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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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함께하는 시간도 유한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사실을 절절히 깨닫는다. 추억을 함께한 때만이 서로를 기억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제대로 사랑하는 법밖엔 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추억을 쌓으려면, 혈육일지라도 관계를 단단히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관계는 서로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럴 때 인생은 더 깊고 숭고해진다. p.7 _ 프롤로그 "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며 정신없이 회전문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는 기분을 맛봤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그 책에 대한 전체적인 호불호를 가늠하게 되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두권은 시집을 읽어보기로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시와 얽혀진, 그것도 오랜만에 읽게 되는 에세이를 마주하게 되어 내심 시도 읽고 편독하는 장르인 에세이도 읽게 되니 일석이조구나 계산했다. 다만 그것이 꼭 마음에 든다는 법은 없었다. 에세이는 개인의 내밀한 체험이나 생각이 녹아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세대적으로나 관점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게 와닿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 살다 보면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의견 차이를 다툼으로 끝내는 관계를 보면 서로를 더 이해하면 친해질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들 자존심이 철근같이 세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자존심도 양파 껍질처럼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깨지는 원인을 잠잠히 들여다보면, 거의가 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p.63 _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 "

 

 주로 딸과의 관계,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 집중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폭 넓고 깊이 있는 내용들도 발견한다. 의견 충돌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관계를 더 쉽게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먹으면 친구 사귀기도 힘들다' 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느껴진다. 세월에 따라 어느 정도 정립된 세계와 패턴이 타인으로 인해 유연해지기 힘든 것이다. 때문에 내가 남을 끊기도 하지만 남이 나를 끊어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은 시기에 읽었던 터라 인상깊었던 부분이었다.

 

 저자가 딸을 낳으며 느끼게 되는 모성과 관련된 부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그런지, 혹 '케빈에 대하여'나 '다섯째 아이'를 강렬하게 본 탓인지 좀 어색했다. 혼자 속으로 과연 모성이 모두에게 다 주어지는 것일까! 아이를 혼자 감당하기까지의 여건이 저자에게도 이리 어려운데 다른 처지의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애초에 선택도 못하지만! 등등의 궁시렁을 삼켰다. 저자가 전달하는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소중함, 삶의 지탱이 되는 자식의 의미, 여자의 삶에 의지가 되는 딸의 존재 등등의 내용은 공익광고 같은 장점의 극대화와 정보 전달의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이 계획이 없다는 사람에게 '낳아봐, 니 자식 낳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느껴지는 난감함이랄까.

 

 거기에 책의 마무리는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끝을 맺는다. 갑작스럽게 애국심이 등장하며 마무리 된 탓에 이렇게 끝난 것이 맞나 의아했다. 출산장려와 모성애, 모국어와 전통문화로 이어지는 애국심까지 진짜 요즘 시기에 사회가 원하는 공익광고의 내용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쓴 내용이라면 이렇게 건-전할 수 있다고 이해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을 날 것으로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나와는 감성이 좀 다른가보네, 하고 읽다가도 어떤 부분은 '그래 우리 삶에는 이런 결이 있었지, 서로 무늬는 달라도 삶을 살면서 같은 결을 나이테처럼 쌓아가고 있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부분들이 반복되면서 이 책 괜찮네 혹은 나랑은 좀 안 맞는 부분이 있네 하는 마음이 정신없이 회전문처럼 오갔다. 하지만 읽고 난 뒤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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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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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 책을 읽었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또 잘 알고 있다. 이 책이라기 보다는 표제작이 되는 단편 '첫사랑'의 내용을. 문득 그 내용을 떠올리다가 도서관에 들린 김에 빌려왔다. 한동안 다른 책도 좀 읽고, 딴 짓도 하고, 게으름도 피워보고 하다 반납기한이 다 되어서야 가방에 책을 넣고 광화문으로 나왔다. 서울 시내의 카페는 어디든 붐비는 법이라 눈치 안보고 책 읽기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눈에 띈 카페 한 곳은 때로 시끄럽고 연령층이 다소 높아도 다른 곳에 비해 한산한 편이라 그리로 들어가 베이글을 뜯어먹으며, 낄낄대며 책을 읽었다.

