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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평점 :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이란 것은 얼마나 정확한 걸까.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의 결말이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너무 달라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거나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이 하는 당시 이야기가 서로 다를 때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참 믿을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니면 내가 그저 기억하고 싶은 데로 기억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기억들은 각색하거나 아예 지워버리기도 하니까.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이런 ‘기억’을 소재로 하고 있다. 대중문화평론가로 대중과 방송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인 ‘현수빈’과 그녀의 남자친구인 ‘박우돌’은 어릴 적 한 다가구주택에 함께 살았던 소꿉친구다. 수빈이 자신의 유년기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게 되면서 둘은 과거 그들의 집이었던 ‘라일락 하우스’에 함께 세 들어 살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방은 5개, 그 방 하나에 하나의 식구가 세 들어 살았다. 주인공 수빈이네 식구 네 명, 건넌방에 20대 초반 언니들 세 명, 문간방에 총각 하나, 별채 두 칸의 방에는 박우돌의 식구 넷과 신혼부부 둘이 각각 살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지금 같으면 그냥 한 가족이 살 법한 집에 대체 몇 명이나 살았던 걸까?
주인공 수빈과 나는 같은 또래다. 나 또한 그 시대에 유년기를 보냈다. 알전구, 석유풍로, 연탄아궁이, 그 많은 사람들 집에 단 하나밖에 없던 재래식 화장실과 마당 한 쪽에 있던 하나의 수돗가. 그들은 아마도 보이기 싫던 치부들도 들켜야 했을 것이고 다들 비슷비슷한 형편이었지만 조금씩 다른 삶의 모습에 질투하고, 시샘하고 때론 같은 처지를 이해하며 보듬어 가며 살기도 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그런 집과 사람들을 떠올리다 내친김에 그때 같이 살던 사람들을 수소문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그녀는 연재 중 문간방 총각의 연탄가스 중독 사망사건을 기억하고 칼럼을 쓰게 되는데 그 칼럼을 보고 당시 사건을 조사했다는 은퇴한 경찰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 사건에 뭔가 석연찮은 비밀이 있음을 직감하고 블로그와 연재를 보고 연락을 해온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그녀는 그때 7살이었다. 어린 아이의 기억과 어른의 기억이 같을 리 없고, 과거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하는 기억들을 말하지만 다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그 단편적인 기억들이 뭔가 조금씩 아귀를 맞춰가며 형태를 띠기 시작하자 그녀의 지지자였던 애인 우돌이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죽은 총각과 우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돌은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소설은 과거 문간방 총각의 연탄가스 중독 사건의 비밀을 찾는 과정에서 당시 라일락 하우스에 함께 살던 사람들의 다른 은밀한 비밀들을 드러낸다. 그 비밀은 누구에겐 봉인된 고통의 해방구였지만 누구에겐 비극의 씨앗이 된다. 비밀은 드러났어야 했을까? 진실은 꼭 밝혀져야 하는 걸까?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기억들이 어떤 계기로 의식의 수면위로 떠오를 때 우린 감당하긴 힘든 진실을 마주해야할 고통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한 없이 안전하고 따뜻하기만 했을 것 같은 나의 유년도 알고 보면 추악한 진실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난 안전하지만 그런 무의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는 내 인생 언제, 어디에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소설은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씁쓸한 결말을 맺는다. 소설 초반부에 깔아놓은 복선들이 모여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누구는 해방되고 또 누구는 절망으로. 이래서 내가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도대체 한시도 편안하게 살게 놔두지 않는다. 적자생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잔인한 법칙이 지배하는 이 거친 세상에, 어쩔 수 없이 끝이 정해져 있는 듯해 무료한 내 인생도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특별한 인생으로 여기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