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분짜리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면 제격인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는 서럽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하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지구의 생명과 자연을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가 때론 잔인하게도 비치지만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상어가 물개를 잡아채며 하늘로 붕 떠오르는 모습이라거나 표범.치타의 먹이를 쫓는 질주장면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잡아먹혀야만 하는 동물들의 서글픔도 잡아먹어야 살 수 있는 동물들의 치열함도 과장되지 않고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어쨋든 이 다큐영화는 북극곰이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동면에서 깨어난 북극곰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나타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드는 장면을 연출한다. 몸뚱아리가 절반이나 줄어들어 자신보다 덩치가 큰 바다사자를 잡아먹기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장면은 눈물을 떨구게 만든다.

누가 저 북극곰을 도박으로 몰게 했을까. 

영화는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행동하라고 말한다. 무엇무엇을 하면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찾아보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거창한 무엇을 찾기 보다  물한방울 아껴쓰고 전기를 허투로 쓰지 않는 것 하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식을 줄인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생명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사자들 사이에서 잠자듯 조용히 드러누운 북극곰의 모습이 눈동자에 아련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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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선택의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이 영화 바빌론 AD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뇌까지 근육질로 꽉 차 있을 것 같은 배우 빈 디젤의 액션에 대한 기대감이 제일 컸다. 다음으론 마티유 카소비츠라는 감독에 대한 믿음이랄까. <증오>와 같은 현실감 넘치는 영화에서 SF로의 이동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4개의 스턴트팀을 동원했다는 액션 장면은 소문난 잔칫집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있는냐 하면 뻔한 구성에 뻔한 줄거리인지라 그닥 흥미를 끌지 못한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미래를 구할 오로라라는 소녀를 몽골의 수도원에서 뉴욕으로 데려가야 하는 사명을 띤 투롭(빈 디젤)이 마지막에 임무를 거부하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는 내용이다. 궂이 영화의 특이한 점을 말하고자 한다면 가족에 대한 시선이라고나 할까. 첨단 컴퓨터를 모체로 한 아이와 동정녀 신화로 태어난 쌍둥이와 가족을 이루는 투롭은 피나 DNA와 상관없는 가족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정한 가족이란 혈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지금 현실에서도 가족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1인 가족이 늘어나면서 이들끼리 실험적인 가족도 탄생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가족에 대한 영화는 아니기에 비난의 화살을 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영화는 할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냥 입을 다물고 끝내 버린다.(아이고, 아까워라 내 돈~~ ㅜㅜ)

어정쩡한 것은 역시 군대에서 줄 설 때나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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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 어린얘와 같아진다고 하던가. 이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가 함께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애니메이션 <언덕 위의 포뇨>는 그의 작품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듯하다. 물론 그가 창조해내는 캐릭터들의 귀여움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할 정도로 여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인어공주의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동화같은 이야기다. 문명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비수보다는 따스한 가슴으로 보듬으려 한다. 그래서 깊은 슬픔이나 아픈 갈등은 무뎌지고 행복한 미소가 깊어진다.

그 행복한 미소는 오로지 사랑에 달렸다. 그런데 사랑을 할 때 그 대상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과연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일까.

꼬마 주인공 쇼스케는 포뇨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 사랑은 포뇨의 정체와 전혀 상관없다. 우리의 사랑은 타인의 정체와 상관없이 사랑이 가능한 것일까. 미야자키 감독은 그럴 수 있는 세상만이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번 애니메이션은 동화같은 이야기가 돼 버렸다. 그리고 사랑은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린다.

정말 사랑은 그렇게 위대한 것인가.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대답은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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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주제곡  창해일성소  滄海一聲笑

滄 海 一 聲 笑  푸른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滔 滔 兩 岸 潮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浮 沈 隨 浪 記 今 朝   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滄 天 笑 紛 紛 世 上 滔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誰 負 誰 剩 出 天 知 曉  이긴자는 누구이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江 山 笑 煙 雨 遙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濤 浪 濤 盡 紅 塵 俗 事 知 多 少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않네
淸 風 笑 竟 惹 寂 寥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豪 情 還 잠 一 襟 晩 照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蒼 生 笑 不 再 寂 寥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豪 情 仍 在 癡 癡 笑 笑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하하하~!

영화 동방불패는 소오강호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때 흘러나왔던 창해일성소라는 주제곡은 동방불패에서도 계속된다. 영화의 분위기는 이 노래가 다 말해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화산파 영호충(이연걸 분)은 사부의 위선적인 모습에 실망하며 사제들과 함께 강호를 떠나고자 한다. 강호를 떠나기 전 회포를 풀고자 만나려 했던 일월신교 임아행의 딸 임영영
(관지림 분)과는 끝내 사랑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대신 비급인 규화보전을 익히면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하게 된 동방불패(임청하 분)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원수가 되면서 서로 싸워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위 영화의 줄거리에서도 느껴지지만 허무주의적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동방불패는 영호충과 임아행의 대화 속에서 인간사회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한다.

