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세계사 - 교양으로 읽는 1만 년 성의 역사
난젠 & 피카드 지음, 남기철 옮김 / 오브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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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도 그렇지만, 내 자신에게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책은 30, 나 자신이 70. '에로틱 세계사'라는 제목에서 기대할만한 내용은 있는데 없다. 한 문장에 한번씩 섹스, 페니스, 음경 같은 말이 꼭 들어갈 정도로 오픈되어 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지루하다. 어린시절 처음으로 코스모폴리탄을 샀던 이후로, 미용실 잡지에 손가락을 끼워 페이지 표시를 해놓고 읽은 코너가 있었던 이후로, 성에 대한 내용으로 점철된 텍스트를 맞이하여 지루함을 느낄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이 바로 그걸 해낸다. 에로틱은 죄가 없는데 세계사 라는 부분이 문제였을까.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해 많이 알아서 지루함을 느낀걸까 생각도 해봤는데, 아니 내가 알면 얼마나 뭘 안다고 싶기도 하고, 솔직히 tmi인 정보가 쉴새없이 주어지는 내용이라 그게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 판에 박힌 학교 성교육 수업도 수업 안하고 놀며 때울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이고 즐거웠는데, '에로틱 세계사'는 정년 퇴임을 십년전쯤 한 노교수가 연 특별 강의를 수강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피임법(p.35)이 실제로 효과가 좀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피임법이라 하면 콜라나 커피를 마셨더니 피부가 까만 아이를 낳았다거나 하는 90년대식 유머같은 허무맹랑한 방법일거라 생각했는데. 인류 문명의 기원이 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문득 떠오르며 고대인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고 갑니다. 또, 여성의 성욕/성감이 남성보다 아홉배 강하다(p.55)는 부분에서 테이레시아스가 여성의 육체를 버리고 남성을 선택한 이유를 개인적으로는 생리, 임신, 출산의 문제로 봤다. 여성의 신체가 아홉배 더 섹스를 즐길 수 있다더라도 테이레시아스가 여성의 몸으로 산 7년 동안 아이도 몇 낳고 매춘부로 살았다고 하니, 공백이 없고 오르가슴에 도달하기에 간편?한 남성의 육체로 돌아가길 꾀하는 편이 좀 더 경제적이지 않았을까. 최근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여성의 생리에 대해 과거와 현재 삶의 양식을 비교하여 설명한 글을 봐서 직관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다. 이견 받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와핑'이라는 행위가 관음과 자극을 위한 역겨운 의도가 아닌 근친에 의한 유전적 방어를 위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누이트들의 스와핑(p.131)은 전통적인 '램프 불끄기 놀이'를 끝낸 뒤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내를 빌려준 남편의 성을 이름으로 붙여준다는 것이다. 상대 남자의 성을 공공연히 이름으로 쓰는 자식을 키우다니. 이누이트들의 저런 문화가 가능했다면 종족보존은 개인이 아닌 종의 보존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더 크다. 그렇다면 현대의 스와핑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현대의 스와핑에서도 상대방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생긴다면 그들 부부는 상대남성의 성을 따 아이 이름을 짓고 자식으로 잘 키울까. 유전질환을 막기 위한 필요의 이유가 아니라면 스와핑을 원하는 현대인들의 이유는 뭘까. 문득 스와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간음하지 말라(신 5:18)는 기독교적 결혼관과 불교의 '10선도' 등의 계율을 따르며 생긴 학습된 견해는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는 뒤의 모수오족(p.138)의 섹스 파트너 공동체, 카사노바의 수녀 여자친구(p.193), 미공군의 스윙어 클럽 (p.269) 부분에서도 비슷하게 나온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서는 상상의 간통으로도 교수형(p.173)을 당할 정도로 시선이 달라진다. 성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것이다.


