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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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작별

그 언제부턴가
가을도 다 지나고

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 있던
불덩어리 하나

다 피어나지도
저를 떨구지도 못한
꽃덩어리 하나

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
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찬 바람 속
몸시 앓다가
한 여드레쯤 지나면
문밖 골목에도
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

  하나 둘씩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사랑이든 미움이든 말이다. 고정희도 그랬고 윤중호나 오규원 그리고 박영근도 사라졌다. 시인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과 특별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은 죽어서도 많은 말들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들이 토해낸 언어들은 죽지 않고 활자로 살아 남는다. 책으로 남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등불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덜 쓸쓸할 것이다.

  박영근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는 시집 앞에 실린 몽골 초원 위에 누워 있는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는게 아니라 어둠속 저 하늘 위 별자리에 누워있을 시인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은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시인 박영근도 그렇다. 그가 남긴 시들이 읽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표정으로 다가온다.

  ‘늦은 작별’이 아니라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 가슴 속에 묻혀 있던 불덩이 하나가 꽃덩어리로 피어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건 아닌지 모르겠다. 생에 있어서 순간성과 일회성의 엄밀한 규칙은 단 한사람에게도 예외가 적용된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듯이.  지금 현재 살아가는 방법과 자세를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문득 부딪히게 되는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침묵이 되어 버린다.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다. 받아들이되 이해할 수도 없고 외면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기억하느냐’고 묻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의 사라짐이다. 인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비로소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종소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떠난다. 하지만 박영근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다. 시인이 끝임없이 되묻고 있으니까, 기억하느냐고.

기억하느냐, 그 종소리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천녀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44편의 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발표되지 않았던 시가 마지막에 실려있다. 뭉크의 ‘절규’를 주제로 한 시가 그것이다.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절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시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절규한다고 해서 살아나지는 않는다. 모든 죽음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목소리들,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치열했던 삶의 자세, 사람과 사물들을 향해 보여줬던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들을 남기고 떠난 박영근 시인을 기억한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은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절규

저렇게 떨어지는 노을이 시뻘건 피라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네가 늘 걷던 길이
어느 날 검은 폭풍 속에
소용돌이쳐
네 집과 누이들과 어머니를
휘감아버린다면
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가 내지르는 비명을
어둠속에 혼자서
네가 듣는다면

아, 푸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작은 새의 둥지도


0706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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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진중권 옮김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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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이가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타인은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관념론과 실재론의 두 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근대 철학의 기본 토대를 뒤흔들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철저하게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와 역할은 늘 그 한계를 보이고 엄밀하고 명징한 분석과 구분으로부터 모든 사유는 출발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명칭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한 사유의 방식을 두 권의 책을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청갈색책>은 제목이 없는 강의 노트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강의를 기록시켜서 청색 표지와 갈색 표지로 복사본 몇 부만 남기고 그 중 하나를 스승인 버트란드 러셀에게 보낸다. 그것이 출판되어 ‘청색책’과 ‘갈색책’이 되었고, 한 권으로 묶여 <청갈색책>이 되었다. 이 책은 <철학적 탐구>가 나오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단초를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데, <철학적 탐구>를 읽어보려다 미루고 있어 내용은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지식과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히 글자와 어휘를 아는 정도의 문식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책이다. 그의 주저인 <논리-철학 논고>는 오히려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었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의 구조와 분량과 상관없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성이 읽는 사람을 압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되새겨 볼만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강의 형식의 노트라고 그런지 몰라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며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강의를 듣는 입장이 아니라 기록된 활자로 번역되어 읽어야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사유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따라가기 어렵다.

  언어의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무엇이든 이 철학자가 말하고 싶었던 사유의 방식이나 과정들이 몹시 궁금하다. 혼자 책을 보고 이해하고 사유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세미나든 강연회든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 같은 곳이든, 철학아카데미든 찾아가야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남겨진다. 책이 지니는 한계는 소통의 문제로 남는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행간의 의미들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절실하지 않으면 끝까지 버틴다. 호기심이 생기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다른 분야의 학문이나 다른 책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욕심이 생기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든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학이나 철학 강좌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07062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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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7
이현재 지음 / 책세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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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위의 반은 여성이다. 남성에 반대되는 개념의 성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예외적인 종족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여성이다. 보통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성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다.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유럽의 경우도 20세기 초,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인류가 문화를 발전시켜 오면서 성숙한 사회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중의 하나가 여성의 문제일 것이다.

