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이 30주년 후원의 밤 행사를 엽니다. 


저는 한 사람의 후원인으로서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이지만, 


인권운동사랑방이 지나온 지난 30년은 정말 뜻깊은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늘 우리 사회 인권의 최전선에서 맨 몸으로 맞서 싸우면서 


을들의 권리를 지켜내고 


우리 사회를 좀 더 민주주의적인 사회로 개조하기 위해 애써온


시간들이었습니다. 


헌신적이라고 말하면 당사자들은 쑥스러워 할 테고 


눈물겹다고 하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씩씩하고


투사라고 하기에는 심성들이 너무 고와서 


적절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살아오고 지켜온 


지난 30주년을 크게 축하하고 앞으로도 더욱 같이 엮여서 지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축하해주시고 


인권운동사랑방이 새로운 30주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후원의 밤 행사와 관련해서는 아래 링크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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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oumoon.co.kr/invite/bebm/v2.php?seq=13552







인권운동사랑방 30년 후원의밤 '기꺼이 엮인 우리'

일시2023년 03월 31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 6시 30분부터 함께 식사해요
장소서강대 곤자가컨벤션
서울 마포구 고산16길 58

'기꺼이 엮인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랑방을 후원해주세요

사랑방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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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번호 보기

후원의 밤 오시는 길



 

서강대 곤자가컨벤션 (서울시 마포구 고산16길 58)

- 6호선 대흥역 1번 출구 도보 5분 거리

- 2호선 이대역 6번 출구 도보 10분 거리  


 

 자가용으로 오실 경우 지하주차장 이용이 가능합니다.

 휠체어 접근이 가능합니다.


 

 

후원의 밤 진행


 

여는 노래  |  싱어송라이터 이주영

첫번째 발언  |  사람과 사람, 함께 엮어온 존엄

이야기 마당  |  인권운동사랑방, 30년의 엮음과 엮임

두 번째 발언  |  운동과 운동, 다시 엮어갈 해방

함께 부르는 노래  |  상임활동가 & 30주년함께위원회

 6시 30분부터 함께 식사해요 :) 

 비건용 식사도 준비합니다.

 수어통역이 있습니다.


 


 

사랑방 30주년 기념 홈페이지


 

후원 계좌 


인권운동사랑방  

신한은행     100-020-549043

인권운동사랑방  

국민은행     031601-04-06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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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지지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서울 마포, 신촌 지역 학술단체 연합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탑승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성명서를 만들었고, 


오는 3월 22일에 일간지 광고 게재를 위해 지지서명과 함께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성명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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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탑승 투쟁에 함께 연대한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투쟁이 우리에게 오랫동안 잃어버린 대의를 일깨워주고 있고, 우리는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으며, 우리가 어떤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 깨달아가고 있다.

 

전장연 투쟁 바로 보기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투쟁을 보는 관점을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시와 정부, 그리고 보수 언론은 연일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을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투쟁으로 몰아가면서, 계속 이런 불법 시위가 지속될 경우 법에 따라 엄단할 것이며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전장연은 지난 20년 동안 이동권 투쟁 등의 권리 투쟁을 전개해오면서 정부, 국회, 지자체와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왔으며, 그 결과 작년 국회 상임위 차원에서는 여야 합의로 장애인권리예산 6600여억 원이 증액된 바 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의 거부에 의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23년도 예산안에서는 단지 106억 원의 증액에 그쳤다. 이는 전장연 요구안 대비 0.8%에 불과하다.


가스비 인상으로 시민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정부와 여당은 수조 원이 넘는 긴급 난방 지원비를 편성하겠다고 하면서도, 장애인들이 수십 년 동안 요구해온 장애인권리예산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 정부에는 장애인의 권리, 더 나아가 사회적 약소자들(minorities)의 권리에 대한 고려가 전적으로 부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누가 비폭력적이고 누가 폭력적인가


이러한 무시와 약속 불이행에 대해 전장연이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전장연은 권력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그러면서도 아주 평화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경찰의 집요한 방해에 굴하지 않고, 불법 시위를 중단하라는 권력의 커다란 소음에 맞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힘껏 자신들의 요구를 외치고 있다.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온몸으로 평화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전장연의 투쟁과 이에 대한 탄압은, 오늘날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물리적 구타와 같은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인 공동체 성원들 사이의 긴밀한 연대를 파괴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집합적 주체로서의 시민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 행위자들로 변모시킨다. 시민의 연대 없이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으며,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무시될 때 시민의 연대는 허물어진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다. 전장연은 가장 약소자들 가운데 하나인 장애인들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하고 지켜냄으로써 파괴되고 있는 시민들의 연대를 복원하기 위한 싸움의 최전선에 나서고 있다.

 

시민 모두가 잠재적 장애인


지난 20여 년 동안 전장연은 장애라는 것이 개인들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속성을 지닌 것임을 눈부시게 입증해온 바 있다. 우리들 각자는 인생의 상이한 시기에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일정한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은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지니게 되며, 상처 받기 쉬운 신체를 지닌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전장연의 투쟁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과 관련된 투쟁이 아니라, 잠재적인 장애인들로서 시민들 전체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 덕분에 연로한 시민들을 비롯한 교통약자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의 토대로서 돌봄 연대


더 나아가 전장연의 투쟁은 돌봄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장애인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손길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나 보호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년의 시기에만 돌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것이 관계 속의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전장연의 투쟁은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러한 돌봄의 중요성과 공적인 의무를 외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역으로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사람답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돌봄의 연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집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적 연대를


그렇다면 전장연의 시위가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소수 집단의 불법적인 시위라는 정부와 서울시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임이 자명하다. 이는 사실 우연이 아니다.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정부일수록 자신들의 잘못을 뒤집어 피해자를 가해자로 변모시키고, 이들을 탄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전장연 시위는 민주주의적 통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싸움이다. 갖은 협박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전장연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적 시민들이 권위주의적인 억압에 맞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싸움에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확장하는 길 이외에 다른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로에 가깝게 줄어들 수도 있고 무한대로 팽창할 수도 있는 권력이다.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고 그에 동참함으로써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민주주의 정치체의 주권자임을 입증하기로 하자. 우리의 민주주의적인 권력을 무한히 증대시켜 보자.


