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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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귤'을 읽는 동안 두통이 일었다. 그 두통이 '청귤'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지, 날이 추워지면서 몸상태가 난조를 보이는 까닭인지, 아니면 책을 읽기 싫었던 내가 만들어 낸 두통인지 모를 일이다. '청귤'의 탓이 아니더라도 '청귤'에는 두통의 책임소재를 물을만한 요소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근래의 정신이 순두부처럼 무뎌져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청귤'의 표지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제발 미숙하고 일러 청량하고 싱그러운 이야기가 있으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 시큼하고 씁쓰레한 것만 흘러나왔다. 머리도 아프고 뒷맛도 좋지 않아 책을 읽고 나서 공연히 개수대에 쌓여있던 설거지를 해보기도 하고, 잠깐 밖으로 나가 커피전문점에 다녀와볼까 생각해보다 냉장고 깊숙이 넣어둔 술을 한 캔 꺼내었다. 시원하고 짜릿한 것이 목을 따라 내려가자 그제야 좀 '청귤'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사실 '로레나'라는 첫 시작부터 어딘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네일을 하는 로레나의 모습을 읽으며 얼마 전 휴가로 다녀온 베트남에서 받은 마사지가 떠올랐다. 나에게 처음 마사지를 해준 사람은 한눈에 봐도 어리고 체구가 작은 소녀였다. 베트남도 마사지도 처음이라 알아보며 '내가 마사지를 잘 받을 수 있을까'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마사지를 받아야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동남아 가면 1 일 3 마사지도 받는대더라며 불편함을 다독이며 마사지를 받았었다. 그런데 '청귤' 안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외면했던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던 마음을 도망가지도 못하고 마주하고 만 것이다. 페디큐어를 하겠다며 로레나에게 발을 턱 들이민 큰 삼촌이 된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청귤'은 내 안에 있던 불편함의 고리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싶게 하나씩 들이밀었다. 어릴 때 앓은 뇌수막염으로 사춘기시절까지 사시가 있던 혜정의 이야기는 어린시절 사시가 있었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아이는 한쪽눈에 하얀 의료용 안대를 하고 다녔는데, 사시가 꽤 심해 초등학교 무렵 수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애의 눈이 교정되는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조용한 따돌림을 당했다. 처음엔 그 아이의 눈이 상대방을 째려보는 것 같아서, 그 뒤로는 남들과는 달라서. 그 아이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나는 꽤 절친한 그애의 친구였는데, 수많은 추억이 생겼어도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어린시절 혼자 놀이터 모래밭에서 놀고 있던 그애의 모습이었다.

 

 '청귤'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기 보다는 내 안에 흩어져있던 조각들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볼까도 싶었지만 책을 읽고 너무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 역시도 좋은 이야기꾼은 아니니까. 소설집 안의 모든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고 기대보다 무거웠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런 계기없이는 좀처럼 떠올리지 않을 것들을 문득 꺼내보게 되기도 했고. 흐린 가을날에 읽어볼만한 책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더 궁금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내 이야기만 늘어놓은 감상평이 되었지만, 이쪽은 진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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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산다는 것 - 불필요한 감정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양창순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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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계절을 지나오는 동안 반대로 몇몇의 인간관계를 잃으며/정리하며 정서적으로는 차갑고 서늘한 시련을 맞았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왔고 가볍고 거추장스러운 인맥은 이미 다 정리했다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찾아온 소원함은 의외였고 뜻밖의 상실이었다. 섭하고 혼란한 마음에 지인들을 붙잡고 토로해보기도 하고 얼마간을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떤 의미로 받아들어야 하지' 고민해보았지만 20년 가까운 세월에서도 서로의 경중이 달랐던 탓이고 나의 욕심이었던 탓이지 다른 결론은 없었다. 소란했던 마음도 계절에 따라 가라앉고 이제 막 안과 밖 온도가 반전되어 가려는 시기에 이 인간관계에 대한 책을 만나게 되었다. 어떤 부분은 그렇구나 싶고 어떤 부분은 조금 아쉽구나 싶은 다소 심심한,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담백한 책이다.

