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엮음, 최미숙 옮김, 진노 마사후미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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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이든, 혹 어느 곳에서든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의 표지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자신도 모르게 30개 도시 중에 익숙한 이름이 있을지 서둘러 목록을 살펴보는 일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면적이 작긴 하지만 나름 '현존하는 최고의' 수식을 붙인 기록물들도 많고, 30개나 되는 목록에 빠질만한 이유도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익숙한 도시 이름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찾던 도시는 없을 것이다. 세계 문명과 한국은 어쩌면 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자신의 도시를 올려놓은 것을 보면 어찌됐든 입맛은 쓰다. 미리 알려두지만 우리나라는 목록에 없다. 얼마나 대단한 역사를 풀어내려고 한국을 빼놨을지 단단해진 눈매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딱딱한 내용이었다. 350쪽 정도 되는 분량에 30개의 도시들을 넣어두려면, 거기다 세계 문명의 역사를 얽어놓기까지에는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아둘 수 없을테니 좀 더 가볍고 부드러운 흐름으로 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뜻밖에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된 정보를 빼곡히 담아두고 있었다. 생각보다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에 잘 몰랐던 도시들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수업 교재 보는 듯한 마음으로 읽기도 했다. 어떤 기준으로 도시들을 선별해서 넣었는지 명확한 설명이 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도시별로 편차가 느껴지기도 하고, 도시라는 키워드가 유행이 되어서 이용된 것인지, 문명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이기 때문인지 불분명한 느낌이다.

 

 읽으면서 같은 아시아 국가이기도 하고, 최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을 읽어본 탓에 장안과 베이징에 대한 내용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중국은 문명의 발생지 중 하나이기도 하고, 큰 땅덩이 안에서 현재까지 오랜시간동안 아시아 지역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도시나 꼽히게 된 것도 이해가 됐다. 과거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문화교류까지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불어서 교토가 함께 소개된 데에는 좀 아쉬웠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의 야만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 세계사라면 모를까, 일본의 오랜 수도로서 교토가 세계사적으로 갖는 의미는 딱히 없다. 관광 안내서도 아니고, "전 세계의 관광객을 매료시키고 있다(128)"는 끝맺음이 어색했다. 상하이에 대한 내용도 다소 부실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느새 도시에 대해 평가를 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가 맞을까, 제외된 도시들보다 더 나은 점이 있는걸까, 자신만의 도시목록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도시 하나만 넣어줬어도 좀 덜 모나게 읽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담고 있는 정보들은 꽤 유익한 책이다. 평소 세계사를 좋아하고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넓고 얕은 지식을 수집하는 단계에서 순수히 재미를 느끼며 읽게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수능 사회탐구 세계사 선택을 한 학생에게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게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각종 그림과 지도, 사진 자료들도 함께 제시하고 있고 지리적, 역사적 내용도 골고루 담고 있어 책을 읽는 것처럼 공부를 할 수 있다. 보통 세계사에 관심이 있어도 시간 순서대로, 대륙별로 너무나 크고 넓은 범위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그런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접근 방법이 매력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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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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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니, 우린 외로움을 두려워하지만 외로움 자체는 존재하지 않아. 외로움은 형태가 없어. 그건 우리에게 내려앉는 그림자에 불과해. 또 어둠이 찾아오면 그림자가 사라지듯 우리가 진실을 알면 슬픔 감정은 사라질 수 있어."  "진실이 뭔데?" 애니가 물었다.

 "누군가 우리를 필요로 하면 외로움이 끝난다는 것. 세상에는 필요가 넘쳐나거든."(113) "

 

 미치 앨봄의 새로운 책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는 꽤 익숙한 내용이다. 만약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장담하건데 없을 것이다. 사후세계라는 것은 아직까지 전혀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나 혹은 배움,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믿고 있을 것이다. 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이 어떤 일들을 겪게 되는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따뜻하게 담고 있다. 책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예상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애니'는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사후세계에 대해 적응하기 어려워하고, 그동안 살아왔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죽음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남겨두고 온 삶을 염려한다.

 

 이제 막 결혼한 새 신부 애니는 파울로와 열기구를 탔다가 사고를 당한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파울로를 위해 장기이식을 결심하고 수술대 위에 오르지만, 애니가 도달한 곳은 미지의 세계, 천국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혼란스럽고 낙담한 애니는 그곳에서 다섯명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만남은 그들 자신의 삶과 애니의 삶에 깊게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씩 만나는 동안 애니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 실수라고 생각했던 순간들, 자신을 얽매었던 과거들이 조금씩 풀어져가는 과정을 보며 마음이 조금씩 따뜻해진다. 실수나 후회, 가장 나빴던 기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들에도 다음으로 이어지기 위한 과정이 숨어있고, 다른 편에서 보면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위로가 되었다.

 

