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도종환 엮음 / 창비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고 한 사람 두 사람 걷다 보면 길이 된다는 노신의 말은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없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필요한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두려워말라고 위로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순탄하기만 할까마는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길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걷고 싶은 것은 모두의 숨은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길들조차 때로는 낯설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다.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배달하려고 수많은 시집들을 뒤적이며 가슴에 닿는 구절들을 고르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학집배원 도종환이 시집을 엮었다.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여러명의 시인들이 쓴 시들 중에서 도종환의 가슴에 들어온 시들을 골라 엮었다.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각 주마다 한 편씩을 고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계절과 시기에 맞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언제 읽어도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시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시집은 결국 개인의 취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를 고르는 안목과 취향은 오롯이 시인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라도 같은 형식의 시집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도 좋은 시들을 모아 놓은 폴더가 꽤 된다. 그러면 내가 엮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집 한 권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시를 보는 안목을 검증받은 적도 없으므로. 도종환 시인에 대한 믿음과 그가 선택한 시에 대한 간략한 해설들이 편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은 시낭송 CD이다. 플래쉬를 만드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고 여러 시인들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다.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기도 하며 목소리 고운 성우의 낭송도 섞여있다. 감성적인 플래쉬를 배경으로 시의 내용이 더욱 명확하고 선명하게 전달된다. 시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집보다도 이 한 장의 CD가 값지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거나 학교에서 다같이 감상해도 손색없는 훌륭한 멀티미이더 교재이다.

이별노래 - 박시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저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나 세월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번져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쌓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하르르하르르 무너져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혹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산다는 일이 모두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행복인지 고통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만난다고 해서 행복이 아니고 떠난다고 해서 모두 슬픔은 아닐 것이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추는 여름 하늘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하게 우리의 삶은 변화를 겪고 과거를 아쉬워하며 미래를 기다린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시는 그저 잠시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원한 냇물이거나 편안하게 기대 울 수 있는 푹신한 베개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 밖에 존재할 것 같은 치유와 배려의 언어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건네는 짧은 한 편의 시가 때로는 수많은 수다와 변명보다도 더 큰 위안이 된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슴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서먹하다. 그의 시를 좋아했다. 고교시절 시를 처음 접한 후 그를 시를 읽어오면서 그의 언어에 공감하면서 오랫동안 꺼내보는 시집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 그의 엉뚱한 곳에서 만난 것 같은 기쁨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사춘기 소년의 연습장에 수없이 끄적였던 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독자에게 전해지는 순간 시는 독자의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든 절박했을 것이고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는 것은 울림이 있는 시였다는 뜻이다. 적어도 내겐.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처음이다, 마지막이다라고.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비가 오기 시작하면 젖어 버리고 한 번 젖어 버린 사람은 다시 젖는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장마의 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구름은 걷힐 것이고 푸른 하늘은 그 구름 너머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산다는 일도 때때로 그렇게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거나 혹은 ‘쨍’하고 해가 뜨거나!


070717-087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7-07-1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모아놓으신 시라면 한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7-07-17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7-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오타 고쳐 주시고...절대 돌아보지 않는...ㅠ.ㅠ 오타 많아요...

비로그인 2007-07-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위에 쓰신 댓글...이제야 사람냄새가 나는듯해요.
오해는 마세요.
늘 반듯한 분위기로 쓰신 글만 봤거든요.
저 시...정말 좋으네요.
복사해갈게요.


sceptic 2007-07-2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람 맞는데...^^...농담이구요...반듯하지도 않아요...삐딱하죠...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고려가요의 절창으로 꼽히는 ‘가시리’의 일부다. 떠나는 임에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원망과 회한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애를 끊어놓는다. 버림받은 사람의 심정은 어떤 설명이나 위로도 소용이 없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보다 그것을 견디고 적극적으로 이겨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은 여전히 문학의 좋은 밑거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별과 유랑을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주인공 바리데기는 ‘국민 여동생’이라 불릴 만하다. 영화배우 문근영이 아니라 ‘바리데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여동생이다. 고전 설화에서 차용한 주인공의 이름과 행적들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라는 분단 현실과 갈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문화적 공통체로서 하나일 수밖에 없는 당위와 필연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고전문학에 대한 경의와 현대적 수용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 황석영이 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작가인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수많은 씨줄과 날줄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다.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관점들이 뒤섞여 있고 하나의 사건이나 단순한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난삽하거나 중심 없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남과 북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태양 아래서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인 북의 현실과 상황들을 ‘바리’라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차분하고 환상적인 장면들로 구성하고 있다. 어차피 현실은 과거의 꿈에 불과하다면 소설에서 사실적 묘사와 설화적 몽환구조는 서로 상통하는 겹침과 펼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민족의 개념과 현실 상황에 대한 개탄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바리는 북에서 출발해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는 유랑길에 오른다. 어른 소녀의 입장에서 감내하기 힘든 현실적 고통들과 위험 속에서 늘 그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할머니와 칠성이의 영혼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바리에게 유일한 삶의 길잡이며 위로이기도 하다. 무속은 우리 삶의 원형에 가깝다. 초현실의 세계는 원시시대부터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 귀신을 보고 영혼과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은 서양의 슈퍼맨과 개념 자체가 다르다. 여성 주인공으로 무속적 영감을 가진 지닌 소녀의 신산스런 삶은 우리 민족적 삶의 원형이기도 하며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들이었다.