 

 고민의 터널을 지나오고 난 뒤이고 평소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위에서의 내용이라 책을 읽으며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지금 막 인간관계로 괴로움을 겪고 있거나 삶이 너무 번잡하여 방향성을 찾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는 2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마음 결을 정리할 틈은 되어 줄 것 같다. 머리로는 다 아는 내용이어도 괴로울 때는 생각이 마음까지 가서 닿기 오래 걸릴 때도 있고, 평소보다 감정의 낙폭이 크니 책이 주는 영향도 더 크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니멀 라이프에 관심이 있거나 이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비슷한 결의 흐름으로 공감하며 읽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몇 부분이 '하얀 개 소니아'일 것으로 추정되는 소재가 짧게 등장하는데 다른 개의 이야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알고 있는 소니아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게 설명되어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까맣던 털이 하얗게 변해버린 리트리버 소니아의 이야기는 일본 티비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책으로 나올 정도로 유명해서 몇번이고 찾아봤던 내용이다. 여기서도 까만 털이 하얗게 되고, 원반 장난감과 관련된 내용, 나중에 다시 털이 까맣게 돌아왔다는 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몇가지 요소가 비슷해 소니아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주요 골자를 뺀 내용이 달라 왜 이렇게 내용을 옮겼을까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p.175-176 4장 담백한 삶을 위한 마음 솔루션 중)

 

 그 외에도 1장의 첫 꼭지부터 '먹방'에 대한 언급이 눈에 들어왔다. " 그런 의미에서 나는 먹방의 유행이 일종의 '정신적 퇴행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덜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병이 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 엄마부터 생각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p.25 1장 먹방과 스트레스, 담백함의 연결고리 중) " 앞뒤의 내용을 살펴 읽으며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마땅히 풀 다양한 방법이 없어 이를 위한 한 갈래로 먹방이 대두되었다는 요지로 전달하려는 뜻을 이해하긴 했지만 '정신적 퇴행 현상' 이라는 표현에 우선 깜짝 놀랐던 마음은 " 혼밥은 사회적 자폐"라는 표현을 봤을 때의 뜨악함을 연상시켰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핵심은 마음가짐을 담백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는 몇 해 전부터 열심히 유행해오던 미니멀라이프 적인 삶의 태도와 같다. 다만 이 담백함에 대한 방향성이 내부와 외부로 갈라진다. 인간관계든 물건이든 필요해서, 좋아서, 보여주려고, 욕심이 나서 같이 여러 이유로 더 많이 좋은 것으로만 가지려고 하기를 멈춘다. 그리고 가급적 비워내고, 내려놓으려 노력한다는 의도가 공통적이다. 하지만 욕망을 내려놓고 비워내는 일이 어디 쉬운가. 오히려 다른 저작물인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는 제목의 책에서 더 심리적인 친밀함을 느낀다. 12년에 까칠하게 살기로 했던 사람이 까칠과는 거리가 먼 담백한 삶을 이야기하는 약 6년 사이의 간극이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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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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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늙어가는 용기, 나이 든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용기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 바꾸는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_ p.93 4장 다시 살아갈 용기"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최근 대형 검색 포털 사이트의 내리막을 실감했을 때였다. 길게 풀어서 돌려말할 것 없이 '네이버'는 한 시대를 풍미한 검색 엔진이었다. 서로의 지식을 나눈다는 의미로 누구나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는 '지식인'이며, 개인 '블로그'에 사진과 정보를 빼곡히 올려놓은 글들로 정보를 검색하고 얻은 경험이 구세대라면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십대들은 이 정보의 창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초록창을 켜서 00하는 법 등을 검색했던 우리와 달리 구글과 유투브에 정보를 검색한단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특히 게시글, 사용 방법 등을 설명해놓은 글을 보는 것보다 유투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는 방법을 선호한단다. 읽는 세대에서 보는 세대로 변화한 것이다. 학교 교실에 우리가 생각하는 칠판이 사라지고 대형 스크린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변화는 분명하다. 덧붙여 과학시간에 공부한 뒤로 누군가 침을 튀기면 '아밀라아제 나왔어/묻었어' 하던 장난도 '아밀레이스'로 표기가 바뀌었단다. 그렇다면 '아이오딘'은 무엇일까? 구세대들이여, 세대차이를 느껴보라.

 

