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10년 전의 그나마 순수했던 디씨인사이드 ‘도서갤러리’를 먼저 이야기할지, 아니면 적어도 내게는 북스피어출판사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기억되는 <아발론 연대기>를 우선해서 이야기해야 할지 , 그도 아니면 지독한 난독증에 시달리던 지난 한 달간을 제일 먼저 이야기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략 10년 전 당시까지만 해도 디씨인사이드의 도서갤러리는 서로 도타운 정을 나누던 따뜻한 도서 커뮤니티였다. 오순도순 책에 대한 이야기와 정보를 나누는 따뜻한 공간이었고 책에 대한 고수도 상당히 많았다. 우리가 책에 대해서 티격태격하거나, 도저히 해결 못하는 궁금증이 생겼을 때 , 불쑥 나타나 위기에 빠진 중생들을 현란한 책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를 열광케 한 gksrud이란 유저가 그 대표적 인물.


그러니까 2006년 조용하던 도갤이 떠들썩할만한 빅뉴스가 떴는데 기존에 <아서왕 이야기>라고 알고 있던 대작이 <아발론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새로 나온다는 소식. 아서왕의 일대기를 켈트신화를 바탕으로 완성한 판타지 소설이다. 이 8권으로 구성된 이 대작을 ‘아웃사이더’라는 출판사가 무리를 해가면서 겨우 겨우 4권까지 내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폐업을 해버렸다.


당시 아웃사이더의 직원이었던 김홍민과 직원 몇 몇은 의기투합하여 <북스피어>라를 회사를 차리고 그 대업을 계속 이어가는 패기를 발휘했다. 외부에서 투자를 받는 한편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결국 <아발론 연대기>로 이름을 바꾼 8권 전집을 완전히 발간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망한 출판사가 완성하지 못한 대업을 직원들이 회사를 새로 차려서 완성한 희귀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도서갤 유저들은 화려한 장정과, 멋진 표지 디자인을 가진 완성된 <아발론 연대기>에 열광했고 모두의 로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북스피어>라는 출판사는 내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개인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그리고 과학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아발론 연대기>는 시대를 앞서가는 화려한 디자인과 장정을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 설립된 <북스피어>가 책임이 질 이유가 없는 <아웃사이더>판 <아서왕 이야기 1권~4권>을 구매한 독자를 위해서 새로 나온 <북스피어>판으로 보상업그레이드 해주는 보기 드문 미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북스피어>의 대표인 김홍민씨가 교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 이벤트지 실상은 독자를 공짜로 부려먹기’위해서 기획한 ‘독자 교정자 제도’에도 열광을 했고 실제로 많은 도서갤의 유저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스스로 무급 교정 일을 하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제 8권 말미에 이른바 ‘독자 교정자 제도’에 참여했던 이름을 기재해준 꼼꼼함과 교정에 참여한 답례로 <아발론 연대기>를 선물한 배려는 <북스피어>를 여느 다른 출판사와는 차별되게 인식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출판계의 인사들은 자주 요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불평과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면 그에 대항해서 더 재미난 책을 만들려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비롯한 책이 그나마 잘 나갔던 시절에 없던 경쟁자와 맞서서 싸울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며 어찌되었던 살아남기 위해서 책을 더욱 매력적이고 재미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지난 한 달간 나는 소설 한 권을 항상 지니고 다녔지만 당체 읽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복잡한 사정도 있었거니와 어쩐지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 폰과 인터넷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라는 책을 발견했고 이 책의 저자가 10년 전 우리를 열광케 한 <북스피어>출판사의 사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과학소설을 즐기지 않아서 <아발론 연대기>도 감탄과 경외만 했을 뿐 그 비싼 가격에 대한 부담도 되고 해서 사지도 못한 처지였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때 그’ <북스피어>가 여태껏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고 반가웠다.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던 게다. 그러나 10년 전 출현할 때부터 이미 범상치 않은 출판사와 그 사장이란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출판인생과 주변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니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주문을 했고 받자마자, 들고 다니던 소설책을 집어 던지고 이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나절 만에 다 읽어내려갔다. 역시 기대대로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내용이 가득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보다 더 재미났다. 그의 말대로 앞으로 책이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재미’를 중요한 가치로 인정해야만 한다. ‘재미’라는 것이 굳이 ‘고급지지 못한’것과 동일선상에서 볼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에 대한 책을 좋아하는 나는 늘 아쉬웠던 것이 정작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문것이었다. 그래서 ‘열린책들’의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를 보석처럼 아끼는데 실로 오래간만에 책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를 만나니 감개무량하다. 이 책에서 ‘야매 출판인’ 김홍민은 매우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계층에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비전을 이야기 한다.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가 대형출판사 사장의 진솔한 출판이야기라면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는 책과 관련된 모든 계층을 향해서 자신의 ‘험난한’경험을 통해서 얻은 ‘영업비밀’을 과감없이 ‘재미나게’ 말하는 책이다. 