강호를 떠나고자 하는 영호충에게 임아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원한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원한은 복수심으로 가득차 서로 싸우게 만든다. 그러니 강호란 바로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강호를 떠날 수 있겠는가.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소오강호에서는 반대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졌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면 영호충 자네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다 해도 지켜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칼을 버리려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에서는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들만 선발해 우주선에 태워 새로운 행성으로 떠난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우주선 안 사회를 구성하는 인물들 간에 사랑이 싹트면서 질투도 같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질투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 사랑이야말로 다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는 희망임을 넌지시 내비치며 끝을 맺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수많은 감정이 흘러간다. 그 감정은 격랑을 일으키며 성난 파도가 되고 폭풍우가 되기도 한다.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때론 그 폭풍우에 휘말려 거스르지 못하고 온몸을 내맡겨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은 때론 비극이 되고 때론 희극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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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의 진짜 주인공은 배트맨일까, 조커일까. 이번 영화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수작이다. 여기에 검사 하비 덴트까지 가세하면 도저히 흠잡을 데가 없다.

영화의 줄거리를 굳이 이야기하자면 너무 간단하다. 악당이 넘치는 고담시. 모두가 썩어빠져 있지만, 배트맨이 도시를 지켜내고 있다. 여기에 청렴결백한 검사 덴트는 떠오르는 영웅이다. 그러나 악당들을 규합해 새로운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조커는 도시의 혼돈을 조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린 덴트는 너무나 순백하기에 쉽게 검게 물들고 만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덴트와 덴트를 영웅으로 남게 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악당의 이미지까지도 받아들이는 배트맨, 세상이 악으로 물들 것이라 믿는 조커의 삼각구도가 영화를 이끌고 있다.  

영화의 재미는 화려한 액션에도 찾을 수 있고, 배트맨이 갖추고 있는 신무기의 성능이 주는 게임과 같은 아이템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선택의 순간순간들이 주는 갈등 구조에서도 맛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 주인공의 캐릭터가 최대 흥미거리다.

명확한 선과 악의 구조라면 재미없다고 느껴질법 하다. 할리우드의 캐릭터는 이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엔 영웅도 인간적 괴로움을 겪는다는 정도로 겨우 한걸음 내디뎠을 정도다.

배트맨의 캐릭터도 이정도 발걸음일지 모른다. 선을 대변하지만,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진 못한다. 그러나 상황은 그를 과감히 강하게 만들어간다. 비난마저도 스스로 감수할 정도로 진짜 강한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비 덴트는 조커에 의해 악에 물들어가는 캐릭터로 나온다. 너무나 깨끗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자극에 쉽게 검게 물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한 정의감이 법을 뛰어넘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게 만들어 살인마저도 서슴지 않게 된다.

덴트의 캐릭터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행운의 동전이다. 행운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믿는 그는 동전의 양면이 모두 앞면인 동전으로 스스로의 뜻을 타인에게 이해시킨다. 그러나 사고를 당하고 나서 한면이 그을러 버린 동전을 가지고서는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이해가 필요없이 강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사고로 이미 그의 마음도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덴트가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캐릭터일 수 있다.

반면 오히려 일반인들은 영화 속에서 희망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여객선 두 대의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 인간의 이기적 마음을 시험하는 이 장면에서 차마 믿기지 않은 선택이 이뤄진다. 이 부분은 너무 영화같은 설정이어서 오히려 설득력을 잃는다.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이겠지만, 왠지 영화의 우울한 측면이 망가져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워낙 강렬한 조커 덕분에 이 희망마저도 왠지 불안해보인다는 점에서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조커는 그야말로 최고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영웅이란 악당을 필요로 한다. 배트맨이 있다면 당연히 조커도 있어야 한다. 배트맨의 정의감은 절대 조커를 죽일 수 없다. 조커 또한 배트맨이 있어 행복할 정도다. 그러기에 조커의 악은 절대 힘을 잃지 않는다. 그의 악은 악을 통해 개인적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닌 순수한 악의이기 때문에 패배란 없다. 그에게는 혼돈만이 유일한 낙이다. 인생의 재미를 그곳에서 찾기에 그는 혼돈을 바로잡고 질서 속에 가두려는 사람의 힘이 강하면 강할 수록 살아갈 맛이 난다. 그 적수가 자신을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정돈된 것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욕망의 화신 조커. 조커를 만든 것은 결국 배트맨이었다.

수레가 양바퀴로 가듯 배트맨과 조커는 세상의 양 바퀴다. 영화는 암울한 듯 하면서도 희망의 빛을 놓지 않고 절묘하게 세상의 수레를 이끌고 있다.

이 막강한 캐릭터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가 죽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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