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⑦

 

7. 벽을 증오하다가, 벽에 길들여지다가, 마침내 벽에 의지하게 되다
 

   
  형벌. ―기이한 것이다. 우리의 형벌이라는 것은! 그것은 범죄자를 정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속죄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범죄 그 자체보다도 범죄자를 더럽힌다.
                           -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251쪽.
 
   

   감옥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어져 마치 감옥의 벽돌처럼 감옥의 일부가 된 사람들. 그 중에 브룩스가 있었다. 브룩스는 50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기에 감옥을 빼놓고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죄수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독서를 권하는 일은 브룩스를 감옥에 갇힌 ‘죄수’라기보다 더없이 충실한 ‘사서’처럼 보이게 한다. 브룩스의 표정은 언제나 편안하고 만족스러워서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감옥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어린 새 한 마리를 품안에 넣고 다니며 직접 키워 ‘제이크’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브룩스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그가 도둑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어느 날 레드와 앤디는 브룩스가 헤이우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다. 칼을 제대로 들고 있을 힘도 없어 보이는 브룩스는 정작 협박당하고 있는 헤이우드보다 더 두려운 표정으로 떨고 있다. “우리, 말로 하자고.” “할 말 없어. 목을 그어 버릴 거야.” “헤이우드가 뭘 잘못했어?” “그건 상관없어. 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앤디는 침착하게 브룩스를 설득한다. “브룩스, 헤이우드를 해치지 않을 거죠? 그도 브룩스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 왜 친구를 죽이려는 거죠? 날 봐요. 브룩스, 그거 내려놔요. 목을 봐요. 피가 나잖아요.” 브룩스의 날 선 눈빛은 앤디의 애정 어린 몇 마디 문장으로 무너져버린다. “이 길밖에 없어. 난 여기 있고 싶어.” 브룩스는 눈물을 흘리며 칼을 떨어뜨리고 죄수들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사면을 받아 감옥을 나가게 된 브룩스에게 ‘잘 가’라고 인사한 죄밖에 없다는 헤이우드는, 억울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브룩스가 미쳤다’고 투덜거린다.  

   도대체 얌전하기만 하던 브룩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죄수들에게 레드는 이야기한다. “브룩스는 교도소에 길들어졌을 뿐이야.” “길들어져?” “감옥에 50년 동안 있어봐. 바깥세상을 전혀 몰라. 여기선 브룩스가 대장이야. 모르는 게 없지. 하지만 사회에선 아무 것도 아냐. 그저 쓸모없는 쓰레기지.” 죄수들은 갑자기 숙연해진다. 감옥의 철책을 바라보며 레드는 말한다. “이 담벼락이 참 웃기지. 처음엔 다들 증오해. 그러다가 차츰 길들어지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길들어지는 거야. 그리고 어느 순간 의지하게 되지. 그게 바로 길들어지는 거야.” 형벌의 목적은 정말 인간을 교화하는 것일까. 니체는 형벌이 인간을 계몽할 수 있다는 환상을 믿지 않았다. 형벌은 인간은 단지 ‘덜 위험하게 보이도록’ 길들일 뿐이다. 형벌은 그가 저지른 죄보다 그를 더욱 망가뜨리는 폭력이다. 브룩스는 어느새 형벌의 한가운데서 삶의 희열을 맛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브룩스는 형벌에 완벽하게 길들어진 나머지 형벌이 곧 삶 자체라고 믿게 되었다. 형벌 없는 삶은 삶이 아닌 것이다. 

   감옥을 나가는 브룩스. 그러나 그의 표정은 50년 만에 자유를 찾은 사람의 그것이 아니라 5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근속했던 회사에서 창졸간에 쫓겨나는 명예퇴직자의 허허로운 표정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져도 다시 시작할 만한 용기도 체력도 친구도 남아 있지 않다. 50년 만에 맞닥뜨린 세상은 너무 빠르고, 너무 매정하고, 너무 무섭다. 브룩스는 그의 유일한 친구들, 죄수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어렸을 적엔 차가 드물었는데 이젠 지천에 깔렸다네.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어. 난 가석방자 임시 거처에 기거하고 있다네. 식료품점에서 포장하는 직업도 얻었지. 남들처럼 빨리 하려고 했지만 실수만 한다네. 지배인은 날 싫어해. 일을 마치면 공원에 가서 새에게 모이를 주지. 제이크가 나타나서 인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지. 벼랑으로 떨어지는 악몽도 꾼다네. 겁에 질려서 깨어나면 때때로 내가 어디 있나 싶어. 도둑질이라도 한다면 나를 쇼생크로 보내주지 않을까? 날 다시 보내주기만 한다면 지배인을 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기엔 난 너무 늙었다네.” 감옥으로 날아온 마지막 편지는 브룩스의 유서였다. 브룩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자살이었지만 50년 동안의 복역 자체가 그를 ‘느린 자살’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레드는 친형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지 못한 친구를 가슴에 묻으며, 앤디에게 말한다. “브룩스는 여기서 죽어야 했어.” 이제는 얼굴조차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동료 브룩스를, 레드는 그렇게 잃어버린다. 