특히 ‘버려지는 띠지에 숨겨 놓은 것’, ‘독자들이 빌려준 5000만 원’ 이야기 등과 같은 북스피어만의 독특한 마케팅방법뿐만 아니라 심지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반드시 4의 배수인 이유와 판권 페이지에 대한 설명까지 포함하는 책과 관련된 스프레이식 지식의 향연를 자랑한다.

출판이나 독자들을 위한 제언뿐만 아니라 과거 편집자로 일하는 재미난 일화도 이 책을 읽는 큰 즐거움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그렇다.


모 잡지사에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첫 직장이었고, 나는 경력이 전무한 편집자였다. 모든 일에 미숙하던 시절,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대목은 필자들의 원고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엄연히 마감 시한이 정해져 있건만 열에 두셋은 당연하다는 듯 시한을 넘기기 일쑤였다. 대개 유명한 필자들이라 나로서는 감히 독촉 전화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부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상당히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체면을 좀 지켜드리자는 차원에서 이분의 이름은 생략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하는데, 글쎄 이러시는 거다. "홍민 씨. 홍민 씨는 왜 나한테 독촉 전화를 안 해? 나는 독촉 전화를 자꾸 받아야 글이 써지는데 당신이 가만히 있으니까 한 글자도 안 써지잖아. 앞으로는 나를 좀 못살게 굴어줘. 제발.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해도 무시하고 전화해야 돼."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사고방식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홍민씨가 북스피어 독자 잔혹사라고 부르는 독자 교정이벤트는 사실 독자들에게는

환장하게 참가하고싶었던 재미난 기회였다. 2005년 당시 <아발론 연대기>교정작업에 ‘운이 좋게’ 참가했던 도갤러 <후훗...>씨의 참가 소감을 읽어 보자. 물론 10년전에 작성된 글이다.


<교정 작업 체험기>

제목대로 교정작업 다녀왔습니다. (휘잉~~~) 아마 제가 가장 마지막에 교정보는 사람이 될 것 같더군요. 이번에 이 책을 내는 '북스피어'라는 출판사, 범우사 바로 '위'에 위치해 있더라구요. 서울 안이고 지하철 역에서 가까이 있기는 한데... 찾아가기에는 좀 까다로웠습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7권이었습니다. 8권 전질에 일곱번째라. 그닥 큰 임팩트가 가는 부분은 아니었는데, '성배'와 관련된 부분이었습니다. 읽고 교정할 부분 찾아 기록하고, 물어보고... 정확히 한답시고 국어사전, 옥스포드 영영사전 등 이것저것 꺼내들고 들이대보기는 했는데... 휴우... 완성된 책이 아니라 출력된 원고로 하는 것이라 몰입도가 떨어져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찾기가 엄한 오류 몇 개를 잡으니 뿌듯함까지 느껴지는게... 한 권 분량 잡고 아홉 시간 가까이 걸리더군요.


 (두 번 보느라) 책은... (스포일러는 생략하고...) 상당히 잘 나왔더군요. 일단 표지야... 짤방 보시는 대로 상당히 럭셔리하고... 잘 모르실 '내용' 부분으로 넘어가자면... 울나라 번역본의 가장 큰 문제가 쓸데없이 문장이 길어지는 '만연체'와 번역자의 '문어적 어투' (~한 바이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어려운 '한자어 차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원전이 있느니 만큼 중반부 이후 조금 늘어지는 듯한 인상은 있었습니다만, 문장이 정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최소한 '반지의 제왕' 류의 번역으로 뒷통수 맞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문장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도 흐름이 유지될 정도로 짧게 배치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본문 중에도 문어체 사용을 줄이고 구어체를 구사하여 처음 접하는 사람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겠더군요. 한자어는, 정말로 대용할 것이 없는 몇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쉬운 한자어로 바꾸어 표현하였구요. 


