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계급론 -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과 새로운 계급의 탄생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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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한민국의 교수와 경제관료들은 토마 피케티나 장하준 등 유럽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하다. 폴 크루그먼 등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유력한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책에 반영한 사례도 듣지 못했다. 대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 시카고 학파의 경제 이론이 ‘그들’의 지적 토대를 이룬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비주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이 여전히 영감을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일레자베스 커리드핼킷은 ‘야망 계급론’으로 유한 계급론을 오마주한다.

물론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이 비판했던 유한계급은 엘리트 계급으로 바뀌었고 중간 계급이 두터워졌으나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규범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한다. 계급 재생산에 몰두한 ‘그들’을 저자는 물질적 소비보다 자신의 지위를 구별짓는 ‘야망계급’이라 명명한다.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나름 피시한 사람들과 의식 있는 소비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뼈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상당수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할 터. 저자는 왜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가 과거 유한계급의 소비문화보다 훨씬 더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을까.

새로운 야망계급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문화수준으로 묶인다.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사회와 환경을 의식하는 가치관, 삶의 철학과 표지가 뚜렷한 교양과 문화자본으로 무장한 계급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경고는 타당한가. 저자의 분석은 야망계급의 구별 짓기가 아니라 ‘비과시적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 육아, 교육, 의료 등 비가시적이고 암묵적인 소비는 상당한 정보와 돈이 없으면 모방하기 어렵다.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와 취향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과거 유한계급보다 은밀하고 심각한 계급 격차의 원인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있다. 이는 불평등은을 은폐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단순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포괄하는 삶의 태도 전반을 아우른다. 이를 선택할 수 없는 중간계층이나 자신의 지위 표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태도는 다소 모호하다. 미국 사회를 분석한 저자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다양성보다는 대개 ‘소득’으로 수렴하며 거대한 욕망이 일방향으로 흐르는 우리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과 본능은 베블런의 지적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100년이 훌쩍 넘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동과 수정 자본주의가 계층과 계급의 ‘차이’를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맨 앞칸과 꼬리 칸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고 앞칸으로 이동하려는 욕망도 변하지 않기 때문일까. 야망계급이든 소비 계급이든 희망 계급이든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구별 짓기가 더 두려울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괜찮지 않다. 아니 어쩌면 괜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상하며 꿈꾼 사회를 이룬 적이 없으나 여전히 멈추지 않고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걸까. 저자의 명쾌한 분석도 ‘과거’와 ‘현재’일 뿐 ‘미래’를 전망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진 못한다. 아니, 그걸 한다고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는 정도면 충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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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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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신문을 보며 세상에 눈뜨던 사춘기 시절, ‘아침마다 피 묻은 칼이 튀어나오는 신문을 들고’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개가 사람을 문 게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대개 사건, 사고에 눈이 가고 관음증의 강도는 배가 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뉴스를 접할 때마다 레거시 미디어와 황색 저널리즘을 구별하던 시대는 차라리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다. 정치는 혐오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언론은 클릭수로 돈을 챙길 때 우매한 군중은 자신의 뇌를 절여 맹목적 증오와 진영 논리에 눈이 먼다. 반복 재생되는 유튜브와 쇼츠, 릴스, 틱톡은 필터 버블을 만들고 생각하지 않는 개인은 에코 체임버에 갇힌다.

어쩌면, 정치가 생활을 바꾸고 투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감시와 처벌을 게을리하는 투표 이후의 비판적 눈길과 적극적인 참여가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정체의 원리를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개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 판단 능력, 논리적 사고가 부족할 때 침묵의 카르텔은 무서운 속도로 서로의 이익을 챙기며 견고한 구조를 만든다. 선의에 기댄 정치 체제는 망상에 불과하며 견제 장치 없는 권력과 비판 기능을 상실한 언론은 현실을, 아니 바로 매일매일의 삶을 참담하게 만든다.

