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④

   

4.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2)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 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꿈꿀 권리>, 열화당, 1995, 72쪽.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 나는 밀밭>, 1890


   그저 단순한 노란색이 아니라 반드시 ‘고흐빛 노랑’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 빛깔 앞에서 우리는 흐뭇이 미소를 흘린다. 단지 물감이 아니라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을 바른 듯한, 이 세상 하나뿐인 황금빛의 아우라 속에서 우리는 고흐의 눈이 되어, 고흐의 숨결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바슐라르는 고흐만이 낼 수 있는 그 선연하고도 야생적인 황색이야말로 고흐의 ‘한없는 꿈’이 만들어낸,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라고 말했다. 고흐빛 노랑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꿰뚫는 응시 속에서 발견된, 예술가의 생애 그 자체라고.

 
 

   원령공주가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들개의 딸’이길 원했던 이유 또한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숲의 빛깔’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라 그 수많은 동물들과 숲의 정령들을 한 아름에 품어 안는, 그녀에겐 세상에 하나뿐인 ‘원령빛 초록색’을 말이다. 그녀는 인간에게는 한없이 적대적이지만 숲의 동식물 하나하나, 깜찍한 숲의 정령 하나하나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 그녀가 밤마다 들개 모로의 등허리를 타고 몰래 인간의 마을에 잠입하여 하는 일도 단지 ‘나무를 심는 일’을 위해서다. 그녀의 초록빛, 아니 숲의 모든 생물들을 위한 초록빛을 지키기 위해, ‘시시신’의 숲을 인간의 자연개발을 위한 미끼로 던져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숲의 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원령공주가 “들개들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 계집애”라고 말한다. 그들이 시시신의 숲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원령공주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들은 숲을 정복하여 마음껏 자원으로 이용하고 숲의 개발을 가로막는 들개들을 몰살하여 ‘풍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재앙신이 바로 타타라 마을의 부족장 에보시의 총에 맞아 한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가 가져온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여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응원을 보낸다.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제작 기술에 뛰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불로 연마한 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힘에 조화롭게 순응하던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상징적인 이미지다. 불과 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첨단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는 에보시의 총에 맞은 멧돼지신이 재앙신으로 변했다는 사실, 재앙신의 저주는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때문임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원령공주의 최대 적수도 바로 에보시다.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이끄는 부족장이자 걸출한 전략가로서 수많은 전쟁 경험도 갖고 있다. 에보시는 거리낌없이 숲을 파괴하며 숲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인간의 재화로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에보시가 타타라 마을 부족 전체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 나병에 걸린 사람들, 사회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까지 모두 거두어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보시의 선택은 ‘가장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자본가의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린 노인은 에보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시타카에게 부디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자네의 분노와 슬픔은 잘 알겠네. 허나 저 분을 죽이진 말게. 우릴 인간 대접하는 유일한 분이라네. 우리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썩은 살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셨지. 산다는 건 정말 힘들고 괴로워. 난 세상과 사람을 저주하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 날 봐서라도 제발, 그분을 죽이지 말게.” 노인은 아시타카의 연민을 자극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에보시는 ‘인간의 생존’과 ‘자연의 이용’을 등가로 판단한다.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족은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신들만 사라지면 괴물들도 보통 짐승이 되지. 숲에 인간의 빛이 들고 들개가 잠잠해지면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원령공주도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시시신의 피는 병 치료에 유용해. 나병환자들도 고치고 자네 상처도 고칠 수 있을지 몰라.” 

