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된 소녀들
정란희 지음, 이영림 그림 / 현암주니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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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올리는 오늘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다. '나비가 된 소녀들'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다. 시대와 국가, 사회의 문제인 이 깊은 주제들을 어떻게 짧은 동화 안에서 풀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었다.

 

 책에서 주인공 나연이는 열세 살이다. 나연이의 외증조 할머니인 넬마 할머니에게는 '넬마의 비밀'이라는 비밀이 있다. 넬마 할머니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며 나연이의 엄마를 열심히 교육시켜 대학까지 보냈고, 예쁘고 똑똑한 엄마는 나연이의 자랑이자, 동경이다. 나연이는 엄마가 열세 살일 때 할머니께서 알려준 '넬마의 비밀'이 엄마가 멋지게 성장한 원동력임을 알고 그 비밀을 알고 싶어 한다. 좀처럼 한국으로 와 나연이네를 만나려 하지 않던 넬마 할머니는 과거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 정복순 할머니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나연이는 넬마 할머니가 한국에 온다는 사실에 들떴지만, 곧 넬마 할머니로부터 '넬마의 비밀'과 한국으로 온 이유를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넬마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로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게 속아 끌려가 위안부로 지내야 했던 과거가 있다. 넬마 할머니는 그것을 '넬마의 비밀' 불렀고, 그리고 나연이가 열세 살이 된 지금 그 비밀에 대해 알려준다. 

 

 여기서 나연이가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무리 요즘 아이들이 많이 똑똑해지고 성숙해졌다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충격적인 주제일거라 염려가 되었다. 주인공인 나연이는 성숙하게 극복하고 이해하게 되지만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참상을 전달하려면 제대로 된 교육과 많은 시간의 투자가 없이는 어린 아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는 주제가 될 것 같아 읽으면서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나연이의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연이가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내용이 심각성에 비해 좀 가볍게 해결되는 모습을 보인 점이 아쉬웠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나연이의 감정 변화는 비교적 섬세하게 다루었으나 외의 다른 인물들의 행동이 너무나 빠르게 긍정적인 면으로 바뀌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특히 나연이를 놀리던 학교 친구들의 행동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갈등이 남아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남아있다는 점도 보여주고 그것 역시 시간을 들여 풀어가게 될 문제라는 점을보여줬다면 좋았을 것이다. 더불어 바쁜 엄마와 나연이 자매들 사이에 있는 갈등이 어떻게 고조되고 해소될 것인지 궁금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사로이 지나간 것 같아 아쉬웠다. 엄마가 하는 일을 함께 해보고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이해하는 척하게 되는 겉으로만 성숙한 아이가 되는 것일텐데 싶었다.

 

 짧은 동화지만 위안부 문제에 관한 내용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울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요즘만큼 많은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잘 알려지고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 시기가 없는 것 같다. '나비가 된 소녀들'은 더 많고 정확한 기록을 남기고 알리는데에 힘을 보태게 될 좋은 동화다. 그동안 영화 '귀향'의 멋진 성공에 뒤이어 '눈길'이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등의 영화들이 등장했는데, 아이들을 위한 관련 작품이 등장하여 반가웠다. 우리 모두가 다 알고 배우는 역사속의 수많은 사건들처럼 위안부 문제도 함께 안고 갈 수 있도록 배우고 접해야 할 것이다. 다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해가 많지 않은 초등생 아이에게 이 책을 읽힌다면 충분한 설명과 대화를 통한 전후의 독서 활동이 함께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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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5시에 퇴근하겠습니다
이와사키 유미코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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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가장 목적을 잃고, 잘못된 곳에 잘못된 이의 손에 놓여진 책이 될 것이다.

 

 출근은 정시보다 앞당겨 해야 당연한 것인데 정시퇴근이 너무나 확실히 보장된 사회에서 근무하지만, 왜 때문에 야근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기한이 정해진 업무를 위해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퇴근마저 반납하여 일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스트레스는 혼자만의 것이 된다. 연장 근무는 당연하게 하지만 급여 정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할일이 많은데 그런 쓸데없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간 마음만 상하니까. 그런데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매일을 일하러 다녔는데, 남은건 몹시도 상한 마음과 정신, 건강뿐이다. 월급이란 것도 받는 것 같은데 그건 대체 어디 가 있는지. 청년의 몸에 노년의 체력만이 남아 주중엔 일하고 주말에 몰린 잠을 몰아자기에 바쁜 현대 직장인들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사장님, 5시에 퇴근하겠습니다'가 어떤 위로를 줄까.