  반면에 공시적 관점에서 전 지구적 변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와 세계화, 인종과 전쟁 문제 등 폭넓은 시야에서 현재 인류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과연 한 권의 소설에서 이런 거대 담론들이 제대로 용해될 수 있으며 한국 문학의 관점에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의심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바리의 남편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인 ‘알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관타나모까지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다. 밀입국으로 영국에 도착한 바리는 나이지리아인 부터 베트남인에 이르기까지 과연 국경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본다. 삶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지역과 시대를 넘어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들은 비슷한 형태로 이어진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 223

  시기적으로 1994년  11살이던 바리가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에 걸친 삶의 역경들은 한반도 20세기 후반을 함께 했던 우리 인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산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만을 견디는 일일까만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현재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리들과 국경을 초월한 삶의 고단한 형태들, 국가간 이기주의와 패권주의 등 9.11 테러에서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종교와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모습들을 모두 한 배에 탄 우울한 인류의 자화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압권은 바리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할머니와 칠성이와 소통하고, ‘황천무가’에서 차용했다는 지옥 장면이었다. 바리는 우리에게 과연 생명수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책의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것을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설화 속의 바리는 생명수를 얻어 부모를 살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 바리는 생명수를 구하기난 한 것일까? 그 생명수는 과연 증오와 갈등, 죽음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작가는 바리의 입을 빌어 소설에서 이렇게 그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P. 286

  아득한 먼 옛날 설화 속 주인공 ‘바리’는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있다. 그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그 대상이 생명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뿐.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구일 뿐. ‘바리’는 늘 무엇에겐가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바로 내가 된다.


070715-086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루문 2007-08-08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계속 올려주시길^^
 
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빠삐용>은 귀신같은 탈옥 솜씨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끝없는 도전 정신이 더욱 인상 깊은 영화이기도 하다. 신체의 구속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던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설명되기 힘들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사회로부터 격리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는 논리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역설이다. 탈옥 영화들은 주인공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관객들이 주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탈주에 대한 욕망이다. 자유를 차압당한 인간의 본능에 대해 공감을 형성한다. 비무장 지대 GP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방에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의 대형 포스터를 오랫동안 걸어 놓았다. 주인공 팀 로빈슨이 시원스레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어둠 속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가슴을 활짝 펴고 양팔을 뒤로 뻗은 자세의 포스터를.

  동명의 소설이 나왔다. 국내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파피용>은 공상과학 소설의 복습이자 예습이며 현재형을 보여준다. 먼저 복습에 대해 살펴보자. 공상과학 소설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쥘 베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이브의 아버지 이름이 쥘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이브의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파피용>은 쥘 베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은 지구 밖을 여행하는 <파피용>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과 탄탄한 구성 측면에서는 선배에게 한참 밀리고 있다.