 

- 정부와 여당, 서울시는 전장연의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시민으로서 장애인들의 권리를 박탈해 온 지난 시간에 대해 즉각 사과해야 한다.

- 기획재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대표자들이 합의를 통해 결정한 예산안을 대폭 삭감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전장연과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야 한다.

- 정부와 국회는 전장연이 요구해 온 정당한 장애인권리예산을 2024년 예산안에 전액 반영해야 한다.

- 시민들과 연구자들은 전장연의 투쟁에 동참하고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권리예산 투쟁을 지지하는 연구자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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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주소를 따라 가시면 지지서명을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후원금 계좌번호로 일간지 광고 게재를 위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hUXyuCH-T7VrHjTwui05qoeAV-alQaZh-_fudLk_9nK6E9w/view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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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3-06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일에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력하나마 힘을 보탭니다.

balmas 2023-03-06 21:16   좋아요 0 | URL
지지와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문학과 사회-하이픈]에 실릴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원래 40매 정도의 분량으로 청탁을 받았는데, 


이것저것 쓰다보니까 120매까지 분량이 늘어나서 


그것을 다시 60매 정도로 축약하느라고 좀 고생했습니다.^^ 


근데 원고를 보내고 나니, 아무래도 '절반의 글'인 것 같아서 좀 찜찜하네요. ㅎㅎ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번에 빠진 부분까지 포함해서 


온전한 글로 다시 발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정보기 이전의 글인 만큼, 이 글에 대한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출판된 판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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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말, 훼손된 정치 정치의 진실을 찾아서

 

 

폭군 아이가 권력을 휘두를 때

 

주디스 버틀러의 최근 저작 {비폭력의 힘}을 읽다 보면 여러 대목에서 무릎을 칠 만큼 공감하게 된다.[Judith Butler, The Force of Nonviolence, Verso, 2020;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국역본은 유려한 번역이지만, 적지 않은 대목에서 부정확한 번역이 나타난다.] 비록 이 책의 모든 논지에 대해 동의하기는 어렵고 어떤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도 되지만, 현대의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폭력들을 비폭력의 이론적 프레임에 따라 독창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유려하고 매력적인 글쓰기로 풀어내는 버틀러의 능력은 그가 오늘날 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지 충분히 납득하게 해준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렇다. 버틀러는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는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들(트럼프, 보우소나르, 두테르테, 푸틴,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치 지도자들과 같은)에 대해, 그리고 그들에 맞선 저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의 우두머리가 폭군 아이일 때(이 아이는 사방팔방으로 마구 성질을 부리고 언론은 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홀린 듯이 주시할 때), 연대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사람들, 이 아이가 사용하는 분별력 상실 전략들의 매혹을 떨쳐낼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드넓은 공간이 열린다. 미친 독재자를 추종하는 사람들과의 동일시가 권력자의 고의적 위반법을 무시하고 권력(파괴능력)에 가해지는 모든 제약을 무시하는 작태과의 동일시인 만큼, 반독재운동은 탈동일시를 토대로 삼게 된다.” [Judith Butler, The Force of Nonviolence, p. 117; 󰡔비폭력의 힘󰡕, 215~16.]

 

이 대목을 읽으면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현상들을 떠올리는 것이 과연 나 혼자만일까? 마치 폼 나게 으스대면서 왕과 같은 대접 한 번 받아보는 것이 정치가가 된 유일한 이유인 듯한 대통령과, 인스타그램에 멋진 사진들을 찍어 올리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어떤 젊은이들처럼,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인 듯한 그의 부인이야말로 한껏 제 욕심을 채우지 못하면 사방팔방으로 마구 성질을 부리는 어린 아이들과 닮지 않았는가?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손바닥에 왕()자를 써놓고 (마구 성질을 부리는 또 다른 폭군 아이인) 한 재벌과 더불어 멸콩 놀이같은 유치한 놀음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마치 금기를 깨뜨리는 전위적인 유희라도 되는 양 그것에 열광하면서 동일시에 빠져들던 젊은이들과 언론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검사 출신답게 늘 법치주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기 처가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으름장을 대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고의적 위반행위는 또 어떤가?


이 폭군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말이 있을 리가 없다. 후보 시절부터,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도 정부는 국민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으면서도 정작 10.29 이태원 참사 같은 대형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는, 마치 조폭이 충성스러운 부하를 감싸듯이, 주무부처의 장관을 어떻게 해서든 그 책임으로부터 면제시켜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다가 결국 최초로 탄핵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른바 관제 애도의 경우는 어떤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으로 이전 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을 경험한 터에 또 다시 발생한 대형 참사를 마냥 외면하기는 어려워서 애도의 시늉을 하느라고, 일방적으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고 모든 국민에게 애도의 의무를 부과하면서도 정작 참사피해자라는 명칭을 극구 외면한 채 사고사상자라는 명칭이 적절하다고 강변하고, 글씨 없는 검은 리본 착용을 강제하는 일이 빚어졌다. 더 황당하고 비극적인 것은 지금은 추궁의 시간이 아닌 추모의 시간이라는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의 말이다. 이 말은 현 정부와 여당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 진정한 애도를 위해 필수적인 참사의 진상 조사를 외면하거나 축소하고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애도를 의례적인 애도의 의례로 대체함으로써, 하루빨리 참사를 지나간 일로 덮어버리려는 속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가족들은 참사의 진상을 알 권리를 박탈당한 채, 세월호 참사 당시와 비슷하게 가족을 잃은 슬픔에 더하여 각종 2차 가해에 시달리면서 고통 받고 있다.


