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⑦

   

 7. 센의 딜레마 vs 유바바의 딜레마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 비판을 미루어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버려라.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 소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386쪽.

 

 

   



   센은 하쿠를 구하러 가고 싶지만 수퍼베이비 ‘보’는 좀처럼 센을 놔주지 않는다. 아기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했던 적이 없으므로, ‘센’이라는 새로 생긴 ‘장난감’도 결코 놓치지 않을 심산이다. “네가 가면 내가 울 거고, 울면 엄마가 널 죽여. 네 팔을 부러뜨릴 거야.” 센의 가느다란 팔을 콱 깨무는 아기(라고 하기엔 너무 커다란!). 타자와의 아무런 접촉이 없었던 아이의 폐쇄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이쯤 되면 후천적인 자폐 상태로 키워지는, 그리하여 타자에 대한 배려를 전혀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떠오른다. ‘소황제’라 불리며 오직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지배하고 독점하며 통제하는 어른들의 욕심 사나운 얼굴도 떠오른다. 센은 아기에게 물린 팔이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른다. “아야, 아파! 나중에 와서 놀아줄게.” “지금 놀아줘. 봤지, 이건 피야!” 그때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는 하쿠가 나타나자 센은 아기를 뿌리치고 하쿠에게 달려간다. 아직도 ‘용’의 모습을 한 채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하쿠.

   하쿠를 돌보는 센에게 아직도 칭얼거리며 보채는 수퍼베이비. 이 못 말리는 아기를 혼내키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좀 하거라!” 분명 유바바의 얼굴인데 갑자기 유바바가 인자하고 상냥해진 것 같다. 게다가 유바바의 얼굴을 한 이 할머니는 아기를 처음 보는 것 같다. “넌……. 꽤나 뚱뚱하구나!” 아기는 “엄마!”라고 소리 지른다. “엄마랑 나도 구별 못 하느냐?” 알고 보니 이 할머니는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인 제니바다. 제니바는 도저히 달랠 수 없는 이 골칫덩이 아기를 우선 작은 생쥐로 만들어버린다. “움직이기 좀 불편할 거야.” 생쥐로 변한 아기는 이제야 좀 잠잠해지고 귀여워졌다.

   알고 보니 절대 권력자 유바바에게도 약점이 있다. 그녀의 약점은 바로 쌍둥이 언니 제니바와의 불화다. 그리고 자라지 않는 수퍼베이비 또한 유바바의 기쁨이자 슬픔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심연의 핵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센.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그저 주어진 미션에 충실해야 했던 센은 점점 그들을 둘러싼 운명의 덫, 그 심연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어쩌면 센은 이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니바는 유바바와 똑같은 외모지만 왠지 유바바보다 훨씬 인정 많고 지혜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 제니바가 센에게 말한다. “그 용을 나한테 넘겨.” 센은 화들짝 놀란다. “하쿠를 어쩌게요? 크게 다쳤어요.” 제니바는 그제야 하쿠가 다친 이유를 설명해준다. “내 동생의 부하인데 도둑 용이야. 그 용은 내 집에서 귀중한 도장을 훔쳤어.” 센은 도리질한다. “하쿠는 착해서 아무 것도 훔치지 않아요.”
    제니바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용들은 다 착하고 어리석어. 하쿠는 마법의 힘을 얻으려고 동생의 제자가 됐어. 욕심쟁이 동생이 시키면 뭐든지 할 아이야.” 이것이 ‘용’의 양면성이다. 용은 착하고 우직하지만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운명에 처한다. 제니바는 마음의 준비가 된 듯 센을 물리치려 한다. “비켜! 이 용을 돕기엔 늦었어. 도장에는 주문이 걸려 있어. 훔친 자는 죽게끔 말이야.” “안돼요!” 자신을 둘러싼 가혹한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던 센은 이제 운명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센은 우선 자신과 부모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도 어느새 뒷전으로 미루고 자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미션까지 도맡게 된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은 일, 하쿠를 구하는 일은 이제 그녀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센은 하쿠를 대장장이 할아범에게 데려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할아범은 하쿠에게 온갖 약초를 먹이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몸 안의 뭔가가 생명을 집어삼키고 있어. 너무 강력한 마법이야. 난 손을 못 쓴다.” 다급해진 센의 머릿속에 불이 켜진다. 마지막 수단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 무서운 유바바 월드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탈출구, 바로 강의 신이 준 경단이다. “하쿠. 강의 신이 준 경단이야. 들을지 몰라. 먹어봐. 하쿠, 입 벌려봐 하쿠, 제발 먹어!” 센의 부모님을 구할 경단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하쿠는 온 힘을 다해 경단을 거부하고, 센은 자기 몸보다 다섯 배는 큰 하쿠를 끌어안고, 온 힘을 다해 경단을 먹이려 한다. 그 순간 부모님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 따윈 떠오르지 않는다. 하쿠에게 억지로 경단을 먹이자 드디어 하쿠의 몸속에서 검은 마력의 기운이 스르륵 풀려 나온다. 제니바의 도장이 튀어나온 것이다. “됐어, 나왔다 도장! 도망친다, 저기!” 강의 신이 준 경단의 위력은 엄청나다. 하쿠가 삼킨 제니바의 도장과 함께 강력한 마법도 함께 사라진 듯하다.

