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오딧세이 - 한 끼에 담아낸 지속 가능성의 여정
김태윤.장민영.황종욱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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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인상깊은 것은 최현석 셰프가 한 "주방에서 셰프보다 더 높은 것이 재료다"라는 말이다. 제철의 좋은 재료가 음식의 완성도를 높여주기도 하고, 그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마저 셰프의 능력이기도 하다. 요리에 있어 그만큼 재료가 중요한데, '로컬 오딧세이'는 재료에 대한 깊은 탐구를 담고 있어 흥미롭다. 계절과 지역을 뛰어넘는 접근성과 새로운 농법, 실험실에서 만들어지는 배양육, 고기를 대체하는 채식 재료, 기후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환경이 우리의 식탁 앞에 다가오는 지금 그럼에도 근본이 되는 제철, 특산의 식재료가 우리 식탁과 사회, 삶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맛볼 수 있는 책이라 기대되었다. 

 재밌는 점 중 하나는 식재료를 소개하면서 이 식재료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며 소비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희망만 품은 내용처럼 보이지만 반세기가 지나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식재료 다양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솎아내 버려지던 재료를 새롭게 활용하고, 소비함으로써 생태계 유지에 더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노력이 엿보여 특별했다. 그 중 하나로 '다 자란 생선 먹기(371)'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 금어기를 정하거나 알을 밴 개체, 미성숙한 개체를 잡지 않도록 하여 자원을 보호하려는 노력에도 굳이 불법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홍게(93)를 소개하면서 어획금지 기간을 명시하고 있지만, '빵게'라는 표현을 처음 듣게 된 것도 불법 소비 문제 제기를 하는 기사 덕분이었다. 알을 밴 암컷 게를 뜻하는 빵게는 어족자원보호를 위해 엄격히 소비, 유통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를 별미로 여겨 알음으로 몰래 거래를 하거나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특별한 맛을 찾는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것은 단순 수산물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는 홍게와 함께 칠게(168)를 소개했는데, 최근 들리는 말로는 동남아에서 많이 잡히는 블루크랩(청색꽃게)이 수온 변화로 제주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잡힌다고 한다. 땅 위에서도 사과, 배 등 오랜 시간 지역명과 함께 붙어오는 익숙했던 특산물 지도가 변화하고 있는 요즘, 책에서도 제주 바다의 변화(220)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 것처럼 바다 생태계의 변화도 성큼 다가오고 있음이 체감된다.  
 게에 대한 이야기에 덧붙이자면 일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을 때 가장 재밌게 들었던 메뉴 소개 중에 남발게가 있다. 오늘은 특별히 게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게를 준비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게요리를 내어주었는데, 처음 들어보길래 뭐냐고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남이 발라준 게 아니겠냐며 답해와 웃었던 기억이 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게는 역시 남발게가 최고라고 농담같은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 뒤로 게만은 제철이나 로컬보다 남이 발라준 것을 일등으로 치게 되었다. 

인상깊은 다른 재료 중 하나는 제주에서 발굴한 식재료로 나온 메밀(222)이었다. 메밀과 제주, 사실 메밀이라 하면 강원도를 먼저 떠올리게 되어서 의아했는데, 찾아보니 우리나라의 메밀 최대 생산지역이 제주도로 되어 있었다. 강원도의 메밀 생산량은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 제주도에서 생산한 메밀을 강원도에서 가공하기도 한단다. 한번 지역 특산품으로 깊게 인식이 된 탓에 제주도에 가서 넓은 메밀밭을 여러번 구경하기도 했음에도 고정관념이 되어 생각지 못했던 사실인데, 여기엔 [메밀꽃 필 무렵]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고급으로 여겨지는 귀하고 좋은 재료가 많지만 괜히 파인다이닝 같은 식당에서 계절별로 메뉴에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마카세 같은 곳도 마찬가지다. 계절별로 초밥의 재료가 다르게 나온다. 이는 메뉴 구성에 변화를 주어 방문객들의 재방문을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재료를 때에 따라 구해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굳이 비싼 값을 내야하는 식당들이 아니더라도, 제철의 음식을 챙겨먹는다고 하면 여름의 빙수, 겨울의 붕어빵 같은 간식거리들도 때에 맞춰 먹었을 때 가장 맛이 좋지 않은가. 미식은 이처럼 가까운 곳에 있다. 

