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비평이론학회에서 간행하는 [비평과 이론] 26권 2호에 게재될 논문 한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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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증상적 독해
[이 논문은 2021년 5월 1일 한국비평이론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2021년 9월 4일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초청 발표회에서 두 번째 발표된 바 있다. 두 번의 발표회에서 유익한 조언과 토론을 해준 참석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두 번째 발표회에서 지정토론을 맡아서 날카로운 비평과 조언을 해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의 조지훈 선생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논문의 최종본을 읽고 좋은 비평을 해준 김은주 선생께도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머리말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오늘 이렇게 귀중한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주신 한국비평이론학회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특히 키노트 스피커라는 과분한 영예를 베풀어주신 데 대해 특별히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키노트 스피커라는 타이틀은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비평과 이론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와 업적을 쌓아온 한국비평이론학회의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과연 내가 그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한 어떤 말 또는 어떤 화두 내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과 같이,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전지구적인 재난, 따라서 모든 인류가 직면해 있는 심각한 위기를 주제로 삼는 이러한 토론 자리에서 내게 부여된 타이틀에 걸맞은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지난 몇 달 간 계속 나를 괴롭혀왔다.
더욱이 내가 느끼는 중압감은 단지 키노트 스피커라는 타이틀이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회의 주제의 엄중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 더 직업적인 측면에서(막스 베버가 Beruf라고 불렀던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날 철학의 성격에 대한 의문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한국비평이론학회에서 처음 나에게 발표를 제안했을 때 일차적으로 나를 비평이론학회의 동료로서, 그 구성원으로 여기고 발표를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내가, 용어의 다소 전문적인 의미에서 ‘비평’이나 ‘이론’(영어로 한다면 critical theory 내지 theory)의 주요 요소 중 하나를 이루는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몇몇 저작을 번역해왔고 또 그들의 철학에 관해 이런저런 글을 써오기는 했지만, 나는 스스로 한번도 ‘비평가’나 ‘이론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며, 얼마간 전통적인 의미에서 철학자라고 또는 철학도라고 늘 생각해왔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이런 측면에서 오늘 모임에 학회 외부의, 이론 내지 비평 외부의 연구자로서 나를 초청했을 것이고, 나는 얼마간 외부인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이러한 초청과 환대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점을 발표의 서두에 밝혀두는 것은 무언가 철학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 이제 더는 철학이 만학(萬學)의 여왕이라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만 여전히 모든 학문의 토대 같은 것일 수는 있다고 여기는 그런 자부심의 발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중의적인 의미에서) 철학의 빈곤에 관한 서글픈 자각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철학은 지극히 빈곤하기 짝이 없다는 점을 굳이 힘주어 말해야 할까? 조금 신랄하게 말하자면, 철학은 이제 좀비와 같은 어떤 것이 되었다는 점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진태원) 적어도 한국에서 철학은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리고 어쩌면 철학자들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실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런 것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한국 사회의 누구도 어떤 문제에 관한 철학자들의 견해가 무엇인지, 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누군가 내게 한국에서 철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별로 답변할 말이 없다. 그 와중에 한국의 철학자들은,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것이든 또는 세월호 참사나 촛불집회 같은 것이든 아니면 코로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같은 것이든 간에, 그것이 자신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철학은 좀 더 본원적이고 좀 더 시대초월적인 어떤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초연함의 가장(假將)으로 애써 감춰왔던 것이 아닐까?
내가 이 글에서 참조하려고 하는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언젠가 철학은 대상 없는 학문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사실 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의 대상은 무엇인가, 과학으로서 정신분석의 대상은 어떤 것인가, 양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서 알튀세르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다. 여기에 더하여 대상 없는 학문으로서 철학은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그리고 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알튀세르가 생애의 말년까지, 광기가 그의 정신을 휘감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필생의 화두였다.
그런데 대상 없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다른 울림을 지니는 것 같다. 확실히 철학은 대상 없는 학문이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또는 경제학이나 언어학 같은 학문들이 자신들의 분명한 대상을 지닌다면, 철학은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 존재나 정신, 인식이나 논리 또는 가치 같이 한때 철학만이 다룰 수 있는 대상 내지 주제라고 여겼던 것들은 이미 더는 철학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전문 분과학문들의 고유한 대상이 되었고, 되어가고 있다.