   한편 앤디는 6년 동안 주 의회에 도서 기금을 요청했던 편지의 답신을 드디어 받아낸다. “당신의 거듭된 요구에 도서기금을 동봉합니다. 도서기금 200달러와 더불어 지방도서관에서 헌책과 잡동사니를 보냅니다. 이제 만족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문제가 해결됐으니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마십시오.” 앤디의 편지를 모른 척하고 싶었던 당국은 6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편지를 보내는 앤디의 열정에 항복하고 만다. 간수가 앤디의 성과를 축하하며 6년씩이나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치하하자, 앤디는 말한다. “겨우 6년밖에 안 걸렸어요. 이제는 일주일에 두 통씩 써야겠어요.” 간수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앤디는 주 의회가 보낸 잡동사니 중에서 모차르트의 음반을 발견한다. 그는 언제나 죄수들에게 ‘명령’만 내리던 감옥의 스피커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여인의 목소리를 실어 죄수들에게 띄워 보낸다. 일일 DJ로 변신한 앤디는 간수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까지 걸어 잠근 채 <피가로의 결혼>을 거대한 쇼생크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게 만든다. 난생처음 오페라를, 그것도 감옥의 스피커로 들어보는 대부분의 죄수들은 어리둥절하지만, 그들의 귓속에 울려 퍼지는 것은 단지 낯선 오페라가 아니었다. <피가로의 결혼>은 형태도 빛깔도 없는 자유의 바이러스가 되어 권태와 침울함에 젖어 살아온 죄수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간수는 물론 소장까지 나서서 앤디 듀프레인의 돌발적인 DJ 활동을 막아보려 애써 보지만, 앤디의 표정은 너무 평화롭고 즐거워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저 아름다운 음악을 닮아 마치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낭송하는 것처럼 애잔한 목소리로 관객의 가슴을 데운다. “두 명의 이탈리아 여인들이 도대체 무슨 내용의 노래를 불렀는지 저는 이날까지 알지 못합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지요. 굳이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지요. 아름다운 곡이었습니다. 말로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었지요.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노랫소리는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올라  갔습니다. 이 잿빛 감옥에서는 도저히 꿈꿀 수도 없는 그 어딘가로, 더 멀리, 더 높이 울려  퍼졌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우리를 가두던 담장을 허물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주 짧은 한 순간이었지만, 쇼생크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느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죄수들의 심장을 파고든 모차르트는 감옥의 안과 밖을 가르는 족쇄를 산산이 부수고 그들이 미처 잊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던 비릿한 자유의 향기를 걷잡을 수 없이 퍼뜨린다. 죄수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이 지나쳐온 모든 삶의 과정이 한 순간에 자신을 스쳐가는 듯한 가슴 저린 환상을 만끽한다. 이 음악은 ‘오페라’라는 ‘형식’으로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이태리어’라는 ‘언어’로 다가간 것이 아니라, 형태도 빛깔도 없는 무형의 메시지로 죄수들의 딱딱해진 심장을 한순간에 녹여버린다. ‘마치 아름다운 새가 한 마리 날아와서, 우리를 가둔 담장을 허물어버린 것 같았다’는 뭉클한 시적 묘사가 태어난 사연.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음악이 할퀴고 간 레드의 심장이 불현듯 꿈틀거린 흔적을, 30년 동안 쇼생크의 벽돌로 살아간 레드가 앓고 있던 영혼의 불감증이 치유된 흔적을 증언한다. 

   
  음악이 모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 맺는 이 친밀한 관계로부터 다음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 적절한 음악이 흐르면, 음악은 그것의 가장 은밀한 의미를 해명해주는 것 같고 그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주석을 알려주는 듯한 까닭이 설명된다. 이는 어떤 교향곡이 주는 인상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삶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즉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만을 가지고 있어서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 니체, 이진우 역, <비극의 탄생>, 책세상, 2005, 1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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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09-09-1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사는 이 삶이 철창없는 감옥 같다면
나에게 자유의 바이러스는 무엇일까?
오늘은 소주한잔 해야 되겠는데여^^(핑계 참~~암 쉽죠이~~잉)

참, 이슬 2009-09-15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글을 보니 갑자기 영롱한 소주의 투명한 자태가 아른거립니다. 딸꾹! ㅋㅋ

sotkfkd 2009-09-2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⑥

 

6.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고통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혹은 작은 고통에도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빨리 없애고자 한다. 고통을 제거해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을, 니체는 거부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그는 이미 충분히 존재하는 고통을 더 높은 강도로, 더 힘겨운 것으로 부풀린다. 주어진 위험을 오히려 극대화하는 자, 이미 넘쳐나는 고통을 천 배로 부풀리는 자, 그리하여 불행을 기꺼이 짊어진 채 불행을 샅샅이 해부하고 마침내 불행을 영혼의 창조에 이용하는 용기를 지닌 자, 그가 바로 초인이다. 불행을 피하는 데 급급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안락함, 그것은 니체가 보기에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종말’이다. 현재의 불행은 단지 미래의 고통에 대비하기 위한 예방주사가 아니라, 영혼의 힘을 길러주는 창조적 긴장이다. 고통을 거부하는 자들이 도망쳐 가는 가장 흔한 도피처, 그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아, 형제들이여, 내가 꾸며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불과하고 망상에 불과했다. (……) 아무 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이 피로감이 온갖 신을 꾸며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낸 것이다. 