'역사물'이라 은근히 긴장했는데, 의외로 술술 읽혀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야, '로마제국 쇠망사' 읽고 나서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일반 판타지나 무협 소설 읽을 정도의 reading skill만 있으면 수월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자의 햏력이 상당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원전과 1:1 비교를 해보고 싶을 정도로. gksrud님께서 이미 이전 글에 (목요일) 리뷰를 하셨지만, 각주가 정말로 참신하였습니다. 


원전의 각주에 역자주를 첨가한 형태였는데, 심리학 부분까지 건드린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무적이더군요. 교정 보면서도 '이런 부분이 참 재미있다'는 식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이미 '아더왕 이야기'의 형태로 이전에 읽어보신 분도 각주 하나만 보고서도 따로 구매할 만 하겠더군요. 내용 중에도 많지는 않지만 삽화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에다가 책의 장점만 주구장창 늘어놓으면 괜히 '~빠' 다, 뭐다 할 것 같아서 조심스럽기는 한데...  사실, 그닥 큰 단점은 보이지 않더군요.


 '대충대충' 나오는 요즘 책들에 비하자면 노력의 흔적도 보이고, 그닥 좋지는 않은 환경인데도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주인공급(?) 기사의 수가 많다 보니 이름 외우기가 아햏햏하다는 점과 주인공따라 사건이 왔다갔다 해서 조금 정신없던 점, 중반부 이후에 지루하게 전개되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건 원전에서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살포시 무시하고요. (아, 혹여나 하는 이야기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  좋았다는 겁니다.


 주관 뚜렷하신(?) 도갤햏자님들께서 훗날 책 접하고서 '나 후훗이한테 낚시 당해써' '후훗, 왜 그진말해써' 라고 하면 저, 자방합니다. ㅡ.-;;;) 그런데, 아더왕 이야기에 상당한 양의 기독교적 색채가 입혀져 있었습니다. 원전을 미리 접하지 못한 터라 몰랐는데- 제가 맡은 부분이 성배와 관련한 부분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천축국에 불경 얻으러 가는 손오공 일행의 모험담같은 느낌이 들어버리니... 권선징악적인 내용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문맥 속에 숨겨진 (역자주에 자세한 설명이 첨가되어 알게 되었지만)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거세(ㅡ.-;;;)하는 부분에선 섬찟함이 살짜쿵 느껴지더군요. 


(본문에서는 '넓적다리를 찔렸다' 정도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적 사관에 의해 윤색된 것이라고 하네요. 에구... 스포했다 ㅡ.-;;;) 이번 도서가 이 출판사의 첫 사업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이벤트를 계획하고 계시더군요. 이것도 스포일 수 있으므로 말씀드릴 수는 없구요. 아이디어가 참신했습니다. 완성본은 12월 12일 경에 일반 출시될 모양입니다. 권당 가격은 잠정 만 천원. 조금 비싼 감이 있기도 하지만 무려 권당 400페이지 이상인데다 소장가치로 따지자면 저 가격이 과히 비싸겠다 생각이 되지는 않더군요. 


시집 한권에도 칠천원씩 하니... 아, 첫 물량 방출 때 할인계획 있다네요. 찜하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그리고 기존에 발행되었던 '아더왕 이야기' 소장하신 분은 교환 및 별도 할인 계획도 있다고 하니...충전 200% 요 사업이 잘 되면 이후 그걸 종잣돈으로 SF 등으로 출판 범주를 확대할 계획도 가지고 계신 것 같더군요. 에셉 팬이라면 제목을 알만한 마이너 소설도 재발간 계획 있다니까... 기대충만. 마지막으로... 저는 먼저 나왔는데,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실 관계자 분, 수고하시라는 말도 못해드렸군요. 혹여, 이 글 보시면 수고하시라는 말 꼬옥 전합니다.   


