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추한 정체성 논쟁 넌더리난다

 

1주일이 넘게 계속되는 정치권의 추한 정체성 논란이 넌더리가 날 정도다. 삼복의 무더위에 정치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무 실체도, 실익도 없는 말싸움에 골몰하고 있는가. 그것도 정치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까지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는 정체성 논쟁에 직접 가세,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됐다. “지금 정치전선은 과거 유신시대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로 나아갈 것이냐의 기로에 서있다”는 노대통령의 지적에 몇 사람이나 공감할지 의문이다. 유신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게다가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30년 전의 유신 망령을 끄집어내 국민들을 유신 대 반유신 세력으로 패를 갈라 어쩌자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제 의문사위 보고에서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이 있다”고 야당의 정체성 시비를 정면 반박했다. 야당의 공세에 그런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야당이 정체성 시비를 벌이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짓이다. 역사적 잘못을 바로잡자는 데 반대할 명분은 없다. 그렇더라도 최근의 ‘NLL사건’과 의문사위의 결정에 대해 야당 대표로서 얼마든지 문제제기를 할 만한 사안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시하면 그만이다. 의문사위가 독립적 기관인데 대통령이 일일이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여야가 죽고살기로 싸우면 당내 리더십이 확립되고 떨어진 지지율이 올라가는지는 몰라도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후안무치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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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전집’ 50년 걸려 나왔다


△ (좌로부터)1.모스크바에 머물렀던 박헌영이 1929년 부인 주세죽,딸 비비안나와 함께했다. 2.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한 박헌영이 여운형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3.남북단독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6월24일,북에 머물던 박헌영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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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헌영 전집’ 주도적 참여 임경석 교수


  • 각계 100여명 11년에 걸쳐 공동작업
    사건·기록·저술 등 9권에 담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 지평 넓혀

    〈박헌영 전집〉(전 9권·역사비평사)이 나왔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새 이정표다. 이제 이 분야의 연구는 〈박헌영 전집〉 완간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각계 인사 100여명이 11년에 걸쳐 전집 편집위원회에 참가한 과정도 그렇거니와, 책이 나오기까지 50년의 ‘숙성’을 기다려야 했던 역사의 무게를 따져봐도 그렇다.

    〈박헌영…〉은 ‘민족주의적 좌익’ 인물에 대한 조명을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로 대신했던 관성에 대한 결정적 일침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박헌영(1900~1956)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정면으로 다룬 것이다. 한국전쟁 정전 51주년(7월27일)을 즈음해,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것은 물론, 반세기 동안이나 “은밀하고 공포스럽게 유지돼온 박헌영에 대한 기억을 역사로 부활시켜야 할 때”(편집위원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혁명을 선동한다거나 북한 체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연구자들은 전집 9권 빼곡하게 무미건조한 날짜와 사건, 기록과 저술을 담았다. 1~3권은 박헌영의 저작, 4~7권은 신문기사 등 자료, 8권은 회고와 증언, 9권은 화보와 연보로 구성됐다. 전집 편집위원회 책임 대표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박헌영에 대한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객관’을 유지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밴 자평이다.

    거기에 논평과 감상이 서 있을 자리는 없다. 이를 읽으며 어떤 울림을 얻을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전집의 ‘행간’에는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자료와 문헌을 따라가다 보면, ‘민족 배반자’와 ‘미제 간첩’으로 그를 몰아세운 남과 북의 정치권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실을 뒤틀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결국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힘이다. 1918년 한인사회당 건설 이후 30여년 한국 근대사의 중심을 이뤘지만, 결국은 남과 북으로부터 철저히 폄하당한 공산주의 운동의 본류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풍토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편제’한 북한을 논외로 하더라도, 남쪽 역시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척박하기 그지 없다. 김준엽과 김창순이 함께 지은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전5권·1963~1976), 서대숙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영문 1967·국문 1985),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쓴 〈한국의 공산주의〉(1972) 등이 대표적 저작이지만, 냉전체제 아래 영미권의 시각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1987년, 20여명의 소장학자들이 한국역사연구회 안에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반’을 만들어 10여년 공동연구를 펼쳐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집단적·체계적 연구활동은 사라졌다. 전국 각 대학의 역사학 교수 가운데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사를 전공한 이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젊은 학자들은 ‘자리’를 잡지 못해 연구교수 등에 머물러 있다.

