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⑦

 

7. 그들 각자의 순수 (1) : 메이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


   1921년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던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흑인뿐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인종주의가 클라이맥스에 달했던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황인종의 이민이 홍수를 이루자 미국인들은 이것을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 선포한다. 1882년에는 중국인의 이민을 합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남부 유럽인들도 ‘반몽고인’이기 때문에 중국인과 똑같은 법을 적용해 이민을 금지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백인들은 황인종의 카테고리에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 피부색이 옅은 흑인, 유태인, 폴란드 인, 헝가리 인, 이탈리아 인, 아일랜드 인까지 포괄하여 ‘다인종사회의 위협’을 가시화했다.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던 극우 비밀결사 KKK가 활개를 치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미국 앵글로색슨족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백인의 피가 외국인의 피와 섞여 ‘저열한 잡종(!)’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혼혈아란 ‘무정형적이며 형태가 없는 흐릿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앵글로색슨의 피는 ‘친절하고 섬세한 피’라는 둥, 스페인 계·멕시코 계·포르투갈 계의 피는 ‘야만적이고 타락한 피’라는 둥, 그 잔혹한 배제와 추방의 수사학은 실로 기상천외하기 이를 데 없었다. 1)

   『순수의 시대』는 ‘우리’라 불릴 수 있는 내집단(in-gruop)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은밀한 배제와 노골적인 혐오감을 그린 우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앵글로색슨 상류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상징적 마스코트가 바로 메이 웰렌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관능적이며 예술을 사랑하고 독창적이며 반사회적인 엘렌과는 달리, 메이는 “경험이나 융통성, 판단의 자유 등을 갖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훈련된” 양가집 규수다. 메이는 남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천연두에나 걸리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메이의 순수는 곧 ‘다인종 시대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백인 상류층의 공포와 불안을 상징한다. 메이가 보기에 엘렌이 불행해진 이유는 그녀가 ‘외국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엘렌의 결혼은 가문의 혈통적 순수를 위협하는 ‘잡혼(雜婚)’이었던 것이다.
   영화 <순수의 시대>는 ‘메이의 순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뉴랜드와 엘렌의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메이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사랑의 암호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엘렌은 뉴랜드처럼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뉴랜드가 엘렌에게 사랑을 고백하자마자 엘렌은 말한다.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뉴랜드는 처음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렌의 모순적 어법에 스민, 치유 불가능한 슬픔의 메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렌이 뉴랜드의 첫 키스를 받아들이자마자 메이에게서 급작스런 편지가 도착한다. “드디어 결혼을 승낙받았어. 꼭 한 달 후야. 아처에게도 전보를 칠 거야.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사촌 메이 보냄.”  

