 기록들을 긴 호흡으로 훑어보며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모든 신념이 사라졌고 어떤 일에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작전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에게도 자신도 모르게 나무 꼭대기를 비추는 태양빛처럼 공포가 엄습해왔다. - P. 571


독일인은 영웅인가. 미치광이인가? 누가 이런 극단적인 희생정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

619

  

  적들이 몰려올 때 느껴야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 상황이나 피아간의 식별을 넘어 당연한 본능으로 세포 구석구석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며 전쟁에 대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들을 저자는 날것으로 제시한다. 어떤 화려한 수식이나 포장도 없고 개념화하지 않는다. 그 순간들의 기록과 상념들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처절한 육성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이 책은 1967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도 20여년이 끝난 후에 쓰여진 독일 병사의 비망록이다. 패전국의 어느 병사가 쓴 회고록이 승전국의 전쟁 영웅이 쓴 이야기보다 값진 이유는 독자가 책을 통해 확인할 일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지독한 전쟁 경험을 하며 이름 없는 병사가 생각한 것은 다음 몇 줄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쟁의 이론이나 전략가의 충고보다도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반전평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함성과 요구들보다 처절하고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한 번 쯤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복수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제외하고는 침묵하며 지냈다.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용서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 P. 678


  

07060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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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발견 - KTX에서 찜질방까지 문지푸른책 밝은눈 6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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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은 당대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듯이 표현하고 있다. 기록 필름이나 영화의 몫으로만 여겨지는 일들이 문학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언어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 소설은 현실의 정확한 세부 묘사와 재현에 역점을 두고 문학 작품으로 성립 가능한 부분들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아쉽고 그리웠던 시절들에 대한 추억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부분을 보여주는 것보다 일련된 하나의 흐름을 통해, 그 상상의 힘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는 방법은 독자들에게 훨씬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특히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의 입장에서 집단 전체의 문화를 분석하고 묘사하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숲속 나무 그늘에 앉아 산 전체의 형세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찬호의 <문화의 발견>은 그래서 당돌한 책이다. 그냥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인데 그것을 발견했다고 하니 말이다. 무엇을 발견했단 말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동시대인들이 우리들 삶의 모습을 모두 이해하거나 제대로 들여다 보기는 힘들다. 알고 있으나 나름의 방식대로 규정짓고 이해하는 일이 많다. 그렇지 아니면 아예 지나쳐버리고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회를 보는 논리>로 비판적 시각과 예리한 분석력을 보여주었던 김찬호의 새 책은 ‘KTX에서 찜질방’까지 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우리들 일상에서 늘상 지나쳐왔던 것들을 새로운 시각과 진지한 접근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크게 30가지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 작게 여섯 개의 주제로 분류했다. 지하철에서부터 공항까지, 노래방에서 찜질방까지, 편의점에서 시장까지, 아파트에서 경로당까지, 학교에서 교회까지, 화장실에서 병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공간을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재미있고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나 객관적 사실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감성적인 문장과 수필에 가까운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각 주제들을 대표할 수 있는 첫머리 인용글들은 다른 시각과 접근 방법을 제시하면서 저자의 폭넓은 독서와 다양한 시각의 기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함께하고 있다. 각 장마다 붙어 있는 생각해 볼 문제는 대학 교재나 논술 교재로도 활용될 수 있을 만큼 신경을 썼다. 하나의 문화 현상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대변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공간과 사람들의 생각은 선악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시대정신으로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개똥녀 사건으로 인터넷과 세상을 달구었던 일들은 지하철과 핸드폰과 인터넷의 익명성이 결합한 현상으로 네티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온라인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까지 소개되었다. 된장녀로 불붙은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커피전문점들의 문화적 현상들은 소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확인하는 것 같다. 별다방 스타벅스, 콩다방 커피빈에서부터 파스쿠찌, 할리스 커피에 이르기까지 만남과 놀이의 문화가 부재한 현실의 현상들을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주제들의 공통점은 ‘공간성’이다. 저자가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동과 교통, 유희와 교류, 유통과 서비스, 거주와 돌봄, 창조와 성장, 몸과 자연으로 구분해서 주제들을 묶어내고 있지만 모두 구체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현상들을 다루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문화란 시간과 공간의 만남일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공간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간을 보면 문화가 보일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모두 우리들의 문화인 것이다.