   센은 대장장이 할아범에게 말한다. “유바바의 언니 도장이에요.” 할아범은 놀란다. “마녀의 계약도장? 이런 귀한 것을!” 유바바와 제니바는 동전의 양면처럼, 도플갱어처럼, 서로 같고 또 다른 길을 걸어간다. 유바바는 온천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마법을 이용하여 인간의 이름을 빼앗아 지배하지만, 제니바는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물레질을 하며 작은 오두막집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유바바가 마법을 ‘권력’을 위해 사용한다면, 제니바는 고통받는 타인의 ‘치유’를 위해 사용한다. 유바바와 제니바의 관계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와 사루만의 관계와 비슷하다. 간달프가 절대반지의 무서운 힘을 ‘해방’시키는 데 주력했다면, 사루만은 그 절대반지를 오직 자신만의 것으로 ‘독점’하려 몸부림치다가 파멸한다. 유바바가 하쿠를 시켜 훔친 제니바의 도장은 바로 절대반지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세계를 해방시킬 수도 있고 세계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센에게서는 이제 나약한 소녀의 이미지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이제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난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가도 그 길이 가장 옳은 길임을, 자신도 모르게 깨달은 듯하다. 하쿠가 정말 도장을 훔쳤는지도 알 수 없고, 강의 신이 준 경단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강의 신이 준 경단은 부모님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데도, 그녀는 하쿠를 구한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치히로가 유바바 월드의 일상 전체를 바꾸어 놓는, 죽어가는 하쿠를 구하는 존재로 아름답게 비상한다. 유바바에게 절대복종함으로써 일사불란하게 굴러가던 이 거대한 세계는 센으로 인해 곳곳에 ‘틈새’가 생겼다. 센으로 인해 늘 문 밖에서 서성이던 외부자 가오나시가 잠입했고, 센으로 인해 수퍼베이비가 귀여운 생쥐로 변신했으며, 센으로 인해 하쿠의 운명과 유바바의 운명이 바뀌고 있다. 사실 센에게는 ‘부모님을 살릴 것인가’ vs ‘하쿠를 살릴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할 ‘틈’이 없었다. 하쿠는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운명의 짐짝을 잊었다. 그녀는 하쿠와 자신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센이 하쿠였고 하쿠가 센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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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글리 2009-09-0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거 보니깐, 센과 치히로 다시 보고 싶넹 ㅎㅎ

비로그인 2009-09-01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너와 나를 분리할 수 없는 감정, 사랑... 센과 치히로를 봤을 때 러브러브에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역시 그랬던거였어요. ㅎㅎ

doingnow12 2009-09-1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흣..할아범이 몸안에 생명이 있다고해서 굉장히 무서운게 나올줄 알았는데 귀여운 먹물녀석이 뾱 튀어나왔던게 생각나요..ㅋㅋ소중한 땡땡은 누구나 갖고 있는거겠죠..?ㅋㅋ센다시보고싶어지네요..크흣

sotkfkd 2009-09-1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⑥

   

 6. 세 친구: 나보다 더 아픈 나와의 만남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273쪽.