 읽다보니 과거와 현재 동안 수많은 성행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한번 존재했던 행위가 금기시됐다고 해서 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문명의 행위들도 그러할까. 과거에는 자행되어 왔으나 현재에는 아예 사라진 문화나 행위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스킨쉽에 후진은 없다는 명언이 인류사의 큰 흐름에도 적용되어 아로새겨져 내려오고 있다니. 모든 연인들은 그 점을 잘 기억하고 단계를 소중히 하도록. 내용 자체는 괜찮기 때문에 아마 성/섹스에 대한 내용이니깐 흥미진진하고 재밌겠다는 고정관념 섞인 기대를 버리고 읽는다면 좀 더 나을 것이다. 과연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섹스는 어떻게 그 모습을 달리하며 이어져왔는가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알고 싶은 학구적인 눈으로 책을 읽기를. 왕년에 잡지 좀 읽었던 우리들은 다음월 호 잡지를 읽는 편이 더 재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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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는 노땡큐 - 세상에 대들 용기 없는 사람이 뒤돌아 날리는 메롱
이윤용 지음 / 수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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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예쁘고 가볍다. 한편으로는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제목이. 환기도 할겸 요즘은 종종 카페를 찾아 책을 한권씩 읽곤 하는데, 이 책은 어쩐지 민망했다. 제목이 어쩐지 나를 '세상에 대들 용기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고, 기껏해야 '뒤돌아 메롱'만 날리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세상에 대들 의욕이 없고, 인간관계 파탄 내기는 식은 죽 먹듯 경험하고 살았는데도. 그러니까 난 그렇게까지 소심한 사람은 아닌데! 하다가 오히려 그걸 신경쓴게 더 소심한가 싶지만. 거기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류의 책이 아니라 더욱 내 필요에 의한 선택처럼 보이지 않으려 했다. 자존심이 있지. 엄밀히 따지면 '이제 너는 노땡큐' 해서가 아니라 '다 꺼져 이것들아' 같은 느낌으로 살아서 친구가 없습니다.

 

 사실 소소하게 공감될 법한 일상의 상황, 관계들에 대한 내용이라 킬링타임으로 가볍게 읽기엔 좋다. '자니?', '지금 어디야?' 같은 전 남친 시리즈나 휴게소에서 라면먹다 남친이랑 헤어진 친구 얘기는 웃긴다. '상행위'에 음란마귀 낀 눈도, 미역 50g이 20인분이 된다는 것, 스타벅스 다이어리 같은 얘기도 심지어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나 나눈 얘기라 더욱 공감이 된다. 나 역시도 매년 다이어리를 모았는데, 말 그대로 쓰진 않고 모으기만 해서 어느 순간 현타 맞고 (지난해 디자인도 별로여서) 끊었다. 그런데 친구가 문득 3월이 되어서야 '작년 스벅 다이어리 또 받았어?' 하고 물어와서 '아, 혹시 내 인생을 보고 가서 썼나' 새삼스러웠다. 다만 이 정도 얘기는 이미 여기저기서 많이 본 내용이라 식상하다. 굳이 또 꺼내서 모아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심술궂은 생각이 든다.

 

 가장 공감됐던 것은, 바로 오늘 동네에 있는 큰 마트에서 과자 1+1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접수했다. 아침을 잘 챙겨먹고, 양치를 하고, 눈곱이나 좀 뗀 다음 마트에서 하나둘 모은 쇼핑백을 네개 챙겨 전장으로 떠났다. 십만원 어치의 과자를 반값에 사서 쇼핑백에 구겨 담아 돌아오면서 승전의 기쁨을 무게로 만끽했다. 집에 돌아와서 과자를 쌓아놓으니 서재 겸 팬트리로 쓰고 있는 작은방이 더 작아졌다. 일년에 한두번 있을까싶은 이 행사를 위해 오랫동안 시물레이션을 해왔는데, '쇼핑 욕심 (p.99)'를 읽다가 문득 '이게 아니었나' 싶어졌다. 유통기한이 반년 정도 남은 십만원어치의 과자를 먹는 일은 누가하는 걸까. 그리고 그 사람은 십년정도 한결같이 다이어트 중인 인물일텐데. 벼락같은 뒤늦은 깨달음을 뒤로하고 다음 1+1 행사는 정말로 진짜 딱 10개의 과자만 사기로 생각해둔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길티플레져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내 스타일 아닌데, 솔직히 유치하다고 생각하는데 읽다보면 웃긴다. 40대의 연애는 진짜 그럴 수 있을까, 정말 그렇다면 느물대는 중년의 불륜 연애는 왜 이다지도 드라이하고 산뜻하지 못한 전설을 남길까, 나는 연하남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가 누나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인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는 것과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해줘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쪼잔하고 구구절절 구질한 생각을 종류별로 하면서 낄낄대는 시간을 조금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 끝에는 올 겨울이 오면 가끔 만나는 친구 주머니에 슬쩍 천원씩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한다. 그건 정말 괜찮은 내용이었다. 자신이 아직 어리고 무르다고 느껴진다면 '노땡큐'에 익숙해지도록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아니라면 재미로 한번쯤 읽어봐도 나쁘지 않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싸이월드 다이어리 감성? 혹은 파워블로그의 일상글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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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을 위한 미래 인문학 - 새로운 세대를 위한 지적 탐험
윤석만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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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양인을 위한 미래 인문학'은 재밌다. 읽기 편하고,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접근성 좋게 다룬다. 최근에 읽은 야마구치 슈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철학은...'이 실용의 측면에서 철학을 삶의 무기화했다면 '... 미래 인문학'은 멸종 위기의 교양인을 양성하기 위해 이 정도는 알고 사유해볼 준비가 되있으셔야 하지 않으시겠냐는 제안서 같았다. 물론 읽기보다 보기에 더 익숙한 현대인들의 독해력과 참을성을 잘 고려한 양식으로 읽기에 부담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대넓얇' 류의 책에 익숙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커피체인점 한구석에서 백색소음을 배경으로 무난히 읽을만하다.

