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은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많은 것들로 인하여 꿈은 항상 꿈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다. 농경시대의 삶은 생노병사의 흐름이 급변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물론 제도적 변화나 국가의 흥망으로 인한 구조적 문제를 제외하고- 예측가능한 테두리내에서 행동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를 한번 둘러보자. 사방에 죽음의 냄새가 깔려있고, 사랑 또한 공기 속에 부유하고 있다. 누구나 어느 순간 느닷없는 사랑과 죽음 앞에 당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 이건 마치 무슨 보험 광고 같기도 하다. 실은 그렇다. 이 시대는 보험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무엇인가를 대비해서 어떤 준비를 해 두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외출>의 두 남녀는 이런 느닷없이 다가온 사고로 만나게 된다. 외도하는 두 남녀의 각기 다른 남편과 아내로서 만나게 된 두사람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사랑에 빠진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교통사고가 하필이면 외도하는 두 남녀에게 닥침으로써 사랑의 첫 대면을 하게되는 남녀 주인공은 혼돈스럽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실(배우자의 외도)과의 만남은 혼돈이다. 사고로 누운 배우자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바람과, 살아서 변명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지나면 애증도 사라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그러나 이해는 어디까지나 이해이고, 그것이 변치않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우연성은 <외출>의 영문제목 April snow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월에 내리는 눈이란 무엇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봄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한다는 주인공의 바람을 한번에 해결시켜버린 4월의 눈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들이 삶으로 편입되고,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교통사고로 죽게되는 남자) 삶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도 죽음 마냥 결국 누군가에게 아무런 예고없이 닥치는게 현대인의 운명이지 않을까?

그런 장난같은 운명에 우리가 그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동병상련. 같은 일을 같이 겪는 사람들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도 없다.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사고가 주위에 널려있듯이, 특별한 경험의 공유 또한 이미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사랑의 가능성 또한 일상다반사가 되었지만,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초연해지기도 쉬워졌다. 그래서일까, <외출>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흘러가는 바람마냥 세월속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그 잔잔한 흐름이 알 수 없는 애틋함을 가져다준다. 알수 없는 사이, 우리는 서로 위로가 되어준 것일까? 사랑의 종점이 과연 어떻게 될지 여전히 우리는 똑같이 알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은 되어주기를 바랄뿐이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특히 배용준이 흘리는 눈물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처럼 느껴진다. 한 순간의 사랑이지만 헤어져야만 하는 사랑의 아픔 때문일걸까? 아니면, 자신도 이런 불륜을 해보니, 아내가 가졌던 그 불안하지만 달콤한 사랑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일까? 즉, 그 이해는 바로 불륜에 대한 이해이며, 따라서 그것은 불륜으로부터 배척당한 자기자신에 대한 존재를 자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일지도...

그런 감정의 과잉에 조금 영화보기가 괴로운 것을 제외하면, 영화의 끝맺음은 마음에 와 닿는다.

손예진 : 어디로 가죠?  배용준 : 어디로 갈까요? (눈이 덮힌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랑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엔딩장면은 크레딧의 마지막까지 시선을 사로잡아둔다 )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느닷없이 찾아오기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6-06-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나서 책을 읽었어요. 책이 더 나았다는 기억이 나네요. 배우들의 연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팀 버튼의 영화를 줄곧 보아오면서도 열광하지 못했던 것은, 영화가 대부분 우울하고, 환상 속에 담아낸 내면의 쓸쓸함을 견디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왠지모를 삐뚤어진 캐릭터들의 미워할 수 없는 악의, 그래서 차라리 악마가 아닌 악동으로 표현되어지는 감독이 표현하는 화면은 개인적으론 너무나 어둡게 느껴진다. 숨어들어 찾아간 안식처라기 보다는 빨리 벗어나고픈 하수도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울한 영화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계속 봐 왔던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빅 피쉬>를 통해서 그가 밝은 세상 속으로 한발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고, 과연 이런 변화가 돌연변이 인지, 아니면 점차 세상으로 나올 채비를 갖춘 것인지 의심하게 되었고, 다음 작품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아직 보진 못했지만, <유령신부>를 보니 이제 그가 세상과 화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너무나 유쾌한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적 결말에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그의 색깔이 사라져버렸다고 단정지워버릴수 있을 정도로 변한듯 느껴지지만, 그의 화면은 여전히 환상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것은 안식처의 느낌을 준다는 것.

