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서생의 한 포인트는 지식인들의 허세라고 보여진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선비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따로 있음을 알고, 질투심에 불타 야설을 쓰기 시작한다. 가문의 위기에는 오히려 눈을 감고, 공명정대함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겁많음을 숨기려들던 인물이 위험을 무릎쓰고 말이다.  점차 인기를 얻어가자, 색안경을 쓰며 작가인채 폼을 잡고, 자신을 꼬드기던 상인과 똑같은 수법으로 화가를 유혹한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갈망은 사랑까지도 판다. 그러나 자신이 팔아넘긴  사랑이 진실이었다며 왕비에게 말하는 장면은 이것이 위선인지 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허세로 가득 차 있던 주인공이 끝까지 의리를 지키겠다며 침묵을 지키는 장면에선 한 캐릭터의 양분된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다. 지식인들의 허세를 조롱하는듯 하던 영화는 이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머리가 지시하는대로 따라가야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다는 내시의 말. 그것은 현대인에 대한 비판이다. 생존을 위해선 머리를 써라.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머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추월색의 유배도 내시의 죽음도 모두 마음이 지시한 길을 따르다 일어난 일이다. 정말로 어리석게 보이는 한편으로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것이 현대인의 죽어가는 마음의 길을 살며시 보여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마음은 아닌데'라는 후회마저 사라져가는 요즘, 음란서생은 전혀 음란하지 않게 마음을 살짝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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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5-22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살이님, 저도 이 영화를 본 여운이 생각나네요^^

하루살이 2006-05-2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얼마나 야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가,,, 뜻하지 않은 스토리에 당황^^;

하루살이 2006-05-2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저는 뜨끔뜨끔 침을 맞는 기분이어서^^;
게다가 요즘 너무 삭막해진 마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어서, 동감이 가더라구요. 물론 저도 아무 생각없이 야한 이야기나 들어볼까 하는 심정으로(캔디 캔디를 보시는 님의 동심과는 정 반대로 음란한 생각을 품고서) 봤다가 뜻하지 않은 전개에 다소 즐겁게 당황했답니다.^^
 

다코타 페닝이 말을 사랑하는 11살 아이로 나오는, 스포츠 영화다. 스포츠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주마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한다는 장르적 습성을 고스란히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3대에 걸친 가족이 '소냐도르'(드리머, 몽상가의 스페인어)라는 말을 통해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가족영화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감동은 언제나 승리로부터 비롯된다. 승리란 꼭 1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완성시키는 것. ('꿈은 이루어진다'가 월드컵에서 등장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스포츠를 움직이는 진짜 힘이다.

소냐도르는 명마의 피를 이어받은 암말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어느날 갑작스레 부상을 당한다. 다리가 부려져 안락사에 처해진 순간, 아버지 벤은 퇴직금 일부로 말을 데려온다. 그리고 종마와의 교배를 통해 새끼를 팔면 수익을 얻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실망에 빠진 가족들. 하지만 소냐도르의 뼈가 다시 붙고 경주에 나설 수 있다는 것에 환호한다. 그리고 참가하는 브리더스 컵...

경주마는 야생마가 아니다. 즉,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 관계가 어떤 식으로 맺어지는가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냐에 달려 있다. 영화 속에서 소냐도르는 가족의 구성원이다. 다코타 페닝이 분한 케일은 말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말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과 그 은혜를 갚으리라는 것을 아는 아이. 언어가 전혀 필요없다. 그들은 사랑을 안다.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자식의 꿈을 이루게 해주려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 꿈을 이루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 이들에게도 크나큰 행복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좌절하더라도 끝내지 않는것. 끝까지 한번 달려보는 것. 꼴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영화기에 가능하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것이 실화였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누구나 인생의 반전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그 반전을 맞이 할 수는 없다.

소냐도르라는 몽상가의 질주. 울타리가 없는 초원을 달리지 못한다고 해서 말이 꼭 슬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와 함께 달리는가, 무엇을 향해 달리는가가 질주하는 말을 아름답게 또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마치 새옹지마의 우화처럼  끊임없이 뒤바뀌는 상황들이 영화의 재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적 습성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결말은 쉽게 예상이 된다. 하지만 너무나 귀여운 다코타 페닝을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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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0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니 정말 이 영화를 보고 싶어집니다.
말에 대해선 잘은 모르지만 말이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한 동물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말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면 어떤 운명적 기운이 전이된 듯하여
기분이 묘해집니다. 전생이 꼭 슬픈 사연이 잔뜩 있는 인간같기도 하구요.
일본작가 테라야마 슈지의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를 보면
경주마에 미친 작가의 삶이 나옵니다. 인생은 그렇게 질주하는 것이고,
질주하는 것에 도박을 건다는 뭐 그런 뜻이지만요.
님 서재를 늦게 알게 된 것이 너무 후회되요!!
전 지금 누룽지를 먹으며 서재에서 잠시 머물고 있답니다.
말도 누룽지를 먹을까요?