  우리들이 발딛고 서 있는 삶의 공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시대와 역사를 만들어간다. 이것을 살펴보는 일은 삶에 대한 성찰이다. 끊임없는 변화와 유동적인 흐름 속에서 목적과 방향도 없이 흔들리는 삶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 필요한 책은 아닐까 싶다.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07060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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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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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은 우리들이 학교 밖에서 학습한 것이다. 학교 아동은 교사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때때로 교사가 있을 때라도 대부분의 학습을 자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단히 비극적인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결국 학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 이반 일리히, 학교없는 사회 : P.58

  근대적 의미의 학교는 제국주의의 근대 시민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국민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 이념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국민을 교육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질서와 규율을 명분으로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국민을 양성한다. 해방이후에도 교육의 근간과 뿌리는 여전하다. 군사 정권시절에는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심지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국민윤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직도 중학생이 되면 ‘도덕’을 배운다.

"학교는 중요한 진실을 회피한다" - 노암 촘스키, 강주헌 옮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2001, P. 38) 학교는 국가가 승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진리라고 주입한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  P. 69

  아직도 학교에서는 두발을 단속한다. 제각각 다른 머리의 길이가 옷깃을 닿지 않아야 한다는 애매한 규정이나 여학생의 머리 길이 제한 등은 이미 2005년에 국가인권위원에서 학생들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하고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취지의 권고를 교육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벌어지는 지각과 두발 단속의 학교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 봐야 한다. 교육과정에도 없는 애국조회가 아직도 시행되는 수많은 학교를 보자.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교장과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각을 들어보자.

  올바른 가치관의 함양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질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학교에서는 과연 주어지는가? 학교 교육은 이대로 좋은가? 대안 없는 비판이나 한숨 섞인 푸념이 아니다. 온몸으로 실천하며 공교육의 방법과 제도를 비판하고 대안을 찾아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작년에 나온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에서 나는 단 한 줄을 가슴에 새겼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 한 마디를 부제로 달고 <호모 쿵푸스>가 나왔다. 공부하는 인간이란다. 많은 학생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책의 제목을 달고 나왔으나 이 땅의 모든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강제로 읽히고 싶은 책이다.

  어떤 책이든 한 사람의 독자로서 한 권의 책을 읽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거나 머리로 생각하는 장면이 다 다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가슴으로 읽었다. 무덥던 어느 날, 혼자 앉아 밥을 퍼먹으며 책장을 넘기다 울컥했다. 눈물이 날 뻔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 살아왔던가하는 자책과 이 땅의 교육 현실을 꼬집는 고미숙의 이야기는 날선 칼날이 아니라 은근한 손길로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아픈 곳을 콕콕 찔러댄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너 왜사니?

  ‘이념이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한 마디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무엇이 제대로 된 공부인가? 장정일의 ‘공부’를 비롯해서 최근에 불고 있는 ‘공부’ 열풍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자. 과연 왜 공부를 해야 하며, 무엇이 공부이며,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책에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저자 나름의 진단과 해석과 대안들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유동 시절의 ‘연구공간 너머’에서 지금의 남산 시절까지 그녀가 겪은 시간들과 공부 방법들을 단순하게 개인적 차원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규 교육 과정이나 공교육의 제도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부에 대한 열망과 또 다른 방식의 삶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의 말은 현실에서 비롯되었고 실천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이나 사회의 지향점에 대한 반성적 성찰들은 각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고미숙은 이 책에서 ‘교육’ 그리고 ‘공부’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파괴적이고 반문명적인 선전선동이 아니다. 현재의 공교육이 보여주는 문제점들을 정확히 짚어내며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학교’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다. 고미숙은 이 책을 인용하며 현실적 대안이 공교육의 폐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힘겹게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온몸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교육이나 삶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현실적 대안들을 구체화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현실과 부딪히는 많은 문제점들 그리고 교육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까지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수많은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철학적 물음과 연계되어 있고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콩도르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 P. 66