   뉴랜드의 사랑은 엘렌의 인내나 메이의 의지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는 며칠 전에 메이에게 ‘빨리 결혼을 앞당기자’고 졸랐다가, 오늘은 엘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오늘 날아온 전보의 내용에 따라 다시 메이와 결혼을 수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그는 엘렌과 결혼함으로써 가문의 영광을 훼손할 용기도 없었고, 메이와 결혼하여 엘렌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접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메이는 뉴랜드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의 변화가 있음을 직감하고 결혼을 앞당긴 것이다. 메이와 뉴랜드는 드디어 결혼한다. 엘렌은 마치 모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초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떠나며 결혼선물을 남긴다. “아처는 전통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자기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아내를 애써 해방시킬 필요가 없었다.”
   메이의 순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혈통과 취향의 커뮤니티 내에서는 한없이 친절하지만(그녀는 뉴욕 사교계 내에서는 최고의 현모양처다), 그 커뮤니티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교란시키는 존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잔인하다. 말하자면 메이는 부리는 하녀에게 헌옷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녀와 친구가 될 수는 없으며, 우연히 마주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 수는 있어도 거지와 말을 섞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준수되는 게임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메이에게 엘렌은 그녀의 커뮤니티, 특히 미래의 가정을 위협하는 존재였고, 밍고트 가문의 순수를 더럽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녀는 이제 대놓고 엘렌의 ‘행실’을 문제삼기 시작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메이는 남편에게 엘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엘렌은 뉴욕과 집은 내팽개쳐두고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려 다닌대요. 엘렌이 말도 안 되는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해버릴까 봐 미도라 이모가 엘렌을 지키고 있다지 뭐예요. 무엇보다도 엘렌은 왜 남편과 잘 지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뉴랜드는 전에 없이 준엄하고 가혹하게 느껴지는 메이의 태도에 경악한다.
   “당신이 잔인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잔인하다고요?”
   “악마일지라도 지옥에 있는 사람이 행복할 거라고 말하진 않아.”
   메이는 그 투명한 순수로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차분하게 대꾸한다.
   “그러게 외국으로 시집가지 말았어야죠.”
   메이의 눈에 비친 엘렌은 ‘외국에 시집간 중뿔난 사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메이의 순수는 취향의 공동체 내부의 위생상태를 순도 99.99%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자’라는 오염물질을 여과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순수다. 메이는 신혼여행 기간 동안 유럽에 있을 때 유럽 귀족들도 놀랄만한 화려한 의상을 입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난 유럽인들이 우리를 보고 야만인들처럼 옷을 입는다고 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녀가 말하는 야만인은 정확히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이었다. 인디언은 야만인이고 자신은 문명인이라는 식의 태도는 명백히 인종주의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뉴욕 사교계의 순수성’을 대변하는 메이의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메이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다. 그것은 “포카혼타스가 격분할지도 모르는 경멸적인 태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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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품이 그리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허정애, '인종주의 우화로서의 <순수의 시대>', [영미어문학] 56호, 1999년, 65~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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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러너 2009-08-0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대 초기 조선에서도 '중국인'과 결혼하는 조선인들에게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곤 했지요. '피'의 순수는, 일부에서는 여전히 진행중...

예인 2009-08-0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혈통주의, 정말 갑갑합니다.
다른 집안 사람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자기 집안 사람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치시절에 게르만족은 이유없이 우월하고
유태인은 이유없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한번 만나보십시오.
오만정이 다 떨어집니다.

sotkfkd 2009-09-1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⑥

 

6. 아비투스의 딜레마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2>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꿈쩍하지 않는 육체’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결코 돕지 않는 남편들. 아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가상하지만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육체의 무관심’이야말로 갈등의 씨앗이다. ‘작업’ 중인 여자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매너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여성 동료에게는 ‘커피나 타 와, 프림 둘 설탕 하나!’라고 외치는 남성들. 뮤지컬 <헤드윅>에 열광하면서도 막상 실제 트렌스젠더와 마주치면 쭈뼛쭈뼛 움츠러드는 사람들.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막상 아이비리그 출신을 보면 ‘역시 달라’라고 느끼며 몹시 우러러 보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무엇보다도 ‘몸의 철학’이다. 육체에 각인되어 있는 수많은 관습과 욕망의 문신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천 년 동안 투쟁하며 합의해온 육체의 행동 패턴. 아비투스를 바꾸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이유는 그것이 성문화된 법전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의 명령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습관을 숨길 수 없는 ‘몸’이지 언제든 화려하게 분장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닌 셈이다. 
   <순수의 시대>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몸과 자꾸만 변해가는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하는 인물은 뉴랜드 아처다. 엘렌은 뉴랜드의 인생에 있어 취향과 욕망 사이에 치명적인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취향의 공동체에서는 메이야말로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번도 목격한 적 없는 종류의 인간, 자신이 살아온 취향의 공동체와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한 엘렌을 만나자마자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잔심부름하는 하녀가 심부름 나갈 때 추울까봐 자신의 오페라 망토를 직접 입혀주는 엘렌, 모두가 수군거리며 욕하는 유명인사 버포트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엘렌. 뉴랜드는 자신도 모르게 꽃가게에서 한번도 눈독들인 적 없는 노란 장미를 사서 엘렌에게 선물하는가 하면, 엘렌이 직접 불 붙여준 담배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녀와 태연하게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비난하는 여동생 앞에서 그녀를 열정적으로 변호하기도 한다. “그녀 덕분에 밴 더 루이든 가문의 파티가 그 갑갑한 장례식 분위기를 떨쳐버렸다고!”
   그는 자신이 마치 엘렌 올란스카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선언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자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이상에 따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이의 어머니 웰렌드 부인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건 외국인들이 우리에 대해 꾸며 낸 희한한 이야기일 뿐이지.” 엘렌의 출현으로 인해 그는 그의 인생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취향의 올가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허용하지 않던 유럽을 떠나 ‘자유의 땅’ 미국으로 돌아온 엘렌의 낭만적 이상은 끔찍한 허상이었음이 밝혀진다.  