 

 이전에 읽었던 '철학은...'이 재밌는 책이긴 했는데, 과연 여타의 소설이나 '~해도 괜찮아' 류의 접근성 좋은책들에 비해 얼마만큼의 반향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인터넷에서 영업?내지는 반응이 보이는게 아닌가. 그 성공의 밑받침에는 '철학은...'의 미끼상품과도 같았던 '르상티망'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동안 쉽게 '신포도'라고 표현해왔던 개념의 고급스런 대체어를 소개하면서 지적 허영심을 소소하게 채울 수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런데 이 '...미래 인문학'은 그 이상의 재미와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몽골, 중국 등의 문화와 역사를 망라하며 미래에 대한 탐구를 곁들이고 있기 때문에 책으로 읽는 '알쓸신잡' 같다.

 

 재밌었던 몇가지 부분을 소개하자면 첫째로 기계, 인공장기와 컴퓨터로 대체될 수 있는 미래 인간을 두고 어디까지 기계와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인공장기를 단 사람을 기계로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한 사람의 신체와 기억을 본떠 옮겨와 인공으로 만든 휴머노이드가 있다면 그 사람의 지인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휴머노이드를 자신의 친구로 인정해줄까? 이런 전면적인 개조가 아니더라도 뇌를 바꾸는 '더 게임'이라는 영화처럼 외형은 바뀌었으나 기억정보를 담고 있는 뇌를 인증을 통해 바뀐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줄까? 이런 가벼운 의문들부터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저출산에 대한 살벌하게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이 문제를 (p.110 7 바보가 돼 버린 사람들)의 내용과 이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역플린효과 혹 덤앤더머로 비유되는 인류의 지능저하 문제에 관련한 카툰을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교육과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아이를 적게 낳고 반대의 경우에서 아이를 더 많이 낳기 때문에 인류 지능의 평균이 낮아지게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재밌는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생활에 여유가 있을수록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기반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못한 경우 둘 다 포기하는 세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 인문학의 바보가 돼 버린 사람들'에서는 단지 부모세대의 교육 소득수준 뿐 아니라 기술발전을 통한 알고리즘 수집을 바탕으로한 선택적 정보제공, 이미지와 동영상 중심의 뇌의 피동화를 함께 언급했다. 다만 저출산 문제가 대두되는 한편 인류가 가진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인구과잉과 자원 고갈이 꼽힌다는 점이다. 이는 다운그레이드를 추구하는 책 초반의 타노스의 주장(p.69 1 타노스의 변명/ p.198 8 여섯 번째 대멸종, 지구 파멸을 앞당기는 인류)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이쯤되면 인구의 문제는 독일과 영국에서 출산률 비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 이주민들로 넘어가고, 난민 문제로 번진다. 거기에 인도나 중국 같은 나라의 보호/관리되지 않는 출생자들과 인권문제도 따라온다.

