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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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는 독특하다. 오래된 이의 고문을 옮겼다고 해서 다로 고루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여타의 소설보다 잘 읽힌다. 워낙 문장을 늘어지지 않도록 잘 옮겨놨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내용이 담백해서 읽기에 좋았다. 언뜻 제목을 봤을 때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끈 에세이 책이 떠올랐다. 내심 왜 제목이 굳이 비슷하게 나왔을까 염려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장의 온도"를 읽으면서 제목이 비슷한 것이 마뜩치 않을 정도로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혹 그 에세이를 읽고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문장의 온도"를 읽어보길 권한다.

 

 "문장의 온도"안에 수록된 문장들을 이덕무의 문집에서 한정주씨가 꼽아 번역해서 옮긴 것이다. 옮겨진 문장들이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함께 표시해놓았기 때문에 확인하며 읽을 수 있다. 옮긴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1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고, 2 내 눈에 예쁜 것, 3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곳, 4 세상에 얽매이거나 구속당하지 않겠다, 5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얼어붙은 세상을 녹인다, 6 온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 총 여섯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구분해놓았다. 때문에 관심사에 따라 어떤 부분은 단조롭게 읽히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깊이 공감하게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3번과 4번, 6번 단락을 읽을 때 가장 흥미로웠다. 3번과 4번 단락은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읽으면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특히 3번 단락에서 '세상의 기이한 일들 (p104)', '자연의 다양성 (p113)', '평양의 싱크홀 (p115)' 같은 내용들은 읽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어 읽으면 흥미로울 것이다. 4번 단락의 내용들은 지금과 가치관이 달라진 점이 있는지, 나의 생각과 입장은 어떤지 찬찬히 정리해보게 된다.

 

 6번 단락은 글과 책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뤄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그 중에서 '책을 빌렸다면 (p324)' 중 "무릇 서적이 있다면 비록 좋아하고 아낀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는 운장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랬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빌려준 책이 깨끗히 돌아오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임을 탓하는 동춘 선생의 일화가 함께 소개되어 새로운 관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예전 어느 면접 자리에서 받았던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 거의 마지막 질문이었을텐데, 그동안 읽은 책이 몇 권 정도 되는 것 같으냔 질문이었다. 남아수독오거서라는 말이 떠올라 애매하게 다섯 수레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답을 했더니, 한 수레에 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느냐고 또 물어왔었다. 결국 잘 모르겠다고 말았는데, 면접을 보고 난 다음에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계산법이 되었든, 지금의 추측이 되었든 아마 죽기 전에는 다섯 수레의 책을 다 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내용이 작위적이지 않고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책이다. 에세이같지 않으면서도 고문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세련됨이 보인다. 에세이 특유의 잠시간의 찰나, 센티멘털에 빠진 감상들에 대해 이리저리 늘어놓지 않았고 한문으로 점철된 숨막힘도 없다. 에세이 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읽을만한 내용이다. 속 안의 정갈함을 그대로 옮긴듯한 표지도 인상적이다. 날이 추우니,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덕무가 남겨놓은 "문장의 온도"를 가늠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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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월급쟁이 부자들 - 투자의 고수들이 말해 주지 않는 큰 부의 법칙
성선화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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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삶이 지금보다 윤택해지길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한다. 여러 신문기사로 접한 발표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로또 판매량이 하루 평균 104억원 어치나 팔리는 등 판매량 기준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로또와 같은 복권은 경기가 나쁠수록 소비가 늘어나는 불황형 상품이다. 체감 경기는 팍팍한데다가 계층 사이의 박탈감이 갈수록 더해지면서 로또와 같은 일확천금의 한방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던 것은 아닐까. 최근 엄청난 이슈가 된 가상화폐 시장도 그러하다. 투자가 아닌 투기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 가상화폐 역시 일부 사람들의 전설적인 수익률 신화가 퍼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길 소망하는데, 다산북스에서 출간한 '100억 월급쟁이 부자들'은 그 제목만으로 이목을 끌기 충분하다. 월급쟁이인데 100억을 버는 일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과 함께, 읽기 전에는 과연 이 책의 내용에 공감이 가거나 흥미가 생길만한 부분이 있을까 싶었다. 투자라는 것도 매우 생소하고, 흔히 하는 생각으로 뭐라도 해보려면 그에 맞는 자금이 필요한 일인데 그조차 거리감이 들었다. 극히 일부일부를 제외하고는 주식도 가상화폐도 결국 개미들은 휩쓸리다 나가떨어져 버린다고 하지 않나. 투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다. 거기다 100억이라는 빅넘버의 월급을 제시한다해도 의심스러울 뿐 딱히 체감되는 것은 없었다.