   뉴랜드는 그녀가 더 이상 추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의 이혼을 만류한다. 그러나 엘렌의 이혼을 막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남자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대고 ‘품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을 이야기한 첫번째 여자였다. 그의 합리적 이성은 ‘가문의 품위 유지를 위해 엘렌의 이혼을 막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의 육체는 체면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거리낌 없는 웃음과 눈물, 거짓 없는 몸짓과 사랑스런 표정에 이끌렸다. 이 취향과 욕망의 균열 속에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청난 일탈을 기획한다. 맨슨 후작부인이 엘렌의 남편이 지닌 엄청난 재력을 부러워하며 그녀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자, 뉴랜드는 엘렌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 애가 어떤 것들을 포기했는지 아시겠어요? 소파 위에 있는 저 장미, 저런 것이 니스에 있는 남편의 으리으리한 정원 온실 안에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구요. 보석은 또 어떻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진주며 소비에스키 에메랄드, 검은 담비털 하며…….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팽개치다니! 그림이며 귀한 가구들, 음악, 지적인 대화……. 아, 아처 씨, 미안한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건 꿈도 못 꾸어 보았을 걸요! 그앤 그 모든 것을 맘껏 누렸다우. 모두 그 애를 여왕처럼 떠받들어주었지. 맙소사! 그애 초상화가 아홉 차례나 그려졌다고요. 유럽 최고의 화가들이 그애의 초상을 그리는 특권을 허락해달라고 애걸했지.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 깊이 뉘우치고 있는데도?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03쪽.
 
   

   이렇듯 뉴욕의 귀족들은 ‘도도하고 고집 센’ 엘렌이 버리고 온 탐스러운 문화자본에 침을 흘릴 뿐, 엘렌이 결혼생활 내내 감내한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뉴랜드의 눈에는 그제야 엘렌 올레스카가 이제 막 지옥의 불길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뉴랜드는 엘렌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뉴랜드는 엘렌이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작부인에게 격노하여 품위 따윈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다. “차라리 그녀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낫겠어요!” 뉴랜드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던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감정의 파문을. 처음으로, 몸의 속삭임에 마음이 굴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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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를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불가에서 말하는 마음을 수행하는 최고의 경지는 마음이 실천과 같아야 되는 경지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유가에서도 군자는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입니다. 인격의 최고의 경지이지요.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를 관습과 욕망이 몸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과 아비투스를 바꾸는 것이 진정한 실천이라는 말에 부르디외가 존경스럽게 보입니다.

블레이드러너 2009-08-04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랑의 딜레마. 저같은 범인은 몸과 마음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게 우리네 사는 모습이겠지요. 신의 경지가 아닌 다음에야.

sotkfkd 2009-09-1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요구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⑤

 