 신체적인 노화는 사실 스무살이 넘어가면서부터 해가 다르게 작년이랑 차이가 남을 서서히 느껴온터라 조금씩 늙어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데, 정신적인 부분 요즘의 세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느낄때면 타격이 크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쉽게 보편의 상황에서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혼잣말을 하길래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했더니 줄이 없는 이어폰을 꼽고 있더라, 혹은 청소년들이 '문상' 있냐 가져왔냐 하는 말을 하길래 애들이 웬 문상을 하는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문화상품권의 줄임말이더라는 얘기는 우습지도 못한 일화가 됐다. 하다못해 편의점 간식도 'ㅇㄱㄹㅇ'이니 'ㅂㅂㅂㄱ'니 하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세상이니 더욱 그렇다. 세상의 속도에서 뒤쳐지며 생기는 이런 어리둥절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질 것이다. 책에서는 좀 더 먼 삶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어찌됐든 책의 제목과 가까운 나이이다보니 조금씩 멀어지는 것들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마음의 준비는 가볍게 시작했지만 책은 시종 진지한 어조로 노화와 간병,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소 고루한 면도 있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 표현도 지나치게 익숙해서 큰 위안이나 전환이 되기 어렵고, 본인이 늦은 나이에도 한국어 배우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의 재활에 대한 내용 등은 의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어쩐지 멀게만 느껴진다. 나도 소소한 도전을 해야겠다기 보단 '대단하시네요' 하고 말아버리게 된다. 거기에 부모님의 나이듦에 관한 내용은 인상적이면서 안타까웠다. 고령화와 핵가족화를 넘어선 1인 가구의 증가 등으로 심화될 노인 간병 등의 문제를 인생의 한 부분으로 다룬 점에는 공감되었다. 그런데 간병으로서 오는 어려움을 "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겼다'라고 생각해보(p.162) "자는 맺음은 매우 아쉽다. 물론 매우 옳은 말이고,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그 시간조차 소중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실제적 간병 상황, 간병인에 대한 현실적 조언보다 못한 형이상학적인 위로의 말만 남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어지는 8장과 9장의 내용은 좀 더 계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쉬웠던 마음을 풀어가며 읽었다. 전체적인 내용보다 소제목들이 간결하고 핵심적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자기계발서여서인지, 일본저자 특유의 감성을 건드리려는 의미부여들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큰 감흥을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계절도 가을이고, 올해도 벌써 다 끝나가고, 나는 한 살 더 늙는거고, 혹은 이제 곧 마흔 즈음이 되가고, 아니 이미 넘은지 오래고, 어쩐지 마음이 우울하고, 문득 살펴본 부모님 얼굴에서 주름을 더 발견했고, 갑자기 한숨도 나오는 것 같고, 날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어두워지는지 모르겠는 마음이 자꾸만 불쑥 솟아나는 사람들은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어른이 되니까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고 좋다!거나, 가을이 되니까 붕어빵 사먹을 수 있어서 이득!이라거나, 할로윈, 크리스마스, 눈오는 날 제일 좋아! 등 약간의 긍정적임이 남은 사람들보다 인생의 황혼,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 한 해의 마무리가 아쉽기만 한 사람들에게 어쩌면 조금 공감을 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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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 -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의 딸의 인생을 바꾸는 50가지 교육법
손경이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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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이미 성인이 된 세대들은 성교육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비웃음을 가지고 있다. 언제고 성교육은 진짜로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을 교육시켜준 적이 없었으며, 인생의 어느 시점에 몇번을 받아도 늘 음지에서부터 전해오는 정보와 문물을 앞서나갔던 적이 없었다. 성교육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두시간 수업 대신 시간을 때우는 기능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장점이 없었다. 물론 학생 시절에 그만하면 큰 장점이라 쓸모는 없어도 성교육 시간을 좋아했다. 인체 해부도가 나오면서 어느결에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난자를 만나러 갔는지 모를 영상물을 감상할때면 어두운 틈을 타서 좀 졸수도 있고, 서로 알건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아는척 '응~? 그러니까 조심해!' 하고 끝맺는 선생님의 민망함도 우스웠다. 옆학교에서는 순결 서약을 하면 사탕도 준다던데, 순결이고 뭐고 사탕이나 나눠주지 하는 부러움도 있었다.

 

