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TURN 6
정이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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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책의 표지를 보고 한동안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이 어떤 내용일까 의아했다. 절반은 사람의 얼굴을 절반은 나무의 형태를 한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그림은, 사람이 나무가 되어가는건지 나무가 사람이 되어가는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판타지같은 얘기처럼 보였다. 환경 오염에 대한 미래 세계의 얘기일까, 신화나 전설같은 판타지일까. 
" 감정이 금지된 겨울의 학교를 녹이는 돌연변이 소녀들의 봄빛 연대와 여름빛 사랑 "
책 뒷편에 적힌 문구를 보며 가을이 섭섭하겠단 생각을 하다가 가을의 결실과 성취는 독자에게 남겨진 몫이라 생각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얻을 수 있을지 시도해보자.  

 온통 옅은 보랏빛으로 가득한 책을 읽고선 라일락의 꽃말을 찾아보았다. 순결과 순수, 첫사랑, 우정. 이브와 같은 연보랏빛의 라일락에는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꽃말이 있었다. 그 모든 의미가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안에 담겨 있었다.
" 캐모마일, 산딸나무, 에델바이스 우리의 사랑은 역경을 극복한다. 아마릴리스, 목련, 시계초, 산사나무 우리의 존엄에 자부심을 가져라. 난초, 동백, 물망초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달리아, 오렌지 꽃, 글라디올러스, 라일락 불멸하는 사랑으로. 154"
왜 다른 수많은 꽃과 나무 중에서도 라일락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라일락 향을 맡아본 사람은 분명 그 향에 매료되어 왜 라일락이어야 했는지 납득하게 될 것 같았다. 

 기후 위기가 찾아온 미래의 지구. 각지에서 절망과 불만이 쏟아져나오고 인간의 DNA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생체코드 기술을 활용해 열성인간을 우성인간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독재자와 그 측근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 여자아이들의 사랑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 불안정한 존재들을 취약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랑이에요. 세상이 지금처럼 어지러운 이유죠. 낭만이나 동성애 따위를 좇는 쓸모없는 행위에 빠져드는 것도 대부분 여자애들이잖아요. 아름답기만 하면 금방 취해버리는 저 나약하고 가냘픈 영혼들을 통제해야 합니다. 14"
 독재자는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의 화살을 돌리는 방법을 알았고 기후 위기의 현상을 우성과 열성 인간의 선별과정으로 포장했다. 세상을 우성과 열성으로 나누어 차별해야 마땅함을 내세우는 주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조했고, 계엄령을 선포해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상 필드 통제 구역에 수감했다. '잿빛라일락법'이 선포되고, 사랑을 말하는 소녀들을 열성 인간으로 분류해 끝없는 겨울이 계속되는 가상 필드에 수감시키는 소녀원이 생겨났다.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은 그 곳에서 일어난 저항에 대한 이야기다. 

 독재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 그리고 계엄령.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소녀들의 연대와 사랑, 책을 읽으며 지난 24년 12월을 떠올렸다.  
 " 식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독재자가 경호를 받으며 나타났다. 나는 드디어...... 그의 얼굴을 목격했다. 삭막한 철제 의자에 앉은 아이들을 뒤로한 그가 연단에 올랐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었다. 말투도 아둔했고 언론에서 칭송하는 카리스마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잔인한 힘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혹자들이 의탁한 욕심이었다. 그가 리수와 피로 맺어져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염된 강물처럼 탁했고, 제 탐욕을 채우는 행위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무딘 인상이었다. 242"
 12.3사태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도 수긍하게 될 정도로 비슷했다. 말도 안되는 주장을 앞세워 난데없는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부터 탄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금껏 뻔뻔한 얼굴로 죄의식도 없이 활보하고 다니는 인물과 계속해서 그를 옹호하는 아둔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행태까지 같았다. 그리고 계속되던 추운 겨울날에 갇혀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타오르던 연대와 사랑, 새로운 계절과 시작을 맞이하던 지난 봄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항을 책과 함께 되새길 수 있었다. 

