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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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으로 박근혜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다. 다소 과격한 표현인가? ‘유신 공주’ 박근혜의 정체성부터 묻고 싶어지는 발언들이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대중은 바보인가? 대한민국의 체제 수호와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파수꾼 박근혜는 어떻게 현실 정치의 중앙에서 행세하고 있는가. 부끄러운 우리의 정치 현실의 단면을 보고 있는듯 하다. 보수과 진보, 우익과 좌익을 논하기 이전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이념 공방을 보면 대한민국을 뜨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문명국가 한국은 아직도 야만의 정서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는 사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문명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용인된 사상의 자유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군사적 특수성 때문이라는 위협은 이제 지나가던 개도 웃게 되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국가 보안법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헌법 19조, 20조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명시하고 있지만 사상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에 일부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헌법 37조 2항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 한하여 벌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어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언제쯤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반공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14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존 B. 베리(John Bagnell Bury, 1861-1927)의 <사상의 자유(A history of freedom of thought)>가 박홍규 교수에 의해 완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이 책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시대별로 사람의 생각을 가두고 억압했던 인류의 역사를 종교를 통한 사상 통제의 역사로 풀어내고 있다. 각 시대별로 사상의 자유를 위해 피흘렸던 선각자들의 이론과 저작을 통해 이성적 존재라고 믿었던 인간이 얼마나 긴 세월동안 야만의 시대를 겪어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중세를 암흑기라 했던 이유는 ‘교회의 영향력이 최고도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이성은 기독교가 쌓아올린 인간 정신의 감옥 안에 사슬로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는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와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배타성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이성을 억압해 왔으며 고통스런 역사속에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극복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이다.

  베리가 종교를 중심으로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나는 거의 전적으로 종교에서의 사상의 자유만을 고찰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본문 190페이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리의 우려대로 인류의 ‘사상의 자유’는 이데올로기라는 직격탄을 맞는다.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반공을 국시로 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지독한 사상 탄압과 맞물려 언론의 자유까지 유린되었다. 종교의 근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으며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와 사상의 자유가 없는 지구상의 특별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분당에 800억짜리 교회가 지어지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개신교 세계 50대 교회중 44개가 대한민국에 있으며, 세계 10대 교회 중 7개가 대한민국에 있다. 규모와 신도수로 특정 종교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한 특정 종교의 배타성이 인류 역사에서 초래했던 불행과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자행되었던 지난날은 이대로 묻혀 가는 것인가?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 존 밀턴(John Milton), 본문 120페이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에도 이와 동일한 항의가 등장했다. “관용이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 둘 모두 독재이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고 처한다.” - 본문 133페이지

  밀턴과 페인의 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 혹은 관용과 불관용을 논하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베리는 100년전에 설파했고 대부분의 문명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끝나버린 논쟁들을 우리는 여전히 유효한 갈등 요소로 감싸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해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학교를 상대로 외롭게 싸웠던 일,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로 매년 1천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 지금 현재 동국대 강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논란 등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의지했던 권위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호두껍질처럼 단단하게 나를 깜싸고 있던 암흑의 세월들을 난 이제 믿지 않는다. 그 첫 단추는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채워진다. 지금 우리의 초등 교육은 어떠한가? 베리의 걱정은 아직도 유효한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은 곧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에서 삶은 시작되고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촉발된다. 전도유망함의 제 1계명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진정한 행복을 배울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여 사상의 자유가 인류 진보의 원칙이라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각인시켜야만 하는데, 그러나 걱정스럽게도 이 일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초등교육 방식이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 274페이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라는 말은 전도유망함의 제1계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들은 바를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 정당하고 어떤 경우에 정당하지 않은가를 아이들 - 이제 막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된 - 에게 설명해 주는 것은 반드시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본문 275페이지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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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 반민주주의자에 대한 민주주의 재판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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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교 다닐 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배웠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철학자가 한 말이므로 무조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이 독재 정권의 통치 수단에 교묘히 이용됐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1995년에야 교과서에서 그 말이 사라졌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처라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화인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철학의 수호자로서 아테네인들에게 누명을 쓰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그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좀 더 공부하거나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일이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고 처음 주장하기 시작한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를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가 ‘이성’의 철학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철학의 아버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저자는 차근차근 조목조목 따져나가고 있다.

