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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면 - 사랑하는 아들에게 ㅣ 피터 레이놀즈 시리즈 5
앨리슨 맥기 지음, 김경연 옮김, 피터 레이놀즈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한때 아이였던 나는 언제 어른이 되나 조바심을 내곤 했었다. 어른이 되면 근사한 일이 많이 생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재밌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들과 새로운 즐거움과 새로운 여행지...날마다 재밌는 일로 가득찰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어른으로써 내 마음대로 살아가도 된다는 자유가 주어질거란 기대에 어른이 되는 순간을 갈망했었다. 그때가 오면 날마다 새로우리라, 그때가 되면 날마다 행복하고 날마다 흥미로우리라...나를 그럴거라 기대했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현실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자유가 주어진다는 점은 맞았지만, 그리고 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 기대했던것만큼 좋은 것이라는 점만은 사실이었지만...그럼에도 난 별로 행복해지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날마다 배우는 날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은 날에도, 기분은 그저 그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 날에도 새로운 것을 본 날에도,그런 일상들들도 점점 익숙해지면서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다시 미래를 기약해야 했다. 미래 어느날엔가는 행복해질거야, 미래 어느날에는 흥미진진해질꺼야, 미래 어느날에는 비로서 평화를 찾을 거야. 쉴새없이 현재를 미래로 밀어 올리면서 난 덕분에 살게 됐다. 현재는 아니지만 미래는...이라는 단서로 현재의 불행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렇게 난 현재가, 순간순간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언제든지 날려 버리고 벗어던지면 잊고 싶은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내가 "지금만 아니라면..." 이란 심정으로 살고 있다는걸 아는 사람은 아마 나밖엔 없었을 것이다. 그 비참함을 자각할때마다 난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함정에서 벗어날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우리는 그 함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걸까? 그것이 바로 삶이고 인생인것일까? 난 절망했던 것 같다. 아니, 절망했었다.
그러다 우리집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그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난 처음으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아이와 있다 보니 순간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기때문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작은 내천에서 먹이를 찾는 왜가리가 한없이 멋지게 보인 것도,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잠이 드는 야생 오리를 발견하고 숨을 죽이게 된 것도, 그곳에 사는 물고기를 향해 과자를 던져 주다 그 과자를 빼앗아 먹겠다고 달려 나온 쥐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게 된 것도 아이가 가져다 준 변화였다. 세상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였고, 필요치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걸 알게 됐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보니,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늘 소박한 것이 최고라고 말을 하면서도 한번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아이과 함께 행복하다는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걸 알게 됐다. 멋진 자동차나 근사한 장난감이 아니라도 아이는 충분히 행복해했다. 작은 상자 하나, 흔해빠진 놀이터, 지나가는 도둑 고양이, 아침을 비추는 햇살과 비오는 날 아침의 소리, 비처럼 내리는 봄의 벚꽃 나무, 나뭇가지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참새, 주인과 산책을 나온 올망졸망한 강아지들...주변에 널린 모든 것들이 아이에겐 신기하고 소중한 것이었고, 그 사실은 나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드디어 나는 그렇게 고대하던 흥미로운 순간을 살고 있었다. 구호만의 삶이 아니라, 경구속의 박제된 삶이 아니라,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냥 그대로의 삶에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아이의 존재만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은 내겐 정말로 충격이었다. 한 인간의 위대함이 그렇게 클 것이라는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빨리 어른이 되길 바랐던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탄생을 맞이하면서 비로서 그가 그토록 바란 존재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이 동화책은 아이를 통해 작은 것의 소중함과 순간순간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 한 아버지의 독백이다. 그는 말한다. 아들아, 너를 보니...
너의 노란 컵이, 나를 깨우는 노랫 소리가, 비스듬히 비치는 아침 햇살이
처음 만난 잠자리가, 그리고 커다란 상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첨벙첨벙 뛰어놀 웅덩이가, 부었다 쏟았다 하는 모래 놀이가, 마루 위를 달리는 트럭이
벽에 표시한 연필선이....우주선 잠옷이, 우주 여행 이야기가, 두려움 없는 도전이, 서두르지 않는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아, 널 보면 알겠구나
지금의 이 순간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렇다.이 동화책은 아이들을 위한책이 아니다. 아들이 밝게 노는 모습과 함께 잔잔하게 내뱉어진 아버지의 독백이 비록 아름답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오진 않을테니 말이다. 아이들에겐 오히려 이 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보다 아이들 둔 부모님들을 위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를 보면서 날마다 감사를 하는 부모님들의 심정을 읽어주는 책이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순간의 중요성을 날마다 새록새록 알아가는 부모들을 위한 책, 그리서 아이들이 이해하건 말건간에 너무너무 사랑스런 책이었다. 손에서 쉽사리 내려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비록 아이들을 위해 나온 동화책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짧은 동화책속에서도 어른들이 공감하고 배울 것이 있으며 찬탄거리가 있다면 우리도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 어른들을 위한 책으로 추천한다. 한마디로 부모를 위한 책이라고 하겠다. 그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적혀진 책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