-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0, 47쪽.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를 강조하며 이 세계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다음 세상에는 천국이 펼쳐질 테니, 지금의 고통을 묵묵히 인내하라’고 외치는 사람들, 너희가 고통스러운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경의 등 뒤에 숨어 현재의 속물적인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평일에는 바지런히 타인의 삶 위에 군림하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회개’함으로써 그 모든 만행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쇼생크 탈출>의 우두머리 노튼 소장은 그런 인물의 전형이었다. 그는 죄수들의 방을 불시 검열하다가 앤디의 방에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흐뭇해한다.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묻는 노튼 소장에게 앤디는 대답한다.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언제나 ‘그날’이 온 듯이 사는 앤디, 언제나 ‘그날’이 바로 지금인 듯이 사는 앤디에게는 이 문장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노튼 소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을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의 빛이 자기 자신인 양 거들먹거린다. 자신을 잘만 따르면 마치 저 세상의 천국으로 입장하는 암표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듯. 현실의 삶으로 빛을 만들지 못하는 노튼은 성경의 빛에 의탁하여 도무지 빛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빛내보려 한다. 사실 노튼의 속셈은 불시 검열을 핑계로 앤디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신출귀몰한 세무 능력을 지닌, 과거의 은행 부지점장 앤디의 ‘이용가치’를 고민하는 노튼 소장. 그는 앤디의 방에 있던 성경을 무심코 가져가려 하다가 앤디에게 돌려준다. “이걸 뺏어서는 안 되지. 이 안에 구원이 있으니까.” 카메라는 앤디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성경을 의미심장하게 비춰주고, 앤디의 눈빛은 이날따라 달빛을 비춘 칼날처럼 시리게 빛난다. 성경 안에 있는 구원, 그것은 노튼 소장에게는 ‘말씀의 빛’이었겠지만, 앤디에게는 ‘말씀 이상의 무엇’이었고, 이 비밀은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진다.


   자신의 재산을 부풀리는 데 앤디를 이용하기로 결심한 노튼 소장은 앤디를 쇼생크 감옥 도서관의 조수로 배치한다. 앤디의 잡무를 덜어주고 좀더 ‘손쉽게’ 앤디를 곁에 두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도무지 ‘할 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쇼생크 감옥 도서관의 일인 사서이자 관장은 30여 년 동안 ‘죄수들의 독서’를 담당했던 터줏대감 브룩스였다. 브룩스는 30여 년 동안 혼자서 해도 충분했던 이 일에 ‘조수’를 붙여준 노튼 소장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도서관 업무보다도 밀려드는 간수들의 ‘재정 상담’에 바빠진 앤디는 비로소 노튼 소장의 의중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소장보다 더 잽싸게 앤디의 능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발 빠른 간수들이었다. 자녀교육 신탁예금을 계획하려는 간수에게 앤디는 묻는다. “아들을 보내고 싶은 대학이 어딥니까? 하버드입니까, 아니면 예일입니까?” 간수들은 앤디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왔지만 감옥의 간수 월급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대학을 금방이라도 보내줄 것만 같은 앤디의 듬직함에 환호작약한다. 이제 간수들은 물론 소장조차도 앤디를 무시하지 못한다. 

   쇼생크의 죄수들은 앤디의 폭발적인 인기를 실감하며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한다. “간수가 죄수한테 별 아양을 다 떨더군.” “앤디가 간수들을 아주 가지고 놀았구먼?” 앤디는 털끝만큼도 우쭐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한다. “난 안 그랬어. 그저 재정 자문을 해 주는 죄수일 뿐이야. 귀여운 강아지지.” 죄수들은 세탁소의 고된 잡무에서 벗어난 앤디를 부러워하며 말한다. “귀여운 강아지니까 세탁소에서도 빼준 건가?” 앤디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한다. “그 이상이지, 도서실을 확장할거야.”
    그는 언제나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자신의 사용법’을 찾아낸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앤디의 두 눈에는 언제부턴가 은밀한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주 의회에 편지를 보내 도서 기금을 요구하겠다는 앤디의 황당한 제안에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찰 뿐이다. 죄수에게 책이 무슨 소용이냐, 그저 당구대나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죄수들. 단지 앤디가 힘겨운 육체노동에서 벗어난 것을 부러워하던 죄수들은 앤디의 마음속에서 이제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 저 내밀한 ‘꿈의 지도’를 짐작도 하지 못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앤디가 결국 탈옥에 성공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탈옥시키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감옥의 훈육에 길들여지거나, 감옥에서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다치거나 미치는 수밖에 없었던 죄수들에게, 앤디는 이 움쭉달싹할 수 없는 광대한 원룸, 그 어디에도 간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만 같은 치밀한 감시체계 안에서도, 우리의 욕망이 꿈틀거릴 수 있는 ‘CCTV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증명한다. 아니, 그는 무엇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무언가를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임을 증명한다.
    그는 잃어버린 영토를 찾는 정복자나 탐험가가 아니라 ‘지도에도 없는 영토’를 만들어 내놓고 마치 그곳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로 인해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빼고는 별로 자랑할 것이 없던 쇼생크 감옥 도서관은 총천연색 문화의 향기가 넘실대는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앤디는 자신이 말 한대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튼 소장이 말했듯이 답장이 없었습니다. 쇼생크의 간수의 절반은 듀프레인의 손을 거쳤습니다. 일 년이 지나자 소장을 포함해 모든 간수들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체육대회를 핑계로 다른 지역 간수들도 모여들 정도였지요. 그들은 모두 한 해의 세금 공제를 위한 명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잘나가는 사업이었습니다. 세금 징수기에는 너무 바빠 조수가 필요했죠. 저는 기쁘게도 한  달간은 목공소 일을 쉴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라는 성경 구절을 좋아한다는 앤디.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오늘이 바로 생애 최고의 그날인 듯 살아간다. 노튼 소장도 이 구절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늘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주인이 돌아올 날에 대한 노예의 공포 때문이다. 앤디는 단지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해서 잠도 들지 못하고 간신히 깨어 있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올 때를 스스로 결정하고 준비하는, 이미 주인의 머리 위에서 주인의 행동 패턴을 읽어내는 자,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진짜 삶이 모범이 될 수 없기에 성경의 권위를 참칭해야 존속되는 노튼의 권위. 앤디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장이 없는 주 의회를 향해, 소장이 여섯 번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은 쇼생크 도서관에 도서기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한다. 몇 년 동안 일주일도 거르지 않고, 답장 한 번 오지 않는 곳에 편지를 보내는 앤디. 초인의 재능 중 가장 모방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반복’에도 ‘권태’를 느낄 줄 모르는, 지칠 줄 모르는 ‘놀이’의 열정이다. 초인은 똑같은 주사위를 천만 번 던지더라도 매번 다른 표정으로, 매번 다른 마음가짐으로 게임에 임할 것이다.
    똑같은 성경을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의 기로가 펼쳐진다. 노튼은 성경을 무기로 성경 뒤에 숨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데 집중하고, 앤디는 성경의 말씀과 함께 성경을 ‘물질’로 이용한다. 앤디에게 성경은 또 하나의 리타 헤이워드였고, 자신의 진짜 자아를 잠시(10여 년 동안!) 은폐하기 위한 영혼의 베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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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9-1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여울님의 시네필 다이어리의 초반부는 뭐랄까?
철학 속의 영화가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욕망 속에 삶이 있다는 것이죠.
지금의 글쓰기가 딱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 속의 철학이 있는 그야말로 철학으로 영화읽기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삶 속에서 작가의 욕망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고
영화를 통해서 철학과 삶이 유리되지 않고
삶의 철학적 통찰을 볼 수 있습니다.