철학에게는 여전히 비판이 남아 있지 않느냐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비판 내지 비평 역시 이미 철학의 관할권을 넘어선 지는 오래되었다. 칸트가 3비판서를 쓴지 얼마 되지 않아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의 이름으로 비판에 대해 새로운 의미와 기능을 부여하면서 철학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초월론적 비판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한 바 있다.[알프레드 존-레텔(Alfred Sohn-Rethel)에 따르면, 자본은 말하자면 유물론적인 순수이성비판, 곧 유물론적인 초월론 철학이다(Geistige und körperliche Arbeit).]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철학의 지양을 선언한 이래 한 번도 철학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철학은 ‘독일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든가 아니면 기껏해야 방법론적인 해명을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이론적 도구에 불과했다.[물론 이것이 마르크스가 스스로 생각했던 만큼 철학에서 실제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제도화되고 교의화된 철학에서 벗어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형태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수행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뢰비ㆍ르노ㆍ뒤메닐).] 이런 와중에 오늘날 철학을 자신의 한 가지 요소로 품고 있는(!) ‘비평’ 내지 ‘이론’의 출현은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상 없는 학문으로서 철학에게 남은 길은, 내가 보기에는, 분과학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철학에게는 아마도 더욱더 그럴 것이다(우리 학과, 우리 학회, 우리 학교 출신 같은, 부족주의 내지 오히려 씨족주의에 포획되지 않은 ‘한국의 철학’ 같은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말이다). 오늘날 철학에게 중요한 것은 분과학문의 제도적 테두리가 아니고 철학의 관행적 대상이 아니며, 습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가 철학의 본질이라고 착각하곤 하는, 명사로서의 철학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특히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 다중적 위기의 시대에 철학이 견지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유명론적인 것으로서, 형용사이자 동사로서의 철학적인 것이 아닐까? 신자유주의, 세월호, 인류세, 코로나 팬데믹은 바로 그 철학적인 것의 대표적인 이름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관한 이 글 역시 철학적인 것에 관한 한 가지 탐구의 시도일 텐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비평 또는 이론이 스스로 범례적인 방식으로 철학적인 것을 탐구해온 만큼, 그것은 또한 한 가지 비평의 시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철학적인 것을 탐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아마도 비판 내지 비평일 것이며, 따라서 철학도라면 마땅히 오늘날 어떻게 스스로 비판가, 비평가가 될 수 있을지 먼저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거짓 문제
보다시피 이 글의 제목은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이며, 부제는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증상적 독해”다. 아마 여러분의 관심을 끄는 첫 번째 문구는 거짓 문제라는 단어일 것이다.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 이것은 사실 매우 강한 문구이며, 따라서 그만큼 자연스럽게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점에서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문제인 것일까?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문제라는 규정을 받을 만큼 그렇게 문제적인 문구인가? 또한 많은 이들에게는 증상적 독해 역시 상당히 생소한 문구일 것이다. 비평가나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문헌학자, 곧 말을 사랑하며, 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선 약간의 시간을 들여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에 대해, “증상적 독해”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포스트코로나라는 문구는 시대정신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코로나19 팬데믹과 거의 동시대적으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유행어로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021년 9월의 시점에서 보면 ‘위드코로나’(with corona)가 포스트코로나를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하에서 전개되는 이 글의 논의가 설득력이 있다면, 그것은 외양일 뿐이다). 포스트코로나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문구 앞에서는 일체의 차이와 대립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막론하고,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또한 남성과 여성, ‘정상인’과 ‘비정상인’, 국민과 비국민의 구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스트코로나를 염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포스트코로나는 이미, 적어도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한 시점과 거의 같은 시기부터 사람들이 팬데믹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사고하는 틀로 기능해온 것으로 보인다. 경제 분야든 신학 분야든, 교육이든 의료든, 기술과학이든 사회비평이든, 국내 정치든 국제관계든, 자기계발이든 개인적 에세이든 간에,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포스트코로나가 화두가 되고 있다. 인터넷 서점에 나와 있는 코로나 팬데믹 관련 책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포스트코로나 한국 교회의 미래(2020.4), 포스트코로나 사회: 팬데믹의 경험과 달라진 사회(2020.5), 포스트코로나 재테크 긴급 진단(2020.5), 뉴노멀로 다가온 포스트코로나 세상(2020.7), 대전환기 프레임 혁명: 포스트코로나, 사람 중심 경제로의 전환(2020.7), 클라우드: 포스트코로나 비대면사회의 기술혁명(2020.7), 포스트코로나: 미중 팬데믹 전쟁(2020.7), 소환된 미래 교육: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학교를 바라보다(2020.8), 나는 나를 위로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셀프 위로법(2020.8), 긱 레볼루션: 포스트코로나 시대 가장 뜨거운 경제 이슈(2020.8),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생활예술(2020.8), 슬기로운 방구석 플랜B: 포스트코로나와 4차산업혁명 시대 쿨하게 살아남는 법(2020.10), 코로나 시대 한국의 미래: 여시재 포스트-COVID 19 연구팀(2020.11) ... 코로나 팬데믹은 아직 한창 비극적으로 진행 중인데도(인도에서는 2021년 4월 말 매일 하루 30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3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갔다. 또한 2021년 9월 20일 기준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스페인 독감 당시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 포스트코로나는 이미 진부해져가고 있다. 기묘한 시대착오, 비동시적인 동시성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팬데믹 초기 코로나19 종식이 아직 요원해 보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막론하고, 포스트코로나를 화두로 내세워왔다는 사실은 상당히 증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공통의 염원, 동일한 화두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불시에 닥친 전 세계적 감염병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회복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고, 실업의 고통이나 생활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일 수도 있다. 더욱이 여기에는 팬데믹의 충격이 외부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금방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팬데믹을 계기로 전환된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함께 코로나 팬데믹이 10년만에 한번 돌아오는 엄청난 재테크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욕망(또는 그러한 욕망의 부추김)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본 세력과 이를 어떻게든 약화시켜서 내년 대선에 대비하려는 세력들의 정치적 동상이몽도 또한 반영되어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비평가로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 세력들, 운동들이 내세우는 이러한 (만장?)일치된 문구를 의심해보고, 그것을 오히려 다른 수준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의 증상으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증상에 대한 증상으로서 해석해보려고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글을 퇴고하는 과정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증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다른 연구자의 글을 발견했다(Oksala). 명시적으로는 ‘증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사하게 사유하는 더 많은 연구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증상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문구를 거짓 문제로까지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서 증상 개념에 대한 좀 더 정확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증상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상이한 수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보면 증상은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를 가리킨다. 머리가 아프다는 증상이 뇌의 이상을 반드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팔이 저린 증상이 팔의 이상이 아니라 목 디스크를 나타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증상은, 원인과 결과의 (상대적) 일치를 나타내는 징후(sign)와 구별되는 것이며, 그 자체 내에 불확실성 및 더 나아가 기만 내지 가장(假將)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둘째, 상상적 실재로서의 증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존재한다. 이때의 증상은 단순히 모종의 원인을 가리키는 불확실하고 다소간 기만적인 현상, 따라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재성을 지니지 않으며, 자신의 의미론적 효력을 원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로 이해된 증상은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다른 말로 하면 그 자신이 독자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니는데, 단 이것은 상상적 실재성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상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간 정신분석적인 의미로, 또한 스피노자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정신분석적 증상론으로는 지젝 참조). 내가 염두에 둔 상상적 실재성을 잘 보여주는 윤리학의 몇몇 대목이 있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자.
