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책 -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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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의 책'은 책과 그 책 안의 정원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냈다. 어느 책에 대해 줄이고 줄여 건조하게 소개하다가도, 그 안에 정원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갑자기 참견하길 좋아하는 이웃처럼 돌변해 땅은 몇 평에 뭐를 어디에 심었고 비료는 뭘 주고 물은 며칠에 한번씩 주는지 캐내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여러분 이 작품을 아시나요? 이 작품은 이런 인물이 나오는 저런 내용인데, 그것보다는 거기에 나오는 아무개라는 인물네 집에 정원이 있습니다. 하고 갑자기 관찰자의 시선을 화면의 중앙에서 바깥으로 옮겨오거나 그 밖으로 유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읽다보면 정원에 관심이 많고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오타쿠-구나 싶어진다.
 책에서는 총 26가지의 정원에 대해 소개하는데, 비슷한 형식이 짧게 반복되다보니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는 책에 대해서는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98)] 읽다가 갑자기 눈 앞이 아득해지면서 머리속이 공해지는 체험을 할 때도 있었다. 지금도 저 제목을 다시 쓰느라 세번은 확인했는데, 정말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바르와 페퀴셰(33)], [레겐트루데(211)] 같은 작품들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런 작품들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지고 관심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힙.폴'은... 

 괴테에서 톨킨으로 이어지는 문학과 정원의 이야기라는 소개에 처음엔 접하게 되는 작품들이 너무 심각하거나 뒷배경이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염려했었다.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부바르와 페퀴셰-19세기 리틀 포레스트] 를 만나고 나니 부담감이 줄어들고 웃음이 나왔다. 읽으면서 귀농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중장년층의 '자연인'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떠오르고, 얼마 전 읽었던 '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황승희'라는 책도 떠올랐다. 전원생활이 참 좋아보이는데 사실 그 모든 좋아보이는 모습에는 비용과 배움, 노동력이 든다. 
환상 위에 엉터리로 심어놓은 그들의 정원은 매번 엉망으로 망쳐지고 만다. "모든 것에 실패하고 인생에 대해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 이들이 다시 필경을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39)"나는데, 이들의 도전을 웃으며 지켜보다 문득 사람은 왜 낯선 환경에 도전하는 것으로 성취를 이루려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힘과 명성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처럼, 성공과 이상향은 외부 세계로 향한다. 마치 '길가메시가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신들의 영역인 삼나무 산으로 모험을 떠나듯이(200)' 세상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라는 조언을 해주는(혹은 종용을 하는) 것만 같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성취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도시/귀농 생활에 시달린 이들은 다시 자신이 떠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되기와 현실에서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타낸다. 더불어 이 '회귀'는 모든 '떠남'이 성공/주인공을 만드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무를 심는 사람-도토리 100개를 매일 심는 마음(204)]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한 성실함으로 이야기와 삶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도 있다. 
 또한 '회귀'는 도시와 전원 둘 중 어느 한 곳에서의 삶이 절대적으로 더 낫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져보지 못한 장점이 있는 새로운 환경보다 안정과 만족을 주는 것은 익숙함이 큰 것일까. 정서와 성향과 같은 내면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특히 어린시절 겪어왔던 환경과 체험이 그 사람의 토대가 되어 이를 변화시키려면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적은 품을 들여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떠남'의 한 갈래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재밌게 살펴 본 정원 중 하나는 [캔디 캔디-스위트 캔디, 근대의 향기(112)]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하는 만화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자에게 큰 감탄을 했는데 그저 북실한 머리를 한 소녀가 괴롭힘 당하면서 울다가 안운다고 노래하는 인상만 남아있었던 '캔디 캔디'의 전반부 복잡다단한 줄거리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설명해놓은 덕분이다. 덕분에 이 만화의 배경과 내용을 새로 알게 되었다. '울지 않는' 새로운 여성상의 제시라는 의미와 함께 끝부분에 살짝 언급되는 또다른 강한 여성상 오스칼 덕분에 뒤에 나오는 [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왕의 산책을 따라가기(170)]도 관심있게 읽었다.  
 아쉽게도 [베르사유의 장미]와 오스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 안내서가 저자가 아는 한에서는 "조원가나 정원을 방문한 이의 기록이 아니라 정원의 주인인 왕이 작성한 정원 안내서로는 유일무이하다(173)"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만 왕의 흥미로 만들어진 안내서란 특수성은 있어도, 보편성과 활용성의 측면에서는 그리 세심한 배려심이 없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유용하지 않다는 점도 재밌다. 
앞선 두 작품은 익숙함을 바탕으로 관심이 갔다면, [레겐트루데-일어나세요, 비 공주님(211)]은 낯선 내용이어서 궁금했다. 나름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접해보았던 것 같은데 '비 공주'라는 동화는 처음 보았다. 종종 절판 도서를 구하거나 헌책방을 다녀와 어린시절 보았던 책들에 대한 향수가 어린 글들을 만난 적 있는데, '비 공주'의 이야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책이 넘치게 쌓인 오래된 헌책방을 지나게 되면 한번씩 둘러보게 될 것 같다. 

