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④

 

4.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1)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정치적인 것, 곧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다.  


 - 미셸 푸코

 
   

    기억의 주기가 딱 24시간이라 매일 아침 같은 남자와 처음처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첫 키스만 50번째>),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남자가 온몸에 단서를 문신해가며 아내의 살인범을 쫓는 이야기(<메멘토>), 가슴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회사를 찾아가 이제 싫증이 나버린 애인과의 아픈 사랑을 지워버리지만 기억을 지우고도 이상하게 ‘기억할 수 없는 그녀’를 더더욱 그리워하는 이야기(<이터널 선샤인>)…….
    ‘기억 상실’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 곁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바로 그 기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타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기억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 혹은 방해 끝에 ‘잃어버린 자아’를 찾게 된다. 즉, 기억 자체를 찾지 못해도 기억에 상응하는 ‘타인’이 그 기억의 빈자리를 메워준다. 기억, 혹은 기억의 대체제를 찾을수록 주인공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본 아이덴티티>, <본 슈퍼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정체성의 퍼즐을 완성하기보다는 ‘잃어버린 기억’에게 추격당하며, 기억을 되찾을수록 오히려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자신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자신이 엄청난 조직력과 무력을 갖춘 거대한 조직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이슨. 그는 자신의 여권이 가리키고 있던 거주지인 파리에 도착하여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이후로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두통에 시달리던 제이슨은 처음 보는 여자 마리의 밑도 끝도 없는 수다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오며 두통도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의 불안과 절망을 어루만져줄 최초의 멘토를 만난 것이다. 


    마리 : 지금껏 60킬로미터나 달려오는 동안 나만 지껄여댔잖아요. 난 신경이 곤두설 때 이렇게 수다를 떨게 돼요. 이제 입 다물고 있겠어요. 
   제이슨 : 아뇨, 계속해요. 한동안 아무와도 얘길 나누지 못했거든요.
    마리 : 됐어요, 어쨌든 나 혼자만 말하고 있잖아요. 당신은 취리히를 떠난 후 겨우 열 마디를 했을 뿐이에요.
    제이슨 : 당신 이야기 듣는 게 편해서 그랬어요. 한동안 잠도 못 잤고 두통으로 고생했어요.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게 이제야 좀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 계속 이야기해줘요. 


   그가 파리로 도착할 즈음, 카메라는 그를 추격하고 있는 CIA의 정황을 상세히 보여준다. 제이슨의 등 뒤에 두 발의 총성을 남긴 ‘움보시’는 CIA의 골칫거리였고, 제이슨은 움보시를 살해하는 데 실패한 채로 행방불명되었던 ‘트레드스톤’이라는 비밀조직의 일원이었다. CIA의 비리를 언론에 누설해서 한 몫 단단히 챙기고 싶어 하는 움보시는 ClA의 아프리카 활동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고, 또 다시 CIA의 암살대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움보시는 암묵적으로 CIA의 공납을 요구하는 중이고, CIA는 성가신 움보시를 해치우지 못해 안달이다. 트레드스톤의 존재는 CIA 내부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며, 그들의 단독 활동은 CIA의 치명적인 치부가 될 수도 있다.
   CIA의 이름을 걸고 ‘대놓고’ 할 수 없는 불명예스러운 일까지 도맡고 엄청난 비리까지 숨긴 트레드스톤의 행동대장 콩클린(크리스 쿠퍼)은 행방불명된 요원 제이슨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제이슨이 없어져야 트레드스톤의 ‘과오’까지 함께 삭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리 크루츠까지 함께 수배하여 둘을 한꺼번에 살해하여 모든 ‘증거’를 없애버리려 한다. 그들은 순식간에 마리의 정보를 입수하여 그녀를 ‘이해 가능한 존재’로 분석하려고 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집시처럼 떠돌며 살아온 그녀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 행동을 계산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골칫거리 ‘타깃’인 셈이다. 