  우리가 제대로 교육받았다면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고미숙은 책을 말한다. 독서를 뛰어넘는 방법은 없다. 특히 ‘고전’을 암송하며 문리를 터득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진정한 공부방법에 대해 말한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책장을 덮었다.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인가?”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동안 누구에게나 한 권의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책을 추천하겠다. 분량도 많지 않고 내용도 어렵지 않으니 누구에게나 가볍고 편안하게 읽힐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교육과 독서와 가장 많은 공감했던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할 것이다. 삶은 끊임없는 혁명의 과정이며 우주와 생의 신비를 깨닫고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억압과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그것이 곧 혁명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공부로부터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외되지 않은 자만이 구조적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 - P. 199

070603-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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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7:07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비로그인 2007-06-0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로부터 시작한다......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ceptic 2007-06-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때는 그렇게도 지긋지긋하더니...이제 진짜 공부를 좀 해보려고 마음 먹어 봅니다...

2007-06-04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6-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은글 읽으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저 범생이와 아주~~~~거리가 멉니다...^^
 
국경꽃집 창비시선 275
김중일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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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불편한 시가 싫어진다. 그 불편함은 내 마음의 불편함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 시의 언어와 이미지가 이성이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서걱이는 모래바람처럼 시의 언어들이 모래알처럼 뭉치지지 않고 흩어지는 시는 견디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변화가 오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유행처럼 버질 무렵 시의 내용과 형태가 완전히 너덜거릴 때까지 콘크리트 벽에 문지르던 시절이 있었다. 의도와 이미지만 남고 시는 사라졌다. 종류는 다르지만 언어의 틈새와 의미의 간극을 짚어내는 건조한 시들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선함도 생의 감각이나 통찰도 전해주지 못하고 삐걱이며 겉돌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중일의 <국경꽃집>은 시간과 사람 그리고 기계 사이를 넘나들며 다양한 변주를 울리고 있다.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탁월하지만 생경한 이미지와 혼란스런 시점의 이동이나 황망한 공간이동 현실에서 벗어난 서술들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그치고 있다. 시를 읽는 느낌이야 백인백색이니 물론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이성의 어느 지점을 자극하거나 언어의 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1

  잠깐 엎드려서 낮잠을 자고 있었어. 꿈결인가……어느 익숙한 손길이 내 둥글게 구부러진 등과 어깨를, 흐느끼며 거칠게 잡아흔드는 거야. 도대체 뭐지? 눈을 떴을 때, 나는 국경꽃집 카운터에 앉아 있었어.
  - ‘국경꽃집의 일일’중에서

  표제어가 되고 있는 국경꽃집은 시인에게 경계선으로 금기의 선으로 보여진다. 국경은 눈에 보이는 실선이 아니라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는 가상의 선이다. 넘지 못할 금기의 선은 아니겠지만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 모호한 시간과 공간의 경계 속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팔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풍경일 것이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환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워주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김중일은 그 경계선에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개처럼 모호한 영상만 가슴에 남는다. 

  봄 밤

이 밤 사장님이
지구 반대편 나스까 고원을 순시하신다

검은 도화지 위에 번진 도시의 불빛,
밤의 지분이 마드는 무정형의 불면

죽은 버드나무에 기대 우는
노파의 동굴같이 캄캄한 입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는 박쥐들

또다시 사장님께서 버드나무에게로
멀고 먼 손을 뻗으시어, 철컥, 철컥,
가는 잎 수천수만 개 재개발하시는 봄밤

결재문서 속 검은 셀로 지정된 표를 따라
칸칸이 지나가는 첫 번째 전동차

먼 출장에서
노란 택시를 타고 사장님이 돌아오신다

  사장님의 존재가 화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의미 이전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할 말이 없으나 현실의 지난함을 신화와 환상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들이 때로는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또다시 접한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젊은 시인의 생경한 언어들은 ‘철컥, 철컥’ 마음의 문을 잠가 버린다.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시원하니 더 없이 행복하다는 식의 시만을 원하는 독자는 없다. 다람 새로움과 생각의 깊이 다양한 층위의 언어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을 기다리는 욕심많은 독자들을 위해 시인들의 고통과 불면의 밤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도 그들을, 그 시간들을, 그렇게 태어난 시들을 기다린다.


07060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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