  하지만, 예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전문기자였던 작가의 이력을 더듬지 않더라고 만만찮은 소설의 뼈대를 과학 상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상상력조차 상상력은 문학의 가장 큰 재료가 된다. 아득한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인류가 걸어온 길은 빛의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천년 후의 인류를 상상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비좁은 세상을 떠나 상상을 뛰어넘는 저 우주의 또 다른 세계로 떠난다는 설정은 그리 허황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미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형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지구의 현재는 결코 낭만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지향점이 없는 현대 사회의 모순들을 살펴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소설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원자폭탄, 종교적 광신주의, 환경오염, 인구 과잉, 그리고 사방에 스트레스와 두려움’등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기에 차고 넘친다. 전쟁과 기아, 자본주의와 민족적 이기주의 등 헤아릴 수 없는 모순들과 문제들을 가진 일촉즉발의 위기 행성 ‘지구’에 대한 반성이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 것인가? 작가가 소설 초입에서 여러 번 반복하는 말이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다.”라는 문장이다. 과연 그러한가. 희망없는 별 지구를 떠나서 우주의 다른 행성을 찾는 것이 현생 인류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숨은 그림처럼 숨겨 놓았다. 14만 4천명이 태양돛을 단 범선을 타고 천 년 후에 도착할 인류의 새로운 지구를 찾아 떠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하지만 거꾸로 그렇게 찾은 별이 바로 여기라는 설정이다. 끝없이 새로운 별을 찾아 떠날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마지막 ‘지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희망. 이 책에서 작가는 그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 하나를 살려 놓고 있다.

  아담과 이브 등 성서에서 차용한 주인공들의 이름과 우주 여행이라는 기본적인 발상은 그리 신선하지도 않고 낯설지도 않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소설의 기본 틀은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할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개미>에서 느꼈던 강렬함이나 몰입의 즐거움은 찾을 수 없었다. 허명에 쫓겨 이 책을 선택하는 모험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다만 도덕 교과서처럼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는 읽고 난 후에도 긴 여운으로 남는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떠나서 변화해야 하고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 자체도 힘이 드는 현실에서 문학은 또 하나의 각성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IMF가 터졌을 때 돈 많은 부자들이 술잔을 부딪히며 외쳤다는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마지막 희망’이 무엇인지 찾아 떠나는 14만 4천 명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지구는 살만한 별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별에서 국가도 군대도 폭력도 전쟁도 화폐도 결혼도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소설이나 읽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설이 현실이 될 수 도 있다는 사실들을 후세에게 전하며 조용히 늙어가고 싶다.


070712-08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eterCat 2007-07-1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은 팀 로빈스에요 ^^
오타 내신것 같아서 살며시 댓글 남기고 갑니다

sceptic 2007-07-13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수정했습니다...딴 생각하고 리뷰썼나봅니다...^^
 
반자본주의 - 지식발전소 01
사이먼 토미 지음, 정해영 옮김 / 유토피아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의 발전 단계의 종착역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싶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은 철저하게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역설하듯이 미래 사회에서 부는 단순히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자본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과 지식을 망라할 수 있는 모든 생산수단과 국적불명의 대규모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세계화를 이룩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와 인류의 삶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믿는 몽상가는 이제 많지 않다. 자연선택에 의해 동물적인 진화가 아니라 보다 나은 세상으로 자연스럽게 진화한다고 순진하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화와 변화, 진보와 발전 사이에서 인간은 늘 희망을 꿈꾼다. 그것이 헛된 꿈일지라도 우리는 미래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할 수 없다. 지금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비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사회구성체 논쟁이 가열됐던 80년대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서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마르크스의 주장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아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현주소는 물론 과거로부터 이행과정을 되짚어본다. 자본주의는 왜 등장했고 어떻게 굴러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알기 쉽고 평이한 내용으로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관한한 리오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만큼 알기 쉽고 적절하게 설명한 책을 찾기 힘들다. 이 책의 목적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재’에 해당한다. 그 중심에 ‘시애틀’이 놓여있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미국 시애틀 사건을 단순히 성난 군중에 의한 시위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반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 세력들이 어떻게 연합해야 하면 그들이 가진 한계와 모순은 무엇인지 짚어내는 저자의 안목과 비판적 관점은 매섭기만 하다.

  이론적 토대와 경제학에 입각한 논의가 아니라 현실 정치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짚어내는 ‘운동들의 운동’에 관한 논의가 이 책의 핵심이다. 개혁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넓고 다양한 사회적 스펙트럼들을 펼쳐 보여준다. 멕시코의 사파티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현실 가능성과 실제 상황 속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입장과 논리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한 눈에 만만찮은 내공과 논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론 부분에서 앞서 논의되었던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 활동가 혹은 학자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나 각각을 위한 책들은 조금씩 다른 입장과 관점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쉽고 가볍게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입장들을 정리해 볼 수 있는 책이다. 그 흐름과 의미를 개괄할 수 있으며 반자본주의의 미래까지도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하나의 응집된 운동과 현상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숙제가 남겨진다. 또한 이데올로기를 넘어 저항할 수 있는 당연한 논리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당연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희망을 위해서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산층’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스스로 ‘시민’이라고 믿고 있다.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며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에 대해 남의 얘기로 믿고 싶어한다. 평등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자본에 집착하며 스스로 소외되고 20%가 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경쟁의 덫에 치여 죽는다.