  최근 많은 교양인(?)들을 위해 백과사전 요약식의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바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이다. 저자는 우선 이 책을 인용하며 슈바니츠가 유일하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대화법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도 아니고 막가파식 대화법으로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추궁하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 늘어지는 대화법을 통해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 하나를 깨우쳐 줄 뿐이라는 것이다. 알든 모르든 이런 놈을 만나면 말을 하지 않거나 주먹질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소크라테스 철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물론 비판할 만한 철학도 없는 사상가가 소크라테스라고 말한다. 글 한줄, 책 한권 남기지 않은 철학자를 제자 플라톤의 저술에 의해서 되살려내고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철인 정치를 주장한 반민주주의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에 의해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 문제는 두 사람의 저서를 통해 확인하면 될 문제고 이 책에서는 크세노폰의 <회상>, <변론>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등이 주된 참고 문헌이 된다. 이외에도 그리스의 희곡들과 그리스 민주주의에 관한 투키디데스의 <전쟁사>, 헤로도토스의 <역사>등 충실한 자료 분석을 통해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의자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이다. 그의 철학과 죽음에 대한 오해가 2천 4백년이 지나도 바로 잡히지 않고 비민주적인 철학과 철학자들에 의해 추앙되어 온 사실을 비판한다. 그래서 저자는 직접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고 소크라테스가 재판받은 장소를 확인하며 그리스의 하늘과 땅과 그 곳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한 인문주의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바로 알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그의 선언대로 소크라테스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는 의미의 선언문으로 읽을 수 있다.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역시 그가 살았던 당시의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 재판이 마치 정치적인 희생양을 만든 재판인 양 다루어져 왔다. (본문 42페이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저자는 소크라테스 재판의 의미를 면밀히 검토한 후 가장 많은 부분에 그리스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검증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한 분석과 부당함을 제시한 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파탄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맺는다.

  책 전체의 논리성은 저자 나름의 방식임으로 문제 삼을 것이 없고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통념을 완전히 되엎을 만한 이러한 주장과 알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들을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에 대한 저자 개인의 경험과 반감은 이 책과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법제도에서 드러나는 전문 재판관의 문제를 그리스의 민중재판 과정을 통해 보완할 수 있으며 - 이를테면 배심원 제도나 참심제도 -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방법론까지 폭넓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전체에 밑줄을 긋는다.

  비판이라는 말은 가치 중립어이다. 비난과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건전한 비판의식과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사상의 자유가 밑바탕이 된 사회에서 논의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제 좀 더 폭넓은 시각과 주장들이 나와 줄 것을 믿는다. 어렵지 않게 소크라테스에게 한발 다가섰다가 그의 실체를 확인하고 두 발 물러서게 만든 재미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박홍규의 교수의 한마디가 이 책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같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 주눅(?) 들었던 많은 사람들, 쓸데없는 존경심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민주주의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언행을 한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행위는 응당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언행 때문에 그가 고발당하고 사형에 처해진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그리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최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횡세서 그나마 차선의 방법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푼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에 여전히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반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를 적대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는 옳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본문 80)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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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즐거움 - 문화적 교양인이 되기 위한 20가지 키워드
박홍규 외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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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 중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육체적 공복감을 채우고 나면 정신적 공복을 채우기 위해 목말라 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면면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 통시적 관점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면서 공시적 관점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예술이 걸어온 길들을 더듬고 나와의 관계를 확인 일, 그것이 교양이 아닐까?

  그러나 교양이 문화 일반에 대한 얄팍한 백과사전식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습득하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그것을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소화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각 분야의 발전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자고 일어나면 묵은 정보와 지식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로 지식과 정보에 목말라하며 속도에 대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이런 시대에 교양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북하우스에서 나온 <교양의 즐거움>은 현학 취미가 아닌 사람들에게 교양을 위한 작은 지침서 혹은 안내서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잡다한 정보의 지식의 나열을 위한 잡문들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한길사에서 2003년에 나온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이라는 책은 53명의 필자가 철학과 인문학, 사회학과 현대 사회의 쟁점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그 분야의 권위자들과 대표 저작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무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으로 기가 질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칼날같은 시선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듯 하지만 그 많은 쟁점들을 기억하거나 다시 돌아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교양의 즐거움>은 오히려 작은 책이다. 2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학, 철학, 미술, 사진, 만화, 사진, 건축, 음악, 영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혼란스럽거나 잡다하다는 느낌이 없다. 우리 나라 최고의 필력을 자랑한다는 필자들의 소개답게 주제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월간 <신동아> 2003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을 새로 손보았다는 이 책은 편집장의 주문대로 ‘아카데믹’과 ‘저널리스틱’의 중간쯤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는 면에서 성공한듯 싶다. 아무데서나 접할 수 있는 흥미위주의 가벼운 내용은 넘어서면서도 지나치게 학문적인 용어와 접근을 배제하여 일반인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항목별로 그 분야의 역사와 기본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일반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적 상황이다. 외국의 번역서는 그야말로 교양으로 그칠 수 있겠으나 이 책은 현재 우리 상황에 접목되고 있는, 혹은 활발하게 논의되거나 진행되고 있는 문제들까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국내 학자들의 글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어떤 책이든 한 권의 분량에 20개의 주제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량의 문제는 감수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내서와 참고서를 통해 각 분야의 길잡이 노릇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은 후에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잡다한 지식과 쓸데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채워 그 효용 가치를 논하는 일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하나의 지식과 교양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현실 생황에 적용된다는 문제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교양은 실용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으나 사회를 보는 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필요 조건이 될 것이라는 정도로 교양을 정의하면 어떨까 싶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그 준비 단계나 가벼운 몸풀기 정도에 값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선한 야채로 에피타이저를 즐기듯이 읽기에 가장 적합한 책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선택과 집중은 물론 각자의 몫이지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일도 때로는 중요한 일이다. 고개를 너무 높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는 일도 문제지만.