 사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처음 받았던 인상보다 더 애매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가장 처음 읽기 시작하는 들어가는 말부터 난감했다. 대체투자 시장에서의 성공에 대해 말하면서 금수저가 아니어도 괜찮다, 흙수저도 가능하다.고 진입장벽의 여지를 주며 강조한다. 읽어보니 언뜻 희망적인 것 같지만 이어지는 내용이, 개인의 수저보다는 일명 스카이로 통용되는 명문대를 나오는 것이 플러스 됨을 "업계가 원하는 지적 수준"이라는 표현으로 우회하여 표현했다. 새삼, 반발심이 들었다. 요즘 세상에 명문대를 간다는 것도 결국은 집안 비율이 더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저자가 모를까. '개천에서 용난다도 이젠 옛 말' 이라고 공공연히 사용되는데.여기에서 이 책을 더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회의감이 들었다가 문득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말이 떠올랐다. 간절함. 어쩌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자신감을 얻거나 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조차도. 처음 짐작으로 그냥 덮어버리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보던 시선을 접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마음을 덜어내고 읽으니 회의감이 들었던 처음보다는 조금 나았다. 100억짜리 월급쟁이가 어디있냐고 의심했던 것과는 달리 어떤 길을 제시해주지 않을까 싶은 묘한 기대감이 있었나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었다면 모두가 100억 부자가 되었을텐데 말이다.


 "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비록 실패를 하더라도 그 노력의 결과가 언제 어디서 발현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 p. 116 1부 100억 월급쟁이 부자의 DNA "


 1부에서 나오는 내용은 다소 전형적이다. 처음에 제시됐던 정장근 대표의 다섯가지 꼴과 같은 내용은 세련됨이 좀 지난 프레젠테이션 내용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를 이어서 기본이 될만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 몇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런 형식은 거의 반복적으로 계속되어 2부까지도 이어진다. 어떤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1부와 2부에서 나오는 기업이나 인물에 대한 예들은 크게 눈길을 끌지 않고 지나가지만 3부에 들어서면 왠지 호흡이 달라진다.


 3분의 내용은 관조적으로 이 사람은 이런 일을 겪었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되는 것처럼 흥미를 자극한다. 3부의 부제가 일상생활 속 대체투자인만큼 좀 더 실제적으로 와 닿는 예들이 사용되어서 그런 것 같다. 마스크팩에 대한 이야기나, 전지현이 모델로 나오는 치킨업체에 대한 이야기,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광고하는 스테이크 메뉴의 상황, 프랜차이즈 커피 업체, 숙박업소 예약 어플 등 티비 광고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접하고 실제로도 딱 해당 브랜드와 제품을 내가 이용해본 적 있고, 이용할 수 있는 업체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마치 어느 하루 패밀리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메뉴로 식사하고, 프랜차이즈 업체의 커피를 마시며, 어플로 예약한 숙박업소에서 하루 머물며, 치킨을 배달해먹고, 잠들기 전에 팩을 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일정을 짤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다들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100억 월급쟁이 부자들'을 읽으며 기대했던 감상과는 거리가 먼, 달을 가리켰는데도 그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것 같은 감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받침으로 삼아 어떤 성공을 이뤄야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는 것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100억을 벌면 좋겠지만 모두가 100억을 벌수도 없고 벌어야하는 것도 아니니, 그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다. 누군가의 인센티브가 100억이라는 말에 전두엽까지 전해지는 찌릿한 충격을 받은 저자니, 그에게는 이 법칙을 유용히 이용하여 큰 부를 얻는 게 목표였으리라. 그리고 같은 목표로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법칙들이 그 나름의 도움이 될 것이다. 업계에서 요구되는 지적 수준을 잊지 마시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업체는 어떻게 성공했지, 어떤 난관에서 벗어났을까 하는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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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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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들은 별것 아닌 일로도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되기까지 하지 않던가. - p.31 7년 5개월 후 "

 

 더이상 미룰 수 없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날의 아침, 늘 틀어놓는 아침 뉴스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여자화장실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둔기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을 접했다. 사회를 뒤흔든 '강남역'의 사건이 절로 떠오르는 뉴스였다. 묻지마 폭행이 의심되는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피해자를 스토킹하던 남성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여지도 함께 보도되었다. 이 뿐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은 피해자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아물지 못한 사건들 사이에서 '용서의 나라'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아우르며 다가온다.