세줄 요약... 1. 아발론 연대기 교정작업 갔었다. 2. 표지깔쌈. 내용양호, 각주왔다, 삽화뽀샤시, 이벤기대, 12월 12일 발간예정 3. 아더왕과 엑스칼리버에 목마른자, 질러라... 지름신은 이럴 때 도래하는 거시다. 문제제기!!! '할게요' 가 맞나요, '할께요'가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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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6-2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더왕이야기를 좋아해서 <아발론연대기>박스세트를 구입했던 일인인데요,,
이 책이 북스피어에서 나왔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ㅎㅎ
책장님 페이퍼 읽고 찾아보니 8권 말미에 도와주신 분들이라고 나와있는데,
교정부분에 13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네요.
어느분이 후훗님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사와 학생들이 많구요...흑묘라는 분도 있군요
책은 언제 사놓았는지 기억이 까마득한데....아직 한권도 못 읽었습니다..ㅠㅠ..
뭐 언젠가 볼 날이 있겠지요...

페이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박균호 2015-06-2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반갑습니다. 흑묘라는 분은 당시 고려대 심리학과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뭘 하고 지내는지 참궁금하네요...
 
책이 좀 많습니다 - 책 좋아하는 당신과 함께 읽는 서재 이야기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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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에서 유일하게 챙겨서 읽는 것이 '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다른 사람의 서재와 애독서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다른 사람의 서재에는 어떤 책이 꼽혀있고, 어떤 책을 즐겨 읽으며 또 어떤 책을 추천하는지 궁금한 게 대부분의 독서가의 심정이다. 나아가 어떤 사연과 이유로 그 책을 추천하는지도 궁금하다. 독서가들은 사실 추천도서에 목 말라 있다.


자신이 많은 책을 읽어 왔다면 엉뚱한 책을 골라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일이 늘 아쉽기 마련이다. '지식인의 서재'는 주로 유명인사가 주인공이 되니 종종 추천도서가 지나치게 대중적이거나(대중서가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또 전문적인 분야의 책인 경우가 많아서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다. 


거의 십년 동안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해오고 있고 독서와 책과 관련된 여러 저서를 출간한 바 있는 윤성근의 <책이 좀 많습니다>는 '지식인의 서재'에서 느끼는 미세한 '궁핍함'을 채워줄 만한 책이다. 유명인사가 아닌 실질적인 생활 독서가들의 서재와 독서생활을 알려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재의 주인들의 직업은 다양하고 평범하다. 국어교사, 번역가, 대학생, 기자, 판소리 고수, 회사원, 바리스타, 도서관지기 등 거의 대부분 유명인사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책의 소비자이자 생활 독서가에 가깝다. 


근사하고 광활한 서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런 저런 온갖 비상수단을 발휘해서 책을 모으고 소장한다.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한정된 공간에 많은 책을 소장해야 하는 공통의 장애를 공유하는 서재 주인들은 각자의 서재의 도서분류법도 지니고 있는데 이 책에서 꼼꼼히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독특한 독서 습관도 소개한다. 추천도서라기보다는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개인적인 체험과 밀접한 애서를 이야기한다. 이런 이유로 각자의 애장서는 개인적이나 책을 아끼는 마음은 넓게 공감된다.


이 책에 소개된 독서가 중에는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씨와 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고수 독서가답게 자신의 헌책방에서 엑기스만 쏙쏙 골라서 사가는 눈썰미를 재미나게 묘사한 부분 등은 이 책만의 장점이다. 그러고 보니 장서가와 헌책방 주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굉장한 부자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적인 독서가와 수집가는 필연적으로 공간의 압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헌책방에 자신의 장서를 처분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수집가의 운명이다.


또 본인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사후에는 유가족에 의해서 장서가 헌책방에 처분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헌책방 주인 윤성근씨가 헌책방과 장서가와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실감나게 기술할 수 있다는 점이 <책이 좀 많습니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사실 <책이 좀 많습니다>라는 재미난 이 책의 제목도 모아온 책을 감당하지 못해서 윤성근씨에게 책을 처분하게 된 한 장서가의 말에서 따왔다.


이 책에 소개된 독서가 중의 한 명인 대학생 김바름씨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의 고객이기도 한데 그가 부탁한 절판본 <상상의 공동체>를 구해주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윤성근씨의 에피소드를 읽다보니 뉴욕의 가난한 여류작가와 런던의 헌책방 직원과의 20년간에 걸친 우정을 담은 편지를 엮은 책 <채링크로스 84번지>가 연상된다. 