5. 아비투스의 딜레마 -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1>


   영화 <프리티 우먼>은 거리의 창녀가 3일 만에 초특급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경이로운 속성 엘리트 코스를 보여준다. 그녀가 부르주아들의 천국으로 입성하는 티켓은 바로 ‘신용카드’였다. 루이스(리처드 기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고용’한다. 처음에는 밤의 파트너로, 나중에는 사교모임에 대동할 파트너로.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저녁 약속에 어울릴 만한 ‘품위 있는’ 의상을 사 입고 오라며 현금을 두둑이 건네지만, 싸구려 탱크탑을 걸친 비비안의 ‘행색’을 본 명품매장 직원은 비비안을 냉대한다. “당신에게 맞는 옷은 여기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루이스는 비비안을 직접 데려가 최고급 명품 매장의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사람에겐 불친절하지만 신용카드에게는 모두 친절하지.” 명품매장이 즐비한 로데오 거리에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 경쾌하게 활보하는 비비안은 이제 더 이상 거리의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친구는 몰라보게 변한 비비안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멋지다! 거리 출신 티는 하나도 안 나!” 비비안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돈만 있으면 쉬운 일이야.” 비비안이 부르주아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했던 테이블 매너와 우아한 자태는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티 드레스를 입고 전용기까지 타고 날아가 오페라를 본다 해도 그녀가 ‘그들만의 리그’에 진정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예절 바른 냉대’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널 창녀 취급한 적 없어.” 그는 그녀의 면전에서 ‘창녀’라는 단어를 내뱉음으로써 뜻하지 않게 그녀를 모욕하고 만다. 비비안은 쓸쓸하게 독백한다. “방금 그랬잖아요.” 그의 ‘뜻하지 않음’ 속에서, 즉 그의 무의식 속에서 그는 한 번도 그녀가 창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티 우먼>은 결국 비비안의 동화 같은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이 ‘양극화된 세계’의 갈등을 달콤하게 은폐한다. <순수의 시대>는 이보다 훨씬 현실주의적인 영화다. 엘렌의 1차적 아비투스는 뉴욕의 상류층에서 배태된 것이지만, 유럽에서의 자유분방한 문화생활과 결혼생활의 산전수전을 통해 습득한 2차적 아비투스는 달랐다. 엘렌의 취향과 행동 속에서 이제는 어린 시절 습득한 1차적 아비투스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것 자체가 비관습적이지만(unconventional), 남성에게 맨손으로 먼저 악수를 청한다거나 당당하게 맞담배를 피우는 것,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등등은 사사건건 ‘그들만의 리그’가 오매불망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혼을 향해 공동체가 내린 판결은 그것이 ‘불쾌하다(unpleasant)’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이혼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양가는 ‘소문이 무성한, 이혼한 여자’가 존재하는 집안의 일원이 되기를 한결같이 거부했던 것이다.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 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뉴스거리가 되고,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마다 버전-업되어 ‘욕먹으면서도’ 세계적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이탈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끼리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노파심은 이 ‘아비투스의 충돌’을 되도록이면 피해가라는 현명한(?) 처세술일까. 뉴랜드가 엘렌에게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맨손과 담배와 과감한 의상에 매번 화들짝 놀라는 것은 그가 습득해온 취향이 그토록 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단지 제도나 교육을 통해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식’을 통한 학습효과를 넘어 ‘육체’에 각인된 무의식과 몸에 밴 습관이기에 더더욱 ‘포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취향은 노골적으로 ‘끼리끼리임’을 확인하기에는 왠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현대인이 외모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낯선 타인의 계급을 판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련되고 우회적인 암호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중매자라고. 취향이라는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나는 남녀는 각자 자라온 아비투스의 ‘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현대인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은 양,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 ‘천생연분’은 기실 우리의 치밀한 무의식의 용의주도한 주판알 굴리기를 통해 계산된 ‘아비투스의 연합’이 아닐까.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는 ‘나의 취향을 거스르는 사람과는 상대하기 싫다’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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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어요 2009-07-3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식하지 않아도 거부감을 느끼고 꺼리게 되는 관계들이 있는 걸 보면- 순수의 시대에서 말하는 것은 귀족사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잣대와 편견을 대변하는 듯 하네요. 누구나 저마다 그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듯. 대신 이 글을 읽으면서 자각은 할 수 있게 되었네요.