절망과 고통이 삶의 디폴트 값이라면 꿈과 희망은 현실을 견디는 마약일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만큼 순진한 생각이 ‘설마’를 낳고 정치적 퇴행을 양산한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관습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켰다면, 이길보라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 경험의 한계를 절감케 했고, 김인정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언론과 현실의 역학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라는 이상의 말이 새삼스러운 건 자신이 뱉은 말과 행동과 그 태도가 본질이라는 걸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외면하는 듯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짓을 꺼린다. 그래서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숨조차 쉬지 못한다. 그것이 부모 자식, 형제자매, 친구와 연인이어도 다르지 많을 때가 많다. 하물며 사회적 관계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과 언론, 기업과 정부는 불가근 불가원이다. 여기에 몸담은 사람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제 기능을 상실하면 가장 고통받는 건 바로 나, 너 그리고 우리들이다.

고통의 저널리즘을 넘어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이영희 선생 이후 대한민국의 언론과 이익 카르텔을 묵인한 건 뉴스 소비자들이다. 빈곤 포르노를 넘어 개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김인정 기자는 뉴스 너머의 세상을 본다. 그리고 앵글 밖의 1인치를 고민한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 공적 역할에 관한 지루한 논쟁과 거리가 멀다. 개인적 소회, 경험으로 체득한 고민이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경찰,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에 대한 신뢰, 언론과 기자에 대한 존중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정치혐오만큼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는 권력기관과 언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자정 능력은 없으나 사회의 공기처럼 중요한 분야를 방치하면 악취가 진동한다. 진영의 문제도 아니고 정치적 신념의 문제도 아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구조가 단단하지 못하면 집이 무너진다. 한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개인기와 리더십이 아니라 개개인의 비판적 사고에 기반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개인은 나이, 직업, 성별, 종교와 무관하게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단단한 자기 확신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불공정과 몰상식은 세습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목숨 건 사투가 벌어지는 동안 관중들은 자기편만 응원한다. 견제와 균형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내로남불 끝판왕들의 설전을 눈여겨보자. 자기 삶의 근본적 문제를 살피려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대신, 내 안의 편견을 점검하고 이성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지만 마비된 이성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저자는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라고 일갈한다. 구경하는 대중의 음험한 눈길, 팔짱 낀 채 외면하거나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온다. ‘영원히 움직이는 텍스트’를 꿈꾸는 저자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내는 대신 이렇게 고통스런 텍스트를 소비하는 각자의 태도를 점검할 시간이다.

늘 정확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둥글게 휜 포물선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 깔끔하게 과녁을 맞히는 질문. -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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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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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무엇일까. 이성과 감정의 경계에 서서 매번 흔들린다. 이성은 사람을 설득하기 어렵고 감정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윤리와 이타심조차 DNA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회화 과정의 학습효과가 절대적이다. 이 과정에서 가족, 지역사회, 국가가 타인에 대한 태도와 예의를 가르치고, 개인은 기질과 성향에 따라 고유한 도덕과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가진 공통적 본능과 함께 각자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이 마련된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적 도덕과 윤리적 기준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흔들린다는 데 있다. 사회가 정한 질서 즉, 법과 규정은 공동체 생활의 최소한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해결되지 않는 분쟁, 서로 다른 생각, 개인 간 이해관계, 신체적 폭력과 상해 등 갈등 없는 관계는 불가능하고 문제없는 사회는 없다. 군중은 개인보다 우매하며 타인은 단순하게 악하고 자신은 복잡하게 선할까.

목사 라인홀드 니버는 90년 전에 미국에서 인간의 도덕과 인류 사회의 비도덕성을 신랄하게 분석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전쟁과 폭력, 이기심과 불평등은 합일될 수 없다. 현실은 대체로 참혹하고 종교적 실천 윤리는 이상적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세계사의 폭력과 전쟁, 산업사회로 진입한 자본주의의 불평등이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삶의 방법과 태도에 혼란을 가져왔다. 인간과 인간, 나와 탕니이 함께 살아가는 법은 없을까.