 '로컬 오딧세이'는 이 가까움을 생생한 현장감으로 바꾸어 전달하고 있는데 재료와 지역, 생산자에 대한 풍부한 소개가 매력적이다. 기장의 말미잘(44)에 대해 소개할 때는 익숙하지만 낯선 재료에 대한 당황과 구도의 자세가 재밌었고, 의외성으로 이것도 먹나 싶었던 것은 말미잘보다 오히려 송순(128)이었다. 솔잎이나 송홧가루는 알려져있지만 송순은 처음 들어보았다. 아말피 레몬(194)에 대한 소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다양성과 변화를 통해 탄소발자국이 줄어드는 긍정적인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우리의 식탁이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를 마주해보면, 사실 여전히 회의적이긴 하다. 지구의 지속가능성은 그보다 더 넓고 다양한 범위에서 우리의 예상보다 가파른 속도로 훼손되고 있고, 식탁의 변화는 그보다 더디고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버티게하는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로컬 오딧세이'를 소개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한 식탁에 앉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음식만이 아니라, 재료와 시대에  대한 인식과 연대가 함께 공유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더불어 '먹고 사는 일', 이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 예사로이 넘겼던 사소함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세상을 향해 직접적으로 실천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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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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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겠네,하는 생각을 의심의 여지없이 떠올리게 되는 소설집이다. 널리 알려진 작가의 이름도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섞인 기괴한 존재들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소개도 흥미롭다. 예전에 읽었던 만화 중에 이런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 있는데 그 시리즈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기대됐다. '뤼미에르 피플'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 만화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강돌고래(10)와 코스타리카 황금두꺼비(12) 같은 것들 사이에 은근슬쩍 박쥐 인간을 끼워넣는다. 그럼 책을 읽다말고 검색창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찾아보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살펴가며 천천히 책을 읽기 시작하는 동안 실소가 나온다. 당연히 박쥐 인간은 찾아보지 않았지만, 찾아봤자 배트맨이나 드라큘라 같은 것만 나오지 않을까, 이 자연스러운 침투력에 애꿎은 강돌고래와 코스타리카 황금두꺼비만 의심을 사는 것이 공교롭고 재밌다. 

 '[동시성의 과학, 싱크](300)'는 있지만 '무영검 파천황(302)' 게임은 없었다. 그러다 책 안에서 만난 불확실해하는 모든 것을 검색해보는 것처럼 누군가는 '레드망고(321)'를 검색해볼지도 모른다 떠올리니 섭섭해져서 이 요상한 확인 작업을 그만두었다. 기왕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는 김에 요아정이나 요거트월드로 돌아왔어도 모른척 했을텐데, 하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했었다고 환상이 된 현실 중 하나였다고 입맛을 다시며 추억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딨어 싶다가도 이런 일도 있겠지 싶은 이야기도 있다. 

 " 여자아이는 이제 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지 이해했다.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다음 단계, 다음 목표가 필요하다. 어디든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 큰 틀에서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에는 다음 단계라는 것이 없었다. 77"
 환상적이고 묘한 이야기들 사이에 빡과 쩜, 나이트클럽 웨이터와 룸살롱 아가씨의 이야기를 읽다 그럴수도 있구나,하고 세상의 한 면을 이해하게 되는 상황을 만난다. 이게 다 귓가를 울리는 모기소리 덕분이라니. 

 가장 읽기 괴로웠던 것은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이었다. 사실 비급 감성이 담긴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쥐여서일까, 일단 혐오감이 드는데 내용 자체도 엽기적이라 읽는동안 불유쾌함이 컸다. 하지만 이 단편들이 영상화된다면 아마 808호의 이야기를 보고 싶을 것 같은 자극적인 면이 있다. 처음 '뤼미에르 피플'을 봤을때 기대했던 스타일의 내용과 가장 비슷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최근에 봤던 책의 내용 중 기억 남는 것을 꼽는다면 이 내용을 소개할 것 같다.  