 

 비록 '첫사랑'을 보며 읽기 시작했지만, 맨 마지막에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그것까지 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다른 단편들도 재밌다. 읽다보니 '조동관 약전'이 가장 완벽한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똥깐이의 전설적 패악은 유쾌하고 쓸쓸한 결말은 아련하다. 꼭 읽어보길. 소설집 첫사랑 속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인물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 인물들은 무식하거나, 본 데 없는 깡패고, 좀스럽거나 심약한 소시민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숙한 소년이기도 했다. 이 인물들이 유머러스한 작가의 어조와 버무려져 각각의 매력과 재미를 뽐낸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수산 시장에서 펄펄 뛰는 생선을 회로 쳐서 먹는다고 해도 그건 부산 바닷가의 회에 비할 때 회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산까지 갈 수가 없는 경우 먹기는 먹되 "이건 회도 아이다"라는 말을 꼭 붙여야 한다는 게 장택근의 주장이다." p132 _ 2인실

 

 거기에 '강알리 등킨 도나쓰'로 이어지는 붓싼 싸나이 드립의 문학적 버젼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정성스럽게 싸놓기도 싸놓은 인터넷 똥글을 읽으며 자괴감을 느끼는 대신 '여가시간엔 책을 읽어요'라며 표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만한 허영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석제의 이름을 드높인 전설의 단편, 표제작이자 모든 부녀자들의 바이블. '첫사랑'을 수록하고 있으니 과연 주목해볼만 한 소설집이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은 알테니 책 표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고.

 

 "나는 빈 빵 상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빵 도로 놔, 새끼들아." 언제 네가 다가왔는지 아이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반쯤 뜯어먹은 빵까지 전부 다 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불렀다. "너, 거기서 다섯 개 집어." 나는 무시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네가 자꾸 나한테 접근해오는 게 싫었다. "나는 빵 안 먹어." " p223 _ 첫사랑

 

 이 첫사랑 물은 묘하게도 남*남의 구도다. 이 장면을 이성애로 옮겨온다면 "느 집엔 이거 없지?"하고 감자를- 요즘은 값이 너무 올라서 금자라고 불리우는 그것을 들이미는 소설을 연상시킨다.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금기시되는 감정이라는 기본 바탕 때문에 이 첫사랑 물은 좀 더 흥미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뒷세계?가 아닌 곳에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더래도 첫사랑 물의 핵심인 미묘한 기류와 다가가고 싶은 마음, 서툴음을 낯간지럽게 담아냈기 때문에 재미도 충분하다. 이런 어설픈 풋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데 - 그럴만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쨌든, 왜 이런 코드들로 하여금 체험해본 적도 없는 가상의 향수마저 불러온다.

 

 웃기고 쉽게 읽히면서도 전체적으로 '남성적인 서술'이라는 부분들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남*남 구도의 연애물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둘 사이의 도구로 끼인 혹은 도피/부정을 위한 여자의 존재이다. 최근 개봉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면서 느꼈던 수단으로서의 여자의 역할이 '첫사랑' 안에서도 빵집 처녀의 역할로 등장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단편들 안에서 '유랑'의 벙어리 여자 외에는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와중에 김치녀와 스시녀에 대한 비교까지 빠지지 않고 담아낸 것 또한 절묘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지는 못할 만한 이유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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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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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글들이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읽기에는 편한데 심적으로는 자꾸 속엣말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한두해 살다보니 책에 나오는 상황이나 감정들을 제법 겪어도 봤다. 그랬더니, 저자가 전하는 자신 스스로의 진정을 다한 조언이나 위로가 절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남을 위로해준 적도 없으면서 이 친절한 응답을 두고, '아니, 그건 아니지'하고 고개부터 가로젓고 보는 것이다. 사실, 한때는 이 다정한 위로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도 있다. 생각하기에 거의 시초가 될 법한 '그 남자 그 여자' 라는 책이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랬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내 고집이 생길만큼 때가 탄 것인지, 쉽게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이 싫다면 그건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뜻일 겁니다. 이때 너무 가까운 채로 그대로 있다보면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게 될 거예요.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거리까지 떨어져봐요. 타인으로서의 거리까지 떨어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다면, 곧 이별인거죠. - p17 이별의 완벽한 타이밍"