   에보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이자 용의주도한 정치가이자 주도면밀한 전쟁전문가의 원형으로 그려진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개발한 화승총은 그 시대 최고의 전쟁 무기였던 것이다. “이 총은 괴물이건 무사의 갑옷이건 모두 박살낸다.” 아시타카는 화승총의 위력에 놀라 타타라 마을 사람에게 말한다. “숲을 빼앗고, 산의 신들을 재앙신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그 총으로 원한과 저주를 살 셈이오!” 아시타카는 아직 원령공주와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인간이길 포기해가면서까지 들개와 동거하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이해한다. 원령공주에게 숲의 빛깔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정확히 등가인 것이다.
   그녀는 자연을 그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기를 선택한 존재다. 만약 바슐라르가 <원령공주>를 보았다면 자신이 꿈꾸던 낙원을 가꿀 용맹스러운 전사의 이미지를 바로 여기서 찾았다며 감탄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자신의 행복과 숲의 행복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숲의 수호신인 시시신의 피를 질병 치료에 이용하려는 문명인의 상상력으로는 결코 원령공주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잃어버린 반 고흐의 황금빛을, 잃어버린 원령 공주의 초록빛을, 마르크 샤갈의 잃어버린 낙원의 빛깔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샤갈의 그림은 대지와 인간이 반목하지 않았던 시대의 바로 그 원초적 낙원을, 대지의 목소리에 인간이 귀 기울일 줄 알았고 인간이 ‘땅처럼 숨쉬는 법’을 알고 있었던 시대의,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만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낙원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 마르크 샤갈, <낙원>, 1961.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싫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쳐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이가림 역, <꿈꿀 권리>, 열화당,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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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0-27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흐와 바슐라르와 원령공주와 샤갈이라...묘하게 잘 어울리는 데요?^^

sotkfkd 2009-10-3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doingnow 2009-11-0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호.. olleh!!는 이럴때 쓰는거죠?ㅋㅋ 재밌게 잘 읽었어용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③

   

3.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1)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 타고르, <반딧불> 중에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전기가 어둠을 서양의 바깥으로 몰아낸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어. (……) 성서에는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고 묘사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여기에서는 빛이 어둠을 몰아내네. (……) 파괴된 도시들의 운명에 대한 근심으로 예언자들이 비탄에 잠겨 울부짖던 옛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숲이나 사막,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과 사원, 사유하기에 좋은 정적과 고독 등의 상실과 파괴를 슬퍼하고 있어. 도시-빛은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고요함을 깨뜨리고, 자연의 침묵에 문자를 들러붙게 하고, 생물을 멸종시키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절망의 아우성이 퍼지던 그 옛날의 적막한 공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야.  


 -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 <천사들의 전설>, 그린비, 2008, 67~70쪽. 

 
   

 

   전기는 인류의 오랜 공포였던 어둠을 몰아내면서, 동시에 어둠에 깃드는 몽상의 시간도 함께 추방해버렸다. 촛불은 빛을 생성하면서 어둠이 거처할 여백을 남겨두지만, 형광등은 빛을 생산하는 동시에 어둠을 말끔히 삭제해버린다. 어둠과 빛을 한 공간 안에 담아내는 촛불의 너른 품 안에서 인간은 밤의 무의식과 낮의 의식을 결합시키는 몽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는 전등으로 인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빛의 시대’가 열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전등으로 인해 빼앗겨버렸다고. 전등 앞에서 우리는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기계적인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로맨틱 가이의 프로포즈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품, 그것은 바로 ‘촛불’이다. ‘저 남자를 사랑할까 말까’하고 고민하는 여성에게, ‘흔들리는 촛불’은, 어둠과 빛을 모순 없이 공존케 하는 촛불의 널따란 품은, 계산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몽환적 감성을 일깨우는 멋진 뮤즈의 역할을 자임한다. 흔들리는 여인의 마음을 더욱 제대로 뒤흔들어 버리는 촛불의 미학을 활용할 줄 아는 남성들의 지혜. 그것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마음에 평등하게 내재한 본능적인 천재성(?)이 아닐까.
    이 순간 촛불은 ‘문명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메신저’이며, 어둠의 몽상을 빛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주체로 거듭난다. 촛불의 빛을 굳이 없애버리지 않고 ‘가만히 남겨두는’ 어둠 너머로, 우리는 몽상의 나래를 펼친다. 촛불 너머의 세계, 무지개 저편의 세상, 합리적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꿈을. 촛불은 의식이 ‘불확실성’이라 명명하는 어둠의 공간을 꿈과 이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원령공주>에서 평화로운 에미시족의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재앙신’은 ‘몽상의 시간을 빼앗긴 자연’의 은유처럼 보인다. 에미시족의 후계자인 아시타카는 성난 멧돼지의 모습을 한 재앙신을 설득하여 원래의 유순한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하지만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길이 없다. 결국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 결투 끝에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자신도 오른 팔에 끔찍한 저주의 상처를 입고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국 재앙신의 탄생 원인을 밝혀 자신에게로 옮겨온 저주를 풀기 위해 아시카타는 서쪽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여행 중에 ‘지코’라는 수도승을 만난 아시카타는 재앙신의 탄생이 ‘시시’신의 숲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시’신의 숲. 그곳에서는 모든 짐승이 태곳적 모습 그대로 거대한 몸을 지니고 있다더군.”