  학문으로서 ‘여성학’이 붐을 이루고 남녀 차별 철폐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여성들의 권익이 신장되고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성들의 위상은 달라졌다. 가시적인 변화들은 인식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의 문제는 제대로 파악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 숱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이거나 인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 여성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결국 철학에게 부탁한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여성’의 문제이다. 저자 이현재는 ‘인정이론’을 통해 여성의 문제에 접근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문제를 논의했던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고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식이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이루어진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다른 여성과의 동일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여성의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에서 타자를 인정하는 논리로 나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주의가 오해를 받았던 부분을 점검하고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인간화를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조차 힘들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며 1세대의 출발로 본다.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이론가를 차례차례 거론한다. 길리건의 ‘보살피는 여성’, 이리가레이의 ‘하나가 아닌 여성’, 버틀러의 ‘성적 이분법 허물기’가 그것이다. 세 사람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본다. 남성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문제가 철학 안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장면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 위한 필요 조건은 여성들 간의 연대 가능성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과 흑빈 빈곤층 여성은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감성적이고 관습적인 연대는 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낯선 자들과 반성적으로 연대할 때 여성들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며 현실은 분명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언들에 공감한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배제하고 연대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코뮌으로 읽혔다. 국가와 계층을 초월한 전지구적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다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직과 실천의 문제는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타자를 협동적 행위자로 인정하고 여성들 스스로 그 가능성을 열어갈 때 사회적 인식과 또 다른 타자인 남성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다. 다만 여성으로서 역할과 사회적 주체로서 당당히 서야 하는 여성들의 혼란과 갈등은 몇몇 이론가들의 주장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연습이 없고 정답을 알 수가 없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만 잔다르크나 클로델의 경우처럼 분열된 여성의 모습은 과거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여성의 문제가 남성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주의는 철학과 만났다. 나는 이 만남을 통해 타자 배제의 논리, 희생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꿈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주의에 새로운 이념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정 이론을 통해 재구성된 여성철학은 다가올 여성의 세기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 P. 165

07061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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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시대 -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
장석준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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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시대를 넘어 영원한 미래의 희망이 되어 버렸다. 혁명과 희망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거나 지독한 불행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경계선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보다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이 훨씬 많다. 파시즘이 처음 등장했던 20세기 초반에도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다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경우를 생각해 본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앞장 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보였을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 국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천 5백만이 희생됐고, 폴란드의 경우, 전체 인구 5분의 1일 죽었다. 그래서 20세기를 야만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일까?

  <혁명을 꿈꾼 시대>라는 장석준의 책은 20세기에 대한 회고록이다.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라는 부제가 설명해 주듯이 헬렌 켈러에서부터 우고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20세기를 뜨겁게,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신념과 열정을 담아냈던 연설들만을 모았다. 그 모든 순간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책에 거론된 사람들의 삶은 책 제목처럼 일상에서 ‘혁명’을 꿈꾸었다. 꿈을 현실로 옮길 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은 그 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숙연한 감동을 안겨주거나 거센 비난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책의 한계는 깊이의 문제다. 23명이 등장하는 책에서 각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책의 의도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바라본 20세기이다. 책의 내용은 여섯 개의 주제로 20세기를 설명하고 있다. ‘전쟁,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남성중심 사회, 자본의 세계화를 넘어서’가 그것이다. 각 장마다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붙어있고 그들의 인상적인 연설을 옮겨 놓았다. 이런 구성은 산만해지거나 백화점식 나열에 불과할 위험을 내포한다. 편집 의도가 좋다고 해서 괜찮은 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 한 권에 여러명을 소개하는 책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실망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의심없이 선택할 만하다.

  책에서 기대하는 면이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준 부분이 각 장 앞부분에 덧붙혀 놓은 ‘20세기’와 ‘21세기’의 대화부분이다. ‘시간’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의인화한 두 명의 인물이 대화를 나눈다. 21세기가 선배인 20세기를 찾아가 세기가 바뀌면서 최근 7년간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전해주면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꼭 100년간의 시간인 20세기에 대해 선배에게 한 수 지도를 받는다.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과거를 반복한다는 묵시적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특정한 인물의 사상과 생애를 탐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사상사에 관한 책은 연구 목적이 아니라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선뜻 손이 가지도 않고 읽으면서도 많은 부담을 느낀다. 단순한 호기심과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위해서 책장을 넘기다가 한 숨을 쉴 때가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은 공력을 들여 한 세기를 정리하려는 작업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 장석준은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회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연설을 옮겨 놓으면서 적절하고도 설득력있게 사건과 시대를 분석하고 있다.

  ‘20세기’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정리하고 조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알기 쉽게 접근하기 위해 21세기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1세기는 묻고 20세기는 답한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적절한 분량과 명쾌하고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 나간다. 지난 세기를 알고 싶다는 이 책 한 권을 조용히 권할 만하다.

  다만 앞서 지적한대로 깊이와 넓이는 독자가 이 책 이후에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다.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 호기심을 증폭시키거나 관련 분야에 대한 방향과 목적이 결정된다면 한 권의 책이 할 수 있는 역할로는 충분하고도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는 과연 혁명의 세기였을까?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떤 시대가 될 것인가? 두 세기에 걸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저자는 그 길의 방향과 목적지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책을 통해 독자들이 직접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지금, 여기의 문제가 과거의 연장이고 우리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발전시켜온 역사이며 그늘이고 희망이며 아쉬움이고 절망이며 그리움이다.