   요원 : ‘마리 헬레나 크루츠’입니다. 26세, 하노버 시 외곽 출생입니다. 부친은 용접공이었어요. 87년에 사망했습니다. 모친에 대해선 아직 조사 중입니다. 할머니는 아직 하노버에 살고 있어요. 그녀가 이 재앙의 결정적인 인물인 듯싶습니다. 배다른 오빠가 하나 있어요. 복잡하죠, 집시나 다름없거든요. 데이터가 너무 방대한데다 엉망진창이라, 예측불능입니다. 95년에 스페인에서 전기료를 납부했어요. 96년에는 벨기에에서 3개월 동안 전화료를 납부했고요. 세금 내역도 신용카드도 없습니다.
   콩클린 : 맘에 안 드는 여자야, 자세히 조사해보지. 할머니와 오빠의 전화선을 도청해. 연관이 있다면 누구든 지난 6년 동안 그녀가 묵었던 모든 장소를 알아내. 파리 요원들에게 이 정보 전송해. 
 


   마리는 단지 제이슨을 파리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암살 대상’이 되어버린다. 관객은 한 사람의 신상 정보가 저토록 쉽고 빠르게 유출될 수 있다는 것, 개개인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이 저토록 정교하게 전 세계를 아우른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한다. 우리는 이토록 쉽게 ‘이해 가능한’ 존재였단 말인가. 푸코는 과거의 연대기가 ‘영웅적’인 행동을 강조한 것에 비해 근대의 서류파일은 ‘규범의 일탈과 위반’을 관찰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이야기한다. ‘기억할 만한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성찰보다는 ‘측정 가능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인간 과학’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학교와 병원과 감옥과 군대의 각종 ‘서류철’이야말로 천차만별의 개인을 ‘규격화 가능한 신체’로 균질화한 ‘프로파일링의 천국’인 셈이다. 

   
 

인간에 대한 통제와 그 활용을 위한 세부의 치밀한 관찰, 그리고 동시에 사소한 것에 대한 정치적 고려는 고전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일련의 총괄적인 기술과 방법, 지식, 설명, 처방, 데이터 등의 일괄적인 자료를 공유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사소한 일들로부터 근대적 휴머니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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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1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민등록 번호를 입력하는 곳이 너무 많은 웹사이트, 카드키를 찍을 때마다 기록되는 나의 일상들, 고속도로의 '하이패스'^^*를 지날 때마다 찍히는 내 동선의 정보들, 술값을 카드로 계산할 때마다 마눌님에게 추적당하고 '암바' 걸리는 나날들ㅠㅠ

니모 2009-11-1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도 일상 속에서 약간의 '첩보전'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너무 많은 시스템에 우리의 신상정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둥이 2009-11-1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손체조님 그래서 우리에겐 완벽범죄가 필요한거죠^^
이글로 저의 행각이 탈로날 위험이 있으니
이글은 정확히 2년후 삭제됩니다^^

doingnow12 2009-12-0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그래서 전 로그인할때 이메일을 뻥으로 썼답니다. 크하하하하하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③

 

3. 내가 누구인지 알수록 나는 위험해진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67~268쪽.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이름 모를 사내. 그는 유일한 가시적 단서인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은행에 들어간 그는 비밀계좌에 들어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열어 보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찾아낸다. 미합중국의 여권 위에 기재된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이었다. 좀처럼 표정이 없던 이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도의 미소가 스쳐간다. “내 이름은 제이슨 본이구나. 파리에 살고 있군.”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자 자신의 모든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열쇠를 찾은 듯 기뻐하는 제이슨.
   그러나 소지품이 들어 있는 상자의 칸막이를 벗겨내니 수십 장의 여권이 쏟아져 나온다. 사진은 모두 ‘내 얼굴’을 가리키는데 이름과 국적은 모두 다른 수십 장의 여권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이토록 많은데, 나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소지품 상자에는 돈다발이 한가득 들어 있는데다가 ‘총’까지 들어 있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기에 이런 엄청난 물건들을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갖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제이슨은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 일단 여권과 돈은 챙기지만 ‘총’만은 용납할 수 없어 다시 소지품 상자에 넣어두고 스위스 은행을 떠난다.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는 듯한 느낌을 감지한 그는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미국 여권을 가지고 재빨리 미대사관으로 도피한다.
   미대사관의 ‘안전한’ 품 안에 잠시 의탁한 그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찰뿐 아니라 군인들까지도 그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경찰관 두 명을 때려눕힌 액션 실력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신출귀몰한 액션과 과감한 두뇌 플레이를 화려하게 선보이며 수백 명의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한 여자’에게로 접근한다. 제이슨이 대사관에서 눈여겨보았던 한 독일여성이 차를 몰고 떠나려는 찰나, 제이슨은 그녀를 불러 세운다.  
 