   한편, 서쪽 끝 ‘시시’신의 숲 건너편 타타라 마을에 사는 ‘에보시’ 일행은 식량을 운반하던 도중 거대한 들개의 신 ‘모로’ 일행에게 습격을 당한다. 철로 된 각종 무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에보시 일행은 강력한 총포를 쏴 들개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양쪽 모두 커다란 타격을 입지만 왠지 들개에게 거대한 총포를 쏘아대는 인간의 모습은 자연을 ‘압도’하기보다 자연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듯하다. 들개들의 수장 모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더 많이, 더 강력한 화약으로 들개들을 위협하게 만든다. “저놈이 모로야. 놈은 불사신이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마침 ‘시시’신이 살고 있다는 숲을 지나던 아시타카는 모로 일행에게 습격당한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낸다. 아시타카가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주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들개의 신 ‘모로’와 원령공주 ‘산’. 모로의 곁에서 상처 입은 들개들을 치료해주는 원령공주의 모습을 처음 본 아시타카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에 매혹된다. 아직 자신이 ‘원령공주의 적들’의 편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로 가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된다. 에모시의 여인네들에게 아시타카는 죽을 뻔한 남편들을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원령공주가 들개들과 함께 사는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우리 안의 잃어버린 몽상, 밤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린 무의식의 세계와 조우하는 듯한 환상을 느낀다. 합리적 이성의 세계, 낮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한 우리의 가여운 몽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최근 도심 곳곳에서 일어나는 ‘멧돼지 습격 사건’은 더 이상 ‘동화 속 은유’로 멈추지 않는, 문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우리 시대의 재앙신이 내뿜는 절규의 몸짓이 아닐까.


 

   
 


정신분석가는 지나치게 생각한다. 그는 충분히 꿈꾸지 않는다. 낮의 삶이 표면에 맡겨 놓은 찌꺼기들로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설명하려 하다가,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심연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우리의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누가 도와줄 것인가?  (……) 몽유병 환자는 내려간다. 언제나 태고의 숙소를 찾아 내려간다. (……) 그는 자기 속으로 내려가는가? 자기 저 너머로 가는가? 


 - 가스통 바슐라르, 김현 옮김,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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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 hurts 2009-10-2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에 빠진 남자들의 본능적인 천재성~ㅋㅋ 그러게나 말이예요.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쩜들 그렇게 잘 아는지^^

sotkfkd 2009-10-27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엔 '전기'에 더해진 탐욕이 아닐까. 충분히 꿈꿀 수 없는 것은. 잘 읽었습니다.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②

   

2.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2)

   
 

 객관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진실한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적 몽상에서는 매우 실재적이고 활발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꿈은 경험보다 더욱 더 강력하다.  