더욱이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줄곧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자신의 정치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로 제시해왔다. 과연 자유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인지, 평등 없는 자유란 사실은 귀족의 자유이거나 가진 자의 자유가 아닌지, 따라서 평등 또는 평등자유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가치 내지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지만,[주지하다시피 현대철학에서 평등의 중요성을 가장 역설하는 철학자는 자크 랑시에르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평등자유”(égaliberté)라는 합성어를 통해 평등과 자유가 상호 분리 불가능한 개념임을 역설한 바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2부에 수록된 글들을 참조.그의 자유의 수사법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철학 이론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스스로 자신의 말이 나쁜 의미에서 수사법에 불과한 것임을, 곧 허언에 불과한 것임을 여러 차례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예를 든다면, 여당의 당 대표 선거 과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면서도, 그는 자신이 당 대표 선거 과정에서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다른 유력한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입후보 자체를 강압적으로 저지하고 나섰다. 가장 보수적인(또는 수구적인) 신문들조차 개탄하는 이런 반()자유주의적인 행태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실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외치는 것을 보면,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약간의 철학적 성찰

 

하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의 지지자들이 제일 분노하는 것은, ‘법치주의에 관한 대통령과 검찰의 이중적인 태도일 것이다. 엄격한 법치주의라는 명목 아래 헌정 사상 최초로 제1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도(아마도 명백한 범죄 혐의에 대한 제대로 된 소명도 없는 가운데), 뚜렷한 주가조작 혐의가 드러난 대통령 부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를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히 이중적인 태도를 넘어, 명백한 정치 탄압이자 노골적인 검찰 독재의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들이 이라는 글자를 뒤집어 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하고 야유하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민주파괴, 검찰독재, 윤석열을 타도하자!”고 시위에 나서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현 정부의 통치에서 단순히 말의 훼손을 넘어서 정치 자체가 훼손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도, 너무나 유치하면서도 몰상식하고 막무가내인 행태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면서도, 민주당 지지자들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도 역시 또 다른 말의 훼손, 정치의 훼손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비록 두 경우에서 이루어지는 훼손이 동등한 정도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편이 덜 사악하고 덜 반민주적인가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은, 내가 지닌 철학도로서의 정체성 및 정치의 진실에 대한 믿음과 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지점이 약간의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지점일 것이다.


우선 자크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제시한 두 가지 통찰에 의지해보자. 󰡔법의 힘󰡕에서 데리다의 핵심 테제 중 하나는 법은 법으로서 폭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법은 그 자체 내에 강제할 수 있는 힘, 강제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법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법은 법으로서, 법 자체로서 이미 그 자신 안에 힘,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 데리다는 “enforceability of law”라는 영어 표현, 법의 강제 가능성이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함의를 발견한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15.]


그런데 여기서 바로 질문이 제기된다. 법이 법으로서 항상 이미 자신 안에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법적인 힘, 법 바깥의 폭력, 법을 위협하는 힘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을 질문 A”라고 하자.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한편으로 정당한 것일 수 있거나 어쨌든 적법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힘 [...] , 다른 한편으로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폭력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정당한 힘 또는 비폭력적인 힘이란 무엇인가?”[자크 데리다, 같은 책, 17.]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는 이것과 전혀 무관해보이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연관성을 지닌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선행하는 어떤 적법성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어떤 사람들이 곧바로 말할 것처럼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자크 데리다, 같은 책, 17~18. 강조는 인용자.]

 

밑줄 친 부분을 질문 B”라고 하자. 질문 B는 질문 A를 두 가지로 탈구축한다.

 

(1) 탈구축의 1단계

 

질문 B는 적법한 힘과 불법적인 폭력 사이의 구별에 전제되어 있는 적법성과 불법성 사이의 절대적 대립을 탈구축한다. 곧 질문 A에서는 법 바깥에 있고 법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 불법적 폭력이 질문 B에서는 기원적 폭력으로 변화한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A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항 대립이 설정되어 있다.

 

(A) 적법한 법의 힘 불법적인 폭력

 

반면 질문 B에서는 이러한 이항 대립 중 두 번째 항목(불법적인 폭력)이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여기서는 불법적인 폭력이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으로 전환된다.

 

(B) 적법한 법의 힘 불법적인 폭력

                             기원적 폭력


(2) 탈구축의 2단계

 

그런데 이처럼 불법적인 폭력기원적 폭력으로 전환되면, 그 상대편에 있는 적법한 법의 힘역시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정당성 내지 적법성을 독점하는 유일하게 타당한 법질서가 아니라, 기존 법질서의 수호자로서, 따라서 기존 법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또 하나의 폭력으로서 나타난다.


질문 B는 더 나아가 질문 A의 이항 대립을, 󰡔법의 힘󰡕 2부에서 다루게 될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차이(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제시한)로 바꾼다.

 

적법한 법의 힘 불법적인 폭력

법보존적 폭력  ↔ 기원적 폭력 = 법정초적 폭력

 

이렇게 되면 질문 A에서는 정의와 동일시된 법의 힘 대 불법적인 폭력 사이의 단순하고 명백해 보이는 대립이었던 것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구별임이 드러난다. 곧 정의로 자처하는 법의 힘이란, 사실은 승리한 권력이 자신의 승리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행사되는 힘이며, 이것이 내세우는 정당성 내지 적법성은 그것이 (폭력으로서) 승리했고 자신의 법을 설립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스스로 정의임을 내세우는 법의 힘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따라서 가장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것은, 자신을 몰아낼 수 있는 또 다른 힘, 곧 새로운 법을 설립할 수 있는 기원적 폭력(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법정초적 폭력”)이다.