블레이드러너 2009-08-0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암호를 풀 수 있는 힘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인 2009-08-0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 대해 순수의 시대와 귀여운 여인은 좋은 사례가 되는군요. 말 그대로 필로 시네마가 유감없이 실력이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는 마르크스적 계급적대의 충돌보다 아비투스라는 보이지 않는 계급적대를 포함한 사회적 적대가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소외를 더 심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취향과 인격, 습관까지 미세한 정서들의 균열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통해 잘 표현이 되었네요. 마르크스적 계급적대가 몰적인 선분의 충돌이라면 아비투스는 계급적대와 사회적 적대의 분자적인 선분이라고 하면 들뢰즈식의 아비투스에 대한 이해가 될 듯 합니다. 한편의 훌륭한 영화읽기였습니다. 건필하세요. ~~

예인 2009-08-0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관점에서 계급과 아비투스는 그 근저에 식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식욕은 구별짖기, 공격욕동으로 나아가는 것 같고 프로이트적으로 해석을 하면 그 적대 속에서도 짝짖기 하려는 본능인 성욕동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편의 영화를 식욕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 프로이트적 성욕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프로이트적으로 해석을 했는데... 그러면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성욕과 식욕의 억압이 문화라는 꿈으로써 상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한 쪽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네요. 영화라는 장소가 인간의 무의식이 상영되는 장소거든요. 식욕,성욕,수면욕, 인간의 3대 욕구이지요. ~~

sotkfkd 2009-09-1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부르디외며 들뢰즈(댓글)까지 오랜만에 읽게 되는 이름들이어서 참 반갑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④

 

4.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3>


   메이의 금욕주의는 약혼자인 뉴랜드마저 답답하게 한다. 뉴랜드는 곧 결혼할 사이임에도 키스 한 번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사교계의 분위기에 숨막혀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접은 종이에서 오려낸 인형들처럼 서로 닮았소. 판박이 벽지 무늬처럼 똑같지.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새삼 놀랄 것이 있겠소?” 메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요?” 뉴랜드가 왜 좀더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항변하자 메이는 그녀 특유의 순백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주인공들처럼 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렌을 통해 자유의 은밀한 속살을 엿본 아처는 메이를 다그친다. “왜 안 되지?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메이는 약혼자의 평소와 달리 집요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 당신과 논쟁을 할 만큼 영리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런 건 좀…… 천박해요, 그렇잖아요?” 메이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 그것은 ‘천박하게’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솔직함이었던 것이다. 메이가 보기에 그런 ‘천박한’ 사랑의 도피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나 벌이는 작태였던 것이다.

   메이의 주요 의상과 장신구의 특징은 주로 순백색을 위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메이의 티없이 희고 고운 피부와 절제된 순백의 드레스, 시리도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진주목걸이, 뉴랜드가 그녀에게 매일 아침 선물하는(!) 희디흰 백합. 이 모든 것은 뉴욕 상류층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순수’의 미장센이다. 온몸을 ‘순결’이라는 이름의 벽돌로 무장한 듯한 메이의 빈틈없는 아름다움은 ‘도대체 그녀에게 악의라는 것이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숨 막히게 압도적이다.
   한편 엘렌은 붉은색을 위주로 한 정열적인 드레스와 열정을 상징하는 노란 장미로, 메이의 순백색 코디에 눈이 먼 아처의 눈을 어지럽힌다. 메이가 언제든 ‘나의 순수를 위협하는 그 어떤 타자라도 추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극도의 방어적 캐릭터를 순백의 코디네이션으로 은폐하는 반면, 엘렌은 의상 자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뉴랜드는 그녀들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는 노란 장미를 발견해냈다. 노을빛을 닮은 샛노란 장미는 이제껏 처음이었다. 처음엔 백합 대신 메이에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아름다움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정열, 그것이 바로 엘렌만이 가진, 뉴욕의 귀족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관능적 아름다움이었다. 절제와 품위, 금욕과 순결을 숭배하는 밍고트 가문의 집단적 아비투스와는 아울리지 않는. 