 

 '미래 인문학'은 친절하게도 책의 한 권에 걸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접근시키며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권한다. 이를테면 철기 사용에 따른 문명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p.211 1 2500년 전 철기 혁명으로 활짝 핀 인문의 꽃) 자연스럽게 관포지교 같은 고사성어를 끌어와 소개한다. 거기에 다른 참고서적이나 이론보다 더 효과적으로 다양한 영화의 내용을 예로 들어준다. 덕분에 대부분의 내용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우민화의 대표적 장치인 3S 중 영화(Screen)가 교양서적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최근 접한 교양서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딱딱한 책의 인상에 굴하지 않고 (...) 넓은 관심을 받게 된다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 중고등학교의 논술이나 토론 그룹 활동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관심이 높을만한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고 무엇보다 쉽고 재밌다. 여러 상황에 참고할 수 있도록 영화가 소개되어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잘은 아니어도 기본은 알고 싶은 초심자에게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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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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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가끔 발뒤꿈치에도 굳은살이 배겨서 칼로 슥슥 도려냈었다. 잘라낸 그 단단한 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린 나는 말없이 슬펐다. 회사에서 밀려나고 가게마다 망해서 결국 여기까지 온 아버지. 소 발굽을 잘라내면 아마 이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밀리지 않을 거고 이런 소 발굽이 내 살에서 나오지도 않을 거다. _ p.182 "

 

 첫 직장을 들어갔던 때가 떠오른다. 십여년 정도 지난 일이다. 좋은 곳도 아니고 별다른 포부는 없었지만 그때 느꼈던 긴장과 부담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이라 나와 같은 시기에 입사한 신입은 한명이었다. 전공분야는 내가 더 적합했지만, 다른 신입의 동문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교수의 추천을 받지 않고 들어오는 나와 같은 경우가 특이한 쪽이었다. 일을 배우는게 늦은 편인 나와 달리 신입은 센스있었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서로 뿐이지만 불현듯 의식되는 평가의 눈길 앞에서 조금 더 나은 점수를 받으려 노력하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있는동안 가장 가깝게 지내고 종내 퇴사도 같은 날 했지만, 처음 무리에 스며드는 과정동안은 부정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지나와 생각해보면 서로 경쟁을 할만큼 노력할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중력'을 읽으며 불쑥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숨이 막히는 소설이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후보들의 과정을 따라붙으며 높아져가는 중력의 무게를 함께 느끼는 기분이다. 티비에서 해주는 경쟁 프로그램은 즐겁게 보는 편이라 몰랐는데, '중력'안의 경쟁은 내 발목까지 붙드는 기분이 들어 어딘지 찝찝했다. 이진우가 실제로 겪었던 직장에서의 문제보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선발 과정 동안을 지켜보며 지난 직장생활을 떠올렸다는 점이 우스웠다. 우주인씩이나 되지 않아도 우리의 삶에는 고난과 역경이 버젓하다.

 

 소유즈 복사 자료에 대해 추궁당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이해하기를 놓아버리기에 이르렀다. 자료를 얻는데 도움을 받았고, 부주의했고의 여부를 떠나 과정의 진실을 투명히 밝히는 일에 대해 끝까지 함구한 이진우의 선택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복사물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주어졌는지 밝히는 일이 그것이 명료한 사실일 뿐이어도 김태우의 꿈을 뺏게 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꿈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김태우는 그의 꿈을 지켜주지 않았는데도. 다 잊고 있었지만 이 지점에 이르러서 역시나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다.

 

 삶은 우리가 문학 시간에 '소나기'를 읽은 뒤로 항상 복선을 품고 있다. '소나기'만 읽지 않았어도 삶 속에 숨겨진 복선이 좀 덜했을까. 얼마 전에 갑자기 지난 일기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어떤 날은 상세하기도 하고, 어떤날은 '날이 좋다'며 한줄 흘려놓은 일기를 보다 첫 직장에서 당시 고뇌와 괴로움을 담은 일기를 발견하고 잊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중력'을 읽다 또 떠올리고 말았다. 선임에게서 프로그램 작동 인수인계를 받던 중 근 5년 이상의 데이터가 한번에 날아가는 심각한 오류가 생겼고 오류를 발견했을때 담당자는 내가 되어 있었다. 그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중에 문제의 작동을 선임이 시연했다는 것을 떠올렸는데, 그때 그 사실을 밝힐 것인지 아니면 불이익을 감수하고 묻을 것인지 고민했던 일이었다.