 

 독특하게도 '용서의 나라'에서 톰과 토르디스의 관계는 종종 희생자와 치료사의 모습을 띈다. 그것이 독특하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강간 피해자인 토르디스가 그들 사이에서 치료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p.247) 그녀 역시 분노하고 좌절하고 상처입은 영혼으로 표현되지만, 역설적이게도 톰 역시 자기 연민에 빠진 상처입고 후회 가득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토르디스 앞에서 섰다. 그리고 그것을 두 사람이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책의 표지에서 발견한 '성폭력 생존자'라는 표현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토르디스는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중의적인 의미로 생존해 낸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토르디스가 처음부터 용서를 시도하고, 상대방과 마주하길 결정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신이 평범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듯이, 수많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를 가졌었음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로 표현한 바로 이 감정과 고통들은 피해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가 털어놓은 자책과 상처가 '공감'되어 다가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였던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나는 술 먹고 취했을 뿐만 아니라 '강간을 자초한' 여자이기도 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 강간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서 내가 습득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조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시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톰의 어깨에 책임을 지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 p.104 "  우리는 옷가짐을 정숙하게 해야하며,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해야하고, 늦은 시간에 외진 곳에 있어선 안되고, 누군가 나를 성폭행하려 하면 무조건, 죽음의 위협에 맞서 강력히 저항해야만 한다. 어느 하나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성녀가 아니라 창녀의 위치로 전락하여 비난과 의심을 받게 된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가는 문제의식들 뿐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들이 날카로운 위트를 보인다는 점도 좋았다. 굉장히 솔직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신 내부의 변화를 세밀하게 공개했다. 여자의 삶과 인종에 대한 시각, 더불어 그녀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얻게 된 몸의 변화까지도 들어있다. 미경험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출산시 회음부절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으며 (p.244) 토르디스의 솔직함에 조금 더 감화되었다. 처음 '용서의 나라' 를 읽으며 문체가 다소 장황하거나 극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에 비해, 뒤로 지날수록 지나치게 많은 부분에 꼽아둔 표시들이 생겨났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토르디스가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에 대해 말하길 멈추지 않고, 거기에 그녀 자신이 서있는 또다른 위치까지도 의식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 택시에 올라타니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으로서 내가 누려온 부인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한 죄의식과 혐오감이 찾아들었다. - p.113 " 이런 부분인 것이다. 인종적인 문제까지도 서슴없이 화두에 올리길 주저않는 점이 독특했다. 그것이 그녀를 단순히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게 할지도 모름에도. 그리고 인종적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점은 꽤 만족스러운 요소였다.

 

 "내가 막 침묵을 깨려는 순간 지저분한 스웨트셔츠 차림의 이 빠진 남자가 급히 다가오더니 동전을 구걸해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돕고 싶어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마음이 아팠다. 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남자는 포기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무릎 위에 보온 담요처럼 놓여 있는 내 기득권의 무게를 쳐다봤다. - p.77 "

 

 이 책이 누군가에게 깊은 감명과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개인적으로는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다만 다른 이들에게 어떤 강요나 섣부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해결에 정답은 없고, 수많은 자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에 맞는 해결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용서의 나라'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더 내밀한 어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읽는 내내 떠올랐던 짧은 시에 대해 함께 옮긴다. 출처는 ena ganguly라는 이름으로 업데이트 되는 한 SNS이고, 영어로 쓰여진 시를 한글로 옮긴 내용이다.

 