20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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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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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급 생활자의 세금 부담 증가에 대한 예산안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간의 형평성 문제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세금의 본질적인 문제와 국가 차원의 세수 부족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확실한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과 방만하게 운영되는 공기업, 공룡처럼 거대한 힘으로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버티고 있는한 문제는 절대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쟁점이 아니라 몇 백년간 이어져 온 지루하고 식상한 논의다. 다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철학이 결여된 위정자들에게 분노한 백성들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이기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텨온 것이다.


국가는 도덕의 힘으로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기에 필요하게 된 하나의 형태다. 여기에 또한 국가의 의도와 목적인 자유와 안전이 있다. - 상식, P. 25


  18세기 후반 인류 역사상 기억될 만한 두 가지 사건을 꼽으라면 미국의 독립(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페인은 이 두 가지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상식>을 썼다. 팜플릿 형태의 글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뚜렷히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했던 버크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진 <인권>은 1, 2부로 1791년과 1792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출판 당시 수만부가 팔릴만큼 주목을 끌었으며 페인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출판이 영구 금지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상식>과 <인권> 두 권의 합본 형태로 박홍규가 다시 번역한 <상식, 인권>은 그의 설명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작 중의 하나로 평가 받을만 하다. 진보니 개혁이니 현실 정치에서는 되먹지 못한 소리들만 개짖는 소리처럼 처량하게 울려 퍼진다. 이념과 갈등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가장 상식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그들에겐 관심이 없는듯 하다. 아니, 관심이 있어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그것들을 찾아내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국가와 사회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가 군주국이었음을 감안할 때 페인의 팜플릿이 가지는 혁명적 발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놀랄만한 일이다.


인간의 평등권이라는 찬란하고 거룩한 권리는(그 기원이 인간의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생존한 개개인에게마나 관련된 것이 아니라, 뒤를 잇는 사람들의 세대와도 관련된다. 각 세대는 그 앞서간 세대와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그와 같은 원칙에서 각 개인은 그 동시대인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 인권 1부, P. 134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겨우 마칠 정도의 정규 교육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는 페인의 저작은 그의 사상과 당시 역사와 사회를 관통하는 지적 능력을 통해 볼 때 엄청난 독서와 사색을 통한 반성적 사고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사고 방식과 국가와 인권의 문제를 이렇게 통쾌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적 관점에서 개혁과 혁명을 논하고 그 태도를 살펴보는 책은 이제 차고 넘친다. 그러나 페인이 살던 18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루소같은 사상가를 통해 사회계약론과 같은 새로운 사상들이나 지적 성과물이 제시되었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현실 정치의 문제를, 특히 미국과 영국의 비교를 통해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 나타난 정신을 이렇게 정확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는 저작은 찾기 힘들 것이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논쟁적 문체가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빛나는 정신을 가릴 수는 없다.


자연권은 인간이 존재하는 데 따르는 권리다. 이런 권리에는 모든 지적 권리와 정신적 권리, 그리고 타인의 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모두 포함된다. - 인권 1부, P. 138


  인권은 자연권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인권이 자연권이었던 시기가 있었을까?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가치나 목적보다도 우선시 되어야할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이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인의 사상과 주장이 유토피아적 환상과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얼마든지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개혁의 권리는 근본적 성격에서 국민에게 있고, 그 합헌적 방법은 그 목적을 위해 선출된 전국적 집회(공회)에 의해 개혁이 추진돼야 했다. 타락한 기관이 스스로 개혁한다는 생각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 인권 1부, P. 146


  그러므로 언제든 국민들은 정부와 정치를 개혁할 합법적 권리가 있다. 정치개혁은 주체는 그래서 언제든 국민의 몫이지 정치가의 몫이 아니다. 잘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살기 좋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토대는 대다수 국민들의 몫이다. 일부 부유층과 권력이 자기 것인양 착각하는 기득권층의 논리가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의 목소리가 국가와 정치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올바른 사회라는 이야기다.