“거짓 관념이 갖고 있는 어떤 실정적인 것(positivum)도 참인 한에서의 참된 것의 현존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1)
윤리학 2부에서 스피노자가 줄곧 강조한 것은 거짓 관념이 인식의 결여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정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짓 관념은 “잘려나가고(mutilatae) 혼란스러운 관념이 함축하는 인식의 결여(cognitionis privatione)”(2부 정리 35)이며, “참된 관념과 거짓 관념의 관계는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와 마찬가지”(2부 정리 43의 주석)다. 그 사이에 자신의 주장을 망각한 것일까? 스피노자는 4부의 첫 번째 정리에서는 거짓 관념이 “실정적인 것”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그것은 “참인 한에서의 참된 것의 현존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이 정리는 윤리학 4부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거의 공리와 같은 작용을 한다.
왜 스피노자는 2부의 인식론에서 실정성을 부정했던 거짓 관념에 대하여 4부에서는 고유한 실정성, 곧 실재성을 긍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이것은 참인 한에서의 참된 것의 현존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 집요한 실재성을 지니는 것일까? 요점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관념에는 표상적 측면과 변용적 측면(스피노자가 affectio(영어로 하면 affection)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내지 정서적 측면(affectus(영어로 하면 affect) 개념이 나타내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표상적 측면에서 보면 거짓 관념은 인식의 결여이고 비실정적인 것이지만, 변용적이거나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면 거짓 관념 역시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상상적 실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례로 활용되는 태양의 사례(2부 정리 35의 주석, 4부 정리 1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거듭, 우리가 지구와 태양의 실제 거리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태양을 우리에게서 200피트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태양이 가깝게 있다고 상상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 진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은 태양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quatenus corpus ab eodem[sol-인용자 추가] afficitur) 태양의 크기를 인식하기 때문”(4부 정리 1의 주석)이다. 곧 관념이 지닌 변용적 측면은 사실은 관념의 표상적 측면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기능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용의 힘은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신이 변용과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곧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경우 정신은 증상으로서의 변용이 가리키는 실재를 파악하는 대신 증상으로서의 변용을 실재 그 자체로 착각한다. “우리가 외부 물체들에 대해 갖는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의 본성보다는 우리 신체의 상태(constitutionem)를 더 많이 가리킨다(indicant)는 점이 따라 나온다.”(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 2) 그리고 이렇게 되면 변용으로서의 상상적 실재(“변용들의 질서와 연관” 2부 정리 18의 주석)는 실재의 한 수준 내지 한 층위가 아니라, 실재 그 자체로 재현되고 또한 그렇게 기능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되면, 정신 또는 주체는 변용의 힘,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정서의 힘에 다소간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수동/정념(passio) 또는 정서의 힘은 이 정서가 인간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인간의 다른 활동/능동(actio) 또는 역량을 압도할 수 있다.”(4부 정리 6)
대표적인 경우가 중독일 텐데(알콜 중독이든, 마약 중독이든 아니면 기타 다른 중독이든 간에, 중독은 외부 원인이 산출하는 변용에 대한 주체의 전적인 의존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운(運, Fortuna)에 좌우되는 보통 사람들의 삶, 곧 “온갖 종류의 미신에 가장 심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신학정치론 「서문」)의 삶은 외부 원인 및 그것이 산출하는 변용들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수동적인 삶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보면, 사실 예속적인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수동성이 반드시 중독의 경우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나는 정서들을 제어하고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Servitudo)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정서들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권리 아래 있지(sui juris est) 못하고 운의 권리 아래 있으며, 그는 자주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행하도록 강제될 만큼 운의 힘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4부 「서문」) 스피노자 철학에서 esse sui juris의 의미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Steinberg 참조.]
요컨대 두 번째 의미의 증상은 어떤 원인 또는 실재를 불확실하게 가리키지만,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닌 상상적 실재다. 이것은 자신이 가리키는 객체적 실재의 증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에 대한 증상이기도 하다. 이 증상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재현될수록, 더 나아가 어떤 원인(들)에 대한 증상을 실재 그 자체로 재현할수록, 주체는 이 증상에 대해 더욱 예속적이게 된다. 역으로 주체가 이 증상을 어떤 원인(들)에 대한 증상으로서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리면) “적합하게”(adaequate) 인식할수록 주체는 증상에 대하여 더욱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거짓 관념”이란, 증상을 어떤 원인의 증상이 아니라 실재 자체인 것으로 재현하고 자기 자신을 실재에 대한 객관적 재현으로 재현함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자신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증상이며, 이로써 주체를 이러한 증상에 더욱 종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증상이다.