    임경석 교수(성균관대)는 “사회적 금기를 넘어 역사인식의 공감을 넓혀 사회구성원의 가치를 통합하고 그 정체성의 외연을 넓히는 구실을 한다”며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의미를 평가했다. 〈박헌영…〉은 그 길을 가로막았던 어떤 ‘금기’를 깨고, 온전한 역사인식으로 가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셈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박헌영 전집’ 주도적 참여 임경석 교수


    “아직도 독자의 가슴속에
    검열 시스템이 있다”

    냉전적 잣대로 휘둘려온 한국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 대한 임경석 교수(성균관대)의 신념은 확고하다. “역사적 사실, 그대로 톺아보는 학문 연구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역사 연구와 다를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데, 근거 없는 경계심 아니면 턱없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상황’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다.

    그는 1993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다시 펴내, 이 분야의 맥을 잇고 있는 소장학자다. 〈박헌영 전집〉 편찬 과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특히 그 일부인 〈이정 박헌영 일대기〉를 직접 집필했다. 박헌영의 일생을 돌아보는 작업조차도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에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을 주목하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박헌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지원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그는 이념적 열정 대신 학문적 냉철함으로 한국 사회의 금기를 잇따라 넘어서고 있다.

    그런 그에겐 ‘냉전체제’조차도 학문 연구자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과제에 불과하다. “냉전 시기에는 이념적 금기에 도전한다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냉전 구조가 붕괴된 뒤에는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1차 자료를 폭넓게 접할 수 있어, 오히려 유리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의 책임도 학계 내부에 먼저 돌린다. “지금까지 이 분야의 역사서술이 무미건조하거나 지나치게 이념적 편향을 보였기 때문에, 대중들과 폭넓은 소통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활발한 사회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매력적인 역사 서술을 꿈꾸고 이를 실현하는 게 역사학자들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대안도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다. 다만 “학문의 자유가 많이 확장됐지만 아직도 연구자와 독자의 가슴 속에 내면적인 검열 시스템이 있고, 한국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아직도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임 교수의 작업은 “역사적 불화를 거쳐 이리저리 분열된 사회적 심리상태를 통합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사회적 금기를 연구해 이를 정상적인 담론구조에 소통시키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까지 보듬어 우리의 20세기를 온전히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 그의 필생의 과제다.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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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oria 2004-07-3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글 하고는 상관없는 얘긴데 적당히 쓸 곳이 없어 여기 적습니다. 어제 주신 Linda M. G. Zerilli(이름 참 복잡하군요...) 글을 대충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무척 재밌군요! 확실히 세상 참 넓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듯 한데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되네요.
    이 글에서도 '공화주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네요. 볼수록 흥미있는 사상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번에 말씀해 주신 Bonnie Honig의 작업에 특히 관심이 생겼습니다. 아렌트와 데리다를 접목시킨다는 점도 그렇지만, 특히 이를 페미니즘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안타깝게도 도서관에는 책 한권 밖에 없던데, 그래도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석을 주제로 한 책이라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책 하고 어제 말씀하신 Penelope Deutscher의 책이 어떤 내용인지 정말 궁금하군요.
    요새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사람들은, 한명한명이 다 세계란 느낌입니다. 이러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죠? ^^ 감사합니다!

    balmas 2004-07-3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다니 다행이군 ...
    그나저나 박헌영 전집은 아직 안 나오고 [이정 박헌영 일대기]만 나온 셈인가 ...

    aporia 2004-07-3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가 최근 기사라면 전집은 곧 나올 겁니다. 사실 이 전집은 박헌영 선생 탄생 100주년에 맞춰 나올 예정이었고, 그 기간을 놓친 다음에도 매년 나온다는 말이 무성했는데, 이제 이렇게 신문기사까지 난 걸 보면 출판 직전이 아닌가 싶네요. 원래 [이정 박헌영 일대기]도 전집의 일부로 기획되었는데, 전집이 늦게 나왔고 또 이 책을 빨리 출판해야 할 현실적 필요가 있어서 먼저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9권이니까 최소 20만원은 할 텐데, 선생님의 경제에 다시 한번 큰 타격이 되겠군요. ^^ 그러나, 남 걱정 할 때가 아니지요. 저는 이걸 어떻게 마련하죠??? TT

    aporia 2004-07-3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다른 기사를 찾아 봤더니 가격이 60만원이라는군요...! 한권이 6만원 꼴인 셈인데, 물론 고생들도 많이 하셨을 테고 나갈 부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밥 굶는 식으로는 어림도 없겠군요. 전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TT

    balmas 2004-07-3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0만원이라 ...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MEW)보다 더 비싸군!!!
    목돈 생기면 사야지 별 수 없군요 ...
     

