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제목의 패턴이 어디선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루키가 마라톤을 취미로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거의 30년 가까이 그것도 거의 매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고는 놀랐다. 이 정도면 거의 취미를 넘어선 정도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도 몇년전 달리기에 대해 관심을 갖었던 적이 있어서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달리기에 대한 사유들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하루키에게 달리기는 소설을 쓰는 정신적 노동을 뒷받침하는 육체적 노동으로 보여진다. 소설을 쓰는 일이 체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몸을 관리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일을 강제적으로 하면 그것은 바로 고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신이 선택한 고통의 경우는 다른 경우다.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은 그 고통에 어느 정도는 중독되도록 스스로의 몸을 변화시킨다.
그렇게 오랜동안 달리기를 할 수 있으니 당신은 참 의지가 강하군요,라는 질문에 하루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근 30년동안 달리기를 해왔다는 것은 의지가 강한 것의 문제가 아니라고.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싫어하는 행위를 그렇게 오랜시간 할수는 없는 법이다. 성격상 그일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구력을 요하는 장거리 달리기가 자신에게 맞아서 단지 뛸 뿐이라고 한다.
100킬로 미터를 뛰는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는 일화에서는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물론 소위 멍때리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 순간도 많지만, 자아라는 것을 생각지 않고 살 수 없는 의식적인 동물이 인간이다. 하지만 육체가 극한의 고통상태가 놓이게 되면 이 의식이란 것의 힘은 급격히 사그라든다. 하루키는 100킬로를 완주하기 위해 '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라고 만트라처럼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 기묘한 느낌은 경험해본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고 난 뒤 러너스블루(러너스하이와 대조되는 개념)를 겪었다고 한다.
급기야는 수영, 사이클, 달리기 세가지를 다 해야하는 트라이애슬론에 까지 출전하게 된다. 끝까지 자신은 '최소한 걷지는 않겠다'라고 말하는 하루키의 말에서 그의 작품에서 풍겨져나오는 어떤 신념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여름에 잡은 오랜만의 하루키의 에세이 덕분에 나도 달리고 싶어졌다. 쓰지 않아 퇴화된 근육들이 이곳저곳에서 움직여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하지만 장마라서 말이지.. (핑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