 책에서 "정원은 자아의 확장이요, 내면의 반영(42)"이라는 말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식물과 관련된 책들을 반기며 살펴보고 있지만 사실 내 집에는 살아있는 식물이 하나도 없다. 식물을 돌보는데에 전혀 재주가 없어 아까운 생명을 없애느니 아예 들이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가지지 못한 탓에 더욱 식물과 관련된 책들을 반기게 된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스스로의 정원을 돌보기 포기한 사람의 자아와 내면은 게으르고 메마른 것 이상의 황폐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만든 문장이었다. 하지만 정말 더는 살아있는 식물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이렇게 식물을 담은 책을 하나씩 책장에 올려두고 나만의 정원으로 삼는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정원을,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는 책을 꿈꾸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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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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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스토리카는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것, 또는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학의 필수 요건이며 글이 있기에 과학은 이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 글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지금, 여기에만 묶여 있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다. 8" 

 책은 총 5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 고대 세상의 기록은 1200년경까지의 기록물들에 대한 내용, 2장 출판의 르네상스는 책 제작 방식에 인쇄술이 도입된 후 나타난 변화들에 관한 내용, 3장 근대의 고전은 과학책이 대중으로 독자층을 넓혀나간 후의 변화, 4장 고전을 벗어난 과학책은 과학이 전문 분야로 자리잡으며 나타난 변화, 5장 다음 세대는 1980년 경 부터 대중 교육에서 흥미와 정보 전달로 달라지기 시작한 과학책의 경향을 담고 있다. 궁금한 장부터 찾아 읽어봐도 좋겠다. 
 최근 읽은 책에서는 우리가 글을 씀으로 기억을 하려는 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봤다. 적어두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정보를 머리속에 저장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소 엉뚱한 주장이었는데, 지금 과학의 발전과 글에 대한 내용을 보니 글의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는 특성에 크게 공감했다. 
뒤로 이어지는 인쇄술 이야기에서 목판 인쇄술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 868년]을 꼽고 중국 중심으로 흘러가는 내용은 아쉽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현존 최고의 인쇄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04~751년 추정]인데 우리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니 아쉽다. 

 첫번째 장을 읽으며 "로마인들에 관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과학 발전에는 거의 기여한 게 없다는 것(14)"이나 알하킴이 나일강 물줄기를 바꾸겠단 약속을 했다 못 지키게 되자 죽을 때까지 미친 척했다는 일화(78), 피보나치수열의 피보나치가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었다는(84), 그러나 영원히 피보나치로 불리며 고통받는 피보나치의 이야기처럼 소소하게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두번째 장으로 들어서면 "과학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늘 인기가 좋다(96)"는 시작처럼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등장 만으로도 내용 자체가 그냥 흥미롭고 재밌다. 
 마찬가지로 갈릴레오가 등장했을 때도 관심을 가지고 읽었는데 "피사의 사탑의 낙하 실험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146)"고 보고 있는 내용은 의외였고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같은 장에서 소개되는 다윈의 [식물원]은 삽화도 아름답고 진화론을 떠올렸던 데에 비하면 신선한 접근이 되어주어 반가웠다. 