     

    논문·리포트‥‘상아탑 지식’도 인터넷 매물로


    △ 국내 주요 지식검색 포털사이트들의 초기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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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검색열풍은 다분히 ‘한국적’

  • 인터넷 지식검색 열풍
    지식유통구조 근본이 바뀌고 있다

    지식 유통구조의 근본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 지식검색 열풍 때문이다.

    인터넷 순위 사이트인 ‘랭키닷컴’( www.rankey.com)의 집계에 따르면, 대표적 지식포털 사이트 ‘네이버 지식iN’의 주간(7월11일­7월17일) 방문자수가 사상 처음으로 238만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엠파스 지식거래소’는 33만여명, ‘야후 지식검색’ 29만여명, ‘네이트 지식뱅크’ 7만여명 등의 방문자수를 기록해 역시 기존 기록을 갈아치우거나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런 추세는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한 고급·전문지식 서비스 개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윤을 쫓는 시장의 논리는 생활상식 무료문답이 아닌 새로운 수익창출 모델을 찾았고, 그 결과 그동안 접근성이 떨어졌던 ‘상아탑’의 지식을 인터넷에 끌고 나온 것이다. 각종 학위논문 검색은 물론, 전문지식 판매 및 구매, 관련 전문지식 동시제공, 전문학술도서 본문 열람 등의 지식검색 서비스가 올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덕분에 기존의 지식생산·유통 구조의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지난 5월 개설된 네이버 ‘지식시장’은 그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이곳에 나온 논문은 3천원­1만2천원 정도, 리포트 형태의 문서는 300원­4천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기존 논문검색 서비스가 정액요금에 따라 정식학위논문만 제공하는 데 비해, 지식시장에선 각종 형태의 ‘개인 지식’을 시장원리에 따라 사고 판다. 특정 지식에 대한 품평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이를 둘러싼 ‘지적 논쟁’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지식의 전문성과 고급성, 권위는 결국 ‘가격’이 결정한다.

    학술논쟁이 학술지에서 인터넷 게시판으로 옮겨오고, 학계 권위자는 상아탑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인정받으며, 지식활동에 대한 보답은 교수 월급이 아니라 네티즌들의 입금액이 결정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관측은 더 이상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박주범씨의 연구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를 보여준다. ‘지식검색서비스에 관한 이용연구’를 주제로 최근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에서 박씨는 “지식검색 질문에 대한 답변 소요시간을 조사한 결과, 쇼핑·상품정보에 대한 답은 질문 24시간만에 제공된 반면, 교육·학문 분야의 질문은 0.02­0.03시간(1.2분­1.8분)만에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설문조사 결과, 주로 이용하는 지식 범주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36.4%가 ‘전문지식’을 꼽았다. 초중고생의 숙제 해결 수준을 넘어, 대학생 이상의 ‘지식인’들이 본격적으로 지식검색의 바다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 급격한 기술 발전과 이에 힘입은 지식사회 변동은 전 세계적인 관심거리다.27일 신라호텔에서 ‘지식사회 건설’을 주제로 열린 유네스코 주최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나선 학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연합·자료사진

    숨가쁜 기술변화는 지식사회 현장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 사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학부과정 학생의 기말 레포트에 자신의 논문 일부가 그대로 옮겨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용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쓴 것처럼 했더라고요. 인터넷 검색 자료를 짜깁기하다가 내가 쓴 글인 줄도 모르고 그냥 옮겼대요.” 이 교수는 “텍스트를 읽어 제 것으로 소화하고 그 연구성과를 문서로 남기는 일을 인터넷에 맡기고 나면, 인문학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는가”라고 물었다.