    제이슨 : 당신은 돈이 필요하죠. 난 당장 차가 필요해요.
    마리 : 내 차는 택시가 아니에요, 그럼 이만.
    제이슨 : 나를 파리까지 태워다 주면 만 달러를 주겠어요.
    마리 : 젠장, 내가 바보천지인 줄 아나?
    제이슨 : 그냥 가버리면 정말 바보예요.
    마리 : 장난해요? 사기 치냐고요?
    제이슨 : 사기 아니에요. (그는 만 달러 뭉치를 마치 야구공 던지듯 심상하게 그녀에게 던져주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파리에 무사히 도착하면 만 달러를 더 주겠어요.
    마리 : (대사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표정이 굳어지는 제이슨을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보며) 세상에! 경찰 때문인가요?
    제이슨 : 차를 타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하잖아요.
    마리 : (절박한 상황에서 돈을 보자 마음이 흔들리지만, 낯선 남자를 태우는 일이 영 찜찜한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난 지금도 너무 복잡해요, 알겠어요?
    제이슨 : 그럼 돈을 돌려주겠어요?



   화폐는 때로 최고의 신분증명서가 된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의 화폐가 그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한다. 제이슨은 결국 마리의 자동차를 타고 파리로 향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빠른 속도로 학습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신체의 반사적 액션을 통해 자신의 엄청난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제이슨의 무의식은 ‘몸’이라는 유일한 비밀통로를 통해 그의 의식을 향해 끊임없이 감각의 모스 부호를 날려 보내는 중이다. 넌 지금의 네가 아니야. 넌 너를 찾을수록 미궁에 빠질 거야. 너를 찾는 길이 과연 최선일까. 네가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총만이 아니야. 네 온몸이 곧 최첨단의 무기인 셈이지…….
   온몸의 세포가 기억한 삶의 흔적, 그 엄청난 분량의 메시지를, 무의식은 ‘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의식을 향해 송신한다. 그는 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수많은 여권과 엄청난 돈까지 지녔지만 어딜 가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보이지 않는 감방 안에 갇혀 살아가야 한다. 그를 쫓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권력기구이며 그의 모든 정보를 ‘프로파일링’하여 보유하고 있는, 제이슨 자신보다 제이슨을 훨씬 잘 알고 있는 무시무시한 비밀 조직인 것이다. 제이슨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발견하자마자, 생사의 문턱을 가르는, 출제자도 출제 목적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시험은 개인을 자료의 영역 속으로 집어넣는다. 시험은 사람들의 신체와 일과의 차원에서 구성되는, 섬세하고 정밀한 모든 기록을 뒤에 남겨 놓는다. 개인을 감시 영역 안에 두는 시험은 또한 개인을 기록망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시험은 개인을 붙잡아 고정시키는, 두툼한 기록문서에 집어넣는다. 시험의 여러 가지 방식은 집약적인 기록과 서류보관의 체계를 동반하게 된다. ‘기록에 의존하는 권력’은 규율의 톱니바퀴 같은 장치 안에서 본질적인 부속품처럼 조립된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95~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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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1-1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화폐는 때로 최고의 신분증명서가 된다! '때로'가 아니라 요새는 거의 '매일' 인 듯 합니다 ㅠㅠㅋㅋ

봉인 2009-11-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구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데이터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 걸까요? 나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져버리는 걸까요? 그저 '아이덴티티 없는 나'가 남는 걸까요?