 세번째 장에서 근대로 들어오며 돌턴이 등장하는데, 얼마 전 탄소의 원소 기호를 물어오는 일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수헬리베붕탄질산을 내뱉고는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나 반가웠다. 과학 저술의 범위를 천문학, 물리, 화학에만 두지 않고 생물학, 해부학 저서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 다양한 삽화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전에는 다윈의 [식물원]을 소개했다면 3장에서는 [종의 기원]을 다루기 때문에 더욱 익숙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목해야 할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연구에 대해 간략한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내용이 너무 깊거나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다. "379쪽에 이르러서야 "지금까지 정의한 대로 덧셈하면, 이 명제에 따라 1 더하기 1은 2가 된다." 233 [수학의 원리]"는 내용이 나올 염려는 없는 것이다. 

 3장 끝부분에 들어서서야 과학에서의 여성에 대해 나오기 시작하는데, 4장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마리 퀴리로 내용을 시작한다. 더불어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을 만나볼 수 있다. DDT 사용 제한 조치 때문에 모기 박멸의 기회를 놓쳤다는 책의 내용이 사실일지 궁금해졌다.
 1976년 첫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소개되는데, 얼마 전 [불멸의 유전자]를 읽었기 때문에 특히 더 반가운 장이었다. 불멸의 유전자가 자연철학자들에게 받는 비난에 반박하는 "과학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더이상 감탄하지 않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더 깊이 통찰해 더 큰 감탄을 일으킨다. 288"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의 장들이 과학이 철학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자신의 영역으로 넓혀지고 확고해졌는지를 살펴봤다면, 4장은 다시 철학적 사고로 돌아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확실히 현대로 오면서 유명한 책들의 제목이 익숙해지고, 어떤 책들은 전체나 일부를 직접 읽어본 것들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최신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330)"이는 독자밖에 될 수 없지만 그 조차도 접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 혹시 여러분은 제 설명을 듣고 나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저는 왜 여기서 여러분을 귀찮게 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제가 설명할 내용을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왜 거기에 앉아 계시죠?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하면 안 된다고 여러분을 설득하는 게 제 일이기 때문입니다. 후략... 271" 

 책을 읽다가 문득 지치거나 좌절하게 될 때 경쾌한 어조로 힘을 북돋아주는 문장이었다. 리처드 파인먼의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의 서문에 있는 내용이다.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한 부분을 알고 흥미와 즐거움을 느꼈다면 괜찮은 독서였던 것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의 발달을 수를 셈하려는 시도부터 보고 있는 시작이 흥미로웠다. 더불어 '기록'이 과학 발전과 정리에 중요한 축을 담당하기 때문에 문자의 발달과정부터 첫 내용이 시작되는 점도 재밌다. 아주 넓은 범위로 시작하는 인류의 발전과정을 이야기로 들려주듯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첨부된 사진, 그림 자료들도 많아서 보는 동안 따로 찾아볼 필요없이 언급된 자료에 대해 더 이해하기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료들의 색감이 더해지고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선명해지고 가독성이 좋아지는 변화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에른스트 헤켈의 [자연의 예술적 형상] 삽화들(225-227)을 보다보면 한 가지만 잘해서는 세계사에 이름을 올릴 수 없겠구나 싶어진다. 다만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꽃등에 머리를 확대해서 그려놓은 섬세한 그림(154)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핵심적인 이론, 인물, 저서 등을 키워드로 삼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주제와 크고 두꺼운 책의 무게감에 비해서는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다. 생각보다 익숙한 내용, 아는 내용이 많다고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책을 썼다면, 독자인 우리들은 그 부름에 마땅히 응하도록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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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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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면허'의 도입부를 읽으며 "전 세계 이동이 사실상 그치다시피 한 순간(14)" 지난 코로나 팬데믹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기간 동안 다시 한 번 코로나에 걸려 고생했었기 때문에 전세계를 멈추게 만든 여행의 규제는 둘째치고 코로나의 사악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기도 했다. 