 " "언젠가 네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네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작은 존재인지 알게 될 거야. 사랑하는 이의 고통 하나 덜어줄 수 없는 게 인간이야. 네가 아기일 때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었어. 그 작은 몸이 아프다고 엉엉 우는데, 난 그 고통의 반도 가져올 수가 없었지. 그 자리의 한계를 자각하는 게 사랑이야."
  "그럼 사랑은 굉장히 쓸쓸하고 초라한 것 아닌가요?" 104"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은 사랑을 마냥 좋고 행복하기만 한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랑을 하며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들 중 씁쓸하고 외면하고 싶은 짙은 감정들도 함께 보여준다. 은주에 대한 이브의 마음은 어떤 빛깔을 가질까, 리수와 은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런 감정도 사랑이 맞을까, 사랑은 어떤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가슴속에 사랑을 품고 온 마음으로 세상의 다채로움을 받아들이는 소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사랑은 성실함이자 신뢰라는 말을 곱씹었다. 사랑이 불멸하는 건 매일의 자리에서 연속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얼어붙지 않았다. 매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하여 계속 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리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브의 얼굴을 빚었다. 155"

 겨울만이 계속되는 고립된 학교에서 펼쳐지는 소녀들의 저항은 어떻게 피어날까. 처음 다소 낯설었던 설정에 익숙해지고 나니 안에 숨겨진 다양한 코드들이 하나둘 흥미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은주가 남긴 플로리오그라피 코드, 아이들의 비밀 게시판인 낙원과 가드너, 저항의 상징인 이브의 존재, 은수를 적대시하면서도 주시하는 리수의 비밀, 이브를 향한 은수의 동경과 은수가 가진 비밀의 정체가 한데 얽혀 꽃이 가득한 새로운 세계 안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을 읽는 동안 지나가버린 짧은 봄을 떠올렸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겨울이 지날 무렵 제 순서를 기다리며 차례대로 피어나던 꽃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피었다. 약간은 느지막히 진항 향기를 담아 꽃망울을 터뜨리던 라일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을 읽는동안은 코끝에 다시 그 향이 맡아지는 듯 했다. 언제나 짧아서 아쉬워했던 라일락이 피는 계절의 한 가운데로 초대하는 소설,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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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동해 - 동해 예찬론자의 동해에 사는 기쁨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2
채지형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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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허는 있으나 운전은 하지 못하면서 이상하게도 국도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이게 만든다. 마음속의 인상으로 고속도로는 연휴 때면 수많은 차들로 막히는 하지만 번듯한 휴게소가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길이고, 국도는 어느 길이고 들어서면 한적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낡고 오래된 휴게소마저 무대같은 길처럼 느껴진다. 물론 운전자에겐 안 막히는 길이 가장 가슴 설레는 길이겠지만. 그래서 작가가 동해를 처음 찾을 때 20분은 더 걸려도 국도를, 이름부터 멋진 38번 국도를 선택했다는 부분에서 반가웠다. 우리 뭔가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단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선곡을 만났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손에 꼽게 좋아하는데, 삽입곡인 calling you 이야기에 반갑다 못해 설레었다. 
 
 " 오뚜기칼국수도 할머니가 운영하신다. 도와주는 분이 있지만, 할머니가 진두지휘하며 칼국수를 낸다. 한 그릇 비우고, 두 손으로 돈을 드리면 "고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고 덕담을 건네신다. 같은 말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들으면 결이 다르다. 정겹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두 식당에 사람들이 줄 서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느낌으로나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65" 

