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느와르라는 장르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아니, 느와르라는 장르보다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라는 인물에게 반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쑤시개를 꼬아물고 쌍권총을 쏘아대는 그의 모습은 알지못할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예쁘장하게 생긴 장국영과, 외유내강의 모습을 지닌 적룡 등 주변 인물들과의 우정과 사랑, 이것을 사나이들의 의리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죽음보다도 더 강렬한 감성이라는 것이 사춘기 시절, 피끓는 청춘에게 매력적일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 느와르의 표현방법이 과장되어지고, 또한 그 감정의 선이 무수히 반복됨으로써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어둡고 차가운 블루라는 느낌이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그나마 조금은 자유롭다고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유혹의 정도가 약해지기도 했다. 오히려 느와르보다는 판타지가 어울리는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생계라는 현실에 부닥치며, 내 정신도 몸도 닳고 닳아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사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니, 한국이라는 사회가 집단공황을 불러일으키게 만듬으로써 자신에게 처박히도록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절에 느와르라는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청춘 시절의 그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줄까? 아니면 내면에 감추어진 피의 뜨거움을 불러올 것인가?
<달콤한 인생>은 그래서 내면으로의 침잠에 어울리는, 나르시스적 경향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헌이 창가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새도우 복싱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 이 <야수>라는 영화는 어떤가?
개인적 의리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나이들. 법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두 야수가 결국 사회적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의리를 넘어 정의로 향하는 순간, 이미 <야수>는 느와르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애시당초 느와르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순전히 이것은 나만의 착각이거나, 다른 곳에서 얼핏 들은 선입견일 것이다. <야수>는 결코 느와르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또한 아예 법과 제도라는 것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고, 어둠 속에서 정의를 행사하는 <더티 해리>류의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순박하다.
이 영화 <야수>가 특이한 점은, 형사와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제거되어야 할 보스와 배신을 행한 조직원 모두 가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선택의 상황에서 가족을 택한 이들은 악당이고, 가족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정의라는 이름하에 힘에 저항하다 가족들마저도 희생당한다. 그리고, 정의는 결코 법과 사회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맞서 싸워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90년대 초, 의리를 위해 싸웠던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들은, 21세기 한국에선 정의를 위해 원시시대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힘에 맞서기 위해선 오직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어야만 하는 야수는 빌딩 솦에 사는 애처로운 존재일 뿐이다. 세상은 결코 이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힘의 서열만이 살아있는 빌딩으로 둘러쌓인 원시시대의 밀림 속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위해 우리 모두가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만 할 것인가? <야수>는 그래서 아스팔트 위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곳은 정글이며, 또한 정글이 아니기에... 발톱을 잃어버린 성난 야수, 세상은 이들을 길들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