<유령신부>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의 느낌을 주는데다, 화려한 조명, 아름다운 음악 등이 상상의 세계에 잘 녹아들어 유쾌하다. 무엇보다도 뇌리에 가득 새겨진 것은 피아노 선율이다. 빅터와 빅토리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의 피아노 솔로, 빅터와 유령신부가 함께 치는 피아노 듀엣은 너무나 아름다워 절대 잊혀지지 않을것 같다. 이 음악은 팀 버튼의 <비틀 쥬스>, <배트맨2>, <가위손>, <화성침공>, <크리스마스의 악몽> 등의 작품에서 신비로운 음악을 담당했던 대니 엘프만이라는 사람이다. 최근 인기를 누렸던 미국 시트콤 <위기의 주부들>과 영화 <스파이더 맨>도 그가 음악을 담당했다.

팀 버튼과 대니 엘프만의 관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의 관계와 비슷한듯 싶다. 아무튼 팀 버튼의 변화를 엘프만의 음악 속에서도 그대로 찾아질 수 있을듯 싶다. 그의 음악이 신비로움을 넘어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의 영화도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 따뜻함이 녹아들어가 있는듯하여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서운하다. 아무튼 거북한 느낌없이 팀 버튼의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코마개 2005-12-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팀버튼 참 좋아하는데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좀...
그게 저는 팀버튼의 냉소적인 면을 참 좋아하거든요. 저도 좀 냉소적 인간이라서 드물게 만나는 비슷한 부류의 인간에 대한 애정처럼. 그럼데 찰리는 마지막에 따뜻한 결말로 끝나서 속상했어요. ㅎㅎ 같은 사람에 대한 이렇게 서로 다른 기대라니.

하루살이 2005-12-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제가 거북해하면서도 계속 그의 영화를 본 것은 그 냉소 덕분이겠죠?
음~ 찰리도 따뜻한 결말이라니...
확실히 팀 버튼이 세상과 화해를 한 모양입니다.
전 <유령신부>의 해피엔딩에 엄청 놀랬더랍니다.^^
 

노자 도덕경엔 自然은 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겐 상을 내리고 악한 이에겐 벌을 내릴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해주는 경구로 나는 알아듣고 있다. 최근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자연재해가 바로 이러한 불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거처럼 생각된다. 착하다고 해서 허리케인이나 지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괴물은 아니다. 인간이나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이빨이나 발톱을 드세우고 덤벼드는 괴물로 그려지는 자연은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자연은 불인한 존재이지 괴물은 아닌 것이다. 식인 상어가 마치 오직 사람만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덤벼드는 모습마냥 이상한 일도 없다.

<오픈 워터>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재앙을 화려한 액션으로 꾸민 치장을 걷어내고 마치 다큐멘터리 마냥 가만히 카메라를 들이댄다. 휴가를 얻은 부부가 스킨스쿠버를 즐기려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다 배를 잃어버린다. 망망대해. 위치를 제대로 찾았는지 티격태격.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두려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카메라는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이들만을 가만히 지켜본다. <남극일기>의 하얀 눈덩어리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고 지겹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란 색만이 가득한 이 영화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은 새삼 놀랍다.(솔직히 좀 지겹긴 했지만 남극일기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럭저럭 런닝타임이 지나가 있다)

할리우드였다면 당장 덤벼들었을 상어들이 한번 쓰윽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해파리의 습격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을지도 모르는 장면들도, 심리적 불안감에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작용만 할뿐이다.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구조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이 안고서 시간은 흘러가고, 상어들이 자꾸 나타나다보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주인공 부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 네 탓 내 탓 다투다가도, 서로 의지해야 할 대상이 오직 그 둘뿐임을 알고, 그리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다른 상황에서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보내야 하는 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상황은 어떻게 될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내 눈이 피로해지는 만큼 그들의 체력도 다해갈 것임을 알고, 곧 무슨 사단이 발생할 것임을 예측한다. 하지만 영화는 어떤 극적 장치도 끼워넣지 않고 담담하게 결말을 맺는다. 이것이 비극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자연 앞에서 무장해제됐을 때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만을 보여줄뿐이다.