이러한 “거짓 관념”이라는 증상이, 그것이 “가리키는”(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 2에서 사용한 용어의 의미에서) 실재 또는 원인의 내재적인 계기를 이룰 때, 증상의 세 번째 측면이 드러난다.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관념 또는 거짓 문제라면, 그것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문구가 가리키는 그 실재, 곧 코로나 팬데믹이 또 다른 실재 내지 원인(들)의 증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모종의 원인들의 산물이며, 그 원인들을 “가리키는” 증상이지 궁극적인 원인 내지 실재가 아니다. 따라서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는 증상의 증상이다. 하지만 포스트코로나라는 거짓 문제는, 코로나 팬데믹이 원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증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하며, 자신이 증상의 증상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더욱이 이러한 효과는 코로나 팬데믹이 증상으로서 가리키는 그 원인(들)의 기능적 필요성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원인(들)의 내적 특성의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이러한 세 번째 측면은 증상들의 생산과 재생산이 예속적 주체의 재생산을 위한 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측면은 좀 더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인 함의를 갖는다. 따라서 증상에 대한 다층적 개념화는 호명 개념을 중심으로 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함께 푸코의 예속화(assujettissement) 및 주체화(subjectivation) 이론을 코로나 팬데믹과 관련하여 새롭게 재해석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 곧 코로나 팬데믹은 넓은 의미의 계급적 분할(자본주의적 착취만이 아니라 인종적ㆍ국민적 차별과 위계화, 젠더 불평등과 혐오 등을 포함하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갑과 을의 위계적 분할이 세계를 구조화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포스트코로나라는 문구는 이러한 위계적 분할을 세상의 이치(way of the world), 세상의 정상적 조건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스트코로나가 함축하는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바로 그러한 의미의 정상적 조건으로의 회귀를 예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증상적 독해
내가 부제에서 “증상적 독해”(lecture symptomale)라고 부른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5년 출판된 집단 저작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의 서문인 「자본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에서 루이 알튀세르가 제시한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다(Althusser). 증상적 독해 개념으로 그가 제기한 문제는 고전 정치경제학(스미스, 리카도)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는 이 문제를 독서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라는 또 다른 문제와 관련시킨다. 시각(vision)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둔 첫 번째 독서는 고전 정치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차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척도로 삼아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에게서 어떤 “통찰”(vue)과 “간과/실수”(bévue)가 나타나는지 확인함으로써 설명하려는 독서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통찰하는 것을 스미스나 리카도는 간과했으며, 역으로 스미스나 리카도가 간과하고 실수를 저질렀던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천재적으로” 통찰했다는 것이다. 인식의 문제 및 읽기의 문제를 “확인/재인지”(reconnaissance)의 문제로 환원하는 독서, 따라서 사실은 신의 현현(顯現)이라는 종교적 관념에 기반을 둔 이러한 독서에 대하여 알튀세르는 두 번째 독서 방식을 맞세운다.
그가 “증상적 독해”라고 부른 이 독서는 첫 번째 독서와 달리 통찰과 간과/실수를 동일한 수준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또는 한 쪽의 보지 못함과 다른 쪽의 봄을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이한 두 인식 주체의 시각 능력에서의 차이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동일한 대상, 동일한 텍스트가 드러내는 것이 사실은 감추는 것이며, 동일한 주체가 통찰하는 것이 사실은 간과/실수하는 것임을 보이는 독서다.
증상적 독해 개념에서 알튀세르가 예시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 개념을 마르크스가 독해하는 방식이다. 고전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를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생필품의 가치”로 정의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전 정치경제학은 그때까지 자신이 탐구하는 외견상의 대상인 노동가치에 대하여 노동력 가치를 대체함으로써 지반을 변경했는데, 노동력이라는 이 힘은 노동자의 인격 속에서만 존재하며, 기계가 기계의 작동과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기능인 노동과 구별되는 것이다.”(Althusser 13) [이 인용문은 알튀세르가 인용하는 프랑스어판 자본에만 나온다(Le Capital, tome II, p. 209). 독일어판 자본의 해당 대목은 자본 I-2 739 참조.]
곧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 정치경제학이 노동의 가치라고 부른 것은 사실 노동력의 가치인데, 문제는 노동력의 가치를 계속해서 노동의 가치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문제의 “지반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대체하는 것은 잉여가치 개념의 생산을 나타내는 것이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 정치경제학은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생산해낸 이 개념, 이 문제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는 단지 고전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의력이 부족했거나 마르크스와 같은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의 문제의 장―알튀세르가 문제설정(problématique)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곧 라부아지에 이전의 플로지스톤 화학의 문제설정에서 산소가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었듯이, 고전 정치경제학의 문제설정에서는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증상적 독해라는 개념은 몇 가지 개념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보기와 보지 못하기, 통찰과 간과는 인식 주체의 심리적 특성이나 인식 능력의 차이를 넘어선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체의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문제설정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분명히 개인들 사이에 심리적인 습성의 차이, 인식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철학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개인이라도 원칙상 인식할 수 없는 사실이나 문제가 존재하며, 그것은 개별 주체의 심리적 특성이나 인식 능력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화의 구조, 곧 문제설정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둘째, 어떤 문제설정 내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동시에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배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식 주체는 무언가를 보고 이해하는 작용 그 자체로써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배제한다. 통찰과 간과, 이해와 몰이해, 가시화와 비가시화는 하나의 동일한 작용의 두 측면이다. 알튀세르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 “모종의 필연성 관계가 존재”(20)한다고 지적한다. 이 필연성 관계는 어떤 문제설정 내에서 비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는 점을 가리킨다. 가시적인 것이 보이기 위해서는 비가시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자면, 단순히 가시적인 것의 바깥, 배제의 어두운 바깥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 자체에 내적인 배제의 내적인 어둠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것의 구조에 의해 정의된 것이기 때문이다.”(20-21. 강조는 원문)
셋째,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어떤 문제설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양면적 인식 작용, 인식하는 것이 동시에 몰인식하는 것이며, 가시화하는 것이 동시에 비가시화하는 것인 이러한 작용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알튀세르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1965년 당시 알튀세르의 이론적 기획의 중핵을 이루는 또 다른 질문, 곧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었는데, 그는 이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그가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 그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필요했던 이데올로기 개념은 두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론적 이데올로기론”, 곧 비과학과 과학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필요한 이데올로기론에서 보면 핵심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거짓이거나 가상이 아닌 것의 인식론적 위상을 해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가령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 정치경제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거짓이나 기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이지만 과학적이고, 과학적이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어떤 것이다.[나중에 (얼마간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아) 생명과학의 역사와 관련하여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제안한 것은 조르주 캉길렘이었다(Canguilhem).] 다른 한편 “실천적 이데올로기론”에서 필요한 것은 왜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또는 주체의 형성과 재생산에서 필수적인 것인지,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계급 지배의 재생산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왜 동시에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주체이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 과제 중에서 알튀세르는 호명 개념을 통해 후자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얼마간 불완전하게) 성공했지만, 첫 번째 과제에서는 단편적인 분석 이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따라서 과학과 정치와 맺는 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변화했기 때문이다(알튀세르 1993, 1995).