 

 

   


▲파올로 우첼로, <성 제우르지오와 용>, 1456
   

   난 역시 안 돼, 난 결코 꿈을 이룰 수 없을 거야,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난 도저히 저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어…. 조셉 캠벨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용’이라고 불렀다. ‘늪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양의 용이 때가 되면 그야말로 우렁차게 ‘용트림’을 하며 웅장하게 승천하는 존재라면, 서양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은 뭐든지 일단 잡아 가둬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감시하고 있는 공주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그렇다고 그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고집스레 공주의 출입을 가로막으며 입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용의 이미지. 그것은 우리 안의 재능이, 우리 안의 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평생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난 재능이 없어’라고 판단하며 ‘꿈의 승천’을 미루고 또 미루는 인간의 마음을 닮았다.
    우리는 거대한 용과 싸우는 영웅의 이미지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성을 지키는 끔찍한 용과 싸워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부터, 용과의 싸움이 끝나면 드디어 미션이 완성되는 각종 게임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조셉 캠벨은 신화적 모티브의 단골 메뉴인 이 ‘용(dragon)’과의 싸움이야말로 통과의례의 절정, 즉 ‘나를 가두고 있는 나’와의 싸움, ‘나를 감시하고 있는 나’와의 싸움임을 간파했다. 센의 친구 하쿠는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이 거대한 ‘용’을 닮은 인물이다.  

   하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센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곧잘 나타나주지만, 막상 센이 찾을 때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유바바 온천 사람들조차 하쿠의 행방을 잘 모른다. “하쿠는 가끔 잘 없어져. 소문엔 유바바가 험한 일을 시켰대.” “하쿠를 조심해. 하쿠는 유바바의 하수인이야.” 온천 식구들은 하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하쿠에 대한 위험한 소문을 더욱 편리하게 퍼뜨린다. 늘 비밀에 싸인 친구 하쿠, 그는 자신이 가진 놀라운 마력으로 센을 곧잘 도와주지만 센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센은 바다 위에서 거대한 새 떼의 무리와 싸우는 아름다운 용 한 마리를 발견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새 떼와 싸우는 어린 용, 센은 그 용이 바로 하쿠임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새 떼의 맹공에 밀려 온몸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푸른 용. 그런데 맹공격을 펼치던 새 떼가 센이 있는 창 쪽으로 따라와 떨어지자 그들이 그저 ‘종이 새’에 불과했음이 밝혀진다. “그냥 종이잖아?” 쓰러진 용을 쓰다듬으며 센은 젖은 눈으로 속삭인다. “하쿠가 맞지? 다친 거야? 종이 새는 갔어. 이젠 괜찮아.” 용이 된 하쿠는 사악한 마법에 걸린 왕자처럼,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특유의 자폐적인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괴로워한다. 센은 치명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하쿠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 하쿠를 이렇게 만든 것으로 의심되는 유바바를 찾기로 한다. 그런데 유바바를 만나러 가던 도중 예기치 않게 ‘가오나시’의 끔찍한 대변신과 활극을 맞닥뜨리게 된다. 
 

   센이 살짝 열어놓은 문틈으로 몰래 유바바 온천에 잠입한 가오나시. 가오나시는 가면 뒤에 얼굴이 없을 뿐 아니라 목소리도 없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는 몰래 개구리의 몸을 먹어 개구리 목소리를 내며, 사금으로 온천 식구들을 유혹하고, 온천장을 휘저으며 닥치는 대로 폭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오나시는 자신만의 얼굴을 갖지 못한 존재이며, 타인과의 접촉에 실패하고 늘 타인의 목소리에 올라타야만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한,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 가오나시는 타인에게 말걸고 싶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법을 알지 못해 ‘사금’이라는 유혹의 미끼를 쓴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센이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보여준 유일한 친구, 센. 사람들은 몸에서 사금을 만들어내는 가오나시의 능력에 반해 “부자 나리가 납시었네, 금이 손에서 무한정 나온대.”하고 가오나시를 따라다니지만, 센은 이 황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센은 무심한 얼굴로 “전 필요 없어요, 됐어요.” 라고 말한다. 이런 센에게 더 큰 매혹을 느낀 가오나시. 