 내용이 독특한 단편이 있다면 형식마저 독특한 단편도 있다.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있었던 802호도 재밌었고, 잡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던 804호도 독특했지만, 805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으로 나뉜 두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된다. 처음에는 오기로 한쪽씩 통으로 읽었다가 한 이야기를 쭉 이어서 읽어야겠다 싶어져 결국은 한 편을 세번 읽어야 했는데 이런 시도를 하도록 만드는 점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책에는 뤼미에르라고 되어 있지만 신촌에 있는 르메이에르 빌딩이 연상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광화문의 르메이에르를 떠올린다. 다 다른곳이지만 이 생각들이 '뤼미에르 피플'을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가도록 만들어주는 요소이다. '뤼미에르 피플'은 그 자체가 재미와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좋지만 읽는 사람에게 '어쩌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면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심어준다는 점이 좋다.  

 개정판으로 다시 돌아온 장강명의 세계, 독특한 환상 소설의 세계로 비가 잦은 가을의 휴일을 시작해봐도 좋겠다. 
덧붙여 그믐의 김새섬 대표에 대한 기도를 함께 남긴다. 

*펫숍 오브 호러즈 / 아키노 마츠리 작 / 서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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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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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쓰는 몸으로 살기'는 독특한 의미로 다가와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글쓰기 안내서라는 핵심어를 달고 마주했을때 과연, 글쓰기만큼 그 사람이 확고히 드러나는, 바꾸기 어려운 습관같은 이 행위를 교정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궁금했다. 읽을 때는 그렇구나 싶다가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늘 하던 습관을 버려나가도록 만드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안에도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는 구태의연함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다. 
 처음엔 다른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졌는데 읽다보니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계기는 "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가요? 95" 하는 질문에서부터 였던 것 같다. 짧게 쓰기와 길게 쓰기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126), 고쳐쓰기(158)를 종종 생략했던 요즘 나중에 오탈자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쳐야했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쓰는 몸으로 살기'의 매력에 마침에 눈을 떴다. 덧붙여 책에서 소개한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235)은 정말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 함께 추천한다. 

 책을 읽다 그동안 몰랐던 것을 한가지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 '쓰기 싫다'에서 출발하는 쓰기(148)" 단락에서 시작했는데, 무심결에 '쓰기가 싫은 적도 있었나' 생각해보니 한번도 '쓰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뭔가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써야할 게 너무 많다'거나 '쓰려던 걸 까먹었다'는 상황은 있었을지 몰라도 쓰기 싫었던 적은 없었다. '쓰기'가 싫었던 유일한 상황은 빽빽이 과제를 받아서 통으로 책 내용을 손으로 전부 옮겨 적어야 했을 때 뿐이었다. 쓰는 행위 자체만을 지나치게 많이 해야했을때 였는데 요즘은 필사에도 관심이 있으니 그조차도 싫지 않아졌다.
 책까지 낸 저자가 왜 '쓰기 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내용을 살펴보니 자신이 쓴 글에 그만큼의 무게가 지워지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글에 가치가 매겨지는 것에 대한 책임감 등이 압박이 되었던 것 같다. 반면 먹은 것, 소소하게 경험한 사건, 갑자기 떠오른 생각 같은 것들을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동안 혹은 과제나 일을 하는 동안에도 밑준비를 하는 과정이 버거웠던 적은 있어도 쓰는 것이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에는 그런 무거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쓰기 싫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되었다는 의미에서도 좋았지만, 이 점이 글쓰기를 대할 때 내가 가진 가장 큰 이점이겠구나 싶어서 의미있었다. 

 글을 쓸 때 되도록이면 불분명한 표현을 쓰지 않도록 하고, 가급적 외래어를 섞어쓰지 않으려 하고, 짧게 쉬운, 그게 어렵다면 정돈된 문장을 쓰려고 한다. 대단한 사람도,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이를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은 그저 지나치게 어지럽거나 읽기 힘든 글을 쓰지 않도록 스스로 정한 선으로 여겼는데 '쓰는 몸으로 살기'를 읽으며 왜인지,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저 스스로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야 할 지점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 결국은 '쓰는 몸으로 살'고 싶어서 였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나와 나의 글쓰기를 빈번히 떠올리면서 부족함과 낯선면을 발견하며 읽었는데 그게 부끄럽기만한 것이 아니라 새롭고 재밌기도 했다. 책에서 알려주는 글쓰기에 대한 조언들은 쓰기의 기술적인 면이나 부담을 줄여주는 데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 더 나아가 나와 나의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내용을 파고들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몰랐던 자신을 마주치는 지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잘 쓰고 싶어서, 어떻게 써야할지 알고 싶어서 '쓰기'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이 책을 선택한 다른 독자들도 쓰기에 대한 도움을 얻는 것은 물론 자신의 글쓰기를 들여다보는 흥미로운 시간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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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하유지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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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컴버는 멀고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모든 존재가 사랑과 존중을 무한정 누리는 곳, 내가 꿈꾸는 곳. 나는 커컴버를 꿈꾸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도착하기도 전에 추방당했다. 107" 