블링블링 2009-09-1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통의 예방주사가 아니라 영혼의 힘을 길러주는 창조적 긴장이라. 니체 아저씨, 늘 어려운 것만 골라 하드트레이닝시키는 영혼의 스파르타 교육 전문가인 것 같아요, 쿨럭....^^

둥이 2009-09-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여러번 본 영화인데..
다음이 궁굼해지져?
전 아무래도 이번엔 영화에 너무 빠진것 같아여^^

sotkfkd 2009-09-2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⑤

 

 5. 모든 곳이 감옥이다,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한

   
 

그대처럼 정처 없는 자들은 결국 감옥조차도 행복한 곳으로 여기게 된다. 그대는 일찍이 갇혀 있는 범죄자들이 잠자는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그들은 조용히 잠을 잔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안전을 즐기는 것이다. 
  

-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442쪽.

 
   

   원룸에서는 숨바꼭질을 할 수 없다. ‘원룸’이라는 현대적 공간의 치명적인 단점은,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침대와 책상(휴식과 노동)을 한 공간에 몰아넣고,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한곳에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밀폐된 동심원적 공간에서는 방 안의 어느 지점에 앉아도 침대와 책상이 동시에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시점’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다. 원룸뿐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디지털 무언족’으로 살아가며 한동안 오직 인터넷만으로 세상과 소통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유비쿼터스의 환상이, 우리를 마치 ‘모든 곳에 존재하는 듯’한 착시를 선물하지만, 감각이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는 스스로 만든 무형의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옥은 단지 죄수들만을 위해 고안된 공간이 아니다. 감각의 한계를 고정시키는 한, 경험과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한, 어디든 쉽게 감옥으로 돌변해버린다.  

   쇼생크 감옥에서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한 죄수들의 특징은, 아마도 그들이 감옥 바깥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감옥에서는 적어도 배를 곯을 일은 없다. 피난민이나 홈리스처럼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감옥 바깥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부자유만 은근슬쩍 간과하면, 감옥은 어느새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일자리를 걱정하지도,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를 조바심에 떨지 않아도, 다음 범죄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진정한 ‘수인(囚人)’이 되는 순간은 단지 육체가 감옥에 갇히는 순간이 아니라, 이렇듯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순간, 감옥 안의 ‘제한된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다.   

  

   
 

감옥에서. ― 내 눈이 지금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활동하고 사는 공간은 이렇듯 작은 곳이다. 이 지평선이 크고 작은 직접적인 내 운명을 규정하고, 나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자신에게 특유한 하나의 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 원에는 중심이 있다. (……) 그리고 우리는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척도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삶을 측정한다. (……) 우리의 감각기관이 갖는 습관으로 인해 우리는 감각의 거짓과 기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감각기관들이 다시 우리의 모든 판단과 ‘인식’의 기초가 된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실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뒷길로 샛길도 없다! 우리는 자신의 그물 안에 갇혀 있다. 우리들 거미는 이 그물 안에서 무엇을 붙잡든 바로 우리의 그물 안에 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다. 


-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135쪽.

 
   
