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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결국, 저항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생일까?
이 예사롭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주인공 ’레오’의 삶을 보면, 그의 삶을 이끌어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느껴진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어느날 던져지듯 이 세상에 태어나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넘어서는 일련의 사건들과 맞닥드릴 때마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의 몫은 ’반응’이 전부인 것 같다.
주인공 ’레오’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까지 그의 삶의 이끌어간 것은 이랬다. 미국 남부의 해안 도시인 찰스턴의 환경과 문화, 가톨릭 신앙을 가진 부모님, 형의 자살. 형의 자살은 그의 삶을 정지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마약 소지 혐의로 소년법원에 서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관찰대상이 된다. 그러나 열여섯이 되자 최악의 시기를 벗어나 정신병원을 나왔고, 신문배달부의 일을 하면서 노동이 부여하는 회복의 힘을 경험한다. 열여덟의 어느 날, 그는 서서히 세상을 향해 걸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그리고 1969년 6월 16일, 그 하루 동안에 그의 삶을 충만하게, 또한 끔찍하게 바꾸어놓을 친구들과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날 레오의 옆 집으로 이사를 온 이웃집 남매, 그날 고아원으로 온 시골 출신 남매, 그의 학교로 전학을 온 두 명의 흑인 친구, 그날 요트에서 만난 남매와 그들의 여자 친구,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레오를 중심으로 서로 친구가 된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1989년, 이들은 결혼을 통해 서로 가족이면서, 동시에 여전한 친구로 얽혀 있다.
<사우스 브로드>는 1989년대의 미국 남부 찰스턴의 사회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989년이면 그리 먼 시간의 일도 아닌데, 흑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이 존재하고, AIDS가 성행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아득한 옛 일처럼 느껴진다. 동성애, 마약, 스타 배우의 삶, 배우자의 외도, 파티 문화 등 일반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특이하게 기독교 국가를 대표하는 미국에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부모님으로 인한 영향까지 레오의 삶은 과거에서부터 형성되어 온 문화와 급변하는 오늘의 혼란스러움, 그 한가운데 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와서야 밝혀지는 시바와 트레버의 아버지(이웃집 남매), 형의 자살 이유는 허망하리만치 끔찍한 반전이다. 레오의 인생에서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끔찍하게 만들어버렸는가를 목격하며, 나는 인생에 대한 극렬한 저항보다 오히려 그저 받아들이는 일종의 무력감을 경험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체념 같은 것 말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결국 정복할 수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도 없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레오를 보니 우리 인생의 반은 부모님과 가족으로 채워지고, 나머지 반은 친구들로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은 모두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그 소용돌이에서 꺼내주기도 하면서 함께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혹시 이들 가운데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곧 나의 인생 그 자체이기에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 상관 없이 지내고 싶지만 이미 상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
평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을 소용돌이를 헤쳐온 레오가, 1990년 6월 16일, 친구들에 둘러싸여 그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인생에선)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어제를 받아들이고,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