이는 곧 법과 폭력, 정의 사이의 관계가 뚜렷한 경계선을 두고 서로 명백하게 식별되고 분간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가 아님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법과 폭력 사이의 이러한 상호 대립 관계에 대한 탈구축은, 역사적 상대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탈구축을 거치게 되면 어떠한 법도, 어떠한 정치 세력도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어떤 세력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그 자체로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의는 법과 동일하지 않으며, 힘의 승리로 환원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대목에서 데리다는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단편 하나를 인용한다. , 정의라는 제목이 붙은 이 단편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지만, 매우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데리다는 이 단편을 나눠서 인용하면서 자세히 주해하고 있지 않지만, 내 생각에 데리다가 이 단편을 인용한 것은 아마도 여기에 담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전하고 싶어서였을 것 같다. 각각의 문장에 번호를 붙여서 한번 그 뜻을 살펴보자.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같은 책, 26~27.]

 

이 제기하는 질문은 왜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한데,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이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고 이상적이고 정의롭다는 의미에서 정당하지만, 그럼에도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곧 정의로운 것이 지속되면 바람직하고 정의롭겠지만,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는 정의로운 것보다 강한 것이 지속되어 왔으며, 그것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 필연적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서 파스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정의로운 것과 현실적이며 필연적인 강한 것 사이의 대비 내지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에서는 힘없는 정의정의 없는 힘이 대조를 이룬다. 전자는 무기력하며 후자는 전제적이라고 평가된다. 데리다의 주석에 따르면 “‘강제할 힘을 갖지 못하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실현되지 못한다. 무기력한 정의는 이라는 의미에서 정의가 아니다.”[같은 책, 27.] 곧 정의가 정의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강제할 힘을 갖추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정의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력한 정의, 곧 말뿐인 정의,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이상에 불과한 정의에 그칠 수 있다. 데리다는 이처럼 강제할 힘을 갖춘 정의를 이라는 의미에서의 정의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것은 정의가 실효성을 갖기 위한, 강제할 힘을 갖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스칼에 따르면 정의가 힘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에서 말하듯, 무기력한 정의를 비난하는 사악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정의는 세력들 간의 투쟁의 조건 속에서 실존하기 때문에 정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함을 뜻한다. 이것이 가 뜻하는 것이다. 정의와 힘 또는 폭력은 서로 외재적이거나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 는 정의와 힘이 결합될 수 있는 두 가지 양상을 가리킨다.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5-1)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5-2).


(5-1)이 가리키는 것은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이 정의로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의를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5-1-1). 우리가 영웅을 다루는 영화라든가 드라마 또는 소설이나 연극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정의로운 주인공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자신의 정의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악당이라든가 나쁜 세력을 물리치는 것이다. 아마도 민주당 지지자들(특히 강성 지지자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5-2)는 조금 더 미묘하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강한 힘을 지닌 것, 하지만 그 자체로는 정의롭지 않은 어떤 것이 정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5-2-1) 반대로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실제로 정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힘을 정의로운 것으로 꾸미거나 미화하는 것일 수 있다.(5-2-2) 이 경우 강한 것은 부당하게도 자신을 정의로운 것으로 미화함으로써, 정의 자체를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수 있다.


여기서 다시 (5-1)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5-1)의 경우도 사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정의로운 것이 강하게 되는 것은, 정의가 강제할 힘을 갖는 것, 곧 정의가 법을 통해, 실정법이 지닌 강제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와 법 사이의 관계는 동일성의 관계이거나 마냥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데리다에 따르면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정의가 법적 강제력을 지닌다는 것은 순순히, 아무런 잡음이나 갈등 없이 평화롭고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의가 법적 강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정의는 자신의 정의로움을 얼마간 상실할 수밖에 없다.[이점을 간명하면서도 깊이 있게 설명한 것이 막스 베버의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