   아직 엘렌은 자신이 처한 곤경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누가 뭐라 해도 뉴욕은 그녀의 고향이었기에 엘렌은 아무런 의심 없이 다시 그들의 커뮤니티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어두운 과거를 떨쳐버리고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뉴랜드는 그녀가 이혼 때문에 얻을 엄청난 불이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노예처럼 가둬 사육하는 잔인한 남편을 피해 고향으로 달아났지만, 뉴랜드가 보기에 고향만큼 위험한 곳은 없었다. 그녀의 이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온갖 추문의 굴레를 씌워 협박할 사람들도 고향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엘렌은 해맑은 얼굴로 말한다. “이젠 모두 털어버리고 완전한 미국인이 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그러나 뉴랜드는 알고 있다. 미국인, 게다가 뉴욕의 귀족이 되는 일은 ‘돌아온 탕아’ 엘렌에게 너무 어려운 도전임을. 아처는 그 모든 재산과 유럽에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왜 이혼을 택하려 하는지 묻는다. 엘렌은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대답한다. “자유를 얻잖아요.” 뉴랜드는 왠지 그녀가 말하는 자유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관능의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고고한 귀족가문의 규수들만을 상대했던 뉴랜드에게 엘렌은 숨길 수 없는 이국적 매혹으로 다가온 것이다. 엘렌이 원하는 자유는 뉴랜드가 즐겨보는 머나먼 나라 일본의 판화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었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방의 세계처럼 불가해한 판타지였다.

   아직 엘렌은 알지 못한다. 그토록 심플한 자유를 얻기 위해 그녀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정의롭고 낭만적이며 보기 드물게 여성친화적인 뉴랜드 아처는 그녀를 돕고 싶다. 그러나 그 또한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물들어 있는 뉴욕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오랜 시간 그들만의 생활방식이 만들어낸 암묵적 규약이며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을 넘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육체에 각인된 것임을. 아비투스는 개인이 그 메카니즘을 인식하지 못할 때 더욱 선명하게 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가 매순간 부딪히는 아주 사소한 소비의 선택조차도 우리를 조각해온 집단적 아비투스의 보이지 않는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말한다.

   
  개인과 집단을 둘러싸고 있는 집, 가구, 그림, 책, 자동차, 술, 담배, 향수, 옷 등과 같은 특성들 전체와 스포츠, 게임, 문화적 여가활동 등을 통해 탁월함을 드러내는 실천 속에서 체계성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모든 실천의 발생원리이자 통일원리인 아비투스의 총괄적인 통일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 부르디외, 최종철 역, <구별짓기 上>, 새물결, 2005, 316쪽.
 
   

   엘렌이 그토록 꿈꾸는 자유는 밍고트 가와 아처 가를 비롯한 뉴욕 상류층의 가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이물질이었던 것이다. 피범벅이 된 육체를 심상하게 노출시키는 갱스터 무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조차 <순수의 시대>가 얼마나 무서운 영화인지를 스스로 인정했다. 흔적 없이 존재를 잠식하는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을 그려낸 <순수의 시대>.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가 그가 감독한 어떤 영화보다 ‘잔인한 영화’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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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30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비투스, 문화적 구별짖기, 특히 미국은 상류계층의 문화란게 따로 있어서 계층간의 구별짖기가 엄격하다고 합니다. 순수의 시대가 그런 아비투스를 그린 영화군요.

블레이드러너 2009-08-01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잔인한 영화"이고, 잔인한 삶이지만, 우리는 그 삶을 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는 것. 저는 그래요^^* 어떻게 하면 그 욕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요ㅠㅠ

sotkfkd 2009-09-13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한다. '작태'라고 못을 박을 수 있는 맨 처음의 경계선은 무엇일까?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③

 

3.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순수의 시대>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 그들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의 유행을 원시사회의 토템만큼이나 숭배하고, 유럽의 파티 매너나 테이블 세팅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탈출했으면서도 ‘앙시앙 레짐’ 시기의 유럽보다 오히려 악랄한, 원본보다 더 징글징글한 복제품 귀족사회를 구축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뉴랜드 아처 또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취향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파리 귀족의 저택을 본뜬 건물 외관과 인테리어를 숭배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의 가구와 나폴레옹의 뛰를리 궁전의 유품에 둘러싸여 여왕처럼 군림하는 삶을 동경했다.  