 -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바슐라르는 어느 날 정원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은 새를 발견한다. 알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면 부리나케 도망갔겠지만, 품고 있는 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새는 인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버틴다. 바슐라르는 그 새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차마 도망칠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새의 마음이 고스란히 바슐라르에게 전해진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새를 그렇게 떨게 했기 때문에 이제 나 자신이 떤다. 알을 품고 있는 그 새가, 내가 사람임을, 새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존재임을 알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 것이다.” 그는 자신 때문에 떨고 있는 새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온몸으로 ‘새처럼 움직이고 새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추상적 개념만을 닥치는 대로 포식하며 살아 있는 이미지를 꿈꾸는 몽상에 대해서는 극심한 거식 증세를 보여 온 서양 철학의 역사를, 바슐라르는 비판한다. 바슐라르에게 몽상이란 ‘깨어서 꿈꾸는 힘’, 즉 낮의 의식 상태에서도 밤의 무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역동적 행위를 뜻했다. 그에게 몽상은 결코 ‘사유의 포기’가 아니었다. 몽상은 ‘사유의 부재’가 아니라 사유를 준비하는 활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으며, 사유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마음의 토양이며, 투명한 의식으로 무의식을 관찰할 수 있는 영혼의 광학 렌즈였다. 바슐라르는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자의 사유를 연금술적으로 종합하는 힘을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 


   바슐라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향하여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성, 자연의 삶에 경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희망을 찾는다. 자연의 존재가 자신을 개시하는 순간, 그 순간의 황홀경적 조우. 이 순간을 통해 인간은 우주와 대화하고 스스로의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는 절대적 순간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바슐라르는 우리의 ‘언어 습관’ 자체를 뒤집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는 괴테를 ‘위대한 숨꾼’이라고 격찬하면서 ‘숨을 잘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작가 괴테가 뿜어내는 창조성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중에서

 
   



   바슐라르는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이 땅처럼 숨 쉰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을 인간의 문법으로 길들이려는 언어적 습관을 의문에 부쳤다. 의인법은 인간중심적인 문법의 대표주자다. 의인법의 프리즘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인간 따라잡기’와 ‘인간 흉내 내기’에 지내지 않는다. 새들은 사람처럼 도시를 배회하고(‘닭둘기’로 전락한 도시의 비둘기들이여!), 애완동물들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사람처럼 질병을 앓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숨결에 맞게’ 길들이려는 인간의 노력은 한때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원령공주>는 바로 문명을 이룩한 과학과 합리주의가 도달한 ‘사유하는 이성’과 문명에 다가갈수록 멀어져가는 ‘야생의 상상력’ 사이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등장하는 원령공주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늑대소녀에 가까워보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전사의 가면은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향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문명화된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는 길을 택한다. 에미시족의 마을에 살고 있던 소년 아시타카는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타타라마을과 원령공주가 지키고 있는 시시신의 숲 사이를 매개하는 메신저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위에서, ‘몽상’이 숨 쉴 여백의 공간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를 벗어나는 꿈들의 궤적. 그것이 <원령공주>의 세계가 아닐까.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모른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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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2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땅처럼 숨쉬는 인간, 나비처럼 몽상하는 인간. ㅋ....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바슐라르는 언제나 시인처럼 말합니다.

sotkfkd 2009-10-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말기
잘 읽었습니다.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①


   

1.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1) 

   
 

 나는 바슐라르를 대할 때마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인한 사람이다. 그는 서구 인식 전체를 향해 덫을 놓은 사람이다. 


 - 미셸 푸코, 바슐라르 탄생 100주년 기념 인터뷰 중에서

 
   
   
 

실용적 과학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왔건만,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불만족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어느 날 디종에서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어요.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 바슐라르, 폴 지네스티에의 <바슐라르를 알기 위하여> 중에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우체국 전신기사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 중대 중대장에서 고향마을의 과학교사로, 대학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는 과학자에서 소르본 대학 철학교수가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라이프스토리로 유명한, 그러나 그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글쓰기 방식으로 유명한 바슐라르.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즉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봤다. 그런데 생태주의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진 <원령공주>는 내 짐작만큼 ‘생태주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생태주의 너머, 그보다 훨씬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원령공주>는 단지 ‘환경을 보호하자’는 김빠지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원령공주>는 우리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라고 채찍질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함께 보니 그런 막연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길 잃은 몽상이 더욱 확장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이즘(ism)’으로 구획될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과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다. 