예컨대 혁명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린 세력, 곧 법정립적 폭력은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고 수립하는 힘이라는 것을 천명한다. 그런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이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들에 맞서 자신을 보위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힘은 적들을 파괴하고 제거할 수 있는 폭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세력이나 정체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힘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정의로운 세력은 이미 닫힌 세력, 곧 타자들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거나 그들을 하나하나 존중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 일정한 정체성에 들어맞는지 여부에 따라 타자들을 평가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수용하거나 배제하는 세력이 된다. 그리고 이때의 타자들은 내부의 타자들(간첩, 반역자, 불순분자, 의심스러운 자 등)을 포함하기 때문에, 정의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힘, 자신의 강제력을 요구하자마자 정의는 더욱 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세력이 된다(5-1-2). 그렇다면 (5-1)에서 정의로운 것이 강해지는 것은, 정의로움은 있는 그대로 보존한 가운데 외삽적으로 힘을 추가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정치의 진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제시하는 이 두 가지 통찰이 전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파스칼의 단편에서 마지막 두 문장을 조금 더 살펴보자. 파스칼은 을 대비시킨다. 파스칼은 정당한 것이 강한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순수하게 정의로운 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세력화의 조건은 정의로움의 (얼마간의) 상실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는 겉보기에는 정의에 대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표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5-1)(5-2)에서 봤듯이, 이러한 파스칼의 견해를 단순히 강한 것정당한 것을 외재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파스칼의 의도는, 처럼 사람들이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던 이유는, 5-1-2와 같은 힘 또는 권력의 고유한 메커니즘에 대해 맹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파스칼이 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겉보기에 그렇게 생각될 수 있듯이, 반드시 5-2-2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는 오히려 5-1-2에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권력의 고유한 메커니즘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 방식은 5-2-1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 길, 그 자체로는 정의롭지 않은 어떤 것이 정의롭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이 문제에 관해 상론할 여유는 없지만, 몇 가지 간단한 논점을 제시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의와 강함은 일치할 수 없다는 것, 또는 막스 베버가 말한 의미에서 정치의 비극성을 유념하는 데서 가능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비극성을 유념한다는 것은 정치에서 무조건적인 지지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 정의로운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버틀러가 말하듯이 탈동일시임을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동일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특히 통치 세력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성질을 부리는 폭군 아이와 같은 세력일 때, 그들을 비판하고 혐오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저렇게 명백히 사악해 보이는 적들에 맞서는 저항 세력과 탈동일시하는 일이다. 그 어려움은 강하고 사악한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저항 세력들이 똘똘 하나로 뭉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저항 세력들 내부에서 강한 집단을 중심으로 결집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결집은 약한 집단 및 개인들의 희생이나 손실을 요구하며(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명분 아래), 그러한 희생이나 손실은 어쩌면 영구히 지속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 사악하고 강한 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항상 결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2016~17년 탄핵 촛불시위에 힘입어 집권한 민주당은 아주 분명한 실례를 제공해준다. 6년 전 가을과 겨울 전국을 뒤덮은 촛불집회의 뜨거운 함성과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는 신기원적인 사건으로 칭송받았다. 때로는 촛불혁명이나 촛불시민혁명으로 불리면서 국민주권의 시대를 개막하는 사건,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혁명적 사건으로 예찬되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촛불의 뜨거웠던 열기는 마치 신기루인 듯, 매섭게 몰아치는 차가운 칼바람에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촛불 민주주의가 이처럼 급격하게 위세가 꺾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외부적 요인들에 앞서 내적인 한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헌정 사상 최대 의석인 180석을 지닌 막강한 여당이었음에도 민주당은 재벌 개혁, 선거 제도 개혁 같은 핵심적인 개혁 의제를 실행하지 못했을 뿐더러, 여론 다수가 찬성하고 수많은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눈물겹게 투쟁하고 호소했던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반대 세력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민주당이 그 법을 제정하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박권일, 민주당은 왜 그럴까. 그들이 촛불을 배신한 이유, 󰡔황해문화󰡕 116, 2022년 가을호.] 피해호소인과 같은 황당한 신조어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누구누구를 타도하여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면서 결집을 호소한다면, 그 말의 진정성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민주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원동력으로서의 탄핵촛불시위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칭송하듯이 그렇게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정을 농단한 세력을 심판하자는 한 가지의 목적 아래 결집한 세력이었으며, ‘정상적인국정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데리다의 통찰에 따르면, 새로운 법을 정초하는 것에도 훨씬 미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촛불시위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국민주권을 내세운 것은 우연이 아닌데, 이는 국민이라는 기표에 내재하는 계급적 지배에 둔감했고, 여성과 성적 소수자, 비국민 차별 등과 같은 각종 차별과 배제라는 문제에도 맹목적이었다.[진태원, 을들의 연대에 대하여, 󰡔황해문화󰡕 106, 2020년 봄호.] 그런데 실패한 정권의 책임자를 마치 성군이라도 되는 듯 칭송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곧 동일시)만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정의를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며 결집하게 되면, 지난 민주당의 실패와 촛불시위의 한계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일까? 그것은 불가능하며,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오직 탈동일시만이 정치의 비극적인 조건 속에서 정의로운 정치를 위한 길을 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집권 세력만이 아니라 저항 세력에 대해서도 탈동일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약소한 이들, 곧 을 중의 을들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투쟁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소한 이들은 권력도 재력도 배경도 없고, 차별과 배제,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쉬운 이들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투쟁은 민주주의 시금석, 정치의 진실의 관건이 되는 사안이다. 그들이 동일시의 손쉬운 희생물이 될 때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정치의 진실은 약화되며, 최근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헌신적인 투쟁과 같이 그들의 투쟁이 탈동일시로서의 을들의 연대를 위한 조건을 발명해낼 때 민주주의는 진전하고 정치는 자신의 진실을 회복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말했던 바 몫 없는 이들의 몫이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촛불시위가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진실에 이를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불확실한 쟁점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촛불시민혁명이라는 말이 훼손된 말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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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해 지인 중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1. 당시 많은 진보 논객들이 상찬한 촛불시민혁명이 당시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민주당 집권기의 잘못으로 의미가 퇴색된 것일까요? 혹 민주당이 개혁에 성공했다면 당시의 촛불시민혁명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했을까요? 


2.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을들이 다 같은 을들이 아니듯, 민주당도 그럴 것 같은데, 민주당을 싸잡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습니다. 


3. 이재명 대표는 죄가 있나요? 없나요?"



여기에 대해 제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이 글에 대한 "후기"처럼 읽으시면 됩니다.^^ 



첫번째 질문의 경우, 저는 촛불시위 안에는 처음부터 애매성(ambiguity)이 존재했다고 생각해요. 촛불시위가 국정을 농단한 세력 또는 반헌정세력을 탄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보면 분명히 민주주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죠. 하지만 [을의 민주주의] "서문"에서도 지적했다시피, 촛불시위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시급했던 민주주의적인 의제들을 함께 제기하지 못했고, 자신의 혁명적 잠재력을 확장하지도 제대로 실현하지도 못했죠. 그리고 촛불시위의 정치적 수혜를 민주당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이러한 애매성이 촛불시위를 이를테면 "보수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봐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뒤에 5.18 광주항쟁 기념사에서 "촛불혁명"과 "국민주권", "문재인 정부" 사이에 등식관계를 설정했을 떄 여기에는 여전히 촛불시위의 애매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이 애매성이 보수적인 경향으로 전환되었다고 봐요. 조국 법무장관 사건, 안희정 충남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 등이 주요 계기가 되었겠죠.



두번째 질문의 경우는, 그건 민주당만이 아니라 국민의힘도 마찬가지고, 모든 정치 세력이 다 그렇습니다. 단일한 한 가지 정체성을 지니고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닌 정치 세력은 존재하지 않죠. 모두 내부에 이질적인 정체성과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지닌 상이한 집단과 개인들이 결합해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마련이죠. 따라서 정치세력은 늘 불안정하고 항상 동요한 잠정적인 타협체로서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아마 스피노자라면 이런 걸 "독특한 실재"라고 했겠죠.^^


따라서 저는 이 질문을 조금 다른 식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봐요. 예컨대 민주당 지지자들 가운데는 좀더 진보적인 분들도 있을 테고 사실상 국민의 힘 지지자들과 구별되지 않는 이들도 있겠죠. 그런데 정치 세력이 제도적인 틀 속에서 존재하고 활동하며, 그 틀에 따라 일정한 정치적 이익과 손해를 공유하기 때문에, 비록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어떤 정치세력을 지지하게 되면 그 세력이 성취하거나 상실하는 이해관계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죠.