어쨌든 우리가 알튀세르의 증상적 독해 개념에서 포스트코로나와 관련하여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첫째, 만약 포스트코로나가 증상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러한 드러내고 감추는 작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제설정의 필연성에서 또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제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그것이 증상을 이루는 어떤 실재 내지 원인에 내재하는 필연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증상으로서의 포스트코로나가 첫 번째 수준에서 무언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또 다른 무언가를 감추는지 해명하려면, 이러한 증상의 작용이 사실은 원인의 어떤 필연성에서, 곧 그 원인 자체가 또 다른 원인(들)의 증상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봐야 한다. 셋째, 더 나아가 이러한 필연성은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시스템의 재생산에서, 따라서 (예속적)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에서 비롯하는 필연성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증상들은 시스템의 (모순들의) 증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예속 내지 무능력의 증상일 터이다.
포스트코로나가 드러내면서 감추는 것
사실 포스트코로나는 여러 가지를 드러낸다. 또한 그러면서 무언가를 감춘다. 첫째,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충격일 것이라는 예상 및 희망을 드러낸다. 2021년 9월 2일 현재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2억1천9백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450만명을 넘어섰다.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백신 접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2021년 9월에도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가장 먼저 백신 접종률이 50%를 넘어섰던 이스라엘이나 초기 백신 접종 경쟁에서 선두에 있던 미국과 영국의 경우도 한때 1일 확진자 수가 크게 줄어들어 공공영역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좋다는 지침이 내려졌지만, 그 이후 다시 확산세가 증가하여 2020년 2차 대유행에 버금가는 확진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감염력이 현저히 높고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델타 변이의 전 세계적 유행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백신 접종만으로는 코로나19를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우며, 효과적인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팬데믹이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또는 적어도 상당 기간 ‘풍토병’의 형태로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네이처는 2021년 3월 「코로나19가 집단 면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코로나19 집단 면역이 사실상 어려워 보이며, 코로나19는 계속 풍토병으로 남게 될 것 같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Nature).]
그럼에도 이 문구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 문구에 담겨 있는 코로나19의 일시성과 우발성에 대한 예측이 사람들에게 널리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 전문가들은 팬데믹이 경제 시스템 내부의 문제점으로 인해 생겨난 충격이 아니라 시스템 바깥의 외생적 요인에 의해 유발된 충격이라는 점에서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본다면 그 충격이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팬데믹이 백신이나 치료제로 완화되고 결국 종식된다면, 경제 시스템은 곧바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고 낙관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IMF나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들은 미국 중국 및 주요 선진국들의 2021년 및 2022년 경기 전망을 매우 긍정적으로 예측하고 있다. 델타 변이의 유행으로 주춤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올해와 내년의 경기 전망을 밝게 예측하고 있다. 다만 IMF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경제 회복 속도에서 불균형이 심화될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IMF 2021년 세계경제전망 7월 수정 보고서).
또한 이것은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 내지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봉쇄를 경험하고, 1년 넘게 지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같은 엄격한 위생 수칙 준수 속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차단당한 많은 사람들은 하루빨리 코로나 19가 종식되어 이전의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해외여행, 쇼핑이나 실내운동을 비롯한 각종 여가생활을 자유롭게 누리고 싶은 그 욕망이 팬데믹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이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극심한 생활난을 겪는 이들 역시 팬데믹은 하루빨리 종식되어야 하고, 또한 종식될 수 있을 것으로 열망하기는 마찬가지다.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실업 상태에 놓인 이들이나 폐업 및 심각한 매출액 감소를 경험하는 자영업자들도 팬데믹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충격으로 그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코로나는 무엇보다 이들의 기대와 희망을 드러내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대와 희망은 늘 불확실성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스피노자는 희망과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왜냐하면 희망은 그것이 일어날지 어떨지 우리가 불확실하게 여기는 미래나 과거의 것에 대한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기쁨(inconstans laetitia)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려움은,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슬픔(inconstans tristitia)이다.”(3부 정리 18 주석 2)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정의들로부터 두려움 없는 희망 없고 희망 없는 두려움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오”(3부 「부록」 13번째 정의에 대한 “해명”)는데, 왜냐하면 희망이나 두려움은 모두 불확실한 인식에 기반을 두는 까닭에, 양자 사이에 윤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 쉽게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지만 포스트코로나는, 첫 번째 논점과 모순되게도 팬데믹을 모종의 서사의 중심으로 만들고 있으며, 그것을 위험의 도래와 고난의 극복에 관한 국민주의적(nationalistic) 영웅 서사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첫 번째 논점과 모순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앞의 논점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사실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재난일 뿐 체계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 데 반해, 이러한 국민주의적 영웅 서사는 코로나19를 미증유의 도전으로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특정한 인물이나 정치 세력, 또는 국가를 팬데믹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일수록 팬데믹의 도전과 위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K-방역’이 이러한 의미의 영웅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형적 문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서사가 대중들에게 폭넓은 공감과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면 2020년 11월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와 모더나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한 이후 포스트코로나 서사의 중심은 백신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방역에 실패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내면서 정치적 궁지에 몰렸던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 등은 백신 개발 및 접종을 선도적으로 수행하면서 포스트코로나 서사의 또 다른 영웅으로 등장하고 있는 반면, 모범적인 방역 국가로서 손꼽혔던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또는 일본 같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백신 접종에서 뒤처지면서 백신 접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민주의적 영웅 서사에서 ‘백신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쓰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2021년 여름을 경과하는 동안 방역을 느슨하게 풀었던 미국, 영국, 이스라엘에서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다시 백신 회의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코로나와 관련하여 방역 서사와 백신 서사라는 두 개의 영웅 서사가 경쟁해 왔으며, 백신 개발과 접종, 집단 면역의 시도가 전개되면서 후자의 서사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 됐든 두 개의 서사는 모두 코로나 팬데믹이 모종의 영웅의 노력 덕분에 통제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선의 승리 또는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라는 결말이 도출될 수 있다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따라서 포스트코로나는, 첫 번째 논점에서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고 두 번째 논점에 의해 서사적으로 극화되는 방식으로,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일상의 회복’, ‘경제의 회복’ 등으로 표현되는)나 팬데믹 이전보다 더 나은 세계로의 전환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그 이전의 세상보다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이는 분야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에 대응하는 보건의료 역량의 향상이다. 보건행정 당국이나 바이오산업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스 바이러스나 메르스 바이러스와 비교해보면 코로나19에 대한 우리나라 보건 당국의 대응 역량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년여 동안 지속되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를 일정한 수준 이하로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 경제 활동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국내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방역 역량은 이전보다 훨씬 더 증대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팬데믹 초기 심각한 정책 실패를 경험했던 유럽이나 미국의 방역 대응 역량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향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오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코로나 팬데믹은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례가 없는 전폭적인 정부 지원 덕분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채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했으며, 특히 m-RNA 방식 백신 상용화에 처음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m-RNA 백신 개발의 원리를 밝혀낸 카탈린 카리코가 유력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이 백신 제조 방식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잘 말해준다(김빛내리, 김우재).