   <원령공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분명 생태주의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년 후 우연히 바슐라르를 읽다가 비로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더욱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는 프리즘을 얻게 되었다. 원령공주는 악을 퇴치하는 정의의 사도로서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여신상이 아니다.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대중화된 생태주의는 인간을 ‘죄책감의 동물’로 격하시켜버린다. <원령공주>는 생태주의 그 이상의 메시지, 생태주의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두 경향을 강렬한 보색대비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자연을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파악하는 합리적 이성과 자연을 자신의 존재론적 태반으로 인식하는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근원적인 갈등.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구조를 격렬한 갈등과 대립의 형태로 보여주는 미야자키 하야오식 철학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바슐라르의 프리즘으로 보면 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의 세계’와 ‘개념의 세계’라는 인간의 두 가지 두뇌활동의 근원적인 충돌을 보여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아닐까. 개념의 세계가 과학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미지의 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계몽주의의 확산 이후로 끊임없이 ‘합리적 이성의 장애물’로 인식되어왔던 이미지의 세계, 비논리적 상상의 세계, 주관적 몽상의 세계야말로 바슐라르의 필생의 연구 과제였다. 
 

   
 

이미지는 이미지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몽상 속에서 모여드는 이미지들의 모습 그대로를 꿈꾸면서 말이다. 상상력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지에 대하여 경탄을 할 때만 진정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이미지와 개념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력과 이성이다. 이들 사이에는 배척하는 극성이 작용한다. 자장의 극성들과는 공통점이 없다. 그들은 서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밀어낸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중에서

 
   

 

   이미지를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는 감성의 차원에서는 실존하지만 논리적으로 재생할 수 없는 상상력의 운동이다. 논리적 분석이나 개념적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를 꿈꾸는 것. 아무런 ‘언어’도 발설하지 않는 토토로에게 우리가 매혹되는 이유 또한 그것일 것이다. 개념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편안함, 분석할 수 없는 치유의 힘,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상상력의 자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토템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토토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토토로의 장수비결은 우리 안의 원시적 야생의 꿈을 일깨우는 토템적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 아닐까. 토토로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한 번도 ‘언어’를 발설하지 않는다. 토토로가 뿜어내는 그 푸근함, 그 따뜻함, 그 푹신함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이 상상의 생명체를 향한 전 세계 팬들의 열광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슐라르는 ‘사유하는 의식’보다 ‘꿈꾸는 의식’이 훨씬 더 어려운 지적 행위임을 통찰했다. 말하자면 합리적 이성이 ‘쓸모없다’고 몰아세우는 ‘몽상(daydream)’, 인간의 낮 꿈이야말로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은 사유에 따르는 부차적 능력이거나 진정한 사유를 추구하다 남은 쓸모없는 잔여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구철학은 ‘몽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몽상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림으로써, ‘사유만을 다시 사유하는’ 쳇바퀴를 돈 것이 아닐까. 사유는 창백한 개념의 시체, 물고 물리는 개념들만의 무의미한 연쇄작용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닐까. 바싹 마른 개념들의 무미건조한 사유의 퍼즐이 아니라, 생생한 촉감과 온도와 빛깔을 지닌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바슐라르는 문명의 역사에서 배제된, ‘망각된 몽상의 가치’를 발견해냈다.  


   
 

단순한 인상주의와 몽상에 기반을 둔 주관성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 이 문제에 대한 바슐라르의 대답은 ‘자신에게 충실하기’이다. 인상주의는 사물의 겉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을 통하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문학적 몽상의 활동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다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은 두 번째 독서에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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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0-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모노노케 히메. 하야오 선생의 마스터피스죠, 암요~!^^

sotkfkd 2009-10-2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맞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올 겨울은 바쁠 것 같습니다. 영화들을 모두 다 다시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⑩

   

10.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3)  


   
 

 유목민은 물론 움직이지만,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앉아 있다. (……) 유목민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그들은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있다.   