제가 이번 글에서 분량이 더 여유가 있고 시간이 더 있었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조금 얘기했을 거예요.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는 흥미로운 통찰이 여럿 담겨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행위"로서의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 거예요. 그 구별의 논지는 이런 겁니다. 예컨대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자본가의 탐욕을 고발하고 그들을 경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컨대 그 자본가의 회사에서 일하거나 그 자본가가 대주주로 있는 주식을 소유한다면, 우리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도 "행위"의 차원에서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성실히 받아들이고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민주당 지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어떤 분들은 "비록 다른 대안이 없어서 내가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나는 민주당이 지닌 여러 가지 한계를 잘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젝의 구별에 의거하면 이것은 "의식"의 차원에서는 민주당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도 "행위"의 차원에서는 그 이데올로기를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셈입니다. 그러한 의식적인 비판적 지지가 "행위" 차원에서의 비판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그것은 사실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따라서 두번째 질문에서 핵심적인 것은, 어떻게 하면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민주당을 비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이중성 내지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숙고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실 무조건적 지지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요.


세번째 질문의 경우는, 이제 결국 이 문제는 사법적 판단으로 넘어가게 되었어요. 제가 세부 사항들을 잘 몰라서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검찰이 무리한 수사와 기소, 구속영장 청구를 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요컨대 정치적인 수사와 기소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이것은 이미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아니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예상되었던 일이죠. 대통령 선거에서 지닌 세력은 사법적인 부담을 지게 되어 있었죠. 사법부의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 사건이 빨리 처리되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내년 총선까지는 계속 이 사건이 사법적 쟁점으로 남아 있겠죠. 그건 민주당으로서는 매우 힘든 정치적 부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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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크 2023-03-13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3번 질문의 답에 대한 질문입니다. 민주당의 정치적 부담이 큰 상황에서 총선승리만을 목적으로 이재명대표가 사퇴해야할까요? 개혁의 관점에서 민주당 수박들이 당내 영향력을 가자는 한 총선승리를 한들 결국 검찰과 언론에 의해 개혁은 공염불이 될거라고 봅니다. 수박들은 지금 정의를 요구할때가 아니라 힘을 가질때라고 말하겠지만 ..

balmas 2023-03-1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고 답변하기가 어렵네요.^^ 그 문제는 민주당 당 내 갈등 내지 투쟁에 관한 문제인데, 제가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터라 분명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다만 3번 질문의 논점은 (1) 당파성 내지 정파성이라는 점도 있지만(그러니까 민주당의 경우에는 이재명 대표 지지와 반대로 나타나겠죠), (2) 계산의 문제도 있겠죠. 즉 어떤 경로를 택해야 차기 총선이나 대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쟁점이 있을 테고, 여기에서는 계산의 문제가 빠질 수 없겠죠. (1)에서 일정한 정파성을 택한다고 해도 여전히 (2)의 계산의 문제는 남겠죠. 누구의 계산이 옳았는가는 앞으로 결과가 말해주겠죠.^^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기욤 시베르탕-블랑의 저서 [국가에 관한 질문들]이 오월의봄에서 출간됐습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썼는데, 그것을 여기에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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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인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



이 책의 저자인 시베르탕-블랑은 들뢰즈와 가타리 사상의 전문가로서, 현재 국제적인 마르크스주의 학술지 "악튀엘 마르크스"(Actuel Marx)의 편집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탁월한 정치철학 교과서인 이 책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된다.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정치철학에 관한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좌파적인 입장에서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과서는 알다시피 학생들을 위한 책이다. 교과서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체계적이면서 교육적으로 제시하여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관련 지식을 성공적으로 습득하여 활용하거나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발판을 제시해주는 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철학에 관한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종의 당파성을 견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과서에 대한 이러한 중립적인 정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좌파적인 관점에서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더 까다롭고 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실패에 관한 성찰, 따라서 어쩌면 자기 자신의 불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교과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선 이 책이 다루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곧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서 러시아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에 이르는 200년 간의 정치철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성의 시작을 알리는 한 혁명에서 근대성의 종결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혁명의 실패에 이르는 이 시기는 좌파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쓰라린 실패의 여정일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하지만 새로운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시기이다. 저자가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하되, 혁명가들의 담론보다는 혁명에 대한 대응들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러시아혁명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를 총체적 국가와의 대비 속에서 살펴보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 책을 서술하는 방법론적 전략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국가라는 역사적 실재를 이 책의 준거로 삼으면서, 역사적, 이론적, 비판적 관점에서 국가라는 대상을 둘러싼 정치철학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적' 관점은 국가라는 대상을 실체화하지 않고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서 이해하겠다는 뜻이며, 또한 국가를 둘러싼 철학적 담론들의 전개과정 역시 그러한 역사적 변화와 연동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이론적' 관점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철학이라는 담론을 불변적인 초역사적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신학이나 법학,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다른 담론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정치철학 담론의 조건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 그리하여 정치철학이 매 시기마다 새로운 담론으로서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학과의 마주침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철학과 경제학 및 사회학과의 마주침 이후에 생성된 정치철학은 하나의 동일한 담론이 아니다.