이 책은 기독교 윤리가 현실의 모순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더 나은 세상,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한 종교는 언제나 인류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고 성찰의 시간을 제공했다. 자기 삶의 목적과 이유를 고민하게 하는 순기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이 문제이듯 종교가 아니라 언제나 종교인의 태도와 생각, 말과 행동이 종교적이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기독교 윤리를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데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글쓴이가 목사라고 해서 교리를 앞세워 도그마에 갇혀 있는 건 아니다. 매우 폭넓은 시각으로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과 민족, 특권 계급을 살핀다. 프롤레타이라 계급은 물론 당대 정치와 혁명을 살피며 도덕적 가치를 점검한다.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사회의 권력 불균형에 의해 생겨난 사회적 갈등의 해소는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학자는 별로 없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의 도덕과 사회 구조를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자들의 이익이 합치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서로 극과 극 대척점에 서 있는 건 아니지만 대개 개인의 도덕과 사회적 윤리는 충돌하기 마련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나 ‘비도덕적 사회’라는 표현에는 공감한다. 인간과 사회를 도덕과 비도덕으로 대립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 민족과 계급으로 나뉜 개인의 도덕성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맥락없이 부정된다. 공리주의가 표방하는 다수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도 사회적 관점의 비정함은 변함없다. 급변하는 시대를 반영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인류 사회가 지향해야 할 혹은 극복해야 할 정의, 불평등, 분배 문제를 정치의 역할과 기능의 관점으로 살피고 있으나 답답함과 한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개인과 사회가 지닌 모순과 부조리는 21세기가 되어도 진정되거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의 역할과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소수의 이기주의와 이해관계로 단단하게 얽힌 현실은 라인홀드 니버가 보여준 당대의 고민이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한다. 적어도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해지는 잘못을 시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이기주의보다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를 더욱 가혹하게 억제하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법이 도덕의 최소한이라면 자기 객관화는 이기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 아닐까.

특권과 권력의 유혹에 굴복해버린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는 의심할 바 없이 개인적인 야심과 영달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었다. 일반대중은 진정한 지도자라면 이러한 결점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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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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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거실 창밖에 밧줄에 매달린 분이 나타난 적이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허공에 매달린 사람을 거실에서 마주하니 놀라움이 먼저였다. 도심 빌딩 외벽에서 작업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분들을 올려다볼 때마다 ‘불가능’이란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노력하면 가능할 듯싶은 일이 있고,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일이 있다. 존경과 두려운 마음으로 작업 광경을 바라본 적이 많다. 그래서 12명의 베테랑 중 로프공 김영탁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게 느껴졌다. 고소공포증까지는 아니어도 현기증이 나서 유리가 바닥으로 된 관광지의 전망대나 출렁다리도 건너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직장에서 일하는 로프공 김영탁은 “베테랑은 내 안전 내가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파리바게뜨, 베스킨라빈스 등 SPC 계열사의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오래다. 집 근처 프랜차이즈 빵집을 지날 때마다 목이 멘다. 산업재해를 지적하기 위해 쓴 책은 아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베테랑들이 처한 노동환경에는 할 말이 많아진다. 작업의 위험성 여부를 떠나일하는 모든 사람, 즉 노동자의 권리가 바로 서지 않으면 행복한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조산사, 안마사, 마필관리사, 세신사,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배우, 식자공 등 열두 가지 분야의 베테랑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론과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경험과 실제다. 온몸으로 생을 밀어 온 베테랑들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은 어떤 철학자들의 개념과 다양한 주장보다 숭고함이 느껴진다. 베테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고 간명하게 자기 삶의 철학을 담아낸 한마디가 겸손하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프로페셔널 혹은 전문가라는 호칭보다 베테랑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와 깊이는 남다르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감탄과 공감을 얻은 이유는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이며 곧 우리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친근함 때문이었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보람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 선민의식과 구별된다.

삶의 달인, 인생의 베테랑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자기 삶의 베테랑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귀하고 소중하다.

“베테랑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일한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 - 세공사 김세모

“베테랑은 자존심 지키며 일하는 사람” - 조리사 하영숙

“베테랑은 내 안전 내가 지키는 사람” - 로프공 김영탁

“베테랑은 묵묵히 제 일을 하는 사람” - 어부 박명순, 염순애

“베테랑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 조산사 김수진

“베테랑은 자기 일에 모르는 것은 없는 사람” - 안마사 최금숙

“베테랑은 말을 이해하는 사람” - 마필관리사 성상현

“베테랑은 내 몸 다치지 않게 일하는 사람” - 세신사 조윤주

“베테랑은 준비를 열심히 하는 사람” - 수어통역사 장진석

“베테랑은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 일러스트레이터, 전시기획자 전포롱

“베테랑은 나에게 올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사는 사람” - 배우 황은후

“베테랑은 수많은 활자들 사이에서 길 잃지 않는 사람” - 식자공 권용국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위태롭지 않은 인생도 없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확신하며 자기 신념이 뚜렷한 사람들이 오히려 두렵다. 그러나 베테랑들은 묵묵히 일하며 자기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분들이다. 온몸으로 살아낸 삶의 흔적과 결과로 그들을 베테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을비 갠 다음 날 맑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한가로운 날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 평화와 안정 뒤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과 투쟁의 흔적이 숨어 있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의 소중함이여. 다만 그냥 이렇게 사는 거죠, 라고 따라 해본다.