    인문학계에 번지는 우려는 학문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함의 실종’이다. 지식·교양을 인스턴트 식품처럼 접하는 세대가 학문의 희열이나 가치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검색 시대가 ‘지식 권력’의 독점적 지위를 무너뜨리고 오히려 지식사회 전반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지적 권위’의 상징으로 통했던 <브리태니커>에 맞서 네티즌들이 직접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만든 것은 대표적 사례다.(<한겨레> 29일치 1면>

    홍윤기 교수(동국대)는 “지식검색을 통한 시민적·대중적 참여가 기존의 ‘지적 독점구조’를 해체하는 것을 넘어, 학자들의 지적 오만함까지 깨고 있다”며 “이제 학자들의 지식수준과 익명의 네티즌들이 확보한 지식수준의 격차가 상당히 좁혀졌고, 결국 인문학이 인터넷 상의 지식경쟁을 수렴해 보다 높은 수준의 성과를 내놓아야 할 시대적 요구 앞에 서게 됐다”고 지적했다. 지식구조의 민주화와 이에 기반한 인문학의 질적 상승이 동시에 일어날 토양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 지적 권위의 상징인 <브리태니커>에 맞서 전 세계 네티즌들이 만들고 있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로고

    <지식사회>의 저자인 니코 스테어 교수(독일 체펠린대)는 지난 27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학술대회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어떻게 감시하고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결국 지식 또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정치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결국 ‘지식 민주화’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짚었다. 인터넷 지식검색 열풍이 인문학의 위기와 지식민주화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지식검색열풍은 다분히 ‘한국적’


    △ (위로부터)한정택 야후코리아 차장·박주범 이화여대 석사

    정보욕구 높은데 컨텐츠제공
    사이트는 외국보다 부족

    지식검색 열풍은 다분히 ‘한국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다. 네이버 지식iN을 운영하는 엔에치엔(NHN)의 조은현 대리는 “급격한 사회변동과 높은 교육수준 때문에 지식·정보에 대한 욕구가 대단히 높지만, 컨텐츠를 제공하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는 외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인터넷 접근성만 높을 뿐 막상 지식·정보를 구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는데, ‘지식검색’이 이를 해소할 유력한 도구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

    국내 지식검색의 시초인 <인터넷 한겨레> ‘디비딕’(2000년 10월 개설) 기획자인 한정택 야후코리아 차장은 ‘동호회 문화’를 또 다른 이유로 꼽는다. 그는 “피씨 통신 시절, 미국의 AOL과 한국의 천리안·하이텔의 가장 큰 차이는 동호회 활성화에 있었다”며 “인적 유대를 기초로 하는 동호회가 관련 지식 공유 활성화의 기초가 됐고, 이것이 인터넷에서 확대된 것이 지식검색”이라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유료 지식사이트가 주류를 이룬 미국에 비해, ‘카피 레프트’ 정신에 충실한 지식검색 사이트들이 국내에 대거 등장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으로부터 지식검색의 영감을 받았다는 한정택 차장은 “인류 공동의 재산인 지식은 무한정 나눠져야 한다”며 “개미들이 더듬이를 맞대고 페로몬으로 완전 소통하는 것처럼, 인류도 인터넷을 통해 그러해야 한다는 꿈을 지식검색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결국 지식독점구조의 붕괴 등을 기대하는 목소리는 이런 ‘지식 공유’의 정신에 충실한 입장이다. 특정인이 권위자로 추앙받고 대중이 이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근대적 지식’에서 다중이 지식생산과 유통에 참여하고 이를 소비하는 ‘탈근대적 지식’의 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지식검색 열풍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박주범 이화여대 석사는 이런 지식검색의 세례를 만끽하고 있는 젊은 인문학도다. 선행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지식검색’을 학위논문 주제로 삼은 박씨는 “대학원 입학 이후 거의 모든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찾았고, 학위 논문을 쓰면서도 대부분의 참고문헌은 인터넷 검색으로 구했다”며 “인터넷으로 접근이 안되는 논문은 아예 사용하지 않게 됐고, 어떤 분야든 질문이 생기면 일단 지식검색부터 한다”고 말한다. 박씨가 보기에 지식검색은 보다 깊이 있는 지식 축적을 위한 ‘참조자료’이자 편리한 도구다.