 

 이진우의 결정을 비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실제로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나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수많은 불만을 안에 품고서도 왜인지 사고를 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진우의 경우는 그대로 묻히고 넘어갔지만, 그때의 일은 선임이 자신이 한 일이라고 사실을 밝히며 나섰다. 그랬어도 현 담당자의 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무고했던 나를 함부로 재우쳤던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는게 그렇다. 진실을 밝힌다해서 그에 맞는 결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똥물만 번져나가는 일도 많다. 그 직장이 똥간같아서 똥같은 결말만 주어진 것도 있지만. 지금도 그 동네쪽은 더러워서 안간다.

 

 우주를 꿈꾸는 드리머들의 이야기를 읽고 똥간같던 첫직장에 대한 깊은 혐오만 내뱉어 놓은 리뷰라 애석하다. 그들의 도전은 그렇게도 크고 야심찼는데 읽은 사람의 데이터 베이스에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음습하고 구질한 리뷰에 더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우린 다 경쟁자였고, 남의 허물에 똥물도 튀겨보며 살아왔으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생한 중력을 느낀다. 이진우가 중력을 느끼는 순간에 떠올렸던 것들이 나의 중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느낄,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중력이기도 하다. 다만 딱 지구에서 두발로 버텨 살아갈만큼의 중력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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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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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름에 비하면 큰 감흥은 없었다. 심지어 빠뜨리지 않고 동성애자 코드를 챙겨 넣었다며 트렌디한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키와 성폭행, 끔찍한 사람들 같은 얘기가 사막에 이는 바람처럼 뜨거우면서 건조하게 지나가는 듯 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작에 관한 생각이었다. '베어타운'을 읽었을 때는 이를테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은체를 하겠지만 굳이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갈 정도는 아닌 사이로 남았다. 그런데 '우리와 당신들'을 통해 짝사랑이 시작됐다. 뒤늦게도.  

 

" 가끔 착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끔찍한 짓을 저지를 때도 있다. 하키팀의 스타였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폭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공동체는 선택의 총합이고 두 아이의 진술이 엇갈렸을 때 우리는 그를 믿었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었고, 여학생의 말이 거짓말이라야 우리가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마을과 함께 무너졌다. 우리가 모든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을 하기는 쉽겠지만 당신이라고 다르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겁에 질리다보면, 한쪽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다보면, 뭘 희생해야 하는지 알다보면 그렇게 된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용감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바라는 만큼 우리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p.14 "

 

 연결되는 작품인 '베어타운'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와 당신들'은 그 후의 내용인데 심각한 사건이 터지고 갈등이 절정으로 올라가는 '베어타운'보다 더 깊게 빠져들어 읽었다. 티비 드라마라면 초반 1~2회차가 전체적인 틀을 잡느라 진입장벽이 되는 느낌이다. '베어타운'이 그렇게 짧지는 않지만. 다만 그 장벽을 넘기만 하면 다음 회차를 기다리느라 일주일을 보내는 인생 명작으로 꼽을만한 드라마가 되듯 '베어타운'으로 틀을 잡고 난 뒤에 다시 만난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연없는 사람, 매력없는 사람 없는 애틋한 내 새끼들이 된다. 한 마을이 있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너무나 많이 소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우리와 당신들'에서 이야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둘 다 읽을 수 밖에!

 

 이제서야 프레드릭 배크만이 어떤 작가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매력을 왜 전에는 눈치 못챘을까. 다 같은 인물에 배경인데 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반짝임이 구석구석 엿보이는 걸까. '베어타운'은 그냥 재미로 보고 '우리와 당신들'은 빛나게 하려고? 혹은 책이 너무 길어지니까 1부 2부로 나눠서 그냥 두권으로 내본걸까. 둘다 재밌는데 내 성향 자체가 폭발하고 불타오르는 생생한 현장보다 폐허에 남은 불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재를 날리는 황량함이 주는 음울하고 위태로움을 더 즐기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인상이 강하게 남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표시를 해놓았는데, 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냥 놓아버렸다. 다 옮기면 책 한 권이니 그냥 읽어야지.