 

 내용에 일러스트가 포함된 위트있는 촌철살인이 담긴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일목요연한 회사 개혁 성공 비법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제목만큼의 임팩트가 본문에 없어서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우리-노동자-만 알고 사측은 모르는 회사 경영 성공 비법에 관한 내용이다. 슬프게도 이 책은 노동자들만 백명천명 백날천날 읽어봤자 소용없는 우리끼리도 밥 먹으며 커피 마시며 술 마시고 충분히 했던 탁상공론이다. 책을 읽고 감명받아 회사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사용자에게 개혁의지나 문제점에 대한 의식이 없는데 노동자가 바꾸겠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깨달았듯이, 학교의 주인은 '우리'라고 가르쳐도 주인행세는 교장이 하듯이, 회사의 주인 역시 사원이 아니라 일만 내가 된 것처럼 하라는 것이지 실제로, 명백히 사장님 아닌가.

 

 이 책도 어떤 부분에서는 구태의연한 면이 있다. 완전히 노동자를 위한 시선으로 개혁된 회사 문화가 아니라 노동자와 사측의 입장이 절묘하게 조절된 방안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변화와 사원들의 니즈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다는 면이 높은 포인트를 받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의문이 들게 된다. 가만히 출퇴근만해도 퇴사 욕구가 솟아오르는 날씨에 기름까지 부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땅에 어디든 '저런' 회사는 없고, '저런' 회사에도 그 나름의 사표를 안고 다니는 노동자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씁쓸한 사실 또한 우리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빛좋은 개살구나 신포도처럼. 그러니 앞으로 세상이 좀 더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판타지를 품고 제목에서 오는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자.  

 

 한 구인사이트의 광고가 논란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노동자가 갑이다. 최저임금을 주지 않는 사장은 나쁘다. 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에 분개하여 해당 구인사이트를 이용하지 말자는 각종 업체 사장님들의 집단적인 반발이 있었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직장 상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것이다. 출판사도 알 것이다. 표지에 적혀 있다. "우리 사장님이 읽어야 하지만 절대 사지 않을 책!" 이라고. 친절하고 위트있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넌지시 사장님/혹은 상사의 책상위에 올려놓는 짓은 품에 안고 있는 사표도 그 책 위에 함께 꺼내놓을 직장인이 아니고서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끼리 읽고 세상엔 이런 곳도 있구나 '걸어서 세계 여행'을 보듯이 관람하자. 아니면 곧 퇴사하는 다른 동료에게 부탁하여 사장/상사 자리 근처에 떨어뜨려 달라고 해보자. 그것말고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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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림 찾기 : 일본 여행 나를 위한 힐링 놀이북
몽땅연필 지음, 류나연 그림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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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북스에서 나온 다른 그림 찾기 일본 여행 편이다. 책의 구성은 일본의 여행지 50곳을 컬러링과 다른 그림 찾기를 할 수 있도록 사진과 짧은 안내를 담아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컬러링과 다른 그림 찾기가 합쳐져 나온 점이 독특한데 혼자 시간을 보내기 위한 놀이감에 적합했다. 책 무게가 가볍고 단단한 재질의 커버라 크기가 조금만 작고 표지를 조금만 더 세련되게 뽑았다면 휴대하기에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주 대상이 성인이 아니라 아동인 것일까? 책의 주 대상층을 구분해두긴 구태의연하지만 밖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책의 외관이 꺼내들어 놓기 애매하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충족을 느끼는 편이라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데 늘 하던 취미생활에 변화를 주기에 좋은 책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는 짧고, 더욱이 혼자 있는 동안은 무엇을 하건 혹은 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정말 금방 지나가는 편인데 그 시간동안 무언가를 빼곡히 채워나갔다는 흔적을 남기게 만들어주는 책이라 며칠을 두고 푹 빠져서 만지고 놀았더니 나 자신이 스스로를 쉬게 해주는, 잘 존중해주는 하루를 보냈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라 완전히 나만의 페이스대로 조절해서 완성해나가는 점도 나와 함께 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혼자 있을 때 한번도 지루하거나 심심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지만 이 책과 함께 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만약 일본에 가게 된다면 어딜 가볼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생각보다 틀린 그림을 찾는 것이 만만하지 않아 한참을 괴로워하게도 된다. 아쉬운 점은 스케치 부분이 또렷하지 못한 섬세한 선으로 되어 있어 컬러링하기 애매했다는 것. 그리고 쌍으로 된 똑같은 두면이 있기 때문에 같은 느낌을 피해서 하려는 것도 색 선택이 어렵고, 같은 컬러링을 또 하려니 좀 지루한 감이 있었다. 컬러링을 하면서 대부분 혼자 놀았지만 생각하기에 이 책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해도 좋을 것 같다. 간만에 틀린 그림 찾는 재미가 매우 쏠쏠했다.