lover hurts 2009-11-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수많은 인공적 데이터를 제거하고 남는 '진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바로 <본> 시리즈가 아닐까요.^^

둥이 2009-11-17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공적 데이터를 제거한 '진짜 나'가 맷 데이먼이 될수 없다는게
서글픈 이유는 무엇일까여^^
역시 난 루저일 뿐인가여^^

doingnow12 2009-12-0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저..이말 너무 싫어요!-_-흥

빵꾸똥꾸 2009-12-0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루저란 말, 정말 '없어졌으면' 하는 단어 10위 안에 들죠! ㅠㅠ^^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②

   


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도 말고, 또 내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지도 말라. 우리의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관료와 경찰들에게 맡겨두라. 


 - 미셸 푸코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우리는 이 사회 곳곳에서 ‘도대체 넌 누구냐’라고 묻는 곳이 저토록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선 ‘이름’이다. 사람들은 낯선 타인을 만났을 때 일단 타인의 ‘이름’을 먼저 알아두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실질적인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저 대충 임의로 지어서 불러도 그만인 ‘이름’을 알면 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 뿌듯함을 느낀다.
    이름은 타인을 우리 두뇌 속의 ‘지인 목록’에 올리기 위한 첫번째 구성 항목이다. ‘호명’을 함으로써 타인을 분석하고 때로는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숨기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가’다. 국가가 증명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기록한 ‘여권’ 없이는 우리는 국가의 바깥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국가는 개개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장소 등의 ‘기본적인’ 정보를 통해 개인의 정보를 목록화하고 만약 그러한 정보가 국가의 정보망에 ‘기재’되지 않는다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주민등록만 말소시키면 개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정체성을 기재한 엄중한 ‘기록’들은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생생한 실체를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것이다. 지중해 한 가운데서 등에 총상을 입은 채 표류하고 있던 이 이름 없는 사내가 의식을 되찾은 순간. 그가 맞닥뜨린 것은 낯선 어부가 발견한 난데없는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다. 표류하고 있던 사내를 구해준 이탈리아 어부는 그의 몸속에서 작은 기계장치를 꺼내고 그것을 벽에 비추자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가 나타난 것이다. “000-7-17-12-0-14-26. 게마인샤프트 은행, 취리히. 보시오, 은행 계좌 번호요. 이게 왜 당신 엉덩이에 있었던 거요?”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고 단지 등에 입은 총상과 엉덩이 속에 들어 있었다는 이 계좌번호만이 그가 살아온 ‘흔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어부들의 일을 도와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기억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보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덧셈 뺄셈도 할 수 있고 커피도 탈 수 있고요. 카드놀이도, 체스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억이 전혀 없어요, 젠장! 그게 문제라고요!” 그는 자신을 구해준 어부에게 고민을 토로하고, 어부는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 위로하지만 ‘사내’의 상태는 절망적이다. “벌써 2주일째에요. 소용없어요.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내일이면 항구에 도착할 텐데, 난 아직 내 이름도 몰라요.” 항구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사내를 도와준 어부는 차비를 쥐어주며 말한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스위스까지 갈 수는 있을 거야.”

   그는 혈혈단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스위스에 도착한다. 막상 스위스에 도착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마땅히 머물 곳도 돈도 없어 공원 벤치에서 노숙하려다가 경찰을 만난다.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자 그는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쭈뼛쭈뼛 말한다. 그 순간 경찰이 몸을 수색하려 하자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속도로 경찰 두 명을 때려눕히고 어느새 경찰의 ‘총’을 빼앗아 쥐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의식은 이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가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여 경찰들을 일거에 제압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내 몸 어디에서 이토록 전광석화 같은 액션이 흘러나오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사람 둘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사실 자체에 놀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경찰의 ‘총’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놀라, 불에 덴 듯 엉겁결에 총을 내버리고 줄행랑을 치는 ‘사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의 무기는 ‘몸’이었다. 우리 몸에는 우리 자신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방대한 정체성의 코드가 입력되어 있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사내의 정체성도, 그가 살아온 흔적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단서도 ‘몸’이다. 그는 단지 ‘이름과 인적 사항’만 모를 뿐 그의 몸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의 몸은 충분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정보는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아닐까. 언제든 자유롭게 편집되고 가공되고 재해석되는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의 삶을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니까. 우리의 기억보다 우리를 더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은 우리가 지금-여기서 창조하고 있는 바로 이 ‘행동’이니까. 