영화가 꼭 화려할 필요도, 어떤 극적인 드라마적 장치도 없이, 눈을 사로잡는 액션이 없더라도, 썩 괜찮은 영화를 만들수 있다는 것을 <오픈 워터>는 말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caru 2005-11-08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극일기>의 하얀 눈덩어리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고 지겹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흠...그랬군요... 아직 남극일기도 이 영화도...보진 않았지만...
썩 괜찮게 여겨지는데요... 전 심리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런닝타임이 훌쩍 지나가버리는 그런 영화가 좋더랍니다 ^^

하루살이 2005-11-09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극일기>는 자연에 대한 공포와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 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습니다. 암튼 하얀 눈은 실컷 구경할 수 있죠. 지겹도록...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가끔 그들의 강박관념을 엿보게 된다. 내가 심심해서 보는 영화들이라는 선입관이 강한 탓일까? 재미있으면 됐지 또 뭘 바라나?라는 심리를 그대로 제작쪽으로 돌리면, 재미있게 만들면 됐지 무얼 집어넣으려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리버티는 2002년 [폰 부스]라는 영화와 무척 닮아있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목숨을 저당잡히고, 상대방이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처지의 긴박감. 한정된 공간만을 비추는 속에서 지루함을 잃지 않은채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희미하게 기억나긴 하지만 <폰부스>에서는 저격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리버티>의 경우는 저격자도 대상자도 모두 다 드러낸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야기의 집중은 무엇이 이런 무자비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저격자를 이끌었는가에 있다. 무슨 이유 때문에로 이야기가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무척 잘 만들어진 것 같다.

자신의 딸이 학교 총기 사건으로 죽게 된 전직 CIA요원. 복수심에 불타 복수를 하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단순한 복수로 끝내지 않고 보다 고귀한 무엇인가를 덧씌워야 한다. 물론 그것이 사건의 원인을 타당하게 밝혀내고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세상에 변화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이 곳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은 그래서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 덫이 있다라고 말하며 경고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덫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작용하며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 방식. 그저 덫이 놓여있는 곴까지의 풍경을 그려대다 갑작스레 덫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의 충격을 크게 만드는 것이 할리우드식 표현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한대도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도 궂이 도덕적 포장을 하려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리버티의 주인공의 근본적 욕망은 복수심에 있었을 터이다. 직접적인 가해자를 대상으로 했어야 했겠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고 복수를 행하기에는 왠지 쉽지않다. 개별적 존재자로서 마주쳤을때 복수의 칼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그 이유에 대한 이유를 달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전체 사회로 퍼져 나간다. 물론 실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사건들도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눈덩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 없이 느닷없이 발생한 눈사람만을 이야기하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근거 없는 음모 정도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정말로 진중하게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가 재미로 희석되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러니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사라지지 않고 꼭 계속해서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 방식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더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도록만 하지 않았으면 싶다. 단순히 이런 식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 부추기지 않았으면 싶다. 지극히 개인적으론 그냥 대놓고 복수를 행하는 타란티노처럼 스크린 속에서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할리우드는 할리우드로, 마이클 무어는 마이클 무어식 대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caru 2005-11-0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버티는 안 봤지만... 볼링 포 콜럼바인, 폰 부스는 봤어요..
세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엮일 수 있군요~

하루살이 2005-11-0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갖다 붙히기 선수입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나서 친구들과 소주 한잔(한병... 두병...)을 마셨다. 도저히 그냥 집으로 들어갈수 없게 만드는 쓸쓸함. 그 쓸쓸함을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났다. 일본 영화라 그런지 이번엔 소주가 아니라 정종을 냅다 들이켰다. 아 그 무어라 표현못할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 가슴이 싸~아 하니 아려오는 고독감.

이 영화는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 사실을 모르고서 보더라도 하루키의 냄새가 지독히도 품어져나오니 금방 알아챌 것이다. 정말 너무나도 하루키적인 영화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아직도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미야자와 리에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영화를 보는 행복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잔잔한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영상은 자꾸만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시간은 그렇게 컷과 컷 사이에 녹아들어 있다. 아름다운 시 한편을 보는듯한 감상에 젖어드는 것 같다.