  목숨을 걸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그들에 의해 사립학교법은 무효화되었고 입도선매의 달콤함을 맛본 대학들은 인재의 육성보다 선발에 목숨을 걸고 그들만의 리그를 펼친다. 대학을 졸업하고 놀면서 최소 1억은 있어야 법앞의 평등을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며 대다수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있지만 저항하기 보다는 순응하며 많은 돈을 벌어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태도와 생각 자체가 이미 노예인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현실 상황에서 이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전부가 활동가가 될 수는 없을까?

  혼자서 꾸는 꿈은 한낱 백일몽에 불과하지만 우리 모두가 동시에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잘 길들여진 우리들은 오늘도 내일의 희망과 미래의 꿈을 자본에 맡기고 살아간다. 온 국민이 ‘부자되세요’를 가장 듣기 좋은 덕담으로 외친다. 혁명가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했지만 그 리얼리스트의 한계를 이 책에게 묻고 싶다. 어디까지 현실과 타협하며 어디까지 행동하며 살 것인가.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 속에 묻혀 산다는 것이라고 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남들처럼 사는 게 좋다고도 한다. 하지만 한 번도 그 길이 좋아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길 바랄 뿐이다.


070710-0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알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호기심이 많거나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백과사전이 만들어졌고 네이버에는 지식in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별 쓸데없는 잡다한 호기심과 그에 대한 답변들이 사람들의 본능적인 욕망을 일부 잠재운다. 깊이를 더해 전문적인 탐구가 계속되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 성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만족하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 널려있는, 혹은 매일 접하는 신기한 이야기와 사물의 이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은 정말 재미있다. 그 재미는 박학다식에 버금가는 잡학다식한 저자만의 개인적 관심과 능력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평소 웃음이 많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신기한 것과 재밌는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소설가로서 소재를 취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은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 되고 훌륭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가 고급스런 문화적 취향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에서 출발했지만 소설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촌철살인의 재미있는 이야기나 신기하고 궁금한 이야기들을 2~3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담아내고 있다.

  워낙 뛰어난 입심과 재치로 무장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웃음과 재미는 이 책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와 일반적이고 관성적인 관점에 비틀어보기 그리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펼쳐진다. 마지막 4부에서는 명칭과 어휘 등 문자에 대한 어원과 뒷얘기들로 가득하다. 부제 그대로 만물상에 온 듯 풍요롭게 즐거운 이야기로 책 한 권이 가득 차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라는 저자의 말은 이 책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 소설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천성을 타고 태어났으니 성석제는 천상 소설가이다. 그의 수첩에 적혀있었을 그 많은 재밌는 이야기 거리와 잡학 사전 같은 내용들이 이 책의 내용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읽는 내내 낄낄거리며 혼자 미소짓고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공공장소에서 읽을 때는 주변의 시선을 조심해야할 수도 있겠다.

  이 맘 때면  휴가지에서 읽었으면 좋겠다는 책 어쩌구 하는 얘기들이 나온다. 무더운 한 여름 머리 복잡하지 않고 마치 TV를 보듯이 쉽고 재미있게 읽고 싶은 책으로 권할 만하다. 그렇다고 시중에 떠도는 유머집과는 다르다. 유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기 기원과 의미를 깊이 있게 설명하는 내용들은 호기심을 넘어 지식으로 간직할 만한 이야기들도 많다. 저자처럼 잘 웃는 사람, 호기심이 많은 사람에게 선물하면 좋은 책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알 수는 없다. 알고 싶어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안다고 해도 세상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알고 싶은 대상의 깊이와 폭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재밌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들과 호기심 사이의 본능적인 욕망들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성석제의 이 책은 그렇게 활기찬 생의 재채기와 같다. 유쾌하게 웃고 시원스럽게 박장대소를 터뜨릴 수 있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우리들 삶에 대한 세심한 눈길과 배려처럼 돋보일 때가 있다. 몰라도 스쳐지나가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웃음으로 혹은 지식으로 사소함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저자의 뛰어난 감각이다. 천상 이야기꾼인 성석제의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로 가득한 <유쾌한 발견>을 발견해서 즐거웠다.


070707-0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