 - 들뢰즈·  가타리, <천의 고원>2, 연구 공간 ‘너머’ 자료실, 2000, 165쪽.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61쪽.

 
   

   왜 인간은 사건의 폭풍이 잦아들고 나서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일까. 지나간 시간이, 과거의 기억이 ‘소중하다’는 감각은 기억이 생성된 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각된다. 특히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일수록 대상의 상실은 더욱 오랜, ‘깨달음을 위한 발효 기간’을 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정작 그 상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견디기 힘든, ‘이별’이나 ‘애도’라고 이름붙이기도 어려운 감각의 총체적 혼돈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렇게 인간은 현재에 몰두할 때는 지금 이 시간 자체를 대상화할 수 없다. 현재의 상황 자체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과거’로 회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뒤늦은 깨달음’은 인간의 우매함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타임 리프로 인해 마코토가 깨달은 것은 시간의 ‘조형 가능성’이 아니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 아무리 객관적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도, 과학의 힘이 그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여 성공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물리적인 힘으로 되찾을 수 없다는 것. 몇 번이나 타임 리프를 한다 해도,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은, 나의 욕망이 너의 시간에 새긴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지나간 시간의 의미를 사후적으로 발견하고 뒤늦게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단지 인간의 ‘한계’라기보다는, ‘과거’로 멀어져간 시간에 대한 인간의 오만을(‘나는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를 기록하고 과거를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 일깨우는 시간의 매혹적인 속성이 아닐까.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통해 7월 13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한 번도 ‘동일한 감각’으로 체험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기억을 수정하고 삭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입한 시간은 하나같이 그녀의 ‘의도’를 배반하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시간의 형상으로, 저마다 새로운 ‘차이’의 시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타임 리프로 인해 일어난 진짜 기적은 단지 기계적 시간의 이동가능성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아무런 자발적 사유도 하지 않던 한 소녀가 ‘시간’에 대해, 즉 ‘삶’ 자체에 대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타임 리프로 인해 과거-현재-미래로 지속되는 선형적 시간의 상식이 깨져버리자 마코토는 엄청난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그 시간의 비연속성은 시간 자체가 이미 지니고 있는 내재적 속성이다. 지금 마코토는 미래에서 온 마코토 자신에게 심문당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느낀다. 과거의 마코토와 현재의 마코토와 미래의 마코토가 한 공간 안에 존재함으로써 지금까지 믿어왔던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이 참혹하게 깨어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 화면 안에 공존하며 마코토의 고정된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미래의 마코토가 현재의 마코토에게 과거의 마코토를 넘어서라고 충동질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치아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스케의 마음도 편치 않다. “난 그렇다 쳐도, 너한테도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널 좋아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치아키가 그렇게 말했어?” “딱 보면 알지. 몰랐냐? 하긴 넌 그런 데는 좀 둔하니까. 그래서 치아키가 더 말 못했는지도 몰라.” 치아키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마코토는 ‘이미 고백을 받았으나 그 고백의 시간을 말소해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마코토의 시간 속에서 이미 치아키는 고백을 했고, 그렇게 ‘들었으나 듣지 않은 고백’이 마코토를 뒤늦게 괴롭힌다. “나 정말 못된 애야. 치아키가 어렵사리 해준 얘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어. 난 왜 더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까?” 
   치아키가 떠난 후 풀이 죽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코토에게, 이모는 말한다. 자기도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고. 어른이 되어 헤어졌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그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믿다가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고. 이모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원작 소설에서 타임 리프라는 ‘기이한 능력’을 갖는 것이 두려워 한사코 그 ‘초능력’을 거부하고 싶어 했던, 수줍고 겁 많은 바로 그 소녀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 ‘미래의 소년’을 기다리는 듯 처연한 눈빛을 지닌 이모는 마코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코토. 넌 나랑은 성격이 다르잖아. 친구가 늦게 오면, 네가 먼저 달려가 친구를 데려오는 게 너 아냐?”