 

 구성은 사진으로 되어 있는 페이지와, 스케치로 되어 있는 페이지가 번갈아 나온다. 한 면에 같은 장소의 풍경이 나란히 담겨 있고 두 풍경간에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뒷편에는 정답이 실려 있는데 한 페이지에 여러개의 정답이 있어서 중간에 확인하게 되면 다음 숨은 그림의 정답까지 미리 보게 된다는 점이 아쉽다. 집중해서 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있어 깜짝 놀라게 된다. 컬러링은 좀 어려울지 몰라도 숨은 그림 찾기는 집중을 잘 못하는 아이들도 쉽게 몰입해서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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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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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인생에서 그전까지의 모든 순간이, 중요했던 때와 중요하게 보이기만 했던 모든 대가 합쳐져 이 강렬한 순간의 총합, 단 한순간이 되었다. 심장 한 번이 뛰는 짧고 날카로운 찰나에, 그녀는 이제까지 했던 말, 했던 일 중 그 무엇도, 앞으로 하게 될 말, 하게 될 일 중 그 무엇도 이 비극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안나는 프리크에서 뭄프로 가는 기차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전업주부인 여성들이 결혼을 위해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고 그 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는다는 것은 크나큰 고독이다. 그녀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골목을 속속들이 알고, 어느 시간에나 만날 수 있는 친구나 가족들이 없는 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되는 것은 참 심심한 일이다. 더구나 성인이 된 이후로는 '같은 모임, 아는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친구를 사귀는 일도 쉽지 않다. 주인공 안나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스위스에서 살게 된다. 안나는 독일어를 모른다. 그녀에게 스위스는 항상 낯선 외국으로 묘사된다. 안나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다 건조하다. 자기 자신과 부주의하게 드러내놓은 숨겨야 할 비밀스런, 자기파괴적인 행동과 관계들을 제외하고는. 안나의 행동이 지나치게 충동적이고 부주의했다는 것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읽으면서 안나의 무절제하고 위태로운 행동들이 멈춰지고 그녀가 안정된 삶으로 돌아가길 바랐으나, 읽고 난 후에는 안나가 그녀의 삶에서 배척되고 상실감에 고독했을 것이 떠올랐다.

 

 안나에게는 가정만이 있다. 남편과 세 아이. 그녀의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것은 남편의 가족들, 시어머니와 남편의 동생가족 뿐이다. 그녀로부터 연결된 것은 외국인이라는 공통점 뿐인 몇몇의 지인 뿐이다. 그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스위스가 낯설고 배려받지 못한 대화에서 배재된다. 안나에게 말과 음성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여러번 묘사된다. 다른 이들의 억양, 발음을 유심히 듣거나 자주하는 실수가 무엇인지 짚어내거나, 근사한 음색을, '단어에서 느껴지는 살결'에 매료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그녀가 소통할 수 없는 곳에서 소통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으며 느낄 외로움이 구석구석에서 천천히 눈에 띈다. 안나는 남편을 사랑했다.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결혼을 결심할만큼 강렬했고 그 뒤로도 그녀의 삶이 지루할만큼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때로 보이는 의무감, 배려가 섞인 분리된 각자의 시간이 그녀가 원해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브루노의 태도에 어떤 종류든 긍정적인 감정이 섞여있을 때면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거나, 끊임없이 자신이 매력적인지 확인하는 태도가 그녀가 원해서 주어진 겉으로 평온한 관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나는 아내로서 생활하는 것 이상으로 여성으로서 사랑받길 원한다. 그녀가 갈구했던 것은 그녀를 여성으로 사랑해줄 남성이었으며,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감을 줄 소속이었다. 안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지만 그 안에서 조차 사람들은 인종별로 갈려있다. 영어권끼리, 아시안끼리, 쉬는 시간이 되면 따로 앉아 무리를 이룬다. 그녀 나름대로 무리 안에 속하여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독일어를 배웠지만 '그들'이 실제 구어로 사용하는 것은 독일어에서도 변형된 슈비처뒤치다. 안나가 아무리 따라하려해도 같아질 수 없는 시볼레스를 가진. 그녀는 낯선 곳에서 항상 이방인이었고, 그곳과 그녀가 분리된 상태를 느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더욱 그녀를 그곳과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원해도 들어갈 수 없는 경계밖에 있다는 의식이 스스로도 속하길 원치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더욱더 자신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남편인 브루노는 그녀가 슈비처뒤치를 배워야 함을 공공연히 드러내 표현한다. 파티에서 내국인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사람과는 관계맺기를 거부하면서.

