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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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상을 꿈꾼다.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공상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즐긴다. 자끄 라캉이 구분해 놓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혼동은 휴머니즘과 진보를 모토로 출현한 모더니즘의 연상선상에 놓여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도 여기에 속한 범주로 이해하면 개념이 혼동일지 모른다. 내게는 그렇게 읽혔으니 바로잡는데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변과 경계를 즐기는 버릇은 책읽기에도 곧잘 반영된다. 현실과 환상의 핵심에서 벗어나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를 기점으로 모더니즘이 출발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지금, 여기’의 실체에 대한 역설을 반복한다. 전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이 책은 끝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개념으로 활용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전도서

  벤야민이 말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의 개념과 홀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부터 비롯하여 기계기술의 발달과 현대 사회의 왜곡된 현상들을 해석하는 보드리야르의 시각과 해석은 독특하다. 그의 개념에 동의하느냐 문제는 별개다. 현대사회를 통찰하는 시선의 낯선 방향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시뮬라트르’가 참된 것이라는데.

  시뮬라시옹은 환상과 허구다. 그러나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조작된 현실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지도 결국 실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감추고 변형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혼동 속에서 대중은 실재보다 이미지에 집착하고 현혹된다. 때로는 실재의 부재를 감출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박제된 현실 속에서 환상과 이미지를 찾아 떠나는 피곤하고 긴 여행중인 현대인들의 나른한 일상을 비추어 볼수 있는 프리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시뮬라시옹’은 아닐까.

  텔레비전과 ‘홀로코스트’, 영화와 ‘충돌’이 빚어내는 시뮬라크르는 역사와 현실은 넘어선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모방된 이미지와 개념을 오히려 현실이 따라야 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끝임없는 쏟아지는 광고와 자본은 인류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딘가를 어떤 모습으로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집단 환각제를 마신 것같다. 실재계와 상징계는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치환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 왔고, 그 속에서 헐떡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모방된 현실과 가상 현실은 인간관계도 변화시켜 버렸다. 네트웍과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보드리야르가 바라본 이미지와 실재의 괴로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미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 : 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 - P. 252

  이 책의 마지막이다. 무의미와 허무의 유혹만큼 강렬한 환각은 없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유혹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다. 모호한 언술로 대중을 농락하는 철학자의 말장난이 아니라 뒤돌아보지 않고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경종을 귓가에 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의 실존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론 측면에서, 혹은 사회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개념과 논의들은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모습이다. 안다는 것만으로 부족한 2%는 우리 모두가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무질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질서’가 가져오는 소외와 폭력적 외로움을 전하는 듯한 브레히트의 말이 오히려 가슴에 오래 남는다.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곳, 이것은 질서 : 브레히
트 - P. 241


  윤난지의 <현대미술의 풍경>을 읽다가 개념이 잡히지 않아 읽게 된 책이다. 변죽만 울리고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인용과 재인용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는 책들과 개념들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하이퍼링크 책읽기’의 즐거움이다.