하루살이 2006-03-0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선 다코타페닝이 아이스바를 너무 많이 줘서 빠르게 뛰지도 못할 만큼 살이 찐답니다.^^
음, 영화에서도 한 장면 소냐도르의 눈동자를 클로즈업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님께서는 말을 보면서 그렇군요. 저는 소의 눈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던데...
 

무술을 그리는 영화는 현재 굉장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듯 싶다. 리얼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할지라도, K -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종합 격투기의 실재감을 쫓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스포츠가 갖는 매력 그 자체를 뛰어넘기 위해, 각본을 써야만 하는 숙명이 주는 어려움일 터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실적 몸놀림 위에 양념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을 터인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다. 보다 더 새로운 것을 찾는 관객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 그리 쉽겠는가? 와호장룡의 경공술 이후 영웅, 연인 등에서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과연 지금보다 더 새로운 무술을 보여줄 영화가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축소해서 이연걸 개인으로만 한번 살펴보자.(이 영화의 주인공 곽원갑 역을 맡고 있으니까) 소림사라는 정통적인 방법에서 시작해 황비홍이라는 살짝 가미된 특수효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할리우드로 날아간 이연걸은 자신의 몸뚱아리보다는 기계적 효과에 보다 많이 의존하게 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제작 방식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눈에 뜨이는 부분은 시원한 발차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대련에서 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동작이긴 하지만, 영화 속에선 큰 동작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연걸의 변화에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영웅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보았다. 아직도 그에게는 무술의 힘이 넘쳐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 <무인 곽원갑>에선 황비홍 류의 자신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 부활 또는 복귀는 순전히 원화평이라는 무술 감독의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갖는 장점은 단순히 현란한 대련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광고 카피에선 마치 K-1을 100년 전으로 끌어다 놓은 것 같이 보여지지만, 오히려 곽원갑이라는 실제 인물이 어떻게 정무체조회를 창설하게 됐는가에 대한 개인적 드라마에 눈길이 간다. 정무체조회는 이소룡의 정무문을 떠올리면 된다 외세에 맞서 자주적 힘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면서도 폐쇄적이지 않고, 예를 갖추며, 상대에게 두려움 보다는 존경심으로 우러러받을 수 있는 사람, 집단을  지향했던 단체 말이다. (두려움과 존경심에 대한 이야기는 과잉해석해 보면 중국과 미국을 빗댄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강압적 폭력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중국은 결코 그런 제국적 모습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부풀린 상상임에 불과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변국가들로부터 존경받는 대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또한 자본의 힘으로 남을 깔보지 않고, 존중할 줄 아는 나라이기를 희망해본다.)

곽원갑은 천진이라는 고장에서 제일가는 무술인이 되기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싸운다. 대의명분같은 것은 없다. 오직 1인자만이 최종 목표다. 마지막 진대인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앗아간 혈투를 벌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한다. 충격을 받은 곽원갑은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선다. 그리고 쓰러져버린 한 깡촌 산간 마을. 그곳에서 그는 몇 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참된 武란 무엇인가를 깨우친다. 그 깨우침의 과정은 모내기 장면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이다. 시골마을의 첫 해, 모내기를 도우러 나선 곽원갑은 같이 모내기를 하던 청년들보다 속도가 뒤진 것을 보고 서두른다. 그들을 추월해 정신없이 모를 심는데, 어디선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하고 있던 청년들은 모두 허리를 펴고 그 바람을 만끽한다. 하지만 곽원갑은 어리둥절한 채 계속 모를 심을뿐이다. 하지만 다음날 그를 살려낸 맹인의 처녀가 그가 심었던 모를 다시 심는 것을 보게 된다. 모와 모 사이가 일정하지 않고 빽빽한 것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천천히 다시 심고 있었던 것이다. "모와 모가 너무 붙어있으면 싸우느라 서로 자라지 못해요. 모 사이에도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죠. 사람과 같이 " 다음해 모내기때는 어떤 모습일까 가히 짐작할 것이다. 바람이 불면 허리를 펴고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바람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깃든다.

다시 돌아온 천진, 그곳은 외세에 의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중국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벌어진 무술 대회. 곽원갑은 그 대회를 통해 진정한 무란 무엇인가를 설파한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고 물러섰던 아버지의 뜻도 이해한다. 무릇 진정한 무란 타인을 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다.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요, 진정한 승리는 자신의 성장이다. 4대 1의 싸움에서 마지막 상대인 일본인 무인과 차를 두고 벌이는 대화는 가슴이 찡하다. 마시는 차의 등급은 인간이 정한 것이지, 차가 스스로 정한 것은 없다. 더 낫고 낫지 않고간에 모두가 함께일 수 있다는 생각은, 1등급만을 고집하는 현대인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온다. <정무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소룡이 죽음을 알면서도 이단 옆차기를 감행하듯, 곽원갑 또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

무인이란 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그림자를 찾는 사람이란 것을 <곽원갑>은 잘 말해주고 있는것 같다. (이종 격투기가 끝나면 선수 모두가 포옹하고 위로하고 축하해주는 모습 속에서 언뜻 이런 무도의 자세가 스며 있음을 느낀다) 복수의 끝없는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 영화 <뮌헨>이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마치 '동화처럼' 이야기한다. (실제로야 그게 가능할지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준다) 영화 <무인 곽원갑>은 예기치 못한 드라마적 감동을 지니고 있어 그 재미가 솔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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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매듭일까?