 여권이 가진 유용성에 초점을 맞춘 내용일거라 생각했는데 그 유용성의 그늘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만나게 되면서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이 불안감은 영화 [터미널]의 소개(44)가 등장했을때 극대화된다. 빅토르 나보르스키는 신분이자 보호가 되어 줄 여권이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어진 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의 공항에서 머무르게 된다. 

 갑자기 소속과 증명이 없어져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보다 더 강한 힘과 의미를 가진 여권/증명서/물건을 강조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보다도 더 비싼 값어치를 지닌 물건, 미라에게도 "유효 여권이 제공하는 보호가 필요(61)"하다는 주장이 나온 람세스 2세의 미라 여권 사건과 대비된다. 

 앞서 입국심사대에서 묘한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책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증명이 부정되고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난데없는 이 불안이 생각보다 보편적인가 싶었다. "[파르마 수도원]의 파브리스가 오스트리아 국경 검문소를 질레티의 여권을 이용해 빠져나가려고 할 때 느끼는 불안감은 고전에 해당하는 이후의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묘사된 '여권 불안'의 전조에 해당한다. 136" 

 더불어 최근 전시를 하고 있는 마르크 샤갈의 이야기(222,250)도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비록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의 신분으로 압박의 피해 국경을 넘어야 했던 샤갈 개인에게는 고난과 불운의 시간들이었겠지만, 작품세계에 대해 이해를 더해주는 이 이야기를 미리 읽고 전시를 다녀왔다면 더욱 깊이있게 관람할 수 있었을 것 같다. 

 " 어느 러시아인 망명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단지 신체와 영혼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권도 필요하며, 그게 없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겁니다." 시민권을 포기하고 체류하는 국민국가의 환대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자, 츠바이크는 "인간은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며, 만사가 공무상의 은혜에 의한 호의 말고 자신이 권리는 전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절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238" 

 책에서 현 미국의 이민자 정책 변화로 인한 상황을 떠올리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었다. 이민자 단속 반대 시위로 트럼프 정권은 60년만에 진압을 위한 군대까지 투입하여 전쟁이나 다름 없는 진압을 이어나갔다. 출생 시민권제를 폐지하고 이미 취득한 시민권이나 영주권도 박탈할 수 있다는 상황에서 츠바이크가 느꼈을 무력함과 불합리를 현재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 인종 차별이 자행되던 시대의 "여권 제도의 역사적 아이러니 (실제로 여권이 필요한 주변인과 추방자에게는 발급이 거절되었던 반면, 여권 없이도 다닐 수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특권층에게는 불편과 짜증만 야기했으므로) 160" 는 우경화 된 국제 정세와 이를 앞세워 미국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트럼프 정권에서 반복되고 있다. 

 또, 여권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었는데, "헤밍웨이의 '아내 동반' 여권(201)이나 조이스 가족의 여권 사진(173)"을 통해 여성은 여권에 남성의 세부 내용으로 언급/첨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남성/가장의 여권 없이 여성/아내 심지어 사진에 함께 찍힌 아이들은 이동할 수 없었다. 후에 여성 개인의 서류를 소지할 수 있게 되면서 여권은 새로운 '자율성(206)'의 기념품이 되었다. 