 "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해진다 / 왜냐하면 / 우리는 내내 가르침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폭력을 부르는 미끼이며 / 우리의 입술은 유혹적이고 / 우리의 허벅지는 죄로 역하며 / 자라나는 우리의 굴곡은 아저씨들의 눈과 손을 낚는 덫이라고 / 우리는 이 한 가지 가르침을 받는다 / 남자들 앞에서 우리의 몸은 우리를 배신한다는 것 / 우리는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이를 배운다 / 몇 번이나 이 가르침들은 우리를 옭아매는데 / 남자아이들은 그저 아이로 남는다 - ena gangu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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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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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잉과 풍요의 시대에 가장 강조되고 있는 요소 중 하나는 '다이어트'일 것이다. 이는 콩글리쉬의 의미 그대로 체중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통용되지만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말하자면 우리는 과잉된 섭취로 인해 증가한 체중을 줄이려는 시도를 할 뿐만 아니라, 집안에 쌓여있는 가구와 옷가지 등의 살림을 줄이려는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동경, 중독 수준이라 할 수 있는 핸드폰이나 컴퓨터 등의 전자 기기 사용을 줄이려는 '디지털 다이어트', 24시간 제한없이 엮어진 인간관계 또한 정리하려 하고, 심지어 내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수많은 상념들을 떨쳐내려는 노력도 한다. 때문에 '단순한 삶의 철학'을 통해 우리의 이런 노력이 어디에서 기인했으며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맞을지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눈에 띈 주제는 소박한 삶은 옳고 사치스러운 삶은 틀린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왜 보편적으로 사치스러움을 천박히 여기며 경계하고, 소박함에 대해 도덕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두어 생각하는 것일까에 문제적 시각을 둔 점은 꽤 신선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 개인적으로는 단순하고 검소한 삶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몇 번의 방정리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사려다가 마음을 접은 몇몇 가전제품들로 위안을 삼아보기도 했다. 나 역시도 당연스레 소박함에 더욱 이상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득 나에게 지금과 다른 엄청난 부유함이 주어진다면 과연 동일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자문해보니 답은 아니었다. 단순한 삶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했던 일이 과연 진짜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 결여로 인한 불만족함을 완화하기 위한 다른 수단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반발적인 생각으로, 많은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떠올려본다. 그들은 나름의 진지한 어조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만약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내어놓고 과거로 돌아가 젊음/선택하지 않은 소박하거나 평범한 삶과 바꾸겠냐고 하면 반드시 기꺼이 그러겠다"고. "많이 가진 것은 곧 행복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그들은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가진 것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라 부족한 것은 돈밖에 없는 입장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그들의 말은 매우 허황되고 탐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이 진짜 덜 가졌더라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젊거나 소박하고 단란한 삶을 산다고 해서 분명 그 이상의 행복을 느끼게 될까?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지금의 삶을 다시 버리고 더 가진 삶을 선택하라고 하나면 반드시 기꺼이 그러겠다고 할 사람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갖고 싶은 것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니.

 

 특히 "4장 소박함의 철학은 왜 오늘날의 삶에 어려운 것인가" 의 "소박함의 비판적 측면"을 읽으며 어려웠던 시기 동안 핵심이 되었던 '가성비'라는 요소를 떠올려보았다. 이 가성비라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 자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특히 젊은 세대들의- 빈곤함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의 면모도 보인다. 책에서는 소박함의 비판적 측면 중 첫번째로 "돈에 집착하게 된다 / 모든 것의 비용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가격을 비교하고, 단위가격을 계산하고, 할인 여부를 살피고, 할인행사를 찾아다니고, 폭리를 취하는 곳을 적발하는 등 역설적으로 돈에 과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 -p.187 4 소박함의 철학은 왜 오늘날의 삶에 어려운 것인가" 을 꼽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성비와 매우 비슷한 결이다.

 

 매우 오랜 시기동안 근면과 절약, 성실이 전국민적인 삶의 지향점이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에 스며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가성비적인 삶이 무조건적인 긍정이 될 수 없음도 부각되고 있다. 흔한 예로 미국사회의 계층별 비만율을 들 수 있는데, "미국 연방정부의 통계자료는 소득수준과 비만율이 반비례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소수계층(minority)일수록 비만율이 높아짐을 보여주고 있다. 백인은 연봉이 5만달러(약 6500만원) 이상인 사람들 중 비만인 비율이 16%였고 1만5000달러인 집단의 비만율은 23%로 소득이 낮을수록 비만율이 높아졌다. 흑인은 연봉 5만달러와 1만5000달러 집단의 비만율이각각 22.5%와 34%로 백인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비만율이 더 높았다. - 동아일보기사 이진영 020221" 는 내용이 가성비를 추구하고,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생활 환경의 맹점을 꼬집었다.

 

 더불어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이상도 삶이 팍팍하기 때문에 오는 취향에 대한 극단적 절제로도 해석된다. 이 밖에도 책에서는 "'매몰비용'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너그럽지 못하게 된다, 사회가 침체될 수 있다" 는 것들을 꼽았는데 우리의 경우는 사회가 침체되었기 때문에 소박해졌다는 인과가 더 큰 듯하다. 이처럼 "단순한 삶의 철학"은 소비와 사치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며 단순한 삶에 대한 여러 관점을 보여주는 만큼 책을 읽으며 기존에 품어왔던 생각과 많은 의문들이 서로 부딪히는 과정들을 겪었다. 읽으며 떠올렸던 것들에 비해 개인적인 결론은 너무나 단순하게도 검소함이든 사치든 모든 것이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정도의 선에서 마무리 되었는데 "단순한 삶은 삶의 충만함에 이를 수 있는 여전히 가장 확실한 길 중 하나이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p.363 맺는 글" 로 정리된 본문처럼 다소 아쉬움이 남는 맺음이었다.