   대부분의 죄수는 감옥 생활에 다만 ‘적응’하려 한다. 이미 적응된 사람은 적응을 뛰어넘어 감옥 생활에 애착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런데 앤디는 뭐가 그리 바쁜지 머릿속으로 늘 딴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도 그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 그는 주어진 노동만 간신히 해내기도 바쁜 다른 죄수들과 달리, 틈만 나면 없는 일도 굳이 만들어낸다. 간수 하들리의 골치 아픈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준 이후로 그는 감옥 안에서 인간-은행이자 인간-세무서가 된다. 하들리의 입소문 마케팅 덕분에 그는 주변 간수들의 모든 세금 환급을 담당해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뿐만 아니라 신참 죄수 토미를 가르쳐 검정고시에 합격하게 하며 감옥을 ‘학교’로 만들기도 하고, 있으나 마나 했던 유명무실한 도서관을 갈고 닦아 감옥 안의 멋진 문화 공간으로 만들기도 하며, 광활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던 감옥 전체를 멋진 음악 감상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는 감옥 안의 기계적 배치를 바꿈으로써 완고하기 그지없던 감옥이라는 기계적 공간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욕망이 꿈틀대는 역동적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그렇게 그는 감옥에서조차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한다. 그는 감옥을 마치 감각의 한계를 확장하는 실험실처럼 사용한다. 그는 늘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며,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고착된 대상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그는 레드를 ‘친구’로서 아끼지만 레드에게 끈끈한 연민을 느끼지 않으며, 동료를 존중하지만, 그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감옥이라는 밀폐된 세계 안에서 자신만의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그로 인해 쇼생크 감옥은 점점 ‘최초의 사건들’로 가득해 진다. 그가 사는 곳은 어느새 ‘단지 감옥’이 아니게 된다. 그는 어떻게 하면 감옥 안의 욕망의 배치를 바꿀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고 실천한다. 그리고 무슨 속셈인지 그는 지질학까지 연구한다. 주어진 감각의 경계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과 취미를 찾아다니는 앤디의 열정. 그것은 그의 경이로운 미래를 예언하는 정교한 복선이다. 

   앤디는 레드에게 체스를 가르쳐주겠다며 체스판을 구해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체스판은 살 테지만 체스의 ‘말들’은 손수 깎을 것이라는 계획도 들려주며. “남는 게 시간이잖아요. 돌이 없어서 문제죠. 돌은 많은데 쓸모없는 것들뿐이잖아요.” 돌의 종류를 일일이 설명해주며 암석 전문가의 기질을 보이는 앤디. 속을 알 수 없는 앤디의 독특한 취미가 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레드는 앤디를 아끼는 마음이 점점 커진다. 언제든 새로운 일을 벌이는 앤디로 인해 감옥 생활이 더 이상 권태롭지 않기에. 하루는 레드가 영화 <길다>의 눈부신 히로인 리타 헤이워드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앤디가 다가와 어이없는 부탁을 한다. 바로 저 여자, 리타 헤이워드를 구해달라고. 모든 물품을 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레드는 앤디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는다. 몇 주 걸릴 테니 기다려보라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죄수들의 영화상영관을 나오던 앤디를, 또다시 보그스 일행이 급습한다. 앤디는 주변의 모든 기물을 이용해 저항한다. 치욕스러운 포즈를 원하는 보그스의 비열한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앤디는 죽을 힘을 다해 자신을 보호한다. “보그스는 그날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당도 마찬가지였죠. 앤디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때리기만 했습니다. 듀프레인은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졌죠. 보그스는 일주일간 독방에 갇혔습니다.” 뜻밖에도 앤디의 자원봉사에 힘입어 거액의 유산을 챙긴 하들리가 보그스를 처절하게 응징한다. “그 후로 녀석들은 더 이상 듀프레인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보그스는 못 걷게 됐죠. 병원으로 이송되어 평생 빨대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앤디로 인해 한낮의 야외 맥주라는 기적을 선물 받은 레드와 친구들은, 그동안 앤디를 도와줄 수 없었던 죄책감까지 더해져, 곧 퇴원할 앤디의 환영 선물을 마련한다. “앤디가 체스를 좋아하니까 돌을 구해주자고.” 말똥과 돌도 구분 못하던 죄수들은 레드의 지휘 아래 앤디가 평생 깎아도 남을 엄청난 돌들을 무더기로 구해다 준다. 가만히 있어도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였던 ‘귀공자’ 앤디는 드디어 동료의 진정한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이윽고 레드가 감옥 안의 죄수들을 위해 준비한 물품들이 도착한다. 담배, 껌, 위스키, 여자 나체 무늬의 카드……. 그 중 가장 중요한 물품은 바로 앤디가 부탁한 ‘리타 헤이워드’의 포스터였다. 앤디는 보그스 일당의 상습적인 폭행 속에서도 삶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존엄을 잃지 않았다. 이제 감옥은 앤디에게 더 이상 굴욕의 공간이 아니다. 앤디는 철통같은 감옥의 질서에 크고 작은 균열을 내어 감옥을 때로는 축제의 공간으로 때로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역전시킨다. 게다가 앤디에게는 새로운 애인(?)까지 생겼다. 레드가 구해다 준 아름다운 리타 헤이워드는 마치 구원의 여신처럼 앤디의 감방을 화사하게 밝혀준다. 저 리타 헤이워드의 탐스러운 육체 뒤에 아무도 모를 앤디의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계획되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와 변기밖에 없는 초라한 단칸방에 수십 년간 갇혀 산 앤디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비밀의 방들’이 존재했고, 그 누구도 앤디의 ‘뇌 구조’를 쉽게 밝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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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09-09-1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인생에 리타 헤이워드는 무엇일까?(퀴즈입니다)

예인 2009-09-1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생크 탈출의 서사구조와 빠삐용의 서사구조가 유사합니다. 감옥이란 공간 배치가 그렇고 불가능한 감옥의 탈출이 그렇지요. 빠삐용도 감옥의 친구 드가가 나오지요. 같이 비교하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lost memories 2009-09-14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퀴즈 내신 분! 답은 안 써주시는 건가요?^^ㅋㅋ 저는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제 삶 자체가 리타 헤이워드인 것 같아요. 리타 헤이워드 뒤에 감춰진 검은 구멍, 그곳에 아마도 진짜 내가 뒹굴뒹굴 웅크리고 있을텐데 그게 누구인지 아직도 찾고 있는 중.....