   마코토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침대를 뒹굴다가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0’이어야 할 숫자가 ‘01’로 보인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 치아키가 고스케를 살리려고 시간을 다시 돌렸으니까, 치아키도 분명 타임 리프 회수가 남았을 거야. 이제 마코토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가벼운 유희가 아니라 온몸과 온 마음을 건 도약으로, 멋지게 해낸다.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한 이후의 타임 리프는 이전의 타임 리프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치아키와 함께 걸어왔던 시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올올이 만지는 느낌으로 타임 리프에 자신의 온몸을 던진다.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너로 인해 웃고 울던 모든 시간이, 지진처럼 해일처럼 격렬하게 내 몸을 향해 돌진한다.
   내가 알지 못하던 그 시간의 ‘의미 없는’ 파편들이 이제 저마다 절실한 의미를 품어 안고 다시 내 안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로 인해 단지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라 치아키의 마음이 되어, 치아키의 눈이 되어, 자신들이 걸어온 시간을 다시 되짚는다. 그녀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만난 것은 잃어버린 타인이었다. 타인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 곧 그녀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었다.

   마코토는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등장한, 호두처럼 생긴 타임 리프 기계를 과학실에서 찾아낸다. 미래로 다녀온 마코토에게 이 기계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녀는 타임 리프 장치를 잃어버려 노심초사하고 있을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시간을 되돌려 간신히 되찾은 치아키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마코토. 달리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치아키를 향해 달리는 마코토의 표정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도, 철없지도, 어리지도 않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의 문턱을 넘은 사람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마코토의 얼굴에서 배어나온다. 언제나 시간에 뒤처지던 그녀는 어느새 시간을 따라잡고, 시간이 더 이상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없도록, 시간의 중력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그녀만의 속도로 뛰어간다. 치아키를 미래로 보내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놓아주기 위해.