 언젠가 세계 각국의 여권 파워를 비교하며 우리나라 여권이 가진 가치가 상당히 높다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에 퍼진 적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순위를 보며 자랑스러워하고 우리나라 여권에 적혀 있는 문구,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소지인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를 보며 감동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해나 아렌트는 "출생국과 연계가 끊어지는 것이야말로 인권에 엄청난 위기라고 주장(225)"했는데, 아마 우리가 여권 파워나 문구에 긍정적 감정을 느낀 이유도 바로 국가로부터 공인된 외부로부터의 보호와 보장을 느낄 수 있는 증명서임을 실감했기 때문이겠다. 여권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시대에 따른 사회의 변화와 별 생각 없이 10년마다 갱신하곤 하는 여권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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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교양 100그램 7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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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도 만난 적 있는데, 창비에서 나오는 이 교양100 문고들은 읽을수록 마음에 든다. 가벼운 분량과 실제적으로도 가벼운 무게이고, 어떤 내용이 이 시기에 알맞은 주제의 교양이 될 것인지도 잘 짚어냈다. 게다가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어 독자의 부담을 덜어준다. 특히 이번에 만난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를 아주 유용하게 잘 읽어 더욱 기꺼운 마음에 책의 좋은점을 우수수 쏟아내며 감상을 시작한다. 자꾸만 여기저기 전쟁난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게 왜 이런가, 불안하고 궁금한데 뉴스를 봐도 잘 모르겠고 인터넷에 검색하자니 제대로 된 답을 얻기 어려울 것 같다면 이 책을 가볍게(물리) 손에 들어보자. 

 " 지금까지 미국에 이익을 줬던 국제 협력체제 혹은 세계화 구조가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제 자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있습니다. 미국이 여태 내세웠던 수많은 가치들이 거의 다 뒤집히고 있습니다. 그동안 최소한 겉으로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 환경 드의 가치를 내세우며 세계화 시대의 패권을 유지했는데 이제 그 시대가 저물어버린 겁니다. 이런 시대 변화의 엔진인 동시에 결과물이 트럼프이고, 트럼피즘입니다. 34"
 전세계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우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화임을 말해주고 있어 선뜩하면서도 수긍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변화 흐름 속에서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들의 요구가 미국의 어느 기관에 고발하면 해결이 될 것이라 여기거나, 성조기를 태극기와 함께 흔들며 트럼피즘* 찬동의사를 보인다. 또 이들의 대부분은 친일 성향도 가지고 있다. 책에도 이런 행태를 짚어내는데 " 보통 민족주의는 외세의존적이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우 기형적입니다. 친미, 친일의 식민주의가 그대로 살아남아 있거든요.(75)" 우리나라의 보수는 왜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들며 일본의 손을 잡으려 하는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에 대해서도 후에 교양100에서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 

 "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울분과 불만, 불안을 덮어씌우고 적대시하면 권력을 빠르게 잡을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내거나 좋은 대안을 논의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너무 오래 걸리고 밖으로 표도 잘 안 나니까요. 따라서 이 불안의 과도기에서 사적 권력을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선동 그리고 선동할 수 있는 적을 만드는 것이고, 그 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48"
이 부분을 읽으며 지난 대선토론의 문제적이고 참혹한 순간을 떠올렸다. 후보 이전에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자질부터 검증을 받아야 했던 사람과 문제의식 없이 이를 진행시킨 방송사 모든 노동자의 윤리의식도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워졌는가 고민하게 만든다. 분열과 혐오의 틀로 진영을 나누고 선동하는 것을 17대 정부부터 어떻게 이용해왔고 또 어떤 결과물로 우리 사회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책은 국제사회 변화 흐름을 우리나라의 지난 대선 이전까지의 혼란스러운 탄핵 정국과 함께 짚어 쉽게 접근해준다. 이후 새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이 전쟁에 직접적 개입을 하는 등 굵직한 사건이 들어선 탓에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더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고 끝맺어진 것이 아쉽다. 덕분에 쉽고 재밌게 읽으며 배웠으니 다음 교양도 더 달라는 뜻. 지난 겨울을 지나며 세상이 왜 이런가 관심과 이해를 더하고 싶은데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하다면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를 추천한다. 이 외에도 교양100에는 추천할만한 책들이 더 있으니, 예를들면 인간신경안정제님의 책,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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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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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책이 눈에 띄면 읽어봐야겠단 욕심이 생긴다.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강렬한 표지가 멋있어서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거대한 책장 안으로 들어서는 인간의 모습이 보는 이를 끌어들이는 표지는 어쩐지 압도된 분위기가 남일 같지 않게 보이며 두꺼운 철학책 앞에 겁먹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등산일줄 알고 마음의 부담을 안고 시작했는데 걷다보니 둘레길 산책로였다. 낯설고 어려운 이름과 용어들을 살피고 이 산은 악산이로구나 했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었달까.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네가지 큰 주제를 통해 동서양 철학의 고전들과 21세기 사상가들의 저서 76권을 소개한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담아냈다. 일단 책장을 넘겨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능숙한 인도자인 저자가 지혜와 사유의 길을 따라 독자를 철학의 숲으로 인도한다. 