 

 아쉽게도 삶을 관통하는 철학보다는 빈부에 대한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 더욱 집중하게 됐다. 검소한 삶의 자세가 철학을 통해 추구된 신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주어진 기술에 지나지 않는 시대이고 세대이기 때문에. 앞서 언급되었던 '다이어트'를 고려해 본 적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사실은 선택지 없이 주어진 것들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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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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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상실과 경직, 고착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무언가가 시작되려하는 시점은 늘 그렇듯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된 고인물에서부터다. 우리의 아서 페퍼는, -이후로 페퍼는- 그의 삶에서 더는 시작이란 것은 없을 것이란 다소 우울한 조건에서 존재한다. 페퍼는 거진 일흔이 다 된 나이의 노인이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 40여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삶의 한 톱니바퀴처럼 되어버린- 평생동안 좋은 동반자로 사랑해왔던 아내, 미리엄과 사별한 뒤 그 상실을 이기지 못하고 집 안을 동굴처럼 배회한다. 그에게는 미리엄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그들은 미리엄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페퍼는 굳어가는 고목처럼 미리엄이 없는 집 안에 점점 자신을 가두었고 그런 그를 찾아오는 방문자는 이웃의 버나뎃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끔 찾아오는 버나뎃의 방문에도 마치 집에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응답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면 마치 아무 기대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들 댄과 딸 루시가 이제 그만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며 종용하지만 페퍼는 그들의 무심함과, 예순 아홉의 나이에 이른 자신이 더 나아갈 무언가가 없음을 스스로 불평하듯 토로한다. 그러다 문득 아침의 균형을 뒤흔든 버나뎃의 방문에 페페의 일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사소한 물건들이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신호처럼 읽혀졌다. 페퍼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미리엄과의 작별 의식을 마음 먹는다. 그녀의 옷을 정리하여 구호단체에 기증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날 미리엄이 남겨 둔 작은 기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슬픔은 놀랍도록 다른 빛깔로 빠르게 변화해나간다. 호기심에서 두려움 그리고 자신 안에 존재했는지도 몰랐을 큰 질투까지. 이 변화를 통해 굳어져있던 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한다. 오직 하나 그녀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그리고 여기까지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페퍼의 진짜 걸음은 오직 읽는 이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었다.

 

 페퍼의 모습을 보면 최근에 보았던 "고잉 인 스타일"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건 프리먼 배우가 나오는 영화로 페퍼와 마찬가지로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세 노인의 이야기다. 늘 가는 곳, 늘 먹는 음식, 항상 같은 친구들과 평범한 일상을 살던 그들의 삶에 변화가 생기면서 벌이는 활극을 다룬 영화다. 노쇠해진 그들의 움직임이 굼뜨고 불안한데도, 사실 일상에서 그토록 늙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관심이 없었을 것인데도, 이들 노인들의 새로운 도전은 시선을 모으고 응원을 이끌어낸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버트 드니로가 나온 "인턴"이란 영화도 떠오른다. 성공한 젊은 CEO에게 일흔살의 인턴이라는 언발란스한 조합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페퍼와 세 노인들에 앞서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페퍼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일까.

 

 흔한 표현으로 젊음에는 시작과 도전이란 말이 자연스레 따라붙고, 늙음에는 황혼과 정리, 안정같은 표현을 연상시킨다. 아마 우리 내면에서 나이듦이란 것을 삶의 많은 요소들에 대한 가능성을 마감하고 굳어진 채 그저 안존하는 자세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말로 정해두었는지 모른다. 우리의 관념에서부터 노년의 이미지를 제한해 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때로 우리는 어떤 젊은 영혼의 새로운 시작이 주는 자연스러움 보다 노년에 찾아온 의외의 여정에 더욱 공감하고 감명받는다. 사실 노화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숙명이다. 우리는 노년기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놓았지만, 자신이 만든 그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또한 가졌다. 흔하게 마음만은 청춘이라 하는 말이 가벼운 표현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절감되는 것처럼. 때문에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를 만났을 때 우리가 제한해놓은 선을 보란듯이 넘어서는 주인공들을 향해 진심어린 응원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새롭게 만나는 페퍼의 여정을 함께 한다면 진한 감동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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