 

 흐름은 매설리 박사와의 상담과 긴밀히 교차된다. 안나의 일상, 행동들과 박사와의 상담 시간에 나누는 대화들이 오가며 안나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 하지만 숨기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안나의 생활과 상담 시간이 현실에서 교차하는 순간 그녀의 내면과 외면이 비로소 한데 모이듯이 안나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선택한다. 안나가 저지른 불륜들은 그녀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스위스의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듯, 정해진 결말로 흘러가는 단절되고 좌절된 공간에 놓여진 인간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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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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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세상에! 그 친구는 죽어 있었어요! 머리가 쪼개져 있었어요. 골수와 엉겨 붙은 피가 얼굴로 흘러내렸고, 얼굴은 시체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 친구는 계단을 내려왔어요!"

 

 좀비물은 여타의 공포물과는 다르다. 귀신처럼 어느 곳에나 갑자기 나타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고, 잔인한 연쇄살인마처럼 덫을 놓거나 머리를 써서 집요하게 다음 제물을 노리는 계산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고 무조건 공격하고 무서운 속도로 전염되어 버린다. 요즘 좀비물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기본 설정이 있는데, 좀비가 된다는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비슷하게 피나 타액이 몸안에 들어가면 전염된다. 전염되면 사망에 이르렀다 다시 깨어나게 되는데 이전의 이성이 없는 상태로 다른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 강하다. 다른 신체부위를 공격하는 것은 소용 없으나 머리를 공격받으면 죽는다. 위협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벗어나 생존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사람의 심리 안에 존재하고 있어서일까 좀비물의 이런 요소들이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좀비와의 대치로 긴박감이 넘치는 좀비물들을 즐겨본 탓에 클래식 호러에서 엮어낸 '좀비 연대기'도 기대하며 읽었다.

 

 '좀비 연대기'는 접하게 되는 좀비에 대한 내용과는 달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의 원형에 가까운 설정으로 좀비를 묘사하고 있다. 아이티, 부두교, 강제 노동, 흑인 그리고 소금. 최근에 접하는 좀비물처럼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좀비의 모습이나 실험실에서 배양된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세련된 설정이 아닌 오히려 강제 노역에 혹사 당하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동정적인 시선이 더 많다. 물론 좀비가 가진 특성 상 살아있지 않은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도 들어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에 접하던 현대적 좀비물의 그것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생각보다 부드러운 전개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좀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접할 수 있어 색다른 재미를 준다. 특히 소금을 먹이면 안된다는 금기가 인상적이다. 과거 몇몇 작품들에서 소금을 먹여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좀비가 된 사람들을 구하는 내용을 본 적 있는데, '좀비 연대기' 안에 포함된 작품들은 소금을 먹은 좀비는 괴로움에 소리지르며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가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독특했다.

 

 짧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작가마다 다른 작품 스타일, 좀비의 설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 중 잭 런던의 "천 번의 죽음" 편은 익히 알던 좀비라기 보다는 피실험체를 통한 죽음과 소생의 반복적 실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좀 독특한 분위기라 생각하며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실험대상이 자신의 아들임에도 개의치 않고 실험을 진행하는 아버지의 맹목적인 태도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현대의 좀비와 가장 비슷하게 느껴진 것은 마지막 단편인 앨피어스 하이엇 베릴의 "좀비 감염 지대"인데 여타의 작품들에 비해 가장 엽기적이고 잔혹한 묘사가 등장한다. 가장 첫번째에 있는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지옥에서 온 비둘기"는 좀비 코드를 빌린 추리물같은 느낌이라 초반 몰입도를 높여주는 단편이었다. 좀비물을 좋아한다면 고전적인 좀비들을 '좀비 연대기'를 통해 만나보는 것도 색다를 것이다. 혹시 모를 좀비 사태를 대비해 하나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둔다면 더 도움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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