둥이 2009-09-14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내 인생의 리타 헤이워드는?
아마도 지금 집에서 찡찡거리는 제 아이가 아닐까여^^
그 아이를 보면서 저도 새로운 나를 찾아가고 있으니까여^^


sotkfkd 2009-09-2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④

 

 4. 내가 떠나온 세계,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사람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 (……)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191쪽.

 
   

   도무지 길들이기 힘든 개인의 야성을 빼앗는 가장 효과적인 비결은 ‘노동’을 통해 개개인의 신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니체의 날카로운 성찰은, 감옥에서야말로 훌륭하게 적용된다. 감옥에서는 노동이 최고의 간수다. 숲 속을 마음껏 질주하던 야수들을 규칙적인 생활과 소모적인 노동이라는 철책에 가둠으로써, 야수들은 가축으로 훈육된다. 쇼생크의 죄수들도 이러한 ‘노동의 철책’에 감금된다. 이번에는 야외 노동이다.
    죄수들에게는 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 노동 착취인가. 쇼생크 감옥은 앤디가 복역한지 3년이 되던 해, 감옥 근처 공장의 지붕 보수공사에 죄수들을 동원한다. 이 보상 없는 고된 노동 뒤에는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감옥 바깥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점이었다. 앤디와 레드는 이 보수공사에 동원되는 행운(?)을 누린다. 감옥 바깥의 공기를 단 한 번이라도 마시고 싶은, 레드의 앙큼한 ‘뇌물 공세(간수들에게 담배 한 갑씩!)’ 덕분이었다. 

   고분고분하지 못한 죄수들을 폭행하는 데 엄청난 재능(?)을 선보인, 악명 높은 간수 하들리. 그는 죄수들의 노동을 감독하면서 동료 간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몇 년 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친형이 얼마 전에 죽어 유산을 남겼는데, 유산이 백만 달러나 된다는 거였다. 자기 몫으로 3만 5천 달러를 남겼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나머지, 세금 때문에 ‘한 몫’ 챙기기도 힘들겠다는 투덜거림이었다. 세금이 너무 많아서 새 차 한 대 뽑을 돈 밖에는 안 남을 거라고 불평하는 하들리의 중얼거림을 앤디도 듣는다. 묵묵히 지붕 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앤디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겁도 없이 하들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간수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까 걱정이 된 레드는 앤디를 말려보지만 이미 앤디는 간수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중이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앤디가 던진 질문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들리 씨. 아내를 믿으십니까?” 하들리는 갑자기 자신에게 꽂힌 난데없는 질문에 놀라 앤디의 멱살을 맞잡고 지붕 끝으로 몰아세운다. 일촉즉발의 순간, 간수가 멱살을 잡은 손만 놓으면 앤디는 지붕 밑으로 떨어져 즉사할 참이다.  

   하들리: 네가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앤디: (멱살이 붙들려 숨을 제대로 못 쉬면서도 차분하게 묻는다) 아내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냐는 겁니다. 
   하들리: (앤디의 멱살을 더욱 바짝 잡아당기며) 계속 나불거려봐. 확실히 죽여줄 테니까. 
   앤디: 당신이 아내를 믿는다면 그 돈을 고스란히 가질 수 있어요. 3만 5천 달러요.
   하들리: 3만 5천을 전부?
   앤디: 전부요. 잔돈까지 빠짐없이 전부 다.
   하들리: 설명해봐. 
   앤디: 아내에게 그 돈을 주는 겁니다. 국세청은 6만 달러까지는 1회 한도로 배우자 양도를 허락하거든요.
   하들리: 세금으로 안 뜯어가고?
   앤디: 네. 1센트도 건드릴 수 없죠.
   하들리: 흥. 네가 바로 그 은행가로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나더러 너처럼 감옥살이 하라는 거야?
   앤디: 합법적인 거예요. 국세청에 물어보세요. 똑같이 말할 거예요. 직접 조사해 보세요. (……) 그래도 서류 작성할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하들리: 제기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들!
   앤디: 변호사 대신 제가 서류를 작성해 드리죠. 비용도 절약되잖아요. 서류만 가져오시면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저희 동료들에게 맥주 세 병씩만 주세요.
   하들리: 뭐, 동료? 정말 웃기시는군.
   앤디: 보통 사람들처럼 그저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제 조건입니다. 