 

 거의 첫부분의 내용이다. 가장 첫번째 꼭지부터 생각에 생각이 꼬리물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결국 서로 다른 우주를 가진 타인이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타인의 거리에서 머물러야하고,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거리까지 떨어져서야 자신이 완성된다면/긍정한다면 이별이라니,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지만 너무 극단적 처방이 아닌가! 사실 남의 사랑문제에 있어 가장 쉬운 조언 중 하나가 "헤어져"일 것이다. 인터넷 고민 게시판에 올라오는 "헤어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들도 나 자신의 감정과 버무려지면 "그래도..." "하지만..." 하는 생각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때로 환멸이 나는 마당에 남을 사랑하는 일이 오죽하랴.

 

 이어지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걱정 마!(p19)" 를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이나, 콘돔 안쓰려는 남친에 대한 고민, 헤어지고 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개인의 성향 갈리는 문제들, 한때 유행했던 사랑의 유통기한 - 나때는 2년이었는데 여기엔 3년으로 나오는 그것에 대한 내용, 책에서는 '이별괴물'이라 표현한 안전이별에 관한 내용, 헤어졌는데 계속 눈물이 나요/힘들어요/돌아올까요 와 같은 질문 등등을 보면 이 책의 주 독자층이 십대에서 많게는 이십대 초반 정도까지 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그냥 과감히 헤어져라 하는 조언도 있으니 그런 부분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사랑에 대한 크고 작은 고민과 조언들이 전부 여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질만한 조언이 실질적으로 나오지 않았던 점도 그렇다.

 

 책을 읽기 전에 띄지 뒷면에 있는 체크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를 믿는 것처럼, 일곱개의 항목에 어느 것 하나 어긋나지 않는 자신을 꼽아보면서 이 책이 궁금해졌었다. 같은 음식을 자주 먹으면, 마음에 드는 음악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으면, 계획 없이 돈을 쓰면, 일을 미루다 막바지에 이르러 간신히 하면, 귀찮아, 졸려, 지겨워 라는 말을 자주 하면, 편한 사람에게 거칠게 말하면, 낯가림이 있으면 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나만의 자리'를 찾아야 할 때일까! 난 원래 그런 사람으로 지내왔는데! 물론 씀씀이나 생활태도 같은 것들은 고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저 항목들이 죽어가는 연애세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 안에 답이 없었다는게 함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너무 메마른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된다. 사랑에 무덤덤해지고, 혼자가 힘들지도 않은 나이에 너무 빨리 이른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게 더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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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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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소리가 들리고 짙푸른 태양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을 때 나는 이곳 뉴욕에서 내가 열렬하게 매달릴 무언가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지식, 권력, 방향.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 나는 간절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p.104) "

 

 처음에는 '단지 뉴욕의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들어보기 전에 이런 문구를 먼저 봤다. "바쿠샨(Bakushan)은 일본어로 바꾸-샨으로, 뒤에서 보면 예쁘지만 앞에서 보면 못생긴 여자를 뜻한다고 한다. 이 요리는 어느 모로 보나 못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오싹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 여자가 뒤를 돌아 진실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두려움과 흥미를 동시에 느낀다. (p.8)" 중후반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보여줬던 흥미진진함과 깔끔한 마무리가 다시 빛이 바랠듯한 대목이다. 이게 이 책의 시작이었다.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전해줄 오싹함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시작으로 우리에게 전해줄만한 '내용'이 뭐가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더 압권은 "그 여자가 뒤를 돌아 진실을 보여"준다는 표현이었다. 뒷모습이 예쁘건 앞모습이 못생기건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진실이 아닌가? 왜 이런 표현이 담겨있어야만 했는지, 전체적인 그림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다.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을 고작 여자의 외모에 관한 저급한 말로 소개할 수 밖에 없었다니.