서재방문기와 서재 주인의 애장서를 소개하는 독특한 포맷의 이 책은 저자인 윤성근씨가 다양한 책에 대한 출간과 유통에 관한 뒷이야기와 그 책과 관련된 독자들의 반응과 추이 그리고 배경지식이 충분히 발휘된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다양한 책에 대한 이론적이고 어려운 이야기보다는 그 책에 얽힌 우리 독자들의 에피소드가 가득한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가령 2005년 '디자인이즈'에서 펴낸 천상병시인의 <귀천 : 천상병 육필 서체 시집>이 마치 천상병 시인이 생전에 술을 한잔 걸치고 쓴 것처럼 비뚤비뚤 제 멋대로 늘어진 글자로 채워진 뒷이야기가 그렇다. 


당분간 구하고,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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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천도서를 멀리하는 편입니다. 추천도서 목록을 아예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요, 가끔 목록에 있는 책이 궁금해서 확인합니다만 알고 나면 사고 싶고, 읽고 싶은 책만 더 생깁니다. ㅎㅎㅎ

박균호 2015-06-19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사고 싶고 읽고 싶은 책이 최고죠...ㅎ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공지영 지음 / 분도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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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두 세 가지 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에 모두 기웃거렸었다. 개신교는 모태신앙이 아니면서 교회에 다니게 된 대부분의 한국인과 같은 경로로 발을 들였고 한때는 교회를 관리하는 집사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기도 했다. 불교 또한 종교라기보다는 자기수양과 요즘 유행하는 힐링의 차원에서 보시를 하기도 하고 불자회라는 단체에도 가입하여 '경담'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법명을 받은 몸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다른 두 가지 종교의 경우와는 달리 불온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군복무시절 세례를 받겠다고 통신교리를 신청하여 우편으로 교리공부를 제법 오랫동안 했었다. 통신교리를 하게 된 계기는 왠지 '세례명'을 가진다는 것이 '폼'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니 결국 세례는 받지 못했는데 대학졸업 무렵 천주교 산하의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서 일삼아 '세례'를 받는 '난 놈'이 있는 것을 보고 새삼 그때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어떤 종교에도 귀의하지 못하고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고 현세에서의 나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보고 싶어 차마 저승길로 선뜻 나서지 못했던 '아버지'이지, 내가 가보지도 않은 나라에서 생겨난 내 얼굴도 알 리 없는 '부처님'이나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죽고 나서도 나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행복하지, 거룩한 신이 보살핀다는 고통이 없고 영생의 '열반'이나 '천당'에 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외동아들로 태어난 내가 겪은 가장 큰 불편함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싸움박질을 할 때 든든한 '원군'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사이의 싸움이란 것이 고만고만했고 결국 승자는 '너 ! 우리 형아한테 말해서 때려주게 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였다. 나는 오랑캐 같은 친구 놈을 응징하게 일러줄 형이 없는 외아들이었다. 


친구 놈이 꼼수를 써서 내 딱지를 모두 따가거나, 달리기를 못한다고 놀려대도 그저 억울함과 답답함을 속으로 삭여야할 뿐 달리 대책이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아이들끼리의 일을 어른들에게 고자질하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농사일에 바쁜 어른들이 코흘리개들의 '송사'에 재판관으로 등장할 일도 없었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형과 객관적으로 시비를 가려줄 어른의 부재는 코흘리개의 삶을 '억울함의 천국'으로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지난 8월 4박 5일의 일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그분의 방한을 계기로 천주교로 귀의하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쇄도했다는데 쉰이 다 되도록 굳건한 무신론자로 살아온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민과 공감이 굳이 익히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생소한 타자로부터도 느낄 수 있다는 경험을 했고 그분이 마침내 한국을 떠날 때는 마치 가족이 먼 길을 떠나는 듯한 '서운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코흘리개 시절 내가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할 때 홀연히 나타나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코를 닦아줄 것으로 희망되었던 자상한 형과 같은 따뜻함을 국빈으로 온 종교지도자에게 느낀 일은 내게는 나름 '영적인 충격'이었다.