스필버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절대 감추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이런 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뮌헨>이라는 이번 영화 역시, 그런 관점이 저변에 깔려있다. 이 영화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죽음을 당하고 배후는 아랍의 '검은 9월단'임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공적인 보복을 감행하지 못하지만(아니 실제로 감행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특수 공작원을 보낸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인물이 11명의 제거 대상을 찾아 하나하나씩 없애가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팀들이 맨 처음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다. 대화는 들리지 않고 장중한 음악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크게 웃는 그네들의 장면은 무엇인가 언발란스하게 느껴진다. 자신들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그리고 그 임무라는 것이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과연 정의인지 살인인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을 그 장면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갈등들은 영화 중간중간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아이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오직 타겟만을 죽여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테러집단과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점차 이들은 테러 대상과 별도로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킬러에 대한 복수를 행하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다. 자신들이 행한 임무가 또다른 폭력을 불러온다는 사실에 과연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회의하게 되고, 자기 자신이 살해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자신이 행한 살인방법을 떠올리며 침대, 전화기, 텔레비젼을 뜯어보고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스필버그가 나름대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 애쓴 흔적은 중간중간 삽입되는 뮌헨 올림픽 당시의 상황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인질들을 잔인하게 죽인 테러리스트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묘사된 장면은 격앙된 음악만큼이나 애절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짠하게 느껴진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에게 보다 많은 감정이입을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가족이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 또한 가족이다. 이들과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가족의 확장이다. 무력으로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던 두 집단은 결국 이것이 해결책을 찾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력은 보다 더 큰 무력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스필버그는 평화와 화해의 손을 잡지 않는 이스라엘 정부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요르단 장벽 앞에서 팔레스타인 남자들 옷을 다 벗기며 검색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떠올린다. 탁 트인 마을 앞에서, 앞에 여자가 있든, 아이들이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수모를 이들은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영화는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걸까? 그래서 영화는 따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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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2-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거기서도 가족이 튀어나오는 군요. 맘이 확 바뀝니다.
미국인들의 그 '가족'타령이 넘 질리는지라....

하루살이 2006-02-1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필버그에겐 가족은 떼어낼 수 없는 분신처럼 여겨집니다.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아니, 느와르라는 장르보다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라는 인물에게 반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쑤시개를 꼬아물고 쌍권총을 쏘아대는 그의 모습은 알지못할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예쁘장하게 생긴 장국영과, 외유내강의 모습을 지닌 적룡 등 주변 인물들과의 우정과 사랑, 이것을 사나이들의 의리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죽음보다도 더 강렬한 감성이라는 것이 사춘기 시절, 피끓는 청춘에게 매력적일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 느와르의 표현방법이 과장되어지고, 또한 그 감정의 선이 무수히 반복됨으로써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어둡고 차가운 블루라는 느낌이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그나마 조금은 자유롭다고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유혹의 정도가 약해지기도 했다. 오히려 느와르보다는 판타지가 어울리는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생계라는 현실에 부닥치며, 내 정신도 몸도 닳고 닳아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사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니, 한국이라는 사회가 집단공황을 불러일으키게 만듬으로써 자신에게 처박히도록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절에 느와르라는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청춘 시절의 그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줄까? 아니면 내면에 감추어진 피의 뜨거움을 불러올 것인가?

<달콤한 인생>은 그래서 내면으로의 침잠에 어울리는, 나르시스적 경향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헌이 창가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새도우 복싱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 이 <야수>라는 영화는 어떤가?

개인적 의리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나이들. 법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두 야수가 결국 사회적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의리를 넘어 정의로 향하는 순간, 이미 <야수>는 느와르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애시당초 느와르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순전히 이것은 나만의 착각이거나, 다른 곳에서 얼핏 들은 선입견일 것이다. <야수>는 결코 느와르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또한 아예 법과 제도라는 것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고, 어둠 속에서 정의를 행사하는 <더티 해리>류의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순박하다.

이 영화 <야수>가 특이한 점은, 형사와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제거되어야 할 보스와 배신을 행한 조직원 모두 가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선택의 상황에서 가족을 택한 이들은 악당이고, 가족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정의라는 이름하에 힘에 저항하다 가족들마저도 희생당한다. 그리고, 정의는 결코 법과 사회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맞서 싸워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90년대 초, 의리를 위해 싸웠던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들은, 21세기 한국에선 정의를 위해 원시시대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힘에 맞서기 위해선 오직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어야만 하는 야수는 빌딩 솦에 사는 애처로운 존재일 뿐이다. 세상은 결코 이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힘의 서열만이 살아있는 빌딩으로 둘러쌓인 원시시대의 밀림 속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위해 우리 모두가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만 할 것인가? <야수>는 그래서 아스팔트 위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곳은 정글이며, 또한 정글이 아니기에... 발톱을 잃어버린 성난 야수, 세상은 이들을 길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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