 

 시작은 실망스러움이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책을 읽다보면 그래도 꽤 흥미롭다. 초반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 느낌은 주인공 티아가 뉴욕에 도착해서 느꼈을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뉴욕은 처음이고, 우리의 티아는 친절한 안내자가 아니다. 그녀는 음식과 문장에 한참 깊이 빠져있는 중이었고 그녀와 만나게 된 사람들-독자-에게 마음을 쏟아 안내하는 주인공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의욕과 열정에 충만한 채 새로운 도시에서 무언가를 꼭 해내겠다며 눈을 빛내는, 두려움과 욕심에 찬 여자다. 때문에 티아처럼 낯설고 정신없이 뉴욕 한복판에 그리고 업계에 뛰어든다. 현란하게 쏟아져나오는 식재료의 이름, 조리법, 제대로 경험해보기 어려울 레스토랑의 분위기들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뒤이어 패션과 브랜드들도 끼어든다. 티아의 옷차림이 달라지게 되면서부터는 처음 책장을 넘기며 느꼈던 거부감마저 점차 사라진다, 잊힌다. 그녀의 죄책감과 일상, 목표가 어그러지는 방식과 비슷하게. 묘한 부분에서 주인공에게 이입하게 된다.

 

 사용한 표현이 실망스러웠던 것에 비해 전체적인 흐름은 매우 깔끔했다. '바쿠샨'이라는 단어를 세세히 소개한만큼 중요한 복선이 되어 주었고, 갈수록 심화되었던 비밀과 잘못들로 얽힌 문제는 적절한 순간에 터져나왔다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이 깔끔함과 긍정적인 결말이 현실성을 무너뜨린다. 아니면 뉴욕의 삶은 원래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쿨한가? 소개되는 음식과 레스토랑, 그녀를 뒤흔드는 문제들에 비하면 티아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한 편이 아쉬웠다. 티아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교류 사이에서 에메랄드와 멜린다를 번갈아 재단하다 문득 다른 인물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 "마음이란 건 물이 많은 호수 같은 거야." 멜린다는 와인 잔을 들고 말했다. "물이 불기도 하고 줄기도 하지만, 그래도 같은 높이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거든. 썰물이 와서 물이 빠져나가면 말이야." 멜린다는 남은 와인을 한 번에 마셔버리더니 하던 말을 마쳤다. "무언가를 들어오게 하면 되는 거지. 그러면 우리 머리로는 그 차이를 몰라." (p.356)" 미각을 잃어버린 평론가, 매력이 넘치는 에메랄드, 같이 있으면 죄책감을 남기는 멜린다, 그리고 감각을 일깨우는 남자 파스칼.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뉴욕도 조금 더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담없는 책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가득 묻어나는 느낌을 받았는데, 언뜻 보면 화려한 보석같지만 사실은 글리터같은 반짝이 가루였다는 감상이 남는다. 심각하고 무거운 책들 사이에서 기분전환이 되어줄만한 시간을 줄 한 권이 될 것이다. 전채나 디저트와 같은, 그러나 메인이라 여기기는 어려운 '단지 뉴욕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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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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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가끔 슬픔은 정신적인 것이고 갈망은 육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상처고 다른 하나는 절단된 팔이나 다리, 꺾인 줄기에 달린 시든 꽃잎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바짝 붙어서 성장하다보면 결국에는 한 뿌리를 공유하게 된다. 우리는 상실을 논하고 치유하고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인 특성상 특정한 윈칙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운데가 부러진 식물은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냥 죽는다. (p.193)"