   우여곡절 끝에 가오나시를 피해 달아난 센은 유바바의 방에 몰래 잠입한다. 그곳에서 센은 유바바의 끔찍한 명령을 엿듣고야 만다. “하쿠를 처치해버려. 이제 그 애는 필요 없어.” 유바바는 부하에게 살벌한 명령을 내리자마자 안면을 싹 바꾸어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정으로 돌아간다. “또 침대에서 안 자고! 미안해, 코오 자는데 깨웠구나! 엄마는 아직 일이 있단다. 잘 자렴, 착한 아가!” 그러나 이 아가는 전혀 착하지 않아 보인다. 엄마에게 떼를 쓰며 팽 토라지는 아기의 위용이 그제야 드러난다. 어른보다 더 큰 수퍼베이비. 몸은 어른보다 크지만 정신은 갓난아기에 머물러 있는 이 ‘귀엽지 않은’ 아기와 유바바의 관계는 캥거루족 아들과 헬리콥터족 수퍼맘처럼 서로에게 의존적이다. 모두에게 철저히 군림하는 유바바가 정작 아기에게는 쩔쩔맨다. 그리고 그 아기는 자라지 않는 정신 때문에, 엄마에게 고착된 정신 상태 때문에 엄마를 구속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성장도 구속한다. 엄청나게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지만 아직 영혼의 모유를 떼지 못한 수퍼베이비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물론 엄마다. “바깥은 병균으로 득실거려. 늘 엄마와만 있어라.” 

   이 수퍼베이비에게 센은 난생처음 맞닥뜨린 타자다. 아기는 엄마 아닌 사람과 처음으로 놀아보고 싶은 호기심을 느낀다. 수퍼베이비 덕분에 유바바에게 들킬 위험을 모면한 센은 말한다. “도와줘서 고맙지만 바빠서 가야 돼, 놔줄래?” 아기는 센에게 심술궂은 얼굴로 말한다. “병 옮기러 왔지? 밖엔 나쁜 병균밖에 없어.” ‘아가, 밖엔 무서운 것밖에 없어, 엄마를 떠나면 오직 위험뿐이야’라고 가르친 유바바의 교육철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가면 몸에 나빠. 여기서 나랑 놀자.”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아기에게 센은 굳은 결심이 어린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런 곳은 병에 더 잘 걸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많이 다쳤어. 어서 가봐야 돼.” 센은 어느새 하쿠를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엄마, 아빠에게 찰싹 달라붙어 아무것도 혼자 해내지 못할 것 같던 소녀가 이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 시작했다. 센은 하쿠를 구하기 위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바바의 카리스마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자 그녀는 더욱 강해진다. 하쿠는 지금 싸우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잃어버린 나를 되찾기 위해. 나의 꿈을 가두는 나와의 싸움, 나를 잊은 나와의 싸움, 나를 나이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헛것들(종이 새들)과의 싸움. 하쿠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 하지만 ‘난 역시 안 돼’라는 마음의 벽에 부딪힌다.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해주는 임무는 애초에 센의 미션리스트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무서운 곳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준 하쿠를 구해주려 한다. 나락에 빠진 자신과 부모님을 구하기도 벅찬 센-치히로는 자신이 구해줘야만 할 것 같은 세 명의 친구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서구의 옛이야기에서 영웅은 주로 동굴이나 성을 지키고 있는 ‘용’을 죽임으로써 승리를 구가하지만, 센은 용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용을 속박하고 있는 올가미를 풀어주려 한다. 센이 하쿠의 고통을 함께 앓을 때, 그녀는 어느새 자기를 잊은 채로 하쿠의 존재에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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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와쨔쨔 2009-08-3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애니메이션인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잘 보고, 잘 읽고 갑니다.^^

앨리스 2009-08-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창작물인데 덧글이 적네요. 한번 더 보고 싶다.

dlatjsdud29 2009-08-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난 재능이 없어' 라고 판단하고 '꿈의 승천'을 미루는 인간의 마음과 닮았다는 말이 왠지 공감이 갑니다. 어서 또 다른 자아를 깨부셔야 할 텐데 쉽지가 않아요^^

필로우북 2009-09-0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면서 얼핏 가늠했던 것들을 이론적으로 콕콕 집어주시는 것이 참 흥미롭고 즐거워요~ 즐겁게 잘 보고 있습니다~!!


doingnow12 2009-09-1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의 승천...(>_<)!!!

sotkfkd 2009-09-1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양 사고의 차이가 결국 문화를 잉태하는 것이겠지요. 캠벨을 읽으면 늘 느끼는 것이 동양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⑤

  

 5. 영원에 발을 딛고 시간의 장(場) 위에서 춤추다

   
 

모이어스: 소년 시절에 <원탁의 기사>를 읽었는데요. 문득 저도 영웅이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정말 집을 떠나 용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싶었습니다. 신화가 오클라호마주의 농투성이 아들을 꼬드겨 영웅이 되고 싶게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신화는 우리에게 그만큼 더 수다스러워집니다. 