06021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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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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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아니 자주 나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다. 물론 그것에 대한 답이 될만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를테면 사회경제적 지위로 볼 때 당연히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띠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보면서 기사의 방향과 논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착각하는 비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오래된 숙제처럼 대중들의 비합리적 정치 성향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모순은 풀리지 않았다.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그 의문부호에 확신에 찬 답변을 던져준다. 1933년에 출판된 이 책이 많은 부분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히 사상의 정수를 선보인 것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만하다. 단순하게 사회와 정치를 보는 거시적 안목에 대한 탁월함이나 뛰어난 통찰력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의 기원을 분석해내는 방법과 논리는 명쾌하다. 프로이트와 동시대 인물로 정신분석학 연구소에 일했을 만큼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한계를 느끼고 독특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인간정신의 심리구조를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향을 극복하고 거시적 관점인 역사적, 사회적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맑스다. 맑스의 노동과 사회학적 관점이 라이히 사상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라이히는 ‘성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이 이론의 정수가 바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고 볼 수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극에 달한 시점에서 쓰여진 이 책은 이후 3차례의 개정 증보판을 내게 된다. 그린비에서 이번에 번역된 책은 1942 8월에 쓴 라이히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붙어 있다. 라이히는 이후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소를 세워 연구활동을 하던 중 미국 정부에 의해 연구 성과가 파괴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6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옥사한다.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 후 출판된 이 책은 그의 이론의 독특성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차피 정치는 개인의 성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시대를 반영한다. 파시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혔던 라이히가 대중심리의 비합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프로이트와의 인연으로 인간의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정치적으로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입장에서 대중들의 모순된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억압하며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당당히 현실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라이히의 고민에 공감이 간다. 이런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를 자연스러운 성의 신비적 왜곡과 억압된 오르가즘에 대한 열망 그리고 가부장적으로 구조화된 사회경제적인 억압에서 찾고 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라이히는 노동자들을 계층별로 세분화하고 그들의 정치 성향을 비교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개인의 성적 억압과 가족내에서 구조화된 가부장적 억압구조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지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라이히가 생존했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지닌 현대 사회는 그 특징을 쉽게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인류는 이미 정보 사회로 접어들었드며 인터넷의 발달과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삶의 형태와 의식 구조가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대중들의 정치적 성향과 변화 주기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중들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통제하거나 묶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류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변하지 않는 대중들의 심리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불어 성적 억압구조나 가족 지상주의, 언론과 정보 사회의 극단적 포퓰리즘 등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경제적 계급구조는 더욱 모호해져가고 있다. 아니 모호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라이히의 지적대로 물질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성향 사이의 균열의 원인이 항상 소시민들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논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현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사회의 구조와 경제적 토대가 어떤 형태로 변화될 지 알 수 없으나 라이히의 주장은 상당부분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 많다. 전공자가 아니라서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관점과 이론적 토대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생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원인을, 혹은 그 연결고리를 ‘가족’으로 보았던 라이히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상황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면 그 다양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정치 협잡꾼이 아니라 소시민계층이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통해 바로 잡아야할 문제다. 이 책의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히의 말 한마디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인간 존재의 원천이다. 또한 이것들이 인간 존재를 지배해야 한다!" - P. 496

 

 

0604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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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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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지凌遲’는 죄인의 살갗이나 살점을 칼로 도려내는 형벌로서, 가능한 한 죄인을 살려둔 채 며칠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하는 형벌이다. 능숙한 집행자는 한 사람에게서 2만 점까지 도려낸다고 한다. 이 끔찍한 형벌은 인간의 폭력과 잔혹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무색케하는 이 형벌은 문명이전의 야만과 광기의 산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형벌이 많이 존재한다. 삶아죽이기도 하고 궁형에 처하기도 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방법이 동원된 형벌의 역사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론과 설명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충격이다. 1905년 4월 10일 북경에서 찍힌,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 속 주인공은 푸추리라는 28세 남자다. 조르쥬 바타이유가 평생 간직했으며 생전의 마지막 저서인 <에로스의 눈물> 마지막 장에 실었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적이다. 양팔이 이미 잘려 나갔고 칼로 다리 살을 베어내는 장면이다. 가슴 부분의 살갗이 이미 베어져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있는 사진으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살아 있고 하늘을 바라보는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P. 166