   
 

 고백해야 한다는 의무가 이제…… 우리들 속에 너무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우리를 구속하는 권력의 효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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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1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몸이 말한다. 공부=쿵푸^^*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①

   


1.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들은, 정말 나다운 것인가

   
 

죄수의 첫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 미셸 푸코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 제이슨 본(맷 데이먼), <본 아이덴티티> 중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가족, 국적, 모국어, 학력, 직업, 재산……. 이런 것들 중에 나의 나다움을 진정으로 결정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이용하는’ 세력들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가 하면, 각종 스팸메일과 스팸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남의 번호를 알았는지 천연덕스레 ‘지인’ 행세를 한다. 아직 우리의 온몸에 바코드가 새겨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정보를 유출시킬 빌미를 이 세상에 너무 많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현금인출카드, 운전면허증. 이러한 극히 일상화된 ‘신분 증명’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버젓이 노출하는 절호의 미끼가 된다. 

 

   미셸 푸코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규율 권력을 탐구했다. 말하자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계보학적인 탐구, 나아가 나를 진정한 나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과의 전투가 그의 학문적 실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인간 주체가 ‘자기 자신’을 합리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구적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다. 이성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했다. 자기 자신을 이성의 힘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구적 근대의 기원이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바로 이 근대성의 탄생 지점을 공략하여 그 확실성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떤 형태의 합리성과 역사적 조건을 통해서 인간 주체는 그 자신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주체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 푸코, <텔로스>에서의 인터뷰 중에서

 
   

   주체는 과연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뼈아픈 질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중 하나가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시리즈이다. 일명 ‘본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이 역작은 주인공이 ‘내가 누구였는가(Who was I?)’를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상 최대의 추격전을 벌이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에게 덧입혀진 정체성, 자신의 기억에도 없지만 자신을 규정하는 강요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주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간신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지 뜨거운 연민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갇혀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삶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들이 저토록 간단히 말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기억상실증), 나를 나이게 만드는 정체성을 저토록 간단히 위조할 수 있는 것이라면(한 사람을 잔혹한 인간병기로 만드는 CIA처럼), 우리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살아가는 ‘나’라는 경계는 얼마나 대책  없이 허약한 것인가.
   그 허약한 정체성의 표지들을 한 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토록 하루하루 굴욕을 참아야 하는 것인가. 아직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한 사내는 낯선 바다 위를 표류하며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게다가 나를 죽이려 하는 자들을 통해서만 나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다니. 이 끔찍한 역설을 우리의 ‘이름 없는 사내’는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나의 목적은 그 어떤 목적론도 사전에 축소할 수 없는 불연속성 속에서 역사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 구성도 주체의 형태를 강요하지 않는 익명성 속에서 역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 어떤 새벽의 귀환도 약속하지 않는 시간성에다 역사를 개방하는 것이다. 나의 목적은 역사로부터 모든 초월적 나르시시즘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 푸코, <지식의 고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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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09-11-1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본 시리즈! 넘 멋진 영화죠. 죄수의 첫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

맨손체조 2009-11-1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본 본 본... 007의 기름진 후까시를 한 방에 날려준 매력적인 본 본 본!!! 혹시 여울님은 맷 데이먼의 광팬?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를 두 개 씩이나^^*

illumiation 2009-11-1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네필 다이어리~ 이젠 본 시리즈와 미셸 푸코의 커플 매니저를ㅋㅋ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⑩

   


10. 몽상의 스트레칭, 이성의 근육 이완법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면,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에게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사물에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 벤야민, <보들레르에 대한 몇 가지 주석> 중에서 