    그러나 자유로운 네티즌의 지식민주화가 아니라 기업집단에 의한 지식의 상품화를 향한 흐름도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업체 순위가 분기 단위로 변하고, 그 핵심이 지식검색 서비스의 성패에 달려있는 상황에서, 전문·고급 지식은 속속 유료화되고 있다. 지식생산·유통의 칼자루를 지식사회나 네티즌이 아니라 이들 기업이 거머쥐고 있는 형국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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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국보법은 50년 넘게 이어온 '임시법'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소속 변호사와 법학자들이 <오마이뉴스>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합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편견과 잘못된 상식을 깨는 내용의 [100문 100답 - 국가보안법, 이것이 궁금하다]가 그것입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질문 5. 국가보안법, 제정 배경을 알려주세요

    국가보안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당시 법무부장관이 "국보법은 총이고 탄환"이라는 발언도 했다는데, 제정 배경이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48년 12월 1일 처음 공포되어 시행됐습니다. 이는 일반 형사법인 '형법'이 제정된 1953년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일이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기형적인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하시지요?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해방 이후 남한에 수립된 단독 정부의 성격에서 출발을 해야겠지만,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바로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순사건'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같은 해 4월 일어난 소위 제주4·3사건의 진압을 위해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이에 항명하고 이러한 항명사태가 각 부대로 번져 무력으로 진압된 것입니다.

    당시 수립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정권의 정통성을 흔드는 사건에 대해 크게 당혹할 수밖에 없었고, 국회 역시 이와 같은 사태가 확산될 경우 정부뿐 아니라 의회도 없어질 것이라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좌익세력 척결위해 제정한 법

    그리하여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좌익 세력'의 철저한 제거와 탄압을 위한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제정하게 된 것이 바로 국보법입니다.

    이 법은 당초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안되었으나,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내란행위 그 자체보다는 내란유사의 목적을 가진 결사 ·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으로 중심이 변질되면서 보다 포괄적인 '국보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어 구체적인 위법행위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남로당 외곽조직이나 어떤 형태로든 좌익 결사 자체를 말살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되어, 11월 20일 반국가단체 구성과 범죄 단체 조직, 목적 수행, 자진 방조 등 모두 6개의 조문을 가진 법률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사실, 여순사건 이후 한 달도 안 되는 단기간에 제안·심의·통과의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을 분 아니라, 법률 전문가의 의견이나 국민의 여론이 반영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국회 안에서도 반대 의견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토론 기회가 모두 박탈되거나 부족한 상황에서 처리되었던 법입니다.

    반대 의견 가진 국회의원 토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졸속 통과

    당시 국회의원 중에서도 모두 40여명이라는 적지 않은 제정 반대론자들이 있었지만, 빠른 법안 처리를 주장한 의원들이 "이 법안이 잘되고 못되느냐에 따라서 이 남한이 인민공화국으로 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손만대에 자유스런 국가를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입법을 채근하면서, 폐기를 주장하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공산당 좌익들에 춤을 추는 것"이라고 매도하였고, 국회 밖에서는 우익단체들의 암살 위협까지 있는 상황에서 입법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실제 당시 입법제안자들은 이 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비상상황에 대한 한시적인 대응(한시법)이라고 설득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국보법은 '50년이 넘은 임시적인 법'인 셈이지요.

    국보법은 '50년 넘은 임시법'

    이렇게 제정된 국보법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 일제 시대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사상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치안유지법 제1조가 "국체 변혁을 목적하여 결사를 조직한 자"라고 했던 것을, 제정 국보법 제1조에서 그대로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로 바뀌는 등 표현 상 차이는 있더라도,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기본 취지는 변하지 않았고, 실제로 일제하에서 치안유지법의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국보법으로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체적으로 범행하지 않은 일정한 목적만으로도 처벌을 받게되어 반대·비판 사상 자체를 탄압하는 것으로, 좌익 세력을 주된 대상으로 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반정부적 정치·사회 단체들이 적용대상이 되었으며, 삼팔선 이북에 수립된 정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통일을 위하여 이북과 협상·대화하는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분단 상태를 법제화하고 통일을 가로막는 법적 장애를 만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부정적 성격 때문에, 당시 제정을 반대하는 의원 중 한 사람은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의 잔재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려는 이 마당에… 제국주의 잔재 폐물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다른 반대 의원은 "이 법률이야말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위한 법률이나 진시황의 분서사건이나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권승렬 법무부 장관 "국보법은 반대자 존재 말살하는 총과 탄환"