더 나아가 '비판적' 관점이 가리키는 것은, 국가라는 대상의 우연성과 정치철학이라는 담론 자체의 우연성을 성찰하려는 태도다. 이것은 이중의 함의를 지닌다. 우선 이것은 20세기를 특징지은 양 극단의 국가, 곧 한편으로는 전체주의적인 국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인 국가의 생성의 원인과 그 실패의 이유를 성찰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보통 세계화라고 부르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및 그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인 우연성, 따라서 소멸 가능성에 직면해 있음을 사유하겠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성찰하는 정치철학만이 국가와의 상호정당화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흔히 접하게 되는 정치철학 교과서와는 꽤 차이가 있는 교과서, 역사적 전개에 충실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 개성적이고, 정보가 풍부하면서도 명료한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교과서를 (물론 역자의 공들인 번역 덕분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실패 가능성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는 이 교과서에서 학생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얻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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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하는 학술지 [기억과 전망] 47호에 실리는 권두언입니다. 


아직 교열, 교정을 거치지 않은 글이니, 이 글에 관해 논평하거나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출판된 글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추운 날씨에 모두 건강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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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재난 시대에 을의 민주주의를 모색하며

 

한동안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더니, “책머리에원고를 쓰고 있는 요 며칠 겨울 한파가 전국을 덮치고 있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과 온 몸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기온은 누구에게나 이겨내기 힘든 시련이지만, 특히 바깥 기온과 다를 바 없는 냉골과 같은 방에서 연신 하얀 입김을 털어낼 수밖에 없는 독거 어르신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소자들에게는 더욱 더 견뎌내기 어려운 고통이다.


더욱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 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현상이다. 2008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2010년 아랍의 봄, 2011년 스페인 시위, 2016년 한국의 촛불시위,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등과 같이 세계 전역에서 나타났던 인권과 평등을 요구하는 대중의 민주화 운동은 어느덧 사그라지고, ‘우크라이나 전쟁’(이것은 잠정적이고 논쟁적인 명칭일 뿐이다. 러시아는 전쟁이라는 명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과 시진핑의 3연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표출되는 신냉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세계 전역을 휘감고 있다.


요즘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하게 금리 인상을 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도 연쇄적인 금리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환율 인상, 금융 불안정, 부동산 가격 하락, 가계부채 문제 등과 같은 다면적인 위험 요인들이 누적되고 있는 것이 곧 복합위기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위기로 표현되는 이 문제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치안’(police)의 관점에서 이해된 위기일 뿐이다. 치안에게는 기존 지배적 질서의 안정적인 재생산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 이를 위협하는 요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치안에게는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불안정도 위기이지만 민주화 시위도 위기이고 세월호 참사도 위기다. 더욱이 치안이 위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많은 경우 진정한 위기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실로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 생태계 재난이나 3년여의 시간 동안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보건 재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들과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 장애인들, 이주자, 탈북민, 난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이 직장에서, 일상에서 직면해 있는 불안전 재난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제국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2020), 글로벌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 관계나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용하여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 행동에 대한 정밀한 통제를 수행하고 있는 플랫폼자본주의 같이, 현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심각한 문명적 위기들도 이른바 복합적 위기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기 마련인 자본주의 경제의 불황보다는, 이러한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재난들이야말로 인류의 안전과 행복, 평등과 자유를 기저에서 위협하는 진정한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위기는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재난들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을 재난이자 위기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하는 약소자들, 곧 을()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6년 전 가을과 겨울 전국을 뒤덮은 촛불집회의 뜨거운 함성과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는 신기원적인 사건으로 칭송받았다. 때로는 촛불혁명이나 촛불시민혁명으로 불리면서 국민주권의 시대를 개막하는 사건,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혁명적 사건으로 예찬되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촛불의 뜨거웠던 열기는 마치 신기루인 듯, 매섭게 몰아치는 차가운 칼바람에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촛불 민주주의가 이처럼 급격하게 위세가 꺾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외부적 요인들에 앞서 내적인 한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민주권을 내세운 촛불 민주주의는, ‘국민이라는 기표에 내재하는 계급적 지배에 둔감했고, 여성과 성적 소수자, 비국민 차별 등과 같은 각종 차별과 배제라는 문제에도 맹목적이었다. 더욱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재난들을 감당하기에는 촛불 민주주의의 시야가 단편적이고 협소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한 진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듯이, 다중적 재난들을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을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사고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을의 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으로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호에 수록된 글들이 모두 사회적 약소자의 관점에서 재난과 폭력, 장애, 청소년문학, 국제 연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번 호에는 4편의 논문이 심사를 거쳐 수록되었다. 특집 기억과 용서에 실린 두 편의 글은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태인 선생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던 하와이 진주만과 그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던 장소인 오키나와의 마부니언덕에 각각 세워진 전쟁에 관한 기념공간을 비교, 고찰하면서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선생은 하와이와 오키나와의 공통점을, 두 곳이 미국과 일본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이며, 과거에 존재하던 독립 왕국이 군사적 폭력으로 인해 붕괴한 곳이라는 점, 그리고 선주민 집단들이 지역의 군사화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고 있는 이들이라는 점을 꼽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서부터 누적된 폭력과 오늘날의 군사화로 인한 첨예한 갈등의 장소로 남아 있는 하와이와 오키나와에 세워진 전쟁 기념공간은 한편으로는 국민적 경계를 넘어선 초국적 애도와 화해의 표상을 강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지역 안에서 확산되는 군사화 및 그로 인한 현재적 갈등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선생은 진정한 의미의 초국적인 애도와 기억의 작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행적인 군사적 폭력화 과정에 대한 비판이 선결 과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영진 선생은 끔찍한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화해와 용서,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화두를 다루기 위해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학살에 관해 성찰했던 한나 아렌트와 프리모 레비의 작업을 살피고 있다. 선생은 악의 평범함회색지대라는 두 사상가의 대표적인 개념이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의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용서, 특히 집단적 용서의 가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선생은 사이몬 비젠탈, 장 아메리, 프리모 레비, 자크 데리다, 자우메 카브레 등과 같이 홀로코스트 이후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작가들을 읽으면서 이러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결론에서 선생은 정치적 논리에 따라 작동하기 쉬운 사면과 달리 진정한 용서는 기억의 의무, 곧 저질러진 악을 바로 잡으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자세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집의 두 논문이 을 중의 을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러한 기억의 바탕 위에서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을 찾아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면, 나머지 두 편의 논문은 현재 살아 있는 또 다른 을들에 관한 성찰을 제시해준다. 이상직 선생은 2005년에 설립된 이래 국내의 탈시설운동을 주도해온 인권운동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지난 20여 년 간 전개된 국내 장애인 탈시설 운동사를 정리하고 있다. 선생에 따르면 발바닥행동은 중중장애인을 중심으로 한 탈시설운동의 의제를 당사자운동과 시설의 폐지로 설정함으로써 탈시설운동을 2010년대 장애인운동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폭력의 또 다른 핵심으로 등장하고 탈시설지원법 발의와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이 발표되면서 탈시설운동은 전국적인 의제로 부각되고 정치적 제도화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선생은 탈시설운동은 시설사회에서 돌봄사회로의 역사적 전환을 이끄는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회운동 일반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고 그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고 있다.