   메이와 뉴랜드가 속한 귀족사회는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오페라를 보러 간다는 ‘행위’ 자체에 혁혁한 의미를 부여한다. 막상 오페라 관람 중에는 남들 ‘뒷담화’나 일삼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예술을 즐기는 척’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예술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뉴욕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하며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처마저도 ‘개인’이 아니라 ‘상류층’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는 그들의 집단적 아비투스를 대변한다.

   
  뉴랜드 아처에게 ‘취향’에 대한 모욕보다 끔찍한 것은 거의 없었다. 취향은 ‘예법’조차도 거기 비하면 단지 외적인 표현이며 부차적인 지위에 불과할 정도로 손에 닿지 않을 신성한 가치였다. 올렌스카 부인의 창백하고 진지한 얼굴은 지금 상황이나 그녀의 불행한 처지와 잘 맞아떨어져 그의 상상력에 호소했다. 그러나 터커(17~18세기 여성들이 걸친, 목에 걸어 가슴에서 합친 마직, 모슬린 따위의 천)도 없는 드레스가 야윈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그는 충격과 함께 곤혹감을 느꼈다. 메이 웰랜드가 이렇게 취향의 명령에 무신경한 젊은 여자의 영향권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해졌다.
-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3쪽.
 
   

   뉴랜드에게 그가 오랫동안 갈고닦아온 ‘취향’은 신성불가침의 소중한 가치였다. 최신 유행과 귀족적 취향에는 전혀 무관심한 엘렌 올렌스카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은 뉴랜드 아처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는 예법과 매너를 비롯한 공동체의 암묵적 규약을 일탈하는 엘렌을 이성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남다름’에 이끌린다. 당시 귀족들의 파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엘렌은 따분한 파티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뉴랜드에게 당당하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로 흘겨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자유의 불온한 매력이 뉴랜드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뉴랜드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중 파티 장소에 메이가 도착하자 어서 빨리 메이에게 가보라고 속삭이던 엘렌. 그러나 메이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환영받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랑 조금만 더 있어요.” 올렌스카 부인이 아주 작게 속삭이며 깃털 달린 검은 부채로 그의 무릎을 가볍게 친다. 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뉴랜드는 뜨거운 애무를 받은 듯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그들은 엘렌을 따돌리기 위해 그 어떤 ‘드러나는’ 사전 모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귀족적 아비투스는 이미 무의식에까지 각인되어 있기에 애써 서로의 의견을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지휘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사불란하게 한 여인을 냉대하고 해부하고 힐난하고 배제한다. 그들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우아하게 왈츠를 추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하게 엘렌의 ‘부적절한’ 행동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에 줄리어스 보퍼트와 함께 5번가를 활보하다니, 엘렌이 실수했어.” 그들에게는 이혼하고 싶은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엘렌의 자유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엘렌의 친척들은 엘렌이 살고 있는 동네가 ‘글쟁이’들이 모여 사는 ‘보헤미안’의 냄새를 풍긴다며 그녀의 거처까지 옮기라고 종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한다. 뉴랜드의 약혼자 메이는 이 순수의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마스코트이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엘렌 추방 작전’의 숨은 선봉장이다. 메이가 태어나고 자라 오직 그것만이 세계이자 우주 전체라고 믿는 귀족들의 커뮤니티는 메이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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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고양이 2009-07-2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떻게 보면 메이 역시 순수한 거겠죠. 자신이 속한 작은 공간이 세계의 전부고, 그걸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캐릭터니까, 어떤 의미로의 순수함이 또 있는 것 같아요. 다만 그 방법이 틀렸을 뿐.

시나몬 2009-07-3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편해도 저런 스타일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능. =ㅁ=

바이런 2009-07-30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의시대, 라는 제목이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건지 정말 몰랐어요. 저는 이 영화를 못봤고, 사실..스토리같은것도 들어본적이 없었거든요;;; 흠, 정말이지 영화가 보고싶어지네요.

darcy 2009-07-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순수의 시대 아직 못봤는데, 지금 글을 봐선 오만과 편견이 떠오르네요.

sotkfkd 2009-09-1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비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