이 경험이 나를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 2>를 더욱 주의 깊게 지켜보고 읽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공지영 작가는 이미 십 년 전에 스스럼없이 '돈을 위해 펜을 들었다'고 고백이 아닌 공표를 했다. <수도원 기행 2>는 사실 '돈을 위해 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개인사와 그로 인한 하느님에 대한 갈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따지고 보면 작가가 '돈을 위해 펜을 들지 않는' 경우가  낯설다.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문학의 본좌 도스또예프스끼의 수많은 명작들이 사실은 도박과 사치로 인한 빚에 쫓긴 절박한 펜 놀림의 산물이었고, 동화작가로 유명한 <강아지 똥>, <몽실 언니>의 권정생 선생과 국어학자 이오덕 선생의 서간집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말 중의 하나가 사실 '돈'이야기다. 


물론 원고료와 이오덕 선생이 권정생 선생을 염려해서 보내주는 정성이지만 결국 '돈'은 '돈'일 뿐이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돈벌이로서의 '글쓰기'가 결코 점잖지 못한 일이 아닌 이유다. 30대 초반에 이미 평생 쓸 돈을 다 번 공지영 작가이지만 주변 사람에게 속아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고,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결혼생활을 3번이나 마감해야 했던 그녀에게 '글쓰기'는 고상한 '예술혼의 표출'이 아닌 '생계수단'에 가까웠다. 공지영 작가의 글쓰기는 어린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한  유일한 돈벌이 수단이었고 자식을 지키나가려는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돈을 위해 펜을 들었다고 해서 그의 소설도 구린 돈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지영 작가의 소설은 낮은 자를 향한 강한 연민과 관심의 촉구인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그녀는 사람을 위해 펜을 들었다고 단언한다. 그것도 소외받고 불평등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공지영 작가는 우리 문학계에서 가장 현실참여적이다. 그의 현실참여적인 문학은 난해한 이론 놀음이나 계몽적인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핍박받으며, 불평등을 일상적으로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공지영 작가의 소중함은 그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책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 속에서 직접 참여한다는 데 있다. 굳이 공지영 작가의 약한 자를 위한 행보를 열거하는 수고는 필요 없지 않을까?  등단 이후로 돈을 위해 펜을 들었다지만 공지영 작가의 작품들의 면모는 결국 '사람'을 위해 펜을 든 것으로 증명된다.


공지영 작가의 도드라진 문학의 성과는 '약한 자를 위한 배려와 관심을 이끌어 냈고' 휴머니즘을 실천한 것이다. 나는 <수도원 기행 2>의 기본적인 근간이 '휴머니즘'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땅에 스며든 강아지 똥이 땅위의 아름다운 민들레를 키운 자양이 되었듯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의 휴머니즘이 <수도원 기행 2>이라는 역작을 길러냈다고 나는 본다.


<수도원 기행 2>의 머리 부분을 차지하며 전체 글의 모태가 되는 '왜관수도원'만 해도 그렀다.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소재가 왜관수도원이기도 한데, 한국전쟁 중 애초에 군사목적으로 항해에 나선 미국의 배가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쫓기는 무려 만사천명의 피난민을 기적적으로 구한 '레너드 라루' 선장과 왜관수도원과의 인연이 이 책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수도원 기행 2>가 왜관수도원에서 시작해서 만사천명의 피난민을 구한 레너드 라루 선장이 수사가 되어서 머문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이 책이 단순히 기행문이 아닌 인과관계로 역인 대하소설로 읽히는 감동을 준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오로지 자신의 편의를 위해 국민을 속이고 한강철교를 폭파해 수많은 무고한 국민을 살해한 천인공노할 일로 시작되는 바로 그 전쟁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휴머니즘이 정치나 국적보다 더 우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휴머니즘이 총구나 이데올로기보다 더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도원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하며 노동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왜관수도원의 일원이기도 하며 <수도원 기행 2>을 펴낸 분도출판사를 키운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님의 주요한 기획중의 하나였던 가난한 이웃들의 사진만을 찍어 박정희의 핍박을 받는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 이름이 [Human]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예의라는 뿌리를 가진 이 책의 소소한 '인간적인' 면모는 194페이지의 공지영 작가의 저작권인 에펠탑 야경사진으로도 느껴진다. 야경사진을 삼각대가 아닌 손각대로 촬영하여 초점이 맞지 않아 뭉개진 공지영 작가의 귀여운 인간미가 넘치는 사진 말이다.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 2>에서 발견한 유일한 흠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충고는 '야경사진을 찍을 땐 귀찮더라도 삼각대를 사용하시라'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우리 시대의 고전에 담길 사진이라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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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영의 글쓰기 노트 - 대통령의 필사가 전하는 글쓰기 노하우 75
윤태영 지음 / 책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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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지만 2009년 5월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연결식 조사를 상기해보자. 장례식을 치러내기 위한 한승수 국무총리의 '의례적인' 조사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것을 애통해하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통한의' 조사가 이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조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로 시작해서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로 마치는 한명숙의 조사는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모든 일정 중에서 그를 추모하는 이들의 눈시울을 가장 뜨겁게 달군 대목이었다. 이 조사를 쓴 이가 바로 윤태영 전 비서관이다.