베테랑들은 참 이 말을 좋아했다. “그냥 하는 거죠.” 다만 열심히. - 프롤로그,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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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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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지만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사람 사는 일에 정해진 길이 있다면 누가 인생을 어렵다고 하겠는가. 통시적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 여기가 보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절대왕정을 거쳐 신분제가 철폐되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세상을 만든 과정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진한 피냄새가 배어 있다. 원시 공산제와 고대 노예제를 거쳐 중세 봉건제를 지나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에도 숱한 이들의 땀과 한숨이 스며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개인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어깨 겯고 걸어온 길들 위에 꽃이 피었다. 돌아보면 보이는 것들이 힘겨운 현실과 험난한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김규항이 걸어 온 길, 그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자리에도 꽃이 피었을까. 오랜만에 읽는 김규항의 문장마다 힘과 결기가 느껴진다. 여전히 흔들리며 걷는 사람들 발자국마다 자본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그림자가 스친다. 고정 불변하는 체제는 없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걸어야 하는 것일까.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이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아나톨 칼레츠키가 자본주의 4.0 시대를 선언한지 10여년이 흘렀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반성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충돌하며 대한민국 사회에도 빛과 그림자를 만든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와 복지사회의 꿈이라는 상충하는 우리들의 꿈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누구를 위한 복지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1867)이 출간된지 150년이 훌쩍 지났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체제, 즉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와 시스템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생성, 변형, 소멸의 과정을 거쳤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대로 만물이 유전하듯panta rhei,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도 세상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생존과 적응에 매몰된 다수와 달리 조금 다른 시선으로 미래를 고민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든, 사익 추구를 위해서든, 인류애와 호기심 차원이든 ‘현상’을 넘어 ‘본질’에 집중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변화의 흐름를 읽어내려는 노력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주 조끔씩 바꿔왔다. 반복적 일상에 균열을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의무가 삶의 태도가 아닐까.

매일 숨쉬는 공기처럼 우리는 자본주의를 호흡한다. 욕망을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뱉는다. 주식, 코인, 부동산, 취업, 노후 준비에서 환율, 경상수지, GDP까지 실물경제에 대한 관심이 곧 현대인의 삶이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지 오래고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오늘의 일상과 내일의 행복을 좌우하는 자본주의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18개의 주제로 펼쳐지는 세미나는 200쪽이 안 되는 이 책의 분량과 무관하게 깊고 넓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물론 케인스와 신자유주의의 명암을 찬찬히 살핀다. 우리가 간과한 것은 무엇일까. 1997년, 2008년은 모두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변화를 넘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안녕한가.

갈고 닦고 조이며 자본주의를 고쳐쓴지 오래다. 김규항의 세미나는 새로운 경제 체제를 도입하거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의도가 없다. 문제의 본질을 살피지 못하고 현상에 급급하며 체제 자체의 모순을 간과하는 태도를 성찰한다. 신축아파트에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는 건 시공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설계 자체의 결함이 은폐됐을 수도 있다. 또한 건축 이론과 공법이 모든 지형과 기후에 적용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시대정신을 좇으며 새로운 얼굴로 탈바꿈해온 자본주의는 우리의 미래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구조적 모순과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대개 그러하듯 이 세미나에 참여한 독자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각 장마다 권민호의 그림이 환기 장치로 활용된다. 마지막 장에 소개된 그림과 제목이 인상적이다.

Karl Marx+Quo Vadis, 29.7×42cm, 2013

새로운 사회는 현재의 사회 안에서 자라납니다. 우리가 노쇠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새로운 사회가 생겨나는 시기에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행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행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일정을 갖게 될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이행기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 주역은 선구자나 지도자와 함께하는 군중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로서 노동을 사유하는 최초의 개인들 말입니다. 유토피아는 없지만, 최소한의 사회는 있습니다. -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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