   하들리는 앤디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변호사 선임 비용까지 한 푼도 안 드는 뜻밖의 행운을 놓칠 수 없었으니 그 ‘기묘한 거래’는 성립된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예전보다 조금 젖은 듯한, 애잔한 목소리로 이어진다. “쇼생크 감옥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949년 봄. 지붕을 고치던 죄수들은 아침에 옥상에 둘러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셨습니다. 쇼생크의 악명 높은 간수가 베풀어준 뜻밖의 호의로 말입니다. 그런 냉혈한도 부드러워질 때가 있더군요. 죄수들이 온몸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지붕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니, 마치 우리가 자유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마치 자기 집 지붕 위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죠. 그 순간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듀프레인은 응달에 앉아 휴식을 취했습니다.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띤 채,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걸 지켜보았죠. 간수에게 잘 보이려고 했거나 친구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그는 단지 옛날처럼 보통 사람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찬란한 희열과 가눌 수 없는 슬픔이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앤디는 ‘동료’가 권하는 술도 마시지 않고, 자신은 술을 끊었다며, 다만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맞아보는, ‘감옥 바깥의 햇살’을 만끽하며. 아무도 앤디를 ‘동료’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앤디에게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료였으리라.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동료들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 순간, 정말 감옥 바깥에서 친구들이 시시덕거리며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롭다. 감옥 안의 어떤 폭력과 억압도 막아낼 것만 같았던 앤디의 투명코트는 이렇게 아름다운 기적의 풍경을 연출해낸다. 꼬질꼬질하게 차려 입은 죄수들이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맥주를 마시며 함께 둘러앉아 온몸으로 광합성을 하는, 이 멋진 풍경에는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돈다. 앤디가 쇼생크 감옥에 최초로 들여온 것은 단지 맥주만이 아니라 맥주보다 알싸한 자유의 바이러스였다. 그는 혼자만의 탈출을 꿈꾼 것이 아니라, 희망 없는 이곳 쇼생크에서도, 창살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살처럼 따스한 자유의 틈새를, 함께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 순간, 그의 몸은 간수의 속박 아래 있었지만 그는 아무도 모르게 유체이탈을 감행하여, 지붕 위를 훌쩍 날아올라 감옥 바깥의 세상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내가 말했듯이 앤디는 보이지 않는 코트처럼 자유를 입고 다녔고 한 번도 죄수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결코 그 예리함을 잃지 않았다. 앤디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긴긴 밤을 보내기 위해 감방 안으로 들어가는 죄수의 걸음걸이-어깨는 축 쳐져 있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떼어놓는―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앤디는 따듯한 식사와 예쁜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어깨를 곧게 펴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감방을 향해 걸어가곤 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물러터진 야채덩어리와 잘 으깨지지 않아서 덩어리가 그대로 있는 감자, 죄수들이 정체 모를 고기라고 부르는 비곗덩어리와 연골투성이의 고기 비슷한 것 한두 조각과 벽에 걸려 있는 라켈 웰치의 포스터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스티븐 킹, <쇼생크탈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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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09-09-1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수라는 사회의 약자입장에서, 강자의 포스를 드러내는,,,

둥이 2009-09-10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케이블에서 방송하면 채널을 돌리기 힘든 그런 영화져^^

rememberingLenin 2009-09-10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95년엔가 고딩 때 이 영화를 봐서 기억이 어렴풋하군요. 앤디는 재치가 있는데, 노동의 단조로움과 강박을 깨는 그런 부드러움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평이하고 읽기 쉽지만, 어딘지 너무 평범한 것 같아 아쉽다는 인상은 드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바르트와 색계를 다루는 글에서도 <카메라 루시다>의 핵심인 '시간'의 문제가 색계에 가려진다는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사진에는 과거의 '현재성'이 묻어 있으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맨손체조 2009-09-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방에다가 아내 몰래 맥주를 반입해 놓아야 겠어요. '알싸한 자유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서요^^*

sotkfkd 2009-09-2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를 입고 다닐 것!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③

 

 3.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그 다름은 무엇일까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평균적인, 공동의 체험’을 강요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길들여온 가장 심각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 속담을 듣는다면 아마도 니체는 치를 떨지 않을까. 모난 것이 과연 ‘나쁜 것’인가, 그 ‘정’은 도대체 누가 내려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 현실이 ‘옳다’는 것인가……. 니체는 아마도 수없는 질문을 퍼부으며 모난 돌을 ‘다른 돌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비겁한 권력의 맨얼굴을 파헤치지 않을까. 니체가 혐오한 약자의 근성은 바로 ‘무리지어’ 다니며 ‘우리가 표준이야, 우리가 대세야’라 외치는 패거리의 행태였다. 강한 자는 무리지어 다닐 필요가 없다. 강한 자는 자기 안에서 자신의 윤리를 창조해낸다. 결코 타인에게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자,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자연스럽게’ 행해도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약자의 무리들은 강한 자의 바로 이런 점을 증오한다. 굳이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기꺼이 은둔하기를 선택하며,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자의 ‘홀로 있음’을, 그들은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뭉크, <니체의 초상>, 1906. 

   
 

좀더 유사하고 좀더 평범한 인간들은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좀더 선택된 자, 좀더 예민한 자, 좀더 희귀한 자, 좀더 이해하기 어려운 자들은 쉽게 고립되기 쉬우며,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 재난을 당하기도 쉽고 거의 번식하지도 못한다. (……) 유사한 것, 일상적인 것, 평균적인 것, 무리적인 것으로 ―비속한 것으로!― 인간을 다시 교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거대한 저항력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91쪽. 

 
   
   레드(모건 프리먼)를 매혹시킨 앤디(팀 로빈스)의 매력도 바로 그 ‘홀로 있음’이었다. 앤디는 좀처럼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고, 말을 해도 두 단어 이상 입을 떼지 않음으로써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앤디 듀프레인은 죄수들과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옥 생활에 적응하려다 보니 그런 거라 생각했죠. 한 달이 지나자 앤디는 두 단어 이상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을 건 첫번째 상대는 바로 저였습니다.” 앤디가 자신을 소개하며 다가오자 레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아내를 살해한 은행가시군. 왜 죽였소?” 앤디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한다. “난 안 죽였어요.”