 '언제라도 동해'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먹는 이야기가 풍부하다는 이유도 있다. 사소한 한 마디이지만 덕담 한 마디를 건네주시는 마음에 묵호에 가게 되면 꼭 '오뚜기칼국수'에 가봐야지 마음 먹게 되었다. 요즘은 이런 사소함이 참 반가운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어느 층의 이웃이 고개를 까닥여 가벼운 인사만을 건네도 그게 참 고맙고 좋다. 그런 마음도 "설명하기 힘들지만 느낌으로나마 어렴풋이" 공감되는 것 같아 좋았다.
 책을 읽다보면, 동해가 작가를 끌어들여 집어삼킨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마음속에 담겨져있던 동해에 대한 마음을 부르고 불러 동해로 향하게끔 만든 것 같은 수많은 부름이 곳곳에 있었다. 강연, 한달살기, 책방, 후배 오사, 동식 선배의 도움, 심지어 책방 개업에 맞춰 찾아온 손님들까지 전부 동해가 보내온 신호같았다. 이곳을 찾아오고, 머물고, 사랑하라고. 꽃을 건네며 축하를 나누었던 서호책방의 사장님 이야기를 보며 배우 박정민이 출판업계의 매력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고 이기려하지 않고 좋은 책을 독자에게 선보이는 것에 더 열심인 사람들이라 좋다고 했었는데, 그 꽃이 바로 그런 의미같아 보였다. 
 한동안 크게 난 불 때문에 모두의 마음도 함께 타들어갔던 날들이 있었다. 오래된 절이 불에 탔을 때 눈물을 참지 못하시던 스님의 모습, 피할 줄도 모르고 피해를 입은 동물들, 안타깝게 스러져 간 소중한 생명을 뉴스에서 볼 때면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까웠는데 작가가 경험한 화재 현장의 모습(123)은 실제적인 공포도 함께 느껴졌다. 잎새바람을 찾아가다 벼랑 끝에 차가 걸린 일(66)이나 나도 겪어본 적 있는 이석증 증상(208)도 덩달아 심각하게 읽었다.
 반면 읽으면서 웃게 만든 부분도 있었는데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명한 대사인 '라면 먹고 갈래요'를 '라면 먹을래요'로 바꿔버린 부분(147)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라면 먹고 갈래,하는 물음은 의미심장해 보이는데 라면 먹을래,하고 물으면 무슨 라면? 계란 몇개 넣을건데?하고 답해야할 것 같은 실전이다. 마음이 잘 가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공감도 잘되고 이입도 잘되어 '언제라도 동해'를 읽는 동안 표정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 여행지는 홍천의 '행복공장(160)'이다. '내 안의 감옥'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1.5평 되는 공간에 혼자 들어가 오로지 독서를 위한 자발적 격리? 수감?을 체험할 수 있는 숙소였다. 밥도 방문에 달린 배식구를 통해 건네 받아 해결하는 것을 보니, 언젠가 친구와 절을 찾았다가 언뜻 들어온 무문관 수행과 비슷했다. 나는 깊이가 얕아 도전해보기도 망설여지지만 친구라면 가능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읽었다. 

 책은 4장에 가서야 동해를 방문하고 싶다면 이렇게 해보라며 열가지 제안을 건넨다. 그제서야 아, 이 책 여행책이었지! 되새긴다. 그러니 지금껏 보여주었던 동해와 동해살이의 매력은 뭐 별 것 아니었다는 듯이, 더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여행지로서 즐길 수 있는 동해의 매력은 줄이고 줄여 이 정도 있으니 골라보세요,하고 자랑하는 듯 했다. 특히 해파랑길은 몇 해 전부터 걸어보고 싶어 사진첩에 저장해두었던 곳이라 눈에 밟혔고, 무릉별유천지의 라벤더 밭이 뽐내는 그림같은 풍경도 마음에 들어 눈여겨보게 되었다. 
책문화축제, 북크닉, 강연, 낭독회에 근처 사장님들과의 소소한 차모임까지 작가는 바쁘고도 활력이 넘치는 성향을 맘껏 뽐내며 현지인의 삶을 즐긴다. 길을 가다가도 가자미를 건네받는 묵호의 슈퍼스타(144)가 아닐까 싶은데 덕분에 직접 100퍼센트로 즐길 동해의 삶을, 오히려 120퍼센트로 나눠받는 기분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현지인이 추천하는 여행지, 맛집을 키워드 삼아 여행 떠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목적지를 정착지로 만들어버린 작가의 '언제라도 동해'를 꼭 만나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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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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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위를 피해 카페로 책을 가져가 읽는 동안 카페 어디선가에선 알람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공간 음향, 요란하게 돌아가며 원두를 갈고, 프라푸치노를 말아대는 소음들 사이로 알람 소리만 유난히도 신경이 쓰였다. 열대야에 뒤척였던 지난 밤 모자랐던 잠이 카페의 시원한 실내 온도 덕분에 그제서야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때마침 그 알람 소리가 나와 같은 핸드폰 기종의 공통 알람 소리여서 아침마다 듣던 그 지긋지긋한 소리이기도 해서였다. 짧게 쓰여지긴 했지만 소설 두 편 정도는 충분히 다 읽을 시간 동안 소음들 사이에서 은은히 울려퍼진 알람 소리는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환청처럼 이어지는 소리에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진 핸드폰에 몇번이고 귀를 붙여보기도 했다. 설마 이 빌런이 나는 아니겠지. 