국민의 반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위대한 경사스러운 날'이며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이 대통령이 된 쾌거'였고 또 다른 국민의 반에게는 어쩌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보다 더 한 절망을 안겨준 2012대선을 상기해보자. 결과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선거기간동안 유난히 뇌리에 오랫동안 스며든 연설의 한 장면은 문재인 후보의 어눌한 입에서 나왔다. "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명연설을 쓴 이가 바로 윤태영 전 비서관이다.


이 두 개의 글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글은 어려운 미사여구가 아닌 살아 있는 생활 속의 언어를 재료로 삼아야 하고, 윤태영의 글쓰기 방식이 우리 시대의 더할 나위 없는 글짓기 선생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다양한 글쓰기의 지침 속에 알알이 담긴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저자와 관련된 인물과의 에피소드는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를 글쓰기 교재가 아닌 '노무현 추억하기'로 읽히기도 한다.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는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대한 칭찬을 전혀 듣지 못한 '문학청년' 지망생 저자가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고, 정치권의 글쟁이를 거쳐서 이제는 <기록>(책담, 2014)이라는 걸출한 저서를 남긴 글쓰기 선생이 되기까지 몸소 체득한 글쓰기 비법 75가지를 알려준다.


스포츠 세계에서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감독이 의외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지 않다. 뉴욕 양키스의 '조 토레'나 삼성 라이온즈의 '류중일'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하지만 넥센 히어로스의 '염경엽'처럼 무명선수출신의 명감독이 많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이 명선수였던 사람은 애초부터 타고난 재능이 워낙 탁월하여 '못하는' 선수들의 심정이나 상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 애초에 자신이 주목받지 못한 현역생활을 거친 감독들은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춘 지도력을 발휘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저자 윤태영도 마찬가지다. 문학을 지망하긴 했으나 재능은 타고나지 못한 그는 꾸준한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하고 우리시대를 관통하는 명문장을 써낸 장본인이 되었다. 재능은 싸구려이며 중요한 것은 훈련이라는 말의 훌륭한 예가 바로 윤태영이다. 그런 그가 '실용적이고 당장 처방이 가능한 글쓰기 비법'을 소유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글쓰기 강좌는 지켜야 할 수칙도, 사례도 구체적이다. 김훈이나 김승옥의 소설에서 예문을 구해오기도 했지만 예문의 대부분은 그가 정치 글쟁이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글쓰기 실무의 경험에서 따왔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메모로 쓴다"

"이름 모를 소녀 신비함의 유혹에 빠지지 말자"

"접속사,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자. 흐름을 중시하자"

"모든 것을 설명하지 말자. 욕심이 글을 지루하게 만든다"

 으로 대표되는 75가지의 글쓰기 노하우는 철저하게 실용적이며 구체적이다. 