팬데믹 이전보다 더 나아진 또 하나의 분야는 이른바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디지털 자본의 분야다(‘4차 산업혁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송성수, 이문호를 각각 참조). 어쩌면 이번 팬데믹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분야가 바로 디지털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 이전에는 특수한 분야에서만 활용되던 비대면 화상회의나 강의 등이 이제 일상화되었고, 아마존이나 구글 또는 마이크로소프트나 테슬라 같은 빅테크 기업들 및 네이버, 카카오 같은 플랫폼 기업들은 더욱 확고한 시장의 독점력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기술적 터전이 되고 있다. 쿠팡이나 마켓컬리 등으로 상징되는 온라인 물류 산업의 급속한 성장 역시 팬데믹의 수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자동차, 2차전지 배터리, 비메모리 반도체 등은 팬데믹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면서 이른바 새로운 성장 동력, 미래의 먹거리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는 팬데믹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동력 중 하나라는 후광을 입고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며, 이른바 뉴 노멀의 경제적 토대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넷째, 따라서 포스트코로나는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세상이 본질적으로 연속적일 것이며, 이러한 연속성이 전지구적인 인간의 삶의 정상성을 규정할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팬데믹을 계기로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이루어졌든 간에 그것은 이제 뉴 노멀이라는 규범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었으며, 그것이 지닌 규범적 강제력 덕분에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는 것은 어렵게 될 것이다. 첨단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 고용은 더욱 축소되거나 유연화되면서 이른바 “긱 이코노미”(gig economy)가 일반화될 것이고, 비대면 네트워크의 확산은 일과 휴식, 직장과 가정의 경계를 훨씬 더 모호하게 할 것이고, 교육 분야에서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포스트코로나가 감추면서 드러내는 것
다른 한편, 포스트코로나가 감추는 것은 사실은 그것이 드러내는 것의 이면이며, 포스트코로나는 자신이 드러내는 것을 통해 감추고 있다.
첫째,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체계에 대하여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충격이 아니라, 사실은 체계에 내재적인 모순들에 대한 증상이라는 것을 감추고 있다. 사실 코로나19는 주지하다시피 첫 번째 팬데믹인 것도 아니고, 인수공통감염병의 첫 번째 사례인 것도 아니며, 첫 번째 사스 바이러스도 아니다. 1918년 전 세계에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이나 그 이전에 몇 세기동안 인류를 괴롭혔던 페스트, 천연두 등의 존재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집단 감염병이 인류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내재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윌리엄 맥닐은 전염병의 세계사에 관한 고전적인 저작에서 이를 이중 기생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맥닐). 곧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각종 세균ㆍ바이러스들이 인간을 숙주삼아 기생해온 것이 미시기생이라면, 각종 노역이나 세금 등을 통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기생해온 것은 거시기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기생의 구조는 지금까지 인류 문명의 공통적인 조건이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조건에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롭 월러스를 비롯한 역학(疫學) 전문가들이 보여준 바 있듯이, 이러한 이중 기생의 구조는 20세기 말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더 악화되고 있으며, 생태계 자체의 파괴를 초래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출현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새로운 구조적 원천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중국 남부를 비롯한 남아시아 농촌에서 대규모 축산공업이 출현한 사실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월러스, 월러스 외, 포스터 외). 그것은 사스키아 사센이 “축출”(expulsion)이라고 부르는(사센), 현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착취 및 수탈 구조와 관련되어 있으며, 파샤드 아라기와 필립 맥마이클이 각자 나름대로 보여주었듯이(아라기, 맥마이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집단 이주”를 야기한 21세기의 인클로저 운동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곧 대규모 토지 차익 거래를 노린 국제 금융 자본 및 농업 자본에 의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규모 농지가 취득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은 빈민으로 내몰렸으며, 취득된 토지에서 (산업용 및 제약용 원료 생산을 위해서든, 고수익 작물 재배를 위해서든 또는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해서든 간에) 대규모 단일 경작을 위해 삼림과 생태적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지역 전체는 글로벌 가치 사슬의 새로운 거점으로 포섭되는 것이다. 이는 맥마이클이 “거대한 역설”이라고 부른 것, 곧 글로벌 남쪽 지역에서 개발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지역 주민들의 삶은 더욱 빈곤해지는 현상을 낳게 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생태적 환경의 파괴를 통해 전염병이 빠른 시간 내에 전 세계로 확산되고 순환할 수 있는 생태경제지리를 창출하게 된다(포스터 외). 하지만 포스트코로나(또는 위드코로나)라는 문구에는 이런 원인들에 대한 인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째, 포스트코로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국민주의적 영웅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사실 이번 팬데믹이 21세기의 첫 번째 팬데믹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럴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감춘다.