 '아뇨, 아무것도' 안에 있는 단편들은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다른 소음들 사이에서 충분히 묻혀 지나갈수도 있을만한 어떤 특정한 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을 거스르는 느낌, 살짝 어긋난 타일이나 삐져나온 선, 혼자만 엇박으로 들어가는 동작 같이 눈길에 튀는 것들. 어떨 땐 무심히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한번 눈에 들어오면 자꾸 마음에 걸리고 가끔은 그 모남이 웃음을 주기도 하는 소설들이다. 어떤 결말은 이게 뭐야, 싶기도 하고 어떤 결말은 이래서 그랬구만. 고개를 끄덕이게도 만든다. 그리고 종종 이런 웃음 코드에 웃고마는 내가 싫어지게 웃기기도 하다. 가게의 '게' 자만 나와도 성호를 긋는다(108)는 말에 낄낄 거리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구겠는가.) 110" 

 [날지 않는 새들의 모임]은 읽고 난 뒤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다. 어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날지 않는/못하는 새'들이 등장해서 심각하게 토론을 한다. 펭귄이니 칠면조니 하는 새들이 나오자 새삼 이 책이 이런 소설집이었어? 싶어졌다. 새들은 심각한데 보는 나는 귀엽게 느껴졌다. 닭이 이 모임에 들어와도 되는가 아닌가를 주제로 토론이 치열해질수록, 날기는 커녕 요즘은 걷기도 힘든 인간도 덩달아 심각하게 읽다가 결국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웃긴다. 사실 이런 내용과 개그가 취향이기도 하다. 표지나 제목만 보고 뭔가 더 심각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덕분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그 다음을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묘하거나 오싹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단편들도 마치 책에서 언급된 '전설의 고향'이나 '토요미스테리'를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야기속으로'나 '테마게임', '드라마 스페셜'같은 짧은 단막극들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나열된 프로그램들 다 아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는 기분도 들테니 '아뇨, 아무것도'도 만나보시라.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 [하이델베르크의 동물원]인데, '젊은 사람들은 서로의 시간을 서로 좀 뺏고 뺏겨도 된다(185)'는 말도 인상적이고 은근히 몽글몽글한 결말이 재밌었다. 등을 밀어주는 어느 한 순간, 작은 계기 없이는 달라지기 어려운 굳어진 관계가 점차 풀려나가는 변화를 지켜보는 게 좋았다. 다양한 글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여러맛을 맛보듯 글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무심하고 적당한 완급 조절이 참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제목과 표지가 진입 장벽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그냥 겉만 봤을 때는 사회문제를 다룬 책인줄 알았다. 노동자나 난민, 그도 아니면 청소년과 관련된 내용이 있을 것만 같았다. 표지에 그려진 인물은 울거나 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고, 띠지에 있는 문구도 오해를 부추긴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숨을 안 쉬고 있는 거지?" 세상사에 쪼이고 쪼여서 숨 막힌단 표현 같았다. 나만 이런 오해를 하는걸까. 막상 읽어보면 제목도, 띠지의 문구도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닌데 이게 이렇게 모여서 이런 오해가 생기니 아쉽다 싶었다. 가끔 요즘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소설이란 단어에 알러지가 있지만 않다면, 2025 하반기 동안은 추천 목록에 꼭 '아뇨, 아무것도'를 넣을 것이다. 읽어보세요. 

 감상을 쓰면서 '어긋남'이란 표현을 썼는데 책 뒷편에 바로 그 키워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웠다. 책 한복판에 가나다 순서대로 후기나 다름없는 '작가의 말'을 또다른 단편들 중 하나처럼 넣어둔 작가가 어이없는데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어긋남을 그대로 보여준 것 같아서. 1이라고 입력해서 1이 출력되었구나. 재밌게, 읽는다는 부담은 전혀 없이, 신선하게 읽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을까봐 안타까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졌다. 특히 여름볕이 지나치게 쨍하고 밤마저 무더워서 어디 가기도 싫어지고 시원한 실내에서 심심함을 달래고 싶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책을 안 읽어서 갑자기 길고 깊은 책들은 집중도 안되고 부담스러울 것 같아 망설이는 사람에게, 가벼운 웃음코드나 어이없는 말장난에 여지없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묘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가벼운 미스터리물을 은근히 선호하던 사람에게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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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없는 마음 - 양장
김지우 지음 / 푸른숲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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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가 있는 나도 성공하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런 마음은 없었다. 한 푼만 줍쇼. 준다면 떠나겠습니다. 이 마음에 더 가까웠다. 7" 

 그녀가 극복 서사를 풀어나가거나 여행 바이블의 더미에 책 한 권-그러나 조금은 새로울-을 더하려는 것은 아닐까 예상했던 마음이 나에게 있었다. 첫 시작에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시선들을 향해 '아니'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나섰다. 선이 그어지고 나서야 그 선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는 조심스럽게 선 안으로 발을 들여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어가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아주 커다란 돌이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15)"던 그 순간, 이 사소한 이야기들에 정말로 빠져들었음을 느꼈다. 마음에서부터 올라온 신호가 목과 코끝을 타고 찡하며 울렸다. 