소설이야말로 글쓰기의 훌륭한 교재라는 가르침에 나는 철저하게 동의한다. 좋은 소설을 읽고 그들을 흉내 내는 일이야 말로 좋은 글쓰기의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도 무릎을 치게 하고 가슴을 울리는 명문장이 가득한 김훈이나 김승옥 그리고 이문구 등의 소설을 읽을 때면 수첩을 곁에 두고 메모를 한다. 메모한 문장이나 문투를 다음번 글을 쓸 때  한 번 써먹겠다는 생각이다. 여의치 않으면 그 문장을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가면서까지 흉내 내야 속이 시원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흉내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어투와 글 솜씨를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는 고매한 학문의 깊이를 자랑하면서도 제자의 함량을 고려하지 않는 저 높은 곳의 하늘 같은 스승이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호랑이 선생의 송곳 같은 질문에 쩔쩔매는 친구를 돕기 위해서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힌트를 주는 다정한 친구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밝혀둘 것은 이 글은 접속사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흐름을 중시하라는 저자 윤태영의 충고대로 접속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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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 -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전몽각 지음 / 포토넷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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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서울의 한 가정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대학에서 사진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딸아이의 아버지는 귀여운 딸을 낳아준 아내와 딸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족의 일상을 카메라로 담기로 결심했다. 딸아이의 이름은 윤미였고 그 딸아이를 너무나 사랑한 아버지는 전몽각 선생이었다. 전몽각 선생의 <윤미네 집>은 이렇게 윤미의 출생과 함께 잉태되었다.


전몽각 선생의 사진집 <윤미네 집>은 여러모로 각별하다. 사진집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반 독자들에게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는데 전문사진작가가 아닌 평범한 '아빠 사진사'의 작품이라는 것이 더 놀랍다. '장가도 못 갈 것 같았는데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을 가지게 된 것이 너무 신기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게 이 사랑스러운 사진집의 시작이었다.


전몽각 선생은 아빠의 시선으로 사랑하는 딸아이 '윤미'가 태어나서 시집 가는 순간까지 일상을 카메라로 꾸준히 담았다. 이 사진집을 출간하게 된 계기도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윤미'가 그리워서였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소장용으로 출간이 된 <윤미네 집>은 의외로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전몽각 선생 자신이 말한 것처럼 '아마추어리즘의 소산'인지 플래시와 삼각대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 흑백사진들은 가족들의 소소한 일상이 주는 잔잔한 감동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독자들의 관심은 많은데 애초에 많지 않은 수량으로 출간이 된 이 사진집은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의 애를 태웠다. 사고 싶어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이 사진집이었고 급기야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분량마저 독자들의 성화에 금방 판매가 되었다.


워낙 많은 이들이 <윤미네 집>을 찾는 탓에 결국 초판이 나온 지 20년째 되는 2010년에 새로운 장정과 편집으로 세상에 다시 나왔다. 주명덕 작가가 편집을 맡았고 초판에 없던 '마이 와이프My Wife'가 더해졌다. '마이 와이프My Wife' 는 2006년 유명을 달리한 전몽각 선생이 췌장암 선고를 받고 가장 먼저 정리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와 사진들이다. 천신만고 끝에 구판을 간신히 구해서 소장하던 나는 신판이 나오자마자 2권을 주문해 비닐랩핑도 뜯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전몽각 선생은 원래 토목학자로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가했으며 성균관대학 부총장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이제 그는 '윤미네 아빠'로 더 잘 알려졌다. 딸아이와 가족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는 큰 딸 윤미가 태어난 1964년부터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1989년까지 윤미와 아내의 일상을 렌즈에 담았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그에겐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아내와 딸은 그에게 최고의 모델이었다.


카메라가 흔해진 요즘에는 '아빠 사진사'가 아닌 아빠가 드물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장해서 결혼을 할 때까지 '아빠 사진사'노릇을 하는 아빠는 드물다. 전몽각 선생은 심지어 윤미가 결혼을 할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곳까지 따라가서 사진을 담는 열성까지 보인다. 물론 딸의 허락을 사전에 받기는 했지만 참으로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딸의 일상을 담으려는 그의 의지는 심지어 결혼식까지 이어져서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쥐고 로우촬영으로 윤미의 모습을 촬영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그의 시도는 딸아이 윤미에 못지않게 사랑하는 아내의 반대로 무산이 되었고 대신 그의 절친인 강운구 선생이 대신 촬영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윤미가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가 윤미를 더 이상 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윤미가 미국생활을 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혼식 사진이 윤미의 마지막 사진이 된 것이다. 사진집으로서는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윤미네 집>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이란 결국 기술이나 장비의 소산이 아닌 따뜻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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