이점과 관련하여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2011년 영화 〈컨테이젼〉은 시사적이다. 이 영화에서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파되는 과정을 “2일째”에서 시작한 뒤 “135일째”에 이르러 백신의 대량 접종과 더불어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여준 뒤, 영화의 맨 마지막에 “1일째”를 배치한 것은 서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증상에 대한 해석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사실 마지막에 배치된 “1일째”는 중의적인 함의를 지닌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2일째에서 시작했던 영화의 서사, 따라서 진정한 기원의 공백 속에서 전개된 서사를 회고적으로 완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추리소설의 결말 부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에게 왜 이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파되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처음 발생했는지 설명해주고 납득시키는 기능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더버그는, 에임 앨더슨(AIMM Alderson)이라는 회사 마크가 찍힌 불도저가 (공장식 축산업을 위해 또는 약품 제조를 위해 필요한 천연 식물을 대량 재배하거나 다국적 농업회사의 대규모 단일 작물 경작을 위해) 삼림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밀림에 거주하던 박쥐들이 민가의 축사로 쫓겨나고, 바이러스박쥐의 배설물을 받아먹은 돼지들이 도축된 후 홍콩의 고급 요리점으로 납품되면서 요리사와 손님, 객실 종업원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하는 시퀀스를 “1일째”라는 스크립트와 함께 영화의 맨 마지막에 배치한다. 백신의 대량 보급과 함께 잦아들고 있는 이 팬데믹(영화에서는 2천6백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이 사실은 또 다른 팬데믹의 서막이라는 점, 현재의 자본주의적 축산업과 바이오산업의 작동 방식을 유지한 가운데 팬데믹의 진정한 종식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듭 출현하고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아프리카돼지열병 같은 전염병이 연례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소더버그의 통찰이 정확한 것임을 입증해준다(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질병관리본부로부터 홍보비를 받았느냐고 비평했던 비평가들의 비아냥이 무색하게).
셋째, 방역 서사에서 백신 서사로의 이동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산업의 혁신적인 백신 개발 역량과 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류의 삶의 인프라를 형성하게 될 새로운 디지털 산업의 기술적 역량에 대하여 포스트코로나 서사는 팬데믹 이후의 인류의 삶이 더 나은 것이 되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하지만, 바로 이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구조에 내재해 있는 죽음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감추고 있다.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이자 제도적ㆍ정책적 복합체는, 명칭 자체에서 다소 오도된 뉘앙스를 주기 쉽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라는 명칭은 이것이 과거의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새로운 판본이라는 뉘앙스를 부여하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몇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시장과 국가를 명료하게 구별하고,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간섭을 방지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시장의 논리를 국가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인간 실존의 전체적 측면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목표는 시장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장화, 상품화인 것이다. 국가가 시장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시장의 원리를 따라 경영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추구해야 하며, 이 때문에 이전에는 시장의 바깥에 존재하던, 인간의 삶의 재생산 영역(돌봄 노동의 대상이 되는)과 관련된 인간의 활동 전체 역시 이제 상품화의 영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보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더밋(Joseph Dumit)은 Drugs for Life라는 다의적인 제목을 지닌 저작 및 그와 관련된 일련의 저술에서 “잉여건강”(surplus health)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측면을 명료하게 보여준다(Dummit, Rajan “Introduction”). 더밋이 말하는 잉여건강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을 모델로 하여 구성된 개념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이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잉여가치들을 창조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잉여건강은 생존력(capacity to survive)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존력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통을 겪는 능력과 의사의 처방과 의료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 약을 투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생존력을 통해 상품으로서의 건강이 생산된다. 이 과정을 통해 질병은 더는 의사에 의해 진찰된 단일한 병리적 현상으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생물지표’(biomarkers)(혈압, 콜레스테롤, 당 수치 ...)에 의해 측정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비가시적인 객관적 조건으로서 재규정된다. 따라서 이전까지 질병과 건강 사이에는 일종의 불연속성이 존재했다면, 이제 양자 사이에는 기본적인 연속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의 삶, 인간의 생명은 지속적으로 약물(그리고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해야 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무엇을 위해? 생명 자본의 끝없는 축적을 위해!). 약물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모종의 질병의 위협 또는 질병으로의 전환을 방지하기 위해 단백질 보충제, 영양제 등을 비롯한 기타 약물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도록 권장된다. 말 그대로 Drugs for Life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바이오자본이 질병이라는 수요에 맞춰 약물 및 의료 서비스라는 공급을 제공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바이오자본이 생산하는 공급을 수요가 뒤따르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도 출신의 인류학자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은 글로벌 북쪽과 글로벌 남쪽 사이에 존재하는 바이오산업의 새로운 분업 구조를 보여준 바 있다(순데르 라잔, Sunder Rajan Pharmocracy). 글로벌 북쪽의 다국적 제약사들이 항암제와 백신 등 고부가가치 바이오산업에서 막대한 이익을 산출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이러한 약물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임상 실험이 안전하게, 체계적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규모 임상 실험은 대개 글로벌 남쪽의 인구 대국, 특히 인도와 같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임상 실험에 참여하는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수많은 빈민들의 존재가 인도 같은 나라를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의 최적의 임상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 세계 3위권의 의약품 제조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 각종 백신 물량의 50% 가량을 담당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인도가 세계 최고의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를 기록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넷째,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 및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와 국민주의(nationalism)가 오늘날의 세계 정치 및 삶의 양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포스트코로나는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다. 방역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백신 개발 및 접종 과정에서 노골화되고 있는 국민주의(백신 내셔널리즘)는, 40여 년 전부터 떠들썩하게 제기되었던 세계화에 관한 수사법이 무색하게 이제 국민주의가 자연적인 삶의 조건, 정치적 조건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이러한 국민주의적 경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쟁자들에 맞서 더 많은 백신을 확보하도록 촉구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강렬한 비난과 책임 추궁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포스트코로나는 인종주의가 특별한 사람들의 특수한 병리적 행동이나 타락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이데올로기적ㆍ제도적 틀이라는 것을 감추려 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이은정, Ziarek).