 '현장에 가서 잘 안 풀리면 박박 우(23)'기겠단 전략으로 날아간 타지에서 유쾌한 면모를 보여주는 소소한 사건들을 보며 즐거웠다. 특히 니야와의 트램 여행 무임승차 사건의 '겁나 많은 벌금...' '젠장...'(127)같은 소소한 대화나 독일 욕탕에서 노인들의 체조(101)를 보며 느낀 익숙함 같은 것들이 재밌었다. 바덴바덴이란 지명도 덕분에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웃겼던 것은 여의도 불꽃 축제에서 인파에 갇혀 화장실도 못하고 널브러졌을 때 옆자리 아주머니가 강아지 소변 패드를 건네 주는 친절(144)을 보여줬던 사건(쓰진 않았다고 주장한다)이었다. 역시 한국인의 정이 제일이다. " '엄마 나 횡단보도에서 어떤 아저씨가'까지만 보낸 메시지에 현미가 '망할 놈이'라고 답장한 일은 두고두고 나의 웃음 포인트다. 96"라고 한 부분에서도 많이 웃었다. 

 "우리로 묶일 수 없는(51)" 자유롭고 개개인이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분위기의, 하지만 그 자유로움이 불규칙함으로 이어지는 제멋대로의 도시인 파리. "아니, 이런 일은 생겨선 안 돼(107)" 하고 작은 어긋남 조차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독일. -괜찮다고 말하는 저자에게 건네진 역무원의 단호한 말에 이 문장을 듣기 위해 여태 여행한 것 같았다는 저자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어?(132)" 할 수 없을 것이라 자신조차 접었던 도전을 할 수 있다로 바꾸어 주고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알려준 호주.
나라마다 저마다의 특징과 매력을 잘 살려 보여준 내용들에 함께 빠져들어 읽었다. 

 읽으며 가장 좋았던 부분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54)'의 내용이었다. 잔잔한 일상이 그려지면서 낯섦과 다름도 없이 평범하고 평온한 풍경이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잘 전달되어 읽는 동안 편안했다. 어떤 난감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거나, 어려운 순간 예상치 못한 선의에 감동을 받는 내용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그녀가 온전히 자신으로서 존재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장소처럼 느껴졌다. 파리에서 시작된 책은 미국에서 마무리된다. 글로벌하다. 그리고 '굴러라구르'라는 이름처럼 그녀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되어준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이다. 앞으로 만날 시간에서 어떤 나는 작아지고 어떤 나는 커질까. 지금은 내 몸 전체를 차지하는 어떤 내가 어느 순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부분이 희미해지기도, 외면하고픈 어떤 부분이 거대해지기도 하면서. 그 새로운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 어떤 관계를 맺을까. 새롭게 더 자랄 내가 기대되었다. 동시에,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 순간의 내가 그리웠다. 196" 

 책을 통해 저자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세바시 강연이나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하는 열정적인 활동가였다. 인터넷 검색 창에 저자를 검색해보면 열심히 바퀴를 굴려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한 활동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앞으로의 자신을 기대하는 모습이 풋풋하고 예쁜만큼 기대되기도 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굴러라 구르'가 보여주는 선명하고도 확실한 세계, '의심없는 마음'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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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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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방에서의 시간은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 책을 쓰는 과정이라기보다 한주간 맹렬히 삶과 싸운 누군가가 보고 들은 것들을 목격하는 일에 가까웠다. 글자들이 살아 있다 못해 그 자리에서 내가 그 사람의 삶을 겪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얼굴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5" 