 

 " "결혼 생활은 하키 시즌이랑 비슷한거야, 여보. 가장 막강한 팀이라도 매 경기마다 제 실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하면 졸전을 쳘치더라도 이길 수 있잖아. 결혼 생뢀도 마찬가지야. 점심을 먹기 전에 와인을 마시고 근사하게 사랑을 나누고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싶은데 모래가 너무 뜨겁고 햇빛 때문에 화면이 너무 눈부신 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휴가를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측정하지는 않아. 일상을 기준으로, 집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서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기준으로 측정하지." p.130 "

 

 마을의 이야기이다보니 서로를 낱낱이 알고 있고,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이야기로 묶여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 관계안에서 작가가 닦아온 삶의 경험을 잘 녹여냈다. 결혼생활에 대한 저 부분도 좋았지만, 이 자체가 결국 한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좋았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형편이 어렵거나 상황이 곤궁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겹쳐 들린다. 무엇이든 가장 어렵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면서도 재밌다.

 

 전에 '베어타운'을 읽으면서 트렌디하다고 평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는 소년 '벤이'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는 넷플릭스의 '빨간머리 앤'에 흑인이 등장하거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벤이가 절친을 짝사랑하는 게이소년이 아니라 하키 선수로 바로 서고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이번 편은 트렌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꽤 감동이었다.  

 

 " 그녀가 침대에 눕자 아들이 뺨을 닦아주며 얘기한다. "제가 웃긴 애기 하나 해드릴까요? 저더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여자친구를 절대 못 만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엄마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엄마랑 아빠가 서로 바라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봐줄 사람을 찾거든요." 안-카트린은 보보의 큼지막하고 맹하고 어리숙한 머리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세게 누른다. 그가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다는 건 우라지고 우라지고 또 우라지게 힘든 거라 가끔은 거의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아무리 원래 그런 거라지만 말이야. p.124 "

 

 '우리와 당신들'은 벤이, 마야, 아나, 아맛, 보보, 레오 모든 아이들이, 그리고 베어타운 안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별은 폭발하고, 어떤 별은 새로 태어나고, 어떤 별은 가장 밝게 빛나고, 어떤 별은 혜성처럼 쏜살같이 지나가 머무르지 않는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성실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들의 삶을 펼쳐내 보여주었다. 알고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가 비틀어진 걸음을 걷게 된 돌부리가 있을 수 있고, 눈이 가려져 길을 잃은 것일수도 있고, 다시 제대로 걷기 위해 걸음을 떼는 과정일수도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래서 좋았다. 평면적인 사람이 없어서 나쁘게 보일지라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 아맛은 징징거리지만 리파가 말허리를 자른다. "그만해! 너는 여기서 탈출할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네가 포기하건 안 하건 여기 이 아이들은 네가 하던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연습해! 네가 NHL 선수로 뛰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 여기 출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 할로 출신이고 네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이 동네 아이들은 전부 네 얘기를 들을거야. 그러면 내가 아니라 너처럼 되고 싶어 할 거야." 리파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 정도 되는 재능을 타고날 수 있다면 이 동네 다른 아이들은 뭐든 내줄 수 있다는 걸 몰라?" 아맛의 손이 떨린다. 리파가 다가와 다시 여덟 살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그를 끌어안는다. 리파가 아맛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속삭인다. "너랑 같이 달릴게. 그래야 네가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여기 있는 미친놈들이 전부 여름 내내 너랑 같이 달릴 거야." p.173 "

 

 거기에 진한 우정과 꿈을 좇아 성공해나가겠다는 아름다운 열정도 담겨있다. '베어타운'에 '우리와 당신들'까지 분량이 적지 않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처음 답답한 부분에서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을 새기며 끝까지 읽어나가길. " 그 아이는 오늘 밤에 곤히 잠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 깃들어 있던 곰은 방금 전에 눈을 떴다. p.307 " '우리와 당신들'을 읽으며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줄도 몰랐던 프레드릭 배크만에 대한 덕심도 눈을 떴다. 이 두 권이면 당신도 찾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숨은 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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