책을 읽으며 몇몇 인상 깊었던 내용을 꼽아보면 2장 우주는 생각하는 거대한 뇌일까에서 만난 데이비드 무어의 후성유전학(161)은 얼마 전 읽은 리처드 도킨슨의 [불멸의 유전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불멸의 유전자]에서 뻐꾸기의 탁란을 통해 생물이 경험하는 환경이 대를 이어 반영되면서 알의 색과 무늬가 각기 다른 변화를 갖게된 사례를 전한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에서도 "부모의 경험이 '유전적인 방식'으로(164)" 대물림되는, 경험과 환경에 따른 영향을 주장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3장 영혼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에는 '연금술(282)'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만화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뉴먼의 저서보다 파라켈수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언급하는 인공 인간 바실리스크와 호문쿨루스의 배경(283~)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만화도 배워야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니. 어쨌든 이런 점들 때문에 만화도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대학시절 모더니즘과 미학을 주제로 레포트를 작성한 적 있는데, 당시 문인, 예술가들의 활동이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시대를 관통하기엔 빈약하고 핵심이 없는 시각이라는 평을 받았었는데 1장 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 분야를 다룬 철학서 '아이스테시스(83)'를 다루면서 다시 떠올랐다. 모더니티, 근대성이 함께 언급되면서 개화기에 느꼈을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평등과 자주를 내세운 식민지 시대의 감각이 "미학에 깃든 정치성(87)"을 드러냈음을 그때 말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이 노력에 A+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로나 마이너스 정도는 받았을텐데. 

" "통치자보다 상위에 있는 법은 인민의 안전이다"라고 언명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선익을 보호하는 데 통치자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런 노력을 다하지 못한 통치자는 인민에게 버림받을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327" 
4장 영성과 개벽의 정치를 찾아서 부분은 우리나라의 지난 정국과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를 생각하며 읽게 되는 내용이었다. 앞서 인용한 홉스의 <법의 기초> 내용을 읽다보면 결국 탄핵으로 임기를 마감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두번이나 실천해낸 사람들과 두번이나 탄핵되는 후보를 뽑은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니. 

복잡한 국내 상황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자국 내 시위대 주방위군 투입 진압이나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 상황, 미중 무역 갈등 등의 소식을 통해 "전쟁은 합리적 인간의 계산적 정치 행위가 아니라 모방적 인간의 가속적 경쟁 행위다. 짝패 관계의 경쟁과 모방의 동역학은 둘의 대결이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된다. (363)"는 전쟁론을 인상깊게 보았다. 더불어 지라르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부정 당하고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오늘 날, 오히려 그 이름으로 인해 치러진 타인의 희생이 얼마나 길고 무거운지 또한 오직 소수와 일부의 이익을 위해 지금까지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저자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생각의 요새'였다. 23년 '생각의 요새' 출간 때도 읽어보겠다고 신나게 달려들었던 무모한 추억이 있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교양인과 저자 고명섭이 이끄는 이 철학의 숲 앞에서 홀려 책을 손에 들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다만 영원회귀적 행동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복 사이에서 아주 조금의 차이가 쌓이는 유의미한 경험으로 남길바라며 읽었다. 조금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대학교 인문 철학 교양 수업에 정말 넓고, 사람에 따라서는 깊게도 쓸 수 있을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 요즘의 사회현상이나 국제정세와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으니 이 책 한 권을 여름방학 동안 읽어둔다면 교양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번쯤-가능하면 여러번- 읽어본다면 분명 책의 가치를 실감할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면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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