 글쓰는 삶을 살아가고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챗GPT가 사진만 쥐여주면 무슨무슨애니메이션 풍 그림을 재현해내는 것이 유행했을때 멀거니 세상 참 좋아졌구나, 했는데 문체를 몇 개 학습시키고 이러저러한 내용을 넣은 글을 써달라고 하니 금새 제법 읽을만한 글을 뽑아냈다는 말은 어라, 싶었다. 그렇다면 쓰는 사람들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계속해서 써나가야 할까. 쓴다기 보다는 읽기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문득 덜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쓰기'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고 싶어 책을 펼쳤다. 
 이 정중하고도 가혹한 관리자는 챗GPT에게 글 하나 써와보라고 명령하는 사람보다 더하다. 힘드신가요? 쓰세요. 떨리나요? 쓰세요. 어렵나요? 쓰세요. 뭐하세요? 쓰세요. 응원합니다, 쓰세요. 기다립니다, 쓰세요. 그냥, 쓰세요. 모든 말이 '쓰세요'로 귀결된다. 게다가 얼마나 냉혹한지 "내 글을 읽는데 차마 너무 흉측해서 도저히 읽을 수 없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글이 늘었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보이는 것마다 다 뜯어 고치세요.(181)한다. T인가 싶다. 

 "같은 시공간 안에 있어도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57"는 문구는 무려 올해 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일과 일치했다. 친구와 전처럼 자주 만나게 되지 않으니 만나게 된 날에 있었던 일과 생각을 친구가 기록하는 것처럼, 나는 나대로 적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연초에 그 말을 친구에게도 직접 해놨는데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벌써 반환점을 돌아 7월. 2025년 이대로 괜찮은가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을 때, 다쳤다는 슬픔과 고통보다 무릎에 대한 자각을 앞세우는(114) 사람이어서 새로웠다. 압구정 로데오 한복판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쳤을 때, 나는 창피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넘어져 기어이 바지에 구멍을 낸 채로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 고통과 함께 쪽팔림이 밀려오던 그날을 떠올렸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하면서. 

 '타인이라는 바다로 입수하기(152)'에 이르러서야 글감을 발견한 듯 했다. 몇해 전 친구와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 자신의 미술적 재능이 좀 더 낫다고 주장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역시 내가 좀 더 나았던 걸로 확신하게 되었다,고 다시 주장해본다. 어찌되었든 그때 유심히 바라보고, 뚫어지게 관찰되던 시간이 익숙했던 누군가를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이 되어 기억에 남아있다. 인터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 번 글감을 발견하고 나니, 어떤 주제들 앞에서는 오랫동안 멈춰있게 되었다. 거짓말과 어린시절에 대한 주제가 연달아 나왔을 때(234,240)나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 불행에 대한 주제(270)들이 그랬다. 신화와 꿈이라는 주제, '당신이라는 신화(287)'에서는 태몽이 글감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책을 읽기만 해볼거야, 난 뭔가를 쓰는 성향은 아니야'하고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갑자기 쓸만한 주제를 만난 것처럼 책을 읽다 문득 눈길이 가고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뭔가가 생긴다면 놓치지 않고 쓰기에 도전해보면 좋겠다.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이 수신자들의 답장이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이 점점 커지는데 채워지지 않은 채 끝맺었다는 점이다. '사랑을 사랑 없이 말해볼게요'라는 주제(124)를 마주했을때, 인터넷에서 본 '양말에 구멍이 났다.를 구멍이란 단어없이 다시 써보기 도전'을 떠올렸다. '어쩜 가난이란 것은 발끝까지 옮는지'라고 적은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랑을 사랑없이 말해보는 주제는 어떤 답들이 나왔을까 궁금했다. 
 서간문으로 되어 있는 책은 오랜만에 만나본 것 같은데, 이 다정한 권유이자 능글맞은 압박을 받은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들이 어떤 글을 썼을까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어떤 답장을 보냈는지, 혹은 참여자들이 작성했던 글이 아니더라도 인터뷰 형식으로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함께 볼 수 있었다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여러분은 이제 '쓰는 것의 필연성' 앞에 섰습니다. 쓸 것이냐 말 것이냐는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이제 그저 '무엇을 쓸 것인가'만 남아 있습니다. 질문이 한 걸음 앞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던 힘이 무엇을 쓸까로 옮겨왔을 때 어떤 힘을 발휘할지, 저는 기대됩니다. 91" 

 '쓰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책이 전해주는 다양한 글감과 약간의 압박감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는 읽어보라 추천하지 않고 이 책을 써보라(이용해보라)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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