 책을 읽다가 문득 거실 한쪽에서 조용히 자기 집에 들어가 대기중인 로봇청소기를 흘끔 거렸다. 쟤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익히고 가끔 발생하는 장애물들을 피해 이리저리 열심히 청소를 하는 것만 봐도 대견한데, 프로그래밍 된 몇가지 짧은 문장 외에 말을 한다면 어떨까. 집안일을 해주는 로봇이 나에게 말을 건네온다면, 기특하다고 여길 수 있을까. 사실 밥솥이 띠리링 울리며 밥을 한다고 말하는 소리도 가끔은 너무 말이 많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보다 더 수다스러운 사물의 수다를 참아줄 수 있을까. 처음엔 아미쿠의 말이 너무 많게 느껴졌다. 말을 하는 대신 조용한 연주곡이 나오도록 되어 있다면 좋을텐데, 미리내가 아미쿠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온 집안을 기름 범벅으로 만들어놓고 숨기고 있었던 비밀을 밝혀내는 집안일 로봇은 반품이나 교환을 유발하긴 할테다.

 학교에서 도로시의 소설을 쓰는 것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미리내는 자신이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정말 모든 것을 직접 썼냐는 질문이 그의 양심을 찌른 것이다. 인공지능의 첨삭 도움을 받은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우리의 창작 활동이 앞으로 어떤 영역으로 더 변화해나갈지 모르는 일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도 선뜻 미리내를 두둔해주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가 유치함에서 흥미로움으로 넘어가는 요소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인공지능과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창작을 생산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지점을 자연스럽게 내용에 녹여내 소설에서 현실로 생각을 확장해준다. 

 미리내는 주변 친구들에게 이름 대신 채소의 이름을 붙인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흐려서 구석에 밀어두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남까지 지워버리는 태도,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날서고 공격적인 모습은 미리내에게서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미리내가 가장 감정을 크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미쿠와 관련이 있을 때 였다. 아미쿠 외의 사람들과는 불평이나 비꼬는 말, 욕설, 단절을 담은 대화를 한다. 아미쿠에게 자신의 부끄러움과 분노를 대신해서 폭발 시켰을 때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미리내는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누구도 미리내를 들여다봐주지 않는데 오직 로봇만이 계속해서 그를 두드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같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미리내."(39,112)" 다른 누구도 해주지 않는 것을 기계만이 해주는 미리내의 세계를 떠올려보면 그의 가시가 왜 날카롭고 거센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오직 로봇만이 단절된 사람들의 외로운 마음에 끝까지 기회를 요청하고, 사람은 왜 서로가 단절되었는지도 모른채 로봇에게 기댈지도 모른다. 

 " 강미리내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투명 인간이어도 상관없지만, 작가 도로시만큼은 사람들에게 주목과 찬사를 받으면 좋겠다. 강미리내는 어둠 속 그림자처럼 희미해도 되고 아예 안 보여도 그만이다. 하지만 도로시만큼은 해처럼 환하고 별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한다. 20' 

 그러다 문득 미리내에게 아미쿠가 진짜 있는 것일까 의심도 들었다. 다가오는 파프리카를 끝내 밀어낸 미리내의 모습, 함께 쫄면을 넣은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진짜 사람인 친구가 결국 그렇게 멀어져가는데도 미리내는 아미쿠의 음성에 기댄다. 망가진듯 보이는 모듈이 정말 다시 작동하는 것이 맞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녀의 첫번째 독자를 지켜낸 미리내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진짜 자신은 밀어내고 작가 도로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어차피 마음에 들지도 않는 강미리내 따위는 저만치 밀쳐 두고, 존재 의미는 작가 도로시의 정체성에서 찾(51)"기 위해서, 어떤 세상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는 도로시의 권능으로 도로시를 위한 아미쿠가 있는 세상에 빛을 주기로 한 선택같이 느껴져 씁쓸함이 남았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분명 함께 꿈과 우정을 키워나가는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후에는 독서등 불이 미치지 않는 거실 구석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남았다. 거기에 로봇청소기가 있었다. 언젠가 그게 내 유일한 친구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차게 식었다. 