   레드는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당신도 똑같군. 여기 있는 죄수 모두 자기는 무죄라고 생각하지.” 레드는 운동장에서 산책하는 죄수 중 한 명을 무작위로 골라 질문한다. “어이, 자네 죄명이 뭐지?” 죄수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흥, 무슨 죄? 무능한 변호사 때문이지.” 앤디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침묵한다. 레드는 앤디의 심성을 떠보려는 듯이 질문을 이어나간다. “자네, 거만하다고 소문났던데. 자네는 우리들과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야?” 앤디는 형형한 눈빛으로 레드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런 식의 질문 자체가 부당하다는 듯이. “당신 생각은 어때요?” 레드는 인정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앤디는 물품 공급원 레드에게 아주 작은 돌망치 하나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은 암석 수집광이었는데, 그 취미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레드는 뭐든지 구해줄 수는 있지만 ‘흉기’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앤디는 여기엔 자신의 ‘적’이 없다며 그 작은 망치를 흉기로 쓸 일은 없다고 말한다. 레드는 앤디에게 경고한다. “적이 없다고? 두고 보자고. 자네에게 보그스 일당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조심해.” 앤디는 순진한 눈빛으로 “난 게이가 아니라고 말하면 되죠.”라고 대답한다. 레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의 강도를 높인다. “저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저들의 머릿속에서는 ‘그 짓’밖에 든 것이 없어. 만일 내가 너라면 뒤통수에도 눈을 달고 다닐 거야.” 레드는 절대로 망치를 ‘흉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 불시 검열 때 걸리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임을 분명히 해둔다. “그런데 당신을 왜 ‘레드’라고 부르죠?” 레드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내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의 인종적 특수성이 자신과 다른 죄수들 간에 ‘거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레드의 ‘다름’은 피부색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에 있다.

   레드는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 앤디의 ‘다름’을 알아차렸다. 앤디는 거만한 것이 아니라 감옥 생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죄수들, 자신이 ‘열등한 무리’로 전락했음을 인정하는 다른 죄수들과 ‘다른’ 사람일 뿐임을. “왜 사람들이 그를 거만하다고 수군거렸는지를,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듀프레인은 말수가 적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투도 달랐습니다. 세상사에는 초연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마치 이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투명코트를 입은 것 같았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좋았습니다.” 이 감옥의 ‘죄수다움’을 만드는 온갖 폭력과 욕설과 굴욕으로부터 앤디를 지켜주는 ‘투명코트’를 알아본 것도 레드뿐이었다. 그 투명코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리의 도덕으로부터의 자유, 그 어떤 외부적 강제와 타인의 시선에도 휘둘리지 않는 무한한 자유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앤디 앞에는 이 아름다운 투명코트의 강도를 시험하는 수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다. 앤디를 향한 보그스의 끈적끈적한 시선은 그 첫번째 난관이었다.

   보그스는 샤워장에서 앤디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며 추파를 던진다. “이봐, 너 아직 싱싱하지? 아직 아무도 안 건드렸지? 우린 모두 친구가 필요해. 네 친구가 돼줄게. 짜식, 좋으면서 내숭 떨기는!” 앤디는 뱀처럼 감겨오는 보그스의 시선을 무심하게 떨쳐낸다. 그러나 사건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세탁장에서 노역을 하던 앤디는 가루비누가 떨어졌다는 동료의 말에 묵묵히 창고로 발걸음을 향한다. 창고에는 이미 계획하고 있던 듯 보그스 일당들이 앤디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떼 지어 덤벼들어 한 사람을 겁탈하려 한다. 앤디는 가루비누를 움켜쥔 채 “이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어.”라고 위협해보지만 사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여러 명의 건장한 남자를 혼자서 당해낼 수가 없다.
    보그스는 역겨운 표정으로 앤디의 저항을 즐긴다. “그래, 덤벼봐. 반항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레드의 초연한 듯한 내레이션은 계속 이어진다. “듀프레인이 훌륭한 싸움꾼이어서 무사히 풀려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지만, 감옥은 동화의 세계가 아닙니다. 듀프레인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우리 모두는 알 수 있었죠. (……) 종종 듀프레인은 얼굴에 멍 자국이 가득한 채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물리치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니었습니다. (……) 처음 2년은 듀프레인에게는 최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활이 계속됐다면 듀프레인은 완전히 망가졌을 것입니다.” 

   앤디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고통을 끌어안고 침묵한다. 그는 어떤 무리와도 섞이지 않고 무리 속에서도 홀로 은둔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는 구원의 손길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어떤 패거리의 집단적 폭력도 더럽힐 수 없는 앤디의 투명코트는 과연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앤디는 분명 엄청나게 ‘모난 돌’이지만 자신에게 날아오는 망치질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보그스 일당으로부터는 성폭행을 당하고, 감옥의 다른 죄수들로부터는 ‘거만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모난 돌에게 가해지는 망치질을 당하면서도 자기 안의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감옥의 교화’로 인해 온순하게 길들여지지도, 그의 육체를 탐하는 무리의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자는 끊임없이 각자 흩어지려 하고 약자는 집요하게 서로 무리 지으려 한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 혹은 고귀한 자는 자신의 가치를 외부에 의탁하지 않는 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자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한다. 이러한 도덕은 자기 예찬이다. 그 전경에는 충만한 감정이 넘쳐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부유함의 의식이 있다. 고귀한 인간 역시 불행한 사람을 돕는다. 그러나 거의 동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힘이 낳은 충동에서 돕는다.  

- 니체, 김정현 역, <선악의 저편>, 책세상, 2002,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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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ky way 2009-09-10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자는 끊임없이 서로 흩어지려 하고, 약자는 집요하게 서로 무리지으려 한다니, 순간 움찔하네요, 쿡ㅠㅠ ㅎㅎ

doingnow12 2009-09-1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표준에 맞춰 요리콩 조리콩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꽃가루같은 사람이 저라 저도 움찔..ㅋㅋ

맨손체조 2009-09-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고귀한 자가 되고 싶기는 하지만, 이건, 담배를 필 때도 무리지어 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