  -조셉 캠벨·빌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272쪽.

 

 

   
 

    린은 센에게 작업복을 주고 근무수칙을 일러주며 천신만고의 고생길에 오른 것을 환영한다. 하쿠는 센에게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은밀하게 그녀를 불러낸다. 돼지들, 아니 부모님은 센이 온 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만 있다. “엄마, 아빠! 아픈 거야? 다친 거야?” 센은 걱정 어린 눈길로 부모님을 부르지만 하쿠는 더욱 비극적인 소식을 전달한다. “배가 너무 불러서 자는 거야. 사람이었다는 걸 알지 못해.” 센은 기막힌 소식에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돼지-부모를 타이른다. “내가 꼭 구해줄 테니까 너무 살찌지 마, 잡아먹혀.”   

   걸핏하면 칭얼거리기 좋아하던 철없는 치히로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든든한 보호자였던 엄마, 아빠가 자신이 구해주지 않으면 언젠가 잡아먹힐 돼지로 변해 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미션이 눈앞에 있다. 어떻게 엄마, 아빠를 구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구하지 않으면 엄마아빠가 죽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더욱 슬픈 것은 엄마, 아빠가 매일매일 보듬고 비비던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들이 ‘한때’ 인간이었던 기억조차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치히로가 마음껏 슬퍼할 틈도 주지 않고 하쿠는 마녀 유바바의 지배전략을 일러준다. “치히로. 유바바는 누구든 이름을 뺏어서 지배해. 센인 척하고 진짜 이름은 숨겨. 이름을 뺏기면 돌아가는 길을 모르게 돼.” 하쿠를 바라보는 센의 눈빛이 반짝인다. 길 잃은 센에게, 이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의 유일한 안내자가 되어준 하쿠의 표정이 우울해진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이름이 생각 안나. 하지만 놀랍게도 치히로란 이름은 까먹지 않았어.” 하쿠는 센이 된 치히로에게 먹을 것을 건네준다. 센은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니 입맛조차 없는지 풀 죽은 목소리로 거절한다. “힘낼 수 있게 밥에 주문을 걸었어, 먹어봐.” 
   먹을 것을 뱃속에 집어넣고서야 배고픔을 깨달은 센. 이 배고픔과 이 맛은 이 모든 당혹스런 현실 속에서 그녀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육체적 증거다. 더 이상 자신을 보살필 수 없는 엄마, 아빠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엉엉 우는 센. 그녀는 자기 앞에 부과된 소명을 이제 완전히 받아들인다. 물러설 곳이 없다면 맞서는 수밖에 없다. 더없이 힘겨운 불행이 찾아온 그날, 더없이 아름다운 인연도 시작된다. 이제 센과 하쿠는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이자 멘토가 된다.

   센은 대형 욕탕 당번으로 배정되어 열심히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센은 비오는 날 문밖에 서서 하염없이 어슬렁거리는 얼굴 없는 귀신 ‘가오나시’를 만난다. 센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비를 맞고 서 있는 처량한 모습이 딱해 말을 건다. “거기 있으면 비를 맞잖아요? 문을 열어두고 갈게요.” 친절한 센이 열어놓은 문틈으로 초대받지 못한 귀신 가오나시가 숨어 들어온다. 목욕탕에 급수하는 법을 어렵게 배운 센은 영차영차 목욕탕에 온천수를 공급한다. 그때 목욕탕의 첫 손님으로 ‘오물신’이 등장한다. 모두들 그 엄청난 냄새와 더러움에 구역질을 참지 못하며 오물신을 내치려 한다. 오물신을 받아들였다간 목욕탕 전체가 오염될 것만 같다. “슈퍼 울트라 초대형 오물신입니다.”