   치아키: (마코토가 건네준 타임 리프 장치를 보며) 이걸 네가 어디서 찾았어? 아니 너! 이게 뭔지는 알아?  
    마코토: 알아.
    치아키: 누가 가르쳐 줬는데?
    마코토: 네가.
    치아키: 난 그런 소리 한 적도 할 리도 없어.
    마코토: 네가 모두 다 얘기해 줬어. 네가 살던 시대도, 이게 뭔지도.
    치아키: 너 어디서 온 거야?
    마코토: 미래에서.
    치아키: 너도 타임 리프를 할 줄 알아?
    마코토: 이젠, 못해. 
    (……)
    치아키: 이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과거로 돌아온 거야?
    마코토: 응.
    치아키: 바보같이 내가 왜 얘기했을까?
    마코토: 그 그림은 미래에 가서 봐. 이젠 없어지거나 타버리지 않을 테니까. 네가 온 미래까지 무사히 남아 있게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치아키: 그래, 부탁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
   치아키: 마코토!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너 말이야……. (이제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된 마코토의 잔뜩 설렌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함부로 뛰다가 다치지는 마라. 넌 주의력이 부족하잖아. 먼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
   마코토: (치아키의 고백을 기다리던 설렘이 사라져버리자, 잔뜩 실망한 얼굴로) 뭐야? 그게 마지막 인사야?
    치아키: 바보, 다 널 걱정해서하는 말이야!
    마코토: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
 (치아키의 등을 밀어내며 억지로 치아키를 보내버리는 마코토.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솟구치는 흐느낌을 막을 수 없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우는 마코토를 향해, 치아키가 다시 돌아온다. 너무 놀라 눈물을 뚝 그친 마코토를 살짝 안고,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마코토의 심장을 향해, 치아키는 드디어 고백한다. 예전에 마코토가 ‘삭제해버린’ 그 고백보다 훨씬 멋진 대사로.)
   치아키: 마코토……. 미래에서 기다릴게.
   마코토: (치아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일순간에 모든 아픔이 치유된 듯, 언제 울었냐는 듯이, 이제야 마코토다운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응! 금방 갈게! 뛰어갈게!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이 세상 단 한 번뿐인 사건의 시간이 되었다. 치아키가 살고 있는 미래가 몇 십 년 후인지 몇 백 년 후인지 모르지만, 도대체 치아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그림을 어떻게 저 거대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부터 지켜낼 지는 알 수 없지만. 마코토는 기다릴 것이다. 치아키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막상 치아키를 만났을 때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라도, 그녀에게 이제 ‘시간’은 이미 다른 의미로 흐르기 시작했다. 미래에서 날아온 소년 치아키로 인해 그녀의 현재는 완전히 다른 빛깔과 냄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 안에 둥지를 튼 치아키의 미래는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함께, 따로 또 같이, 살아갈 것이다. 미래 소년과 날카롭게 조우한 이모의 현재가 행방을 알 수 없는 그 옛날 그 소년의 미래와 모순 없이 공존하듯이.
   그러므로 순수한 현재란 없다. 과거-현재-미래라는 편의상의 경계를 매번 무너뜨리며 미처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과거는 오늘을 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은 현재의 우리 몸에서 체현된다. 때로는 예술의 이름으로,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비자발적인 기억은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연출하고 기록할 수 있는 주체다’라는 인간의 착각 혹은 오만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 능력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는 ‘시간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잃어버린 타인의 시간이 곧 잃어버린 나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한. 너와 나의 시간을 분리할 수 없는 그 끝없는 모호성 위에 우리의 인연이, 너와 나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이로써 우리 앞에 겹겹이 닫혀 있었던 시간의 문이 열리고, 그렇게 살짝 벌어진 시간의 틈새로,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으로 분리되지 않는 뫼비우스적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미래 소년 치아키가 다녀간 이 도시에서 이제는 지각할까 봐 휙휙 지나가버린 그 모든 사소하고 당연한 장면들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의 반짝이는 순간으로 거듭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만 끝내 되찾을 시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제 시작될 마코토의 기다림은 마음에 드는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책 없는 수동성이 아니다. 미래가 주저하느라 좀처럼 오지 않는다면 달려가 미래의 손을 꽉 붙들고 데려올, 그런 능동적인 기다림, 시간을 창조하는 기다림이다.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 마코토의 무구한 ‘기다림’으로 인해, 그들로 인해 되찾은 우리의 시간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마들렌의 시간’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제 마코토는 시간보다 더 빨리, 시간보다 더 멀리, 시간보다 더 깊이 달려가는 ‘그녀만의 리듬’을 살아낼 것이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 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 마치 일본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놀이, 물을 가득 채운 도자기 사발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할 수 없던 종잇조각이, 금세 퍼지고, 형태를 이루고, 물들고, 구분되어, 꿋꿋하고도 알아 볼 수 있는 꽃이, 집이, 사람이 되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 이제야 우리들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 수련화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조촐하나 집들과 성당과 온 콩브레와 그 근방, 그러한 모든 것이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마을과 정원과 더불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국일미디어, 65~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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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0-2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코토와 치아키의 사랑이 '키스'가 아닌 '포옹'으로 끝나서 너무나 예쁘고 뭉클했던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도란도란 2009-10-2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 전 무지무지 안타까웠는데요.

종이비행기 2009-10-2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키스도 아니고 포옹도 아닌 그 애매모호한 그 자세가 너무 이뻤지요~!특히 치아키가 마코토 머리 쓰다듬어줄 때 완전 기절하는 줄 알았음^^

sotkfkd 2009-10-21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

love hurts 2009-10-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간보다 더 빨리, 시간보다 더 멀리, 시간보다 더 깊이 달려가는 마코토가 눈앞에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