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으로 표현된 반인종주의 시위는, 그와 동시에 전개된 아시아인 혐오와 맞물리면서,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에 내재해 있는 난맥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이 증상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이제는 전 지구적인 것이 된 자본주의 문명의 (다중적) 위기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를 경제로 환원하거나 경제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포괄적인 의미에서 삶의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Fraser “Behind”, FraserㆍJaeggi 또한 PanitchㆍAlbo). 코로나 팬데믹에서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들)의 증상을 읽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코로나 팬데믹 위기,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다른 위기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단순히 사회ㆍ역사적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비롯한 다중적 팬데믹은 생물학적이고 지질학적인 조건들이 더 이상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 문명에 대하여 외부적(external)이거나 외생적인(exogeneous) 조건들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ㆍ역사적 존재자로 존재하기 위한 심층적 조건들이라는 점, 곧 내부적이고 내생적인 조건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 같은 새로운 개념들이 이점을 일깨워준다. 둘째, 그런데 오늘날 절대적인 것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문명, 곧 절대적 자본주의(Balibar)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들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어떤 의미에서는 차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절대적 자본주의에서 인간들은, 체계가 제공하는 삶의 방식과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사람들은 이중구속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실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의 뚜렷한 증상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심화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것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들을, 자본의 논리에 내재적인 무한한 축적의 경향에 따라 잠식하거나 파괴하다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Fraser “Behind”, FraserㆍJaeggi).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 또는 정상적인 잉여가치 착취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사회적 재생산노동(돌봄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육체적ㆍ정서적 노동)을 전제하지만, 복지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적 재생산노동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 의거하여 여성들이 수행해야 할 무급노동으로서 전가되었으며,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성인-근로자 모델(adult-worker model)에 입각하여 특히 여성들에게 시장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돌봄 노동을 수행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윤자영). 또한 자본주의가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자연 영역’의 보존이 필요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자연 영역을 자신의 이윤 획득을 위해 무한정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수탈하면서 그것을 황폐화된 상태로 방치하거나 악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기후 위기, 돌봄 위기(인구 재생산 위기로 표현되는)가 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경고되고 있고, 날마다 언론의 주요 기사거리가 되고 있음에도 이러한 위기에 대하여 체감할 수 있는 해법이나 대안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 따라서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이런저런 직접적인 수단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특히 디지털 자본주의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집합적이고 독특한) 역량을 평범한 시민들, 즉 경제적 자원과 정치권력, 지적 자본에 대한 접근 권한이 제약되어 있거나 심지어 차단되어 있는 대다수의 을들로부터 수탈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해보자. 우리는 앞에서 이른바 ‘K-방역’에서 나타나는 전염병 내지 보건 위기에 대한 대응 역량이 이전 시기보다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보인다”는 단서를 붙인 것은, 여러 가지 객관적 지표들에 입각한다면 분명 방역 역량의 향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이때의 방역 역량이라는 것이 사실은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규율 역량(Foucault) 또는 생명 권력의 통치 역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생물학적 집합으로서의 인구를 개별화하면서 전체화하는 역량,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예외상태에서도 경제의 수준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주권의 역량 또는 치안의 역량이 아닌가? 또한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플랫폼 백신 기술이 과연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불평등과 차별을 산출하는 치안 장치가 되는 것인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바이오 기술은 그것이 생명 권력의 치안 장치의 일부가 되는 한에서만 제대로 기능하고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한에서 바이오 기술의 혁신은, 그것이 얼마나 혁신적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바이오 자본의 축적 메커니즘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의상 지정학적, 인종주의적, 국민주의적 불평등과 차별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아마도 디지털 자본주의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평범한 시민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킬뿐더러, 그들을 더욱 더 개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더 관리하기 쉽게 전체화함으로써, 위기들에 대한 집합적이고 독특한 대응을 실천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러한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조차 더욱 어렵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이제 간단히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제안하듯이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문제라면, 그것은 포스트코로나가 자신의 원인인 코로나 팬데믹이 또 다른 원인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코로나는 코로나 팬데믹을 우발적인 것으로, 일시적이며 체계에 대해 외생적인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어떤 원인(들)에 대한 증상이 아니라 독립적인 실재 내지 원인으로 파악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코로나 팬데믹이 독립적인 원인이나 실재로 제시될수록, 미증유의 재난에 관한 영웅서사로 재현될수록,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증상을 (재)생산하는 그것의 원인(들)은 비가시적이고 인식 불가능한 것이 될 터이다. 그리고 이 경우 코로나 팬데믹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재앙으로 간주될 것이며, 더 나아가 인종주의적 프레임으로 여과되면 차이나 바이러스라는 명칭(또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 집요하게 고수한 바 있는 “우한 폐렴”이라는 또 다른 명칭)이 말해주듯 “야만적인 아시아”(또는 중국)가 그것의 진정한 원인으로 (데리다가 말한 바 있듯이) 대체보충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들)라는 원인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원인과 연결 짓지 않고서는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문제 자체를 인식할 수조차 없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의 한 요소를 이루면서 동시에 그 위기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글로벌 남쪽의 시민들에 대한 착취(exploitation)와 수탈(expropriation)(두 개의 ‘ex-’의 차이 및 연관성에 대해서는 Fraser “Roepke Lecture” 참조)이 글로벌 북쪽 시민들의 정상적인 삶을 위한 자연적인(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에서) 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을들에 대한, 을 중의 을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자신들의 삶의 자연적인 조건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양식 자체가 팬데믹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식하기 어려우며, 인식의 의지를 발휘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지극히 수동적인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증상적 독해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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