다른 한편 김경민 선생은 탈북민, 이주노동자, 난민 등과 같은 이들을 경계인으로 부르면서 이들을 다루는 아동청소년 문학의 성과와 한계를 살피고 있다. 선생은 인권에 관한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인권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과 타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감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역할이 핵심적이며, 이는 아동청소년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이 이 논문의 문제의식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 선생은 경계인에 대한 아동청소년 문학의 성취로 경계인의 상황과 조건, 어려움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단지 관찰의 대상이 아닌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인데, 선생에 따르면 이는 우리나라 다문화의 현실과 연동하는 것이다. 성장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경을 극복하는 주인공에 관한 다소 상투적인 서사들이 나타나고 주위의 조력자들이 경계인들이 처한 어려움을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설정한 것은 경계인들이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곤경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성장의 주체가 경계인으로 한정되어 있을 뿐, 국내 아동청소년의 성장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또 다른 한계라고 선생은 지적한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때 경계인에 관한 아동청소년 문학은 낯선 이들과의 진정한 공존을 위한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선생의 결론이다.


이번 호에서 또 다른 유익한 글들은 지난 46호에 이어서 연속 게재된 한국 민주주의와 국제 연대기획이다. 첫 번째 글에서 오타 오사무 선생은 재일교포 양민기 선생의 주도로 1993년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히가시쿠조 마당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서 교포 2세로 태어난 양민기 선생은 재일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을 압박과 빈곤 속에서도 자신들이 만들고 유지해온 것에 대한 뿌리 깊은 자긍심을 지니고 있던 민중의 삶과 문화에서 찾으려고 했다. 선생은 마당극에서 민중문화의 탁월한 전범을 발견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한국의 마당극을 번역소개하고 오사카의 이쿠노민족문화제를 시작으로 마당극을 직접 연출함으로써 도쿄와 교토 등지로 마당극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1993년부터는 교토 히가시쿠조의 지역축제인 히가시쿠조 마당을 개최하여, 조선 민족만의 마당이 아닌 재일코리언과 일본인, 오키나와인,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인과 중남미인이 함께 참여하는 초민족적인 문화적 교류의 장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 오사무 선생의 평가다. 선생은 양민기 선생이 주도한 마당 운동의 의의를 자본주의에 의한 신자유주의적인 문화에 대항해 다문화의 공생을 목표로 하는 대항문화운동, 혹은 반자본주의적 커뮤니티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찾으면서 글을 맺고 있다.


다른 한 편 두 번째 글에서 헨리임 선생은 필리핀과 미국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국 민주주의와 국제연대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젊은 시절 필리핀 마르코스 독재에 저항하는 필리핀 공산당 게릴라 조직인 신인민군에 참여하여 10개월 간 현장 체험을 한 바 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국제연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신인민군과 함께 생활하면서 대지주와 독점 자본이 결탁한 부패한 지배세력의 잔혹한 통치 아래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의 수많은 민중이 고통을 겪고 있음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05월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을 전해 들으면서 생물학에서 동아시아학으로 전공을 바꾼 선생은 1986~1987년까지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6월 항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선생은 이러한 경험이 민족과 민주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곧 미국에서 재미교포의 사회운동은 민족이라는 기표 아래 한국의 역사적 주체의 일부로서의 활동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진보운동에 뿌리를 내린 민주주의 투쟁이며,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과 국제 연대라는 틀로 결합되어야 하는 활동이라는 자각이 그것이다. 이 두 편의 글은 을들에 기반을 둔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의 성패가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을들과의 연대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정혁 선생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로 약칭)의 현황과 과제에 관한 글을 기고해주었다. 선생은 1기 진화위의 노력을 통해 한국은 이행기 정의 노력에서 선도적인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고 자평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과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선생은 포괄적인 피해구제책의 마련을 통해 피해자 권리보장이 더 강화되어야 하며, 조사위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조사 활동의 투명성과 책임성, 실질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주제서평에서 강진아 선생은 백영서 선생의 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1919, 1949, 1989에 관해 다루면서, 이 책들에 관해 기존에 제시된 여러 서평들을 함께 검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생은 백영서 선생의 저작만이 아니라 지난 20여 년 간의 동아시아 담론의 현재적인 위상을 성찰하고 있으며, 시진핑 3연임 이후의 중국의 역사적 위상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제기하고 있다. 선생은 중국과 중국공산당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 주체적인 중국론과 동아시아론을 사고할 수 있는 선결 조건임을 역설하고 있다.


소중한 연구 성과와 귀한 원고를 보내주신 필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과 연대의 말씀을 드린다. 매서운 추위가 한 겨울 내내 몰아쳐도, 새로운 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김없이 푸릇푸릇한 새싹이 추위를 밀어내고 쑥쑥 자라 오른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현재 을들이 경험하고 있는 시련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성장과 도약을 위한 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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