정치의 세계에서 개혁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다.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혁명의 시대의 특징이다. - 인권 1부, P. 217


자유는 지구 어디서나 박해를 받아왔고, 이성은 반역으로 간주되었으며, 공포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했다. - 인권 2부, P. 230


  개혁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념의 차이를 떠나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신체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을 짚어내자면 끝이 없다. 부정적 사고가 아니라 건전하고 비판적 사고는 끊임없는 이성의 계발과 차가운 자기 반성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 인권 2부, P. 247


헌법은 국가의 소산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헌법 없는 국가는 권리 없는 권력에 불과하다. - 인권 2부, P. 269


  인간의 위대함은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데 있다고 믿는다. 고전속에 파묻힌 케케묵은 망령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이 뼈아픈 진리와 선언들을 되새겨 둘 만하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유를 바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순히 달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존재하는 금언으로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불행과의 접촉이 연민의 본질이다. 이 주제를 거론하면서 나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승패를 초월한 고결한 긍지로써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 - 인권 2부, P. 313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에 대한 평가는 각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날 수 있는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은 잡다한 논의를 뒤로 한 채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정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역작이다. 나와 국가, 나와 정치와의 관계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 옮긴이 박홍규는 페인을 ‘세계의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사상과 삶은 숭고하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페인의 말은 “자유가 있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프랭클린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나, 바로 그 말이 단순한 미국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의 자유주의자인 페인의 삶과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옮긴이 해설, P. 387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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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은 현재의 의미망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한다. 단절된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고전을 읽고 음미하며 재해석하는 일은 헛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고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 끊임없이 지금 현재를 재발견하는 것이 고전이 주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중엽 근대의 이행기에 두드러진 저작중의 하나가 J. S. 밀의 <자유론On liberty>이다. 인류 문화사에서 근대의 기점론은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를 거쳐 기독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혹은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근대의 중심에는 ‘개인’이 서 있다. 독립적 개체로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문화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밀의 자유론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책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유론>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설과 사상과 언론의 자유,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과 개인에 대한 사회 권위의 한계 그리고 원리의 적용이다. 각 장에서 밀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자유다. 자유가 지니는 의미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은 물론 특히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자유’의 본질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은 헌법과 법률로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서설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지배자가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한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 P. 12

  밀이 생각했던 자유의 본질은 다름 아닌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면 침해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출발하고 있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제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자유론’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밀은 이어서 얘기한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일은 대중과는 언제나 이해가 상반되는 통치자에 대항하는 수단이었으며, 또 그렇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통치자가 국민과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의 이해와 의지는 국민의 이해와 의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 P. 14

  이후 전개되는 언론과 사상의 전개에서 밀은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능히 시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과연 인간이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잘못을 시정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정당한 것인가?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개인의 사회 경제적 위치에 따라 대립과 갈등이 생기고 통합된 논의나 지향점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배치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밀은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지 궁금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책이 있을까? 어떤 논의나 주장도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는 ‘진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상대적 가치 속에서 평가되어야하는 것이 ‘진리’라는 이름의 숙명이다.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자유론’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그렇다면 국가나 사회의 압제와 타인의 관계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해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근본적인 관계 설정과 범위와 한계를 고민하고 싶다면 <자유론>은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한 국가의 가치는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의 가치에 있으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인생처럼 책에 나와 있는대로 혹은 보다 가치 있는 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큰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보다 소중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을을 가져볼 뿐이다. 그렇지 않을 때 대중은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래서 밀은 이렇게 책을 맺고 있다.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이다. 이들 개개인의 정신적 확대나 향상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것을 뒤로 제쳐두고 세부적이고 사소한 사무상의 행정적 수완이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국가, 또는 국민을 위축시켜서 그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국가는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어떠한 위대한 일도 결코 이룩하지 못한다.
  그리고 국가가 온갖 희생을 다하여 이룩해 놓은 완전한 기구라 할지라도 그것의 원활한 운영을 기한다면 국가가 배제한 구성원의 힘 부족으로 인해 아무러너 도움도 되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 P. 278



200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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