혁명이야말로 끊임없는 혁명이 필요하고, 혁신을 주장하는 세력이야말로 혁신되어야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이 오직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불운이겠는가. - P. 79

  지나 간 시간에 대한 반성보다도 미래를 향한 희망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궁금증이 앞선다. 그 궁금증을 우리는 20세기에게 묻는다. 그 길에 대해 20세기의 토니 벤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 세기에 사람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원할 것이다. 자립적인 경제 체제를 갖춘 세계 여러 나라들이 서로 협력할 것이다. 이번 세기에 우리가 항상 전쟁을 계획했던 것처럼 이제는 평화를 계획하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민주적으로 통제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세기가 다음 세기에 전해야 할 참된 교훈이다.” - P. 409


070615-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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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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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광장 앞에서 불에 탄 전경 버스를 바라 본 것은 버스 안에서였다. 시위 군중에 막혀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승객들은 그대로 앉아 마냥 기다릴 수도, 내려서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버스 차창 밖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10대 소년의 눈에 비친 87년 6월은 혼돈속의 질서였다. 무엇인지 모를 열기와 함성들, 거대한 강물처럼 군중들은 물결치듯 조금씩 움직였다. 광화문 네거리 빌딩에는 건물마다 아저씨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길가 한켠에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흔드시던 하얀 손수건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6․10 항쟁 20주년을 맞이해서 누군가가 쓴 한겨레 칼럼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인용했다. 희미한 옛사랑도 아니고 그 그림자를 바라보아야하는 현실은 무기력하기만하다. 4․19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가 이제는 다른 모습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87년 6월이 희미한 게 아니라 그 시대정신과 민중들의 열망과 가슴속의 뜨거움이 희미해졌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가장 큰 불행을 감지한 것처럼 시인도 소시민의 뒷모습을 노래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2007년 시인은 정년퇴직을 했고 드디어 전업 시인이 되었다. 노년의 김광규 시인을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 꼼꼼히 들여다본다.

  시집은 제목이 내용을 집약하는 경우가 있고, 부분으로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김광규의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제목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고교시절에 가슴에 담았던 수많은 시인들 중 오규원은 세상을 등졌고, 황동규나 김광규는 정년을 맞았다. 세월은 모두를 변화시키고 사람도 시대도 다른 무언가로 바꿔 놓는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홉 번 째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목소리는 예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다르면서 변하지 않는 숨결들이 편안하게 읽힌다.

춘추(春秋)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전통적으로 계절의 변화가 생의 변화를 대변한다. 봄에서 가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생의 진리를 안겨준다는 선(禪)적인 명상으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무심한 순간들이 생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그러했으나 인식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산수유 꽃피는 소리보다,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보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화자와 허튼소리 말라는 아내의 눈빛이 떠올라 한참 웃었다. 일상 속에 소소한 마음의 갈피를 잡아내는 시인의 매력은 여전하다.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수많은 시들이 김광규 시의 특징으로 분류된다. 그만큼의 의미와 한계도 지니고 있다. 확장되지 못하고 의미의 영역이 좁아질 위험성이 있다. 시야와 관점이 폭넓다고 해서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문제가 일반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키 높이로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느낌을 받는다. 한 번쯤 발로 툭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 거울’과 같은 시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알의 모레 속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고 한 윌리엄 브레이크가 생각나게 하는 명편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난 후에 갈잎 손바닥에 고인 한 숟가락 만한 빗물이 거울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나를 비추고 온 생애를 담아낸다. 무심하게 던지는 한 마디가 ‘마지막 빗물’이라는 표현과 함께 시인의 전 생애 혹은 독자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거울이 된다.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울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탐구와 ‘마지막’에 대한 성찰들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소멸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든 소멸이라고 부르든 사라짐이라고 부르든 ‘출입통제선’이라는 경계를 이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그 미련과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올 때가 많다. 삶과 죽음의 그 분명한 경계를 출입통제선 이쪽과 저쪽으로 나눠 놓은 솜씨도 솜씨지만 그 무심한 눈길이 오히려 두렵다. 엉뚱하게도, 이렇게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날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조용히 눈감고 싶다는 시와 무관한 개인적인 욕망! 항상 생활 속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묶여있는 삶의 비극성은 ‘출입통제선’ 언저리에서 서성거린다.

생사(生死)

방독면 쓴 방역요원들이 계사(鷄舍)에
사정없이 분무기로 소독약을 뿜어대고
닭과 오리 수천 마리를 비닐백에 잡아 넣어
한꺼번에 살(殺)처분한다
조류독감 때문이다
출입통제선
바깥의 냇가에는
어디서 날아왔다
천둥오리들 한가롭게 무자맥질하며 놀고
백로 몇 마리 한 발로 서서
명상에 잠겨 있고


070614-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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