   유바바는 손님이니 어쩔 수 없다며 초짜 종업원 센에게 오물신의 시중을 맡겨버린다. 입문자에게 주어지는 혹독한 신고식이다. 모두 오물신을 피해 도망가버리고 센은 외롭게 혼자 남아 오물신의 시중을 들어야 할 판이다. 센은 우여곡절 끝에 가마 할아범과 가오나시의 도움을 받아 최고급 약수를 초특급 오물신에게 제공한다. 센은 엄청난 냄새와 오염물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물신을 시중들다 그의 몸에 깊이 꽂혀 있는 가시를 발견한다. 유바바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센에게 말한다. “그분은 오물신이 아냐. 이 밧줄을 써라.” 좀처럼 빠지지 않는 커다란 가시를 빼내느라 이제 목욕탕의 모든 종업원이 힘을 모아야 할 차례이다. 유바바의 지휘 아래 센이 앞장서고, 모든 종업원이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목욕탕 일동 마음을 모아서 당겨! 영차! 영차!” 

   센에게 인간의 구린내가 난다며 그녀를 멀리하던 종업원들, 그들은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손님의 몸에 박힌 가시를 빼낸다. 공동체의 소중함, 함께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센. 드디어 오물신인 줄로만 알았던 ‘강의 신’의 멋진 위용이 드러난다. 강의 신은 인간들의 부주의로 더럽혀지고 상처입은 자연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준 센에게 강의 신은 밤톨만한 경단을 주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센으로 인해 원래 모습을 찾은 강의 신은 통쾌하게 웃으며 하늘로 날아간다. 마녀 유바바는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센을 마음껏 칭찬해준다. “센, 잘했어. 큰 이익을 봤어. 이름 있는 강의 주인이야. 모두 센을 본받아라!” 유바바 월드의 첫번째 미션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센. 이제는 그녀를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처음으로 낯선 공동체의 엄청난 텃세를 뚫고, 자신을 박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시간의 장은 곧 슬픔의 장이다. 모든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렇다. 여러분이 슬픔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그 슬픔을 다른 어디론가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과 함께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영원을 자각한다. 여러분은 해방되고, 또 그런 한편으로 다시 속박된다. 여러분은-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공식이 나오는데-“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셉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171쪽.

 
   


 

   치히로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온몸으로 이해한다. 그녀는 시간의 장을 떠나왔지만 영원의 바다 위에 표류하기 시작했음을. 그녀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슬픔을 긍정함으로써 시간의 차원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원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이 혹독한 입문식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통과의례의 모델이다. 부모님은 돼지로 변해버렸고 나는 원래의 내 시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루(영혼의 스승)’를 만났다. 내가 미처 투시하지 못했던 내 안의 어둠을 밝혀줄 영혼의 친구 하쿠를. 너와 함께라면 이 슬픔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치히로를 죽여 센을 얻었고, 부모님과 생이별하여 다시없을 멘토를 얻었다. 이제 영원의 품 안에서 시간의 춤을 출 마음의 악보가 필요하다. 이제 슬픔의 악보를 연주할 기쁜 춤의 리듬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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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atjsdud29 2009-08-2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을 긍정하는 건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나에게도 하쿠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mr.black 2009-08-2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픔, 눈물, 모두가 너무 아릅답고 숭고한 감정인 것 같네요.

미니쉘 2009-08-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코스프레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 가오나시, 언제 봐도 묘한 매력이 있는...

doingnow12 2009-09-10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방 하쿠!!

sotkfkd 2009-09-1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이로의 모험 그림들과 영화 제작 과정을 모아놓은 두꺼운 책을 열심히 봤던 때가 떠오릅니다. 참 행복했던...... .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④

  

 

4. 미지와의 조우 :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2> 

   
 

마라톤 선수의 모습을 보라. 난생 처음으로 경주에 참가한 사람과는 달리, 전문적인 마라톤 선수는 자신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이기느냐 또는 지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경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기느냐 또는 순위 안에 드느냐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구속 없는 참여인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86쪽.

 

 

   


   이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온천을 지배한다는 마녀 유바바의 방. 치히로는 유바바가 풍기는 으스스한 첫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자신의 요구사항부터 제시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치히로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유바바는 콧방귀를 뀐다. “비실비실한 애가 뭘 하겠느냐? 인간이 올 곳이 아니다. 800만 신들이 피로를 풀러 오는 온천탕이야!” 이제야 이곳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다. 치히로는 온갖 귀신들이 모여 온천욕을 하는,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유바바 월드에 입성한 것이다. “그런데 네 부모는 뭐냐? 손님 음식을 돼지처럼 먹어치우다니! 너도 다시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새끼 돼지로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석탄으로 만들어 버릴까?” 유바바는 마치 치히로 가족의 행적을 낱낱이 감시해온 것처럼, 치히로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듯한 커다란 두 눈을 번득인다.