 
   

    


   몽상의 세계는 의식에 발 딛고 무의식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환상을 체현하면서도 의식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몽상을 캔버스 위에 실현하는 순간,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흔들린다. 환상과 의식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몽상을 특유의 손재주로 이 세상에 불러낸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감동하는 것은 예술가의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에너지에 교감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도 이러한 예술가의 몽상을 닮아 있다. 원령공주가 숲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들개의 등허리 위에서, 들개의 눈높이와 들개의 숨결로 숲을 바라보며, 자음과 모음으로 날카롭게 분절되지 않는 숲의 웅얼거림을 듣고, 고요한 숲의 말없는 시선을 느낀다.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 또한 바슐라르처럼 자연의 언어로, 자연의 시점으로 움직이는 세계의 숨결을 생생히 느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 부족, 우리 인류를 지키기 위해 지구라는 삶의 ‘배경’을 보존하려는 정착민의 욕망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더 커다란 그림, 우주라는 무한한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생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열망이었다.
   로렌 아이슬리는 언젠가 인류가 사라진 도시에서도 새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인간 중심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다인칭(多人稱)’을 사유했다. 인류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무인칭(無人稱)을, 신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류의 부감샷이 아니라 핸드 헬드 카메라를 들고 뛰며 자연이 숨 쉬는 속도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미메시스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시점을 스스로 내려놓은 지금, 아시타카의 속내도 이렇지 않았을까.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동안, 아니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자연은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이 등산로에서 쓰레기를 몰래 버릴 때, 하천에 폐수를 방류할 때, 각종 벌레를 ‘해충’이라는 명목으로 짓밟아죽이고, 고속도로 위에서 야생동물을 ‘로드킬’로 만들 때……. 아무도 보지 않아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 오는 그 감각은, 자연이 인간을 말없이 응시하는 그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요 몇 년간 때때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최후의 인간이 산으로 도망을 친 후에 뉴욕을 접수하게 될 새들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장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나의 거처가 줄곧 높은 곳이어서 나는 새들이 어떤 소리로 노래 부를지 알며, 또한 그들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주시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도 자기들 소리를 엿듣고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 참새들이 에어컨 바깥쪽을 톡톡 치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곤 했다. 또한 나는 다른 새들이 텔레비전 안테나를 통해 들어오는 진동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알고 있다.

 “그가 갔나?” 하고 그들이 물으면, 아래에서 “아직 아니”라는 진동이 올라오는 것이다.  


 - 로렌 아이슬리, 김현구 역, <광대한 여행>, 강, 2005, 248쪽.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하게 되었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의 언어에 진정 귀 기울이고 싶다면, 바슐라르의 말처럼 지성과 상상력의 과감한 이혼을 선택해야 한다. 바슐라르의 철학을 몸으로 배우고 싶다면, 진정한 몽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지성의 경직된 근육부터 이완시켜야 할 것 같다. 합리적 이성과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찌든 우리의 두뇌는, 감각의 모든 촉수를 해방시키는, 자유로운 두뇌의 스트레칭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어린아이들이 ‘혼자 노는’ 모습을 10분만 관찰해도 좋다.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싱그러운 교감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반짝이는 형광등 불빛을 보고도 엄청 반가운 손님을 만난 듯 방싯방싯 미소를 짓고, 사소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떨며, 주변의 모든 자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대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사물 뒤에 내재된 힘, 마나(mana)를 포착하는 비법을,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의 삶과 ‘유관’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 그 비밀을 알았지만 잠시 ‘깜빡’했을 뿐인데…….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끄집어낼 때, 강렬한 드라마의 기호들이 된다. 그것들은 감수성의 확장되는 거울들이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깊이를 모든 것에게 부여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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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09-11-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성과 상상력의 과감한 이혼! ^^

둥이 2009-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럼 우리 복딩이가(우리집 14개월된 넘) 바슐라르가 말한 진정한 철학가?^^

viewfinder 2009-11-1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는 바슐라르스러운 아기들을 보며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고 있는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