  인간이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러난 결국 개인에게 있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추정 내지 유추 정도가 될 것이다. 무관심과는 다르다. 도움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수천명이든 수만명이든 학살과 일방적인 잔혹 행위가 진행되는 과정을 외면했다는 비난과 반성을 외칠 수는 있지만 미디어를 통한 전쟁은 이제 일종의 흥미와 오락거리가 되어 버린다. 94년 걸프전 당신 아침을 먹으며 미국 전투기의 야간 폭격 장면을 마치 오락기의 프로그램처럼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CNN으로 중계됐던 그 장면은 이제 전쟁의 개념도 뒤바꾸어 놓았다. 현대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와 미디어와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전달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기나긴 야만의 시간에 대한 반성과 자책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100년전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인간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집단의 광기와 살육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명 국가를 건설하고 살아가는 유럽과 미국에 의해 자행되거나 묵인되는 상황들을 돌아보면 대답은 분명해지는 듯하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나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2003년에 나온 이 책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 바라본다. 미국의 비판적 지성인 수잔 손택의 관점은 분명하다. 최근의 전쟁과 그로 인한 고통의 원인과 전달 방식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양차 대전과 이후의 국지전들은 여전히 지속된다. 종군 기자로 참여한 사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쟁의 참상과 죽음에 대하여 전달받는 타인들, 그리고 그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잔혹함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진’이라는 은유의 방식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변화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닐까 싶다. 전쟁에 대한 허다한 논의들을 짚어보는 대신 ‘고통’이라는 주제로 ‘나’와 ‘우리’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방식은 전쟁과 참상을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인다.

  화가 고야의 ‘더 이상 안돼’라는 제목의 책 표지 그림은 이 책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나무에 목이 매달린 남자를 턱을 고이고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대중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와 상관없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책 한 권을 통해 내 삶의 자세와 인류애적 도덕성을 일깨우자는 유아적 발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면 인간이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라면 국가든, 민족이든 갈등과 전쟁을 통해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상징되는,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전달되는 과정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인들의 반응은 지금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내 것이 아닌 모 것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과 내가 겪지 않은 고통들을 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기심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이 우리 삶의 방식이다. 대부분 그렇게 산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현퓽岵막?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이 방식이 되어 버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이미지로 ‘재구성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극명한 간극을 보여준다. 그것은 현실의 허구성을 주창하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현실의 비극적 인식을 철저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하는 손택의 현실 인식 방법이다. 나는 우선 그녀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 먼저 ‘재현된’ 현실부터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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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49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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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특별한 장르로 분류하거나 묶어낼 수가 없다. 개성에 따라,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과 사유의 방식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책만큼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책을 읽은 후의 책들이다. 학자들의 경우 연구 저작물의 형태나 해설서, 주석서 혹은 평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결과물을 정리한다. 인류가 남긴 지적 재산이라고 불릴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난다. 단 한권의 책에 수많은 연구 논문과 다양한 해석이 따라 붙기도 하고 논쟁이 벌어지다가 전혀 다른 형태의 이론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렇게 인류의 지성사는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선 시대에 대한 부정과 반발 한 분야의 대가에 대한 도전들은 반드시 필요하며 정의와 진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 모든 행위들은 발전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된다.

  읽은 책의 종류와 내용들, 그리고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들은 책을 읽는 사람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 이정우의 책읽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 <탐독耽讀>이다. 대안 철학학교인 ‘철학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이정우의 서재와 책읽기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한 일이다. 학부에서 공학과 미학을 공부한 후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이정우는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4년만에 사임했다. 그의 책읽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유목적 사유’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의 여정을 거쳐 ‘철학’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른 저자의 ‘사유의 방식과 흐름’을 따라가 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부러움과 시기심, 극단적인 질투를 만들어낸다. 이정우의 유목적 사유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 소은 박홍규 선생의 영향으로 촉발된 ‘존재론’이라는 축과 푸코에 빚지고 있는 윤리적 ․ 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유가 그것이다. 사회문화적 관심은 철학자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현대사회에서 철학을 ‘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짚어보고 철학자의 역할과 의미를 고민해본다면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저작들이 기대된다. 단순히 인류의 지성사에 대한 깊은 연구와 개인적인 사유의 내밀한 성과들이 학문적 성과만으로 끝난다면 이정우는 훌륭한 학자나 연구자로서 허명을 남길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섣부른 판단과 기대가 될 지 모르겠으나 그가 말한 ‘유목적 사유’의 끝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 여정을 지켜볼 용의는 있다.