  

    유바바의 콧바람 한 번이면 훅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치히로는 두려움에 떤다.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난 어떻게 될까. “떨고 있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잘 온 걸 보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도와준 게야. 칭찬받을 만해. 누구였어? 가르쳐 주렴.” 치히로는 자신을 도와준 하쿠의 선의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안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기억해낸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새끼 돼지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꿈쩍도 안 한다. “내가 널 왜 고용해야 하지? 굼뜬 응석받이, 머리 나쁜 울보한테 맡길 일 따윈 애초부터 없어.”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 험상궂은 마녀 유바바는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돌변하며 아기를 어르느라 상냥해진다. 유바바가 아기를 달래느라 정신없는 사이, 치히로는 집요하게 부탁한다.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꼭 좀 일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모든 게 귀찮다는 듯, 얼떨결에 “알았다니까!”라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마녀의 음험한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는 치히로의 첫번째 승리, 그것은 단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때로는 오직 살아남는 것이 그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존엄하다. “계약서다. 이름을 써라. 일하게 해주겠다. 대신, 싫다든가 돌아가겠다고 하면 새끼 돼지로 만들어 버릴 테다!” 새끼 돼지로 변해버리지 않고, 숯검뎅으로 변하지도 않은 채, 일단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치히로는 영웅의 첫번째 임무를 달성한 것이다. “치히로라고?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그 이름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센이다. 알겠느냐?” 센은 자신이 일할 목욕탕으로 배정된다. “이름이 뭐지?” “네? 치히, 아니, 센입니다.” 신화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통과제의의 첫번째 문턱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시켜야한다. 그것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치히로 본인의 이름이었다. 이제 그녀는 치히로가 아니라 센이다. 아니, 자신이 치히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센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치히로는 신화 속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다. 일상의 자극으로부터 완전히 봉인될 때, 시간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될 때, 내면의 탐구는 시작된다.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 봉인되어 있다. (……) 여러분은 날짜나 시간이 주는 자극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는 영원의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62쪽.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두려운 모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도저히 일상의 숨 가쁜 시곗바늘을 순순히 따라갈 수 없을 때, 문득 스스로 행방불명되고 싶었던 경험이 있는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바로 그때가, 우리의 영혼이 내면의 탐구를 시작하는 때, 치히로(일상적 자아)의 행방불명이 센(신화적 자아)의 탄생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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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black 2009-08-2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밉상들은 비슷하게 생긴 것인가? 유바바, 나 아는 사람 닮았어. 어쩌면 성격까지도..-_-?

테마파크 2009-08-2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ㅎ 그런데 유바바는 왠지 무섭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는, 알고 보면 헛점 투성이 일 것 같은 마녀 유바바^^*

비로그인 2009-08-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위 안에 드는 것이 부차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곳은 순위를 중요하게 매기고 있다. 1등을 해야 좋은 세상...

치히로 2009-08-2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오나시라는 멋진 캐릭터가 탄생한- 애니죠!

고구마로소이다 2009-08-2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보면 어제의 나도 그제의 나도 모두 행방불명인데-시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면-하루하루를 매일 신화를 창조하듯이 살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완벽할까. (몽상가의 변)

dlatjsdud29 2009-08-2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과 치히로라는 애니를 봤지만, 치히로가 행방불명 속에서 뭘 보고 왔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정여울 선생님은 치히로가 모험의 끝에서 뭘 봤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doingnow12 2009-09-1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자키는 천재일까요?

sotkfkd 2009-09-1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오직 살아남는 것이 그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존엄하다!
맞습니다. 늘!

sotkfkd 2009-09-1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혼의 내면 탐구!
구속 없는 참여야말로 진정한 참여, 진정한 주체, 진정한 자아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③

  

 

3. 미지와의 조우 :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1>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중에서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느닷없이 추락하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낙하하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찾기 위해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신화적 서사 속에서는 이렇게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나락으로 추락하는, 돌아올 기약 없는 미지의 모험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치히로의 첫번째 임무 또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쿠의 조언대로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마할아범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기나긴 통로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야 한다. 겁에 질린 치히로는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를 구해내기 위해, 아니 지금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처럼 으스스한 통로를 향해, 무작정 낙하한다.  