토니 타키타니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게 이름을 묻고나선 항상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곤한다. 그래서 토니는 어려서부터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버지는 재즈 트럼본 연주자로 공연을 하는라 집을 비우니, 모든 것이 혼자다. 특히 혼자서 밥을 먹는 장면은 너무나 쓸쓸하게 다가온다. 나는 매끼 그렇게 혼자서 밥을 먹지만 그다지 쓸쓸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오호라, 토니도 그렇단다. 특별히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토니는 그림에 재주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들 속에 예술성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에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정확한 묘사만이 그의 그림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는 기계를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밥벌이도 당연히 기계에 대한 그림으로 해결한다. 꽤 잘 나가는 일러스트가 된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 온 에이코라는 여성에게 빠져든다. 사랑에.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 것이였는지를 깨닫는다. 과거 자신의 삶은 감옥에 갇혀 산 것과 다를바 없다는, 고독은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이기에... 토니는 15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에이코와 결혼한다. 눈앞에 있는 행복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혼 초기 굉장히 초조했으나 이내 행복이라는 일상을 즐기게 된다.

에이코는 정말 완벽한 여자처럼 느껴진다. 딱 하나만 빼놓고. 바로 쇼핑중독증. 특히 옷에 대한 집착이 크다. 거의 매일 새 옷을 하나씩 사들여야만 한다. 토니의 집 방 한칸은 이 옷들로 가득찬다. 그리고 갑작스레 다가오는 교통사고. 731벌의 옷만 남기고 에이코는 떠난다. 옷들은 에이코의 그림자처럼 다가와 점점 희미해져간다.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토니는 에이코와 똑같은 신체치수를 지닌 여자를 구한다고 신문에 공고한다. 에이코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발견한다. 그 여자에게 에이코의 옷을 입어달라고 요구한다. 여자는 그 옷들로 가득찬 방에서 조용히 흐느낀다. 토니는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며 채용을 취소한다. 그리고 옷들도 다 팔아버린다. 몇 개월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퓸인 재즈음반이 그 방에 들어가 있다 이내 다 팔아치운다. 그리고 관련된 것들을 모두 불태운다.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은 빈방, 토니는 <혼자서> 옆으로 드러누워있다.

아~ 그 상실감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그곳에서 얼핏 나의 그림자를 마주친다. 나의 가슴 한 켠은 차디찬 겨울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토니. 울고있진 않을 것이다. 정말 울고있진 않을 것이다. 울지마라, 부디.

한 모임에서 에이코와 사귀었다던 남자를 만난다. 에이코의 이상한 성격을 감당하기 힘들었지 않았는냐는 질문에 에이코에 대한 것은 이제 모두 잊어버렸다고 답한다. 하지만 에이코를 그렇게 욕하지 말라고,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고 소리친다. 아, 다 잊어버렸단다.

술을 마시던 친구는 그게 가능하단다. 자기도 실연의 아픔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경험이 있단다. 마음의 벽을 쌓아두면 기억의 통로가 막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하지 않게 될 수 있을까? 애써 슬퍼하지 않으려 할 필요가 있을까? 갑자기 <봄날은 간다>가 떠오른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던 그들이.

추억은 누구에게는 기억으로, 누구에겐가는 망각으로 남겨지는가 보다.

외로움을 알아버린 한 사내의 치유되지 않을 상실감이 이내 나를 술의 바다에 빠뜨려버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caru 2005-10-0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타키타니,,, 흠...거 심상치 않은 작품일듯...
하루살이 님은 잔뜩 흔들어놓다뉘...

하루살이 2005-10-0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속쓰려... 후유증이 크답니다^^

icaru 2005-10-2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봐버렸다지요........ 아!!
알고 읽으니.... 다시 보입니다... 퍼갈께요~
그러고 보니..... 거의 1년 동안 하루살이님이 달고 계셨던 이미지 간판을 토니 타키타니로 바꾸셨군요~ 흠...발견!!

하루살이 2005-10-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 사람들에게 하루키 좋아하느냐고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좋아한다면 꼭 보라고 주접좀 떨었죠. 욕먹을 각오하고서. 그런데 이카루 님께서도 괜찮게 보셨다면 다행입니다. 휴~ 살았다. *^ㅇ^* 아마 당분간 간판은 안바뀌겠죠.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엔...

icaru 2005-10-3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와 쇼자부로(?토니 아빠)역을 한 사람이 맡고, 에이코와 또 다른 여자(신체 싸이즈가 같은) 역을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면서요... 전혀 눈치 못챘다 아닙니까...동일 인물이 맡았다는 거..

하루살이 2005-10-3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친구와 둘다 1인 2역이지 하면서 극장밖을 나오던 생각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