    한편 "국보법은 총이고 탄환"이라고 했다는 말은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권승렬이, 국보법의 유지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한 말인데, 그는 제헌국회 제5회 회의에서 "지금 우리는 건국을 방해하는 사람하고 건국을 유지하려는 사람하고 총·칼이 왔다 갔다 하고 하루에 피를 많이 흘립니다, 즉 국보법은 총하고 탄환입니다… 이것은 물론 평화시기의 법은 아닙니다. 비상시기의 비상조치니까 이런 경우에 인권옹호 상 조금 손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가불 건국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로서는 다소간의 인권 침해 위험성이 있더라도 비상시기에는 총과 탄환 역할의 법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권리 침해와 위험을 제거하는 '법률'이 아니라, 반대자의 존재를 말살하는 무기"라는 국보법의 성격을 적절하게 표현한 셈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비상한 시기에 제정되었고 "평화 시기의 법은 아니"라던 국보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진압되고 사태가 진정되는 등 사정이 변경된 이후에도 소멸하기는커녕 점점 강화되고 확대되었습니다.

    수 차례 '개악' 통해 명맥 이어온 '임시법'

    6개의 조문은 모두 11차례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25개(많을 때는 40개)의 조항으로 늘어났으며, 처음에는 최고형도 무기징역(반국가단체 구성죄)이던 것이 사형이 가능한 죄만 7개가 되었습니다.

    찬양·고무 조항과 같이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한 불분명한 조항도 추가되었고, 심지어 중간에는 인심혹란죄(1958년 3차 개정 : "… 인심을 혹란하게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와 같은 조항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악되는 시점마다 있지도 않은 국가적 위기가 만들어졌고,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강조되었는데, 제정 당시 이 법이 가지는 위헌성과 인권 침해 요소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던 논리나 법을 강화·유지하면서 특수상황을 강조하는 논리와 오늘날 존치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답변: 김진 변호사 / 감수: 백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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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드무비 2004-07-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법이 50년을 넘어서,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 계속 법으로 군림하려 한다니
    어이가 없군요.

    릴케 현상 2004-07-2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한미군 주둔도 임시죠

    balmas 2004-07-2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도 정말 극악한 임시죠. 빨리 치우고 좋은 것으로 바꿔야 할 텐데 ...

    MANN 2004-07-31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으로 제정되어서 아직까지도 굳건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법이네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돌풍

     

    하루평균 870만회 조회
    수록도 ‘브리태니커’ 3배

    소스 공개를 통한 무료 소프트웨어운동을 벌이는 리눅스의 아이디어를 빌려 네티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www.wikipedia.org)가 백과사전의 대명사인 <브리태니커>를 압도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8일 <위키피디아>의 수록 건수가 <브리태니커>의 3배인 30만건을 넘어섰다면서 ‘세상의 지식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자’는 아이디어를 표방한 <위키피디아>가 앞으로 몇개월내에 영어뿐만 아니라 아랍어에서 게일어에 이르기가지 50여개 언어에 1백만건 이상의 내용으로 풍성해진 온라인 백과사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키피디아>는 지난달 하루 평균 870만회의 방문건수를 기록해 조회건수에서도 유료사이트(연간 60달러)인 <브리태니커>( www.eb.com)를 크게 앞질렀다.

    <위키피디아>는 1995년 네티즌들이 협동해서 웹페이지를 만들어보자는 미국 컴퓨터 프로그래머 워드 커닝햄의 아이디어로 출발했으며, 온라인상의 서버는 3년 전 지미 웨일스 등이 결성한 비영리재단인 ‘위키미디어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상근 편집진은 없고 1200명의 자원자들로 구성된 편집자들이 네티즌들이 새로 올린 자료들의 정확성, 저작권 침해 여부 등을 검증해 질을 담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호놀룰루공항의 무료셔틀버스 이름인 ‘위키위키’(하와이말로 ‘빨리빨리’란 뜻)와 ‘백과사전’이란 영어단어를 합성한 말이다.

    위키미디어는 또 지난해 7월부터 무료 교과서와 교재들을 온라인상에 퍼뜨리는 작업으로 위키북(wikibooks)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한국의 네티즌들도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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