 다시 청소년도서를 읽은 만큼 밝고 따뜻한 것들로 눈을 돌린다. 당근맨이 보냈다는 무만한 당근 상자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인공지능 로봇이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도 여전히 제주도에서 당근은 나는구나,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상한 곳에서 안심이 되었다. 표지에 그려진 아미쿠의 관절이 너무나 구태의연해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를 다소 유치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으로 바라볼지도 모르는 예비 독자들에게, 이 안에서 음미할 아릿한 쇠맛에 대해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휴에도 소설 모드를 유지할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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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작은 기록 습관이 바꿔놓는 삶에 대하여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노경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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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소한 나의 일상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작은 감동을 선사하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숨어있던 나의 빛나는 가치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이 단호하고 분명한 문체를 어디서 본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읽은 [나는 누워서 생각하기로 했다]의 저자였다. 저자의 글쓰기에 대해 인정을 하고야 마는 것이, 전부터 제목 하나로 독자를 사로잡는 능력이 대단하다. 일단 이 제목들에 두번이나 홀려 책 앞에 앉게 된 독자가 여기 있다. 

 책은 '자기 역사'라는 키워드로 시작하는데,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요즘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기록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자기 역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면 더 잘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자신이 관심있고 재능을 살린 콘텐츠를 이용하면 됐지 그게 꼭 글일 필요는 없는데, SNS를 하거나 브이로그를 찍는 것도 자기 역사를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일테다. 다만 글이라는 틀을 가져왔을때 더 좋은점들이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글로 지은 마음의 집(23)'에서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초등학교 졸업 문집 주제로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나왔는데 90%가 돈과 집을 꼽았다는 것을 보자, 요즘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대부분 연예인이나 유튜버, 운동선수를 꼽는다는 통계가 생각났다. 가장 흔히 접하고 많은 인기와 수입으로 화려한 생활을 할 것 같은 분야의 사람들을 롤모델로 꼽은 것이다. 전처럼 대통령, 의사, 과학자 일색인 답변이 더 낫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생활과 사유가 필요해보였다. 그게 쓰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자세도 고쳐보기로 했다. 

 소개되는 글들마다 작가의 다양한 개성이 드러나는데 짧기까지 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 책을 읽다 '써야 한다'는 압박이 느껴지는 빈 공간을 보고 당황했었는데, 어느새 압박조차 잊고 술술 다음 장으로 읽어나가게 되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치게 길게 쓰지 말라는 말을 강조-읽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17), 간결함의 미학(125), 하물며 자기 이야기를(178)-하는데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저자의 연배를 고려했을때 고루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시선이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어 균형이 맞았다. " 부고는 적은 분량 안에 한 사람의 인생을 축약해 보여준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만 그래서 재미있다.(188)" 어떤 부분은 날카롭다 못해 차갑다. 오직 글에만 빠져있는 저자의 외골수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듯 하다. 쓰는 사람의 이런 시선을 책에서 소개된 요시카와 에이지의 글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그의 다섯살, 열한살 시절을 서술한 내용(180)들은 놀랍도록 성숙하고 자극적으로 전개된다. 

 쓰기를 위한 읽기에 대한 조언도 인상적이었다. " 잘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잘 쓰기 위해 읽는다는 것은 쓸 것을 생각하며 읽는다는 뜻이다. 보통은 그렇게 읽지 않는다. 61" 그동안 최대한 열심히 꾸준히 읽어나가려고 나름 노력해야왔는데 잠깐 멈춰서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할지, 독서에도 방향이 있어 독자 스스로 그 키를 잡아 방향을 찾아야 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처음엔 책에 있는 주제와 빈 칸이 압박이 되어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다. 책을 읽고 기록을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것을 직접 쓰는 행위에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천천히 책을 읽는 동안 만나게 된 짧은 '자기 역사'들을 보면서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되고, 처음 책의 빈 공간을 볼 때 느꼈던 부담이 점차 나도 해보고 싶다는 자극으로 달라졌다. 쓰기에 관심이 있고, 자신의 글을 쓰는 훈련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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