 나의 성교육 인식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면, 그 이름도 찬란한 '구성애' 강사였다. 그것도 세대가 맞아서라기 보다 그 이전의 성교육은 전무했고, 구성애 강사의 성교육 내용이 워낙 큰 화제로 다가온 솔직한 성교육이라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 이후로는 딱히 성교육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성교육의 유용함에 대한 불신도 불신이거니와 성인이 되고나니 어른에게도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아서였다. 이 두가지 이유 모두 손경이 저자의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을 읽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크나큰 착각이었다. 십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교육은 큰 발전과 변화를 이뤄냈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하려면 성교육 부재 여건 속에서 자라난 어른들부터 성교육을 하기 위한 성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교육의 반복 등장으로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날 것만 같지만, 결론은 이 책은 굉장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의 가치를 매우 얕잡아보고 책읽기를 조금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그럼 한 번 조금 읽어줘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반성합니다. 하지만 핑계를 대자면 성교육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갖게 한 기성 교육과 문화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뿐,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게다가 '딸' 성교육하는 법이라니. 안 읽어도 알 것 같은 생일, 가슴 몽우리, 처녀막 등의 단어들이 벌써부터 지루했다. 그런데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은 달랐다. 딸 성교육하는 법이라고 했는데, 읽다보면 부모의 성과 인식을 교육하고 있다. 읽다보니 교육 당하고 있는 책이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기존의 혹은 쉽고 편한 길로 가는 교육법을 원한다면 당황할 것이다. 진짜 아이의 성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읽는 부모라면 책을 읽고 난 뒤에 더 크게 다가오는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는 과제에 무거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만족스러운 점은 표괄적인 의미의 성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최신의 민감한 주제들을 예로 들면서. 성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연예인 봉태규의 아들 시하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주 가볍게 티비로 보면서 의문을 품었거나 공감했던 내용으로 관심을 끌고 이해를 돕는다. 젠더교육에 대한 주제에서는 다양성을 함께 언급한다. 인종, 장애같이 디폴트 밸류된 고정관념에 대해 건드린다. 성폭력에 관한 주제에서는 예방 옷차림, 행동수칙을 조언하기 보다 생존의 중요성, 피해자에게 씌워지는 프레임, 미투 등의 주제를 다룬다. 어쩌면 페미니즘이나 미투 같은 단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이 책을 못견딜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을 가진 부모라면 그 아이를 위해서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성교육을 할 것인지, 주체성과 자기 결정권을 어떻게 심어줄 것인지 고민해본다면 좋겠다. 흥미롭고 인상깊게 읽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쁜 마음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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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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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전쯤 일이다. 갑자기 왼쪽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무거운 것을 들지도, 손목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파서 덜컥 겁이 났다. 주로 사용하는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 아픈 것도 이유를 모르겠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팔목에서부터 뼈에 구멍이 생기고 있는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덜컥 차를 얻어타고 아는 사람에게 들은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주차해서 접수를 하러 가니 교수님의 진찰을 받으려면 대기가 삼사개월은 넘어간다고 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그냥 돌아오고서 한동안 손목을 부여잡고 생활했다. 내 진료 대기 차례가 되자 통증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의 저자 김신회가 오른손에 통증이 생겨 강제휴업 상태로 들어간 계기를 통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읽고는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왼쪽 손목이 아팠던 나는 어땠던가.

 

 이 에세이는 몇 퍼센트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꽤 생생하다. 정말 너무나도 가까웠던 지인과 일년을 함께 살고 난 뒤에 어색해졌다는 단락에서는 불편함마저 느껴졌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집 한 켠을 내어줄 정도로 살가웠던 지인이 데면해졌다면 그 이유가 어디서부터 왔을지! 그리고 본인은 왜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인지! 게다가 이런 내용을 글로 써도 되는 것인지! 까지 걱정이 앞섰다. 날 것 그대로의 내용은 아니겠지만, 원래 작가들은 자기의 모든 것들을 이렇게 내놓는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일까. 이런 상황의 자신에게는 모두에게 다 사랑받을 수 없으므로 관대해지고, 스타벅스 계산대 앞에서 무슨 음료를 마실까 가벼운 고민을 불특정 다수에게 묻는 결정장애의 타인의 삶에선 움츠리면 나아갈 수 없으니 변화해보자고 말하는 것도 어색했다. 맞는 말이고 좋은 충고이긴 한데, 관대함의 범위가 나와 타인에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은 초반 부분을 읽으며 주로 들었는데, 사실 이런 날카로운 반응이 돋아나는 것은 저자의 탓이라기 보다는 내 개인적인 일들이 에피소드와 반응해 떠올랐기 때문이 더 컸다. 워낙 생활감이 묻어나는 주제들이어서 비슷한 경우가 나에게도 하나씩은 있었다. 이유를 잘 모른채 멀어지게 된 관계나 속으로만 삼키고 끊어낸 관계도 있었고, 밀떡과 쌀떡에 대한 선호도나, 다소 어려운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생각, 사야된다고 생각하면서 몇번이나 무슨 제품으로 살지 간만 보고 사지 못한 물건들, 선물에 대한 관점을 토론했던 기억도 있었다. (선물을 할 때 실용적인 물건을 고르는지, 필요하지 않아도 있으면 좋을만한 물건을 고르는지 혹은 내가 받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고르는지,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고르는지 에 대한 토론) 그런 일상적인 내용들 사이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생각은 나와 다른데? 왜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다 '사과의 타이밍'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날선 마음이 점차 공감하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변해갔다. 자연스럽게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에서 저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하며 달라졌다. 그러자 그때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구나 하고 가볍게 저자의 일상을 듣듯이 편안하게 책이 읽혔다. 시선이 좀 더 관대해졌을 뿐인데, 타인의 시선과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자 내 것도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며 스스로에게도 '그럴 수 있어'하며 관대해졌다. 처음엔 저자는 손이 아픈 동안 이 책을 위한 준비를 했는데, 나는 손목이 아픈 동안 대체 뭘 했었지?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 그때 아팠지. 좀 더 잘 쉬었어야 했는데 팔목을 너무 썼어. 하고 생각도 해본다.  에세이라는 분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나름 좋은 마무리로 잘 읽어냈던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책 속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사람이 아닐수도 있고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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