  저자의 인생과 더불어 중학교 이후 대학 입학시절까지 이어진 문학 서적들에 대한 유목, 학부시절의 과학에 대한 유목, 대학원 시절 이후 철학에 대한 유목이 연대기처럼 펼쳐진다. 물론 살아온 과정과 시기에 특히 주목하고 관심을 가진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나간 시기들이 있겠지만 저자의 경우는 그 이력과 독서의 과정이 재미있다. 단순히 다독가이거나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이름을 날린 명망가의 서재를 들여다 보는 호기심도 제외된다. ‘인간’을 주제로 철학을 ‘하는’ 한 인간의 방랑과 유목에 대한 고백을 진지하게 들어 볼 만하다.

  국어 교사인 아버지 덕에 문학과 동양 고전에 파묻혀 지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출발하는 이정우의 책읽기는 책을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유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는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읽기를 소개하는 저자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탐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 이정우와 나누는 대화의 시간들,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견해들, 잊고 있던 책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보는 즐거움, 읽지 않은 고전들을 이제라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까지 덤으로 얻는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나름의 방법과 틀을 갖추어 나가는 사람들의 방식을 넘겨다보는 일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나의 책읽기와 사유의 방식은 무엇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지향점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저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 독서를 통해 그저 나를 풀어놓고 자유롭게 유목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지적 희열과 사유의 즐거움을 책이 아닌 어느 곳에서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것을 찾는 순간, 러셀의 반어적 표현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철학자라고도 또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랜 시간 옛?유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유목이 특별히 유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사유가 흘러가는 대로 사유하고 글을 쓸 뿐이며, 그런 가로지르기의 사유, 유목의 사유가 내게는 오히려 더 편안하고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갈라놓은 범주들은 내게는 의미가 없다. 오직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라 관련되는 연구와 사유를 할 뿐이다. 내 학문은 다음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선택하지 말고 창조하라.’ - P. 285


06042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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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ptic 2006-10-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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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과 고통은 생물학적 속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이다. 단 한 번의 생이기 때문에 소중하면서도 극적이다. 특히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한 번은 병들고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이 절대 공평의 원리는 삶에 대한 비극성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한 확인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죽느냐, 하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느냐에 따라 그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축복받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죽음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이 ‘은유metaphor’로서 ‘질병illness’을 분석한 책이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이 책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과 묶여 합본으로 출판됐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쓰여진 글 두 편이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후 <타인의 고통>을 펴낸 손택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질병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주는 이미지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는 일관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사회 속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질병으로 고통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와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질병의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그 은유들은 점차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질병은 결핵과 암이다. 저자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극복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관찰과 사유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은 이유조차 감추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결핵’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후 그녀가 걸렸던 ‘암’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 책은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보여주는 문학적 에세이로 판단해야 한다. ‘은유’라는 말은 문학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은유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비유법이다. 손택은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은유라는 표현을 쓸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결한 정의,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내린 정의를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는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 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이다. P. -129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대표적 은유는 병의 원인에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병에 걸리는가에 대한 문제가 질병에 대한 은유의 시작이다. 앞서 말한대로 의학 지식이 부족하거나 병의 증상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그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이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치료를 넘어 주변 사람들과 죽음까지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남은 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지는 질병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환자들에게 다가온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선들, 예를 들어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병역거부자 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그 감염 경로와 치료 과정과 무관하게 널리 퍼져 있는 칼날같은 시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나와 무관하다는 안도감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문제다. 페스트처럼 제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를 넘는 죽음을 불러온 질병들에 대해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암의 정복 즉 질병의 정복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꿈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은유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넘어 선 고통을 받는 ‘질병들’을 주의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잔 손택이 보여준 ‘질병으로서의 은유’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더구나 10여년의 간격을 둔 두 편의 글이 시간을 뛰어 넘어 하나로 읽힌다.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책읽기도 재미있었다.


06042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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