 

 "베어타운"을 읽는 동안 어느 날은 눈이 왔다. 바람이 세차게 분 날도 있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집 안은 손톱을 파랗게 만들게 추웠다. 봄은 바깥에 있었고, 집 안은 아직 겨울이었다. 발끝에서 지겹도록 머무는 냉기를 느끼며 베어타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보여주는 세계는 처음이었다. 이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이 새로운 세계를, 베어타운을 좋아할 수 있을까. 가만히 책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두께를 가늠해보며, 약간은 염려하며 그보다 더 조금 기대를 품고 읽어나갔다.

 

 작은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천히 소개받으며 베어타운이 주는 첫인상을 가늠해봤다. 모든 것을 오로지 하키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이분법으로 나뉘는 도시에 질려갈 때 쯤 길게 늘어진 실마리를 찾아냈다. 실마리를 잡고 난 뒤부터는 쇠락해가는 도시와 이를 일으켜낼 운동 경기, 열광하는 사람들과 성장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급격히 걷혀나갔다.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무겁고도 깊었다. 다소 생소한 하키 팀의 성공담을 감명깊게 볼 수 있을까 염려했던 일이 사라지자, 그저 이 이야기가 그냥 하키 팀의 성공담이었길 바라게 되었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소년들의 어깨에 마을의 활로가 걸린 것처럼 구는 사람들의 행태가 경멸스럽고, 선수들이 쓰는 떡친다는 표현이 불쑥 등장할 때마다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키도, 선수들도 돈벌이를 위한 도구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선수들은 마을에 불러올 돈이 되고, 승리를 위해서 잘못된 행동들이 묵과된다. 마치 재능있는 선수의 특권 같지만,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 곰에게 주는 먹이 보상과 다름이 없다. 팀의 결속력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한 강요된 남성성은 기민한 영혼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 속에서 보보라는 인물의 성장은 거의 유일한 위안이고 웃음이 된다.

 

 청소년팀이 우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온 마을이 그것에 집중할 때 '마야의 사건'이 터져나온다. 팀에서 가장 유능한 선수 케빈에게 준결승 승리 축하 파티에서 페테르의 딸 마야가 성폭행을 당한다. '케빈에서 초대를 받아 어른들이 없는 빈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고 즐겼기 때문에' 절망적인 순간에 어린 소녀를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도 강제로 뜯겨나가는 블라우스 단추를 바라보며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질문들이 무얼지 헤아린다. 슬프게도 그것은 "술을 마셨는가? 어떤 관계였는가? 제대로 저항했는가?" 따위의 익숙하고 어리석으며 모욕적인 질문들이다.

 

 이 사건은 베어타운을 작은 충격에 빠뜨리고 충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를 뒤흔든다. 깊숙히 베어타운 안으로 몰입해 나가다가도 문득,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시점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베어타운에서 성폭행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문학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말한다면 바로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주 쉽게는 왜 방금 전까지 당신과 웃으며 술을 마시고 키스를 했던 여자가 "싫다"고 하면 더 이상의 어떤 행위도 허락치 않는 것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현실이 절망적인데에 비해 "베어타운"은 희망적으로 끝을 맺었다. 마야가 케빈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궁금했던 것보다,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할까봐 걱정하며 읽은 것치고는 희망찬 결말이었다. 이 이상의 소설적 허용은 줄 수 없다는 듯이 모든 인물들이 변화하고, 상황이 반전되는 사이다같은 결말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 속 소녀는 무릎을 꿇지 않았고, 그녀의 곁에는 가족과 친구와 진실을 보는 지지자들이 남았다. 책장을 넘기느라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쥐고 서서히 "베어타운"을 걸어나오며 이 소설이 꽤 트렌디했음을 느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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