   추락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치히로는 뜨거운 불가마 곁에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동을 반복하는 가마 할아범을 만난다. 치히로는 아직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녀지만 꼼짝없이 불가마에서 일을 해야 할 판이다. “가마 할아버지 맞으시지요? 하쿠가 보냈어요. 일을 하게 해주세요.” 치히로는 일단 다짜고짜 말을 뱉어놓긴 했지만 힘겹게 일하고 있는 가마 할아범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도저히 두 팔로는 해치울 수 없는 노동을 해내느라, 할아범은 거미처럼 여러 개의 팔을 갖게 된 것 같다. “내가 가마 할아범이야. 욕탕 가마에서 혹사당하는 늙은이야.”
 
    할아버지는 말을 하면서도 한 번도 날렵한 손놀림을 쉬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조수들은 올망졸망한 검뎅이귀신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치히로는 도리어 차분해진 표정이다. 가마 할아범은 치히로가 전혀 필요 없어 보인다. “일손은 충분해. 여긴 온통 그을음이야. 대타도 넘쳐.”  일하지 않으면 검뎅이귀신들의 마법이 풀려 숯검정으로 돌아가 버린단다. 유바바 왕국의 냉혹한 생존 법칙을 눈으로 확인한 치히로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치히로는 포기하지 않는다. 가마 할아범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조용히 검뎅이귀신들을 도와 일을 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을 들어 가마로 나르는 치히로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더 이상 어리광이 묻어 있지 않다. 그녀가 편안하게 엄마, 아빠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면, 어디선가 이토록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가마 할아범과 먼지꼬맹이들의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 나-가족-학교로 이어지는 일상적 공동체의 울타리를 벗어나자 ‘타인의 삶’을 만나게 된다. 안전한 일상의 DMZ 안쪽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타인의 삶을. 어쩌면 지금 곤경에 빠진 나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고통을 겪고 있던 삶들을. 난생 처음 닥친 어려운 미션을 조용히 해내는 치히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치히로를 지켜본 가마 할아범. 그때 마침 ‘린’이라는 종업원이 할아범의 식사를 배달해준다. 할아범은 린에게 치히로를 맡긴다. “내 손녀야.” 졸지에 가마 할아범의 손녀로 불린 치히로는 깜짝 놀란다. “내 손녀가 일하고 싶대. 그런데 여긴 일손이 충분해. 유바바한테 데려다줘. 나머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가마 할아범은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치히로의 어리버리한 겉모습에 가려진 그녀의 진심을 알아본다. “어디서 일하든 유바바와 계약해. 가서 너의 운을 시험해봐.” 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치히로를 데리고 유바바에게로 간다. 치히로에게 ‘인간의 구린내’가 난다며 힐끔힐끔 바라보는 유바바 온천의 귀신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치히로는 간신히 유바바의 방에 도착한다.


   
 

여러 해 전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어난 일로서, 내가 잘 아는 가정의 아이에 관한 일화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했다. “신화가 무엇이지?” 그 중 한 소년이 답한다. “신화는 내면세계에서는 진짜인데 바깥 세계에서는 진짜가 아닌 거예요.” 불행하게도 선생님은 이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종종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깊은 심리학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 신화는 꿈과 같다. 꿈은 무의식이 보내는 전령이다. 무의식은 꿈을 통해 의식의 관심사나, 무의식이 지니고 있는 내용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We-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 동연, 2008,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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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atjsdud29 2009-08-2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답답할 때는 새로운 나, 다른 환경, 무모한 도전을 꿈꾸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신화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세계를 꿈꾸고, 다른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치히로가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처럼 현실의 나에서 멀어지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면의 나를 만나게 한다는 것 같습니다.

on story 2009-08-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뭔지 설명할 수는 없는데, 왠지 이 길을 따라가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을 때. 그 길로 가면 훨씬 더 힘들 것 같은데 왠지 그 길이 맞는 것 같을 때. 그때가 우리 안의 신화와 만나는 시간인가봅니다...데자뷰 같은 그런..

mr.black 2009-08-2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물가물했던 영화의 추억이 여울님 덕에 생생해지네요.

문익환 2009-08-27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언젠가 부모님을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했던 때가 있었는데...

doingnow12 2009-09-10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먼지 넘 귀여워..으흑(>_<)

sotkfkd 2009-09-1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광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