 문득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를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다섯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적은 것 같으면서도, 그만큼 중요한 다섯명의 사람을 어떻게 꼽을 수 있을까. 내 삶의 다섯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보았다. 온 생애를 통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할, 혹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게 될까. 내가 의미를 두고 만나고 싶을 사람들이 될까, 전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포함될까 궁금했다. 누구든 내가 다섯 사람을 꼽을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의미있을 다섯 사람에 포함될 수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 "우린 살아 있는 동안 매일 뭔가를 잃어, 애니. 때론 방금 내쉰 숨결처럼 작은 걸 잃고, 때로는 그걸 잃고는 못 살 것 같은 큰 걸 잃기도 하지." 파울로가 애니의 왼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 안 그래?"(234)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로 잘 알려진 미치 앨봄의 새 책이 반가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간결하고 소박하게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의미를 담아냈다.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에 가벼운 휴식을 전해주는 잔잔한 위로와 감동을 담은 책이었다. 누구에게 추천해도 환영받을만한 책이니 복잡한 마음이나 더위를 피해 잠시 휴가를 떠나는 마음으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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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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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르르한 외로운 불빛 하나가 문 틈새로 빠져나와 미지의 인물이 지도를 조금 낮게, 하지만 너무 낮지는 않게 달아준 벽의 빈 공간을 비춘다. "보르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 의자에 앉아서 맨 처음 그 지도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된 빨간 점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점이 바로 그녀가 지도를 사랑하는 이유다. 해져서 반만 남았고 빨간색은 빛이 바랬다. 그래도 하단의 좌측과 중앙의 중간쯤에 붙어 있고, 그 옆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186) "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분명 여자는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지 못한다는 켄트의 말에 반발심을 품고 읽기 시작했지만, 브릿마리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딱딱하고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브릿마리의 일방적인 소통은 보고있기 괴로웠다. 편집증적인 청소에 대한 집착도 그녀에 대한 경계를 한층 쌓아올렸다. 정리된 침구와 커트러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모두와 속해있으나 거리를 유지하는 테라스를 사랑하는 나이 든 여자. 처음엔 보르그의 사람들이 왜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쥐덫을 놓아 쥐를 없애는 대신 저녁 식사에 쥐를 초대하는 사람이라서? 농담으로 지인과 비둘이, 고양이에게 밥주는 사람들은 있는데 왜 쥐에게 밥주는 찍맘/찍대디는 없냐는 얘기를 한 적 있는데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릿마리'를 읽어서 절묘했다.

 

 쥐에게 밥을 주는 일은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천천히 브릿마리가 좋아진다. 그녀가 서툴렀을 뿐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와 만나 달라지듯이 그녀도 변화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브릿마리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고여있던 두 세계가 만나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내용은 언제나 어떻게든 매력적이라 그것 또한 좋아하기 때문에 결국은 브릿마리도 즐겁게 읽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시스터 액트' 같은 영화도 비슷한 흐름아닌가 싶다. 카지노 삼류 가수가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좋아하는 이유는 뜻밖의 조합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과정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흐뭇해지고 절로 고양되는 느낌 때문이아닐까 생각한다.

 

 문득 '청소'라는 것이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궁금해졌다. 브릿마리 뿐 아니라 떠오른 모든 작품 안에서 '청소'는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이들의 더러워진 옷을 빨아준 것, 머리를 정돈해준 것, 부엌을 치우고 커트러리를 정리해준 것, 거실을 청소해준 것은 거대한 우울증 덩어리같은 마을 보르그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시스터 액트'에서도 들로리스를 받아들인 이후에 폐쇄적이었던 수녀원이 문을 열고 낙후된 동네를 청소하며 변화하는 모습이 나온다. '바그다드 카페'에서도 야스민이 브랜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무실과 카페를 청소한다. 청소는 곧 변화의 계기가 된다.

 

 이들 책과 영화는 청소와 정리가 필요한 환경을 통해 어딘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 바탕을 둔 요소였다. 저장강박이나 청소를 하지 않고 집을 방치해두는 것이 우울증 증세 중 하나라고 했던가, 청소하지 않고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사는 사람은 그저 게으르거나 불결한 성향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질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한 변화가 청소, 주변 정리, 규칙적인 생활이라는 틀 안에서 시작됨이 공통적으로 보이는게 흥미롭다. 87년, 93년의 영화에서도 이런 점을 파악해서 '청소'라는 장면을 넣었던 것일까?

 

 거기다 브릿마리를 보면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생활리듬을 유지하는 사람에 대한 호감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자기관리가 잘 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슷한 인물을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라는 책에서 만난 적 있다. 캄보디아에서 원더랜드라는 호텔을 운영하는 고복희씨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지만, 청결에 누구보다도 신경쓰고, 항상 정돈된 모습을 유지한다. 좋은 생활 태도에 좋은 정신이 깃든다는 꽉 막힌 말이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사람들의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거나, 어찌할 수 없는 진리에 가 그리고 그녀와 닿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를 즐겁게 읽었다면 아마 고복희씨를 만나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책을 네번째 만나게 된 것 같은데,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을 거쳐 하키에 대해 얼마나 열을 올리며 썼는지 기억나서 "얼마 되지 않는 하키 관련 지식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온 우주를 통틀어 축구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몇 안 되는 운동 가운데 하나가 하키이기 때문이다.(175)"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보며 웃었다. 하키와 축구에 대해 이렇게 긴 소설을 써냈으면서 이렇게 표현한다는 점이 재밌다. 읽다보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테러리스트하고는 협상을 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167)" 같이 웃긴 건 아닌데, 실소가 나올만한 문장들을 적절히 넣어놓은 점이 매력있었다.

 

 초반 브릿마리와 어색한 시간을 지나보내고 나면 순식간에 끝까지 읽게 된다. 켄트와 스벤 사이에서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장면도 좋았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이길 기대한다는 스벤의 말도 꽤 로맨틱했다. 한번쯤은 문을 두드려보고 싶었다는 브릿마리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브릿마리가 끝내 혼자서 이케아 가구를 조립해낸 것처럼 그녀의 노크를 기다리는 두 문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묘하게도 그녀의 '현재 위치'가 더이상 되어주지 않을 것 같은 장소들 사이에서 어떤 결말을 읽게 될 것인지 끝까지 궁금해하며 읽었다. 이쯤되면 그녀를 브릿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옮겨놓는다. 

 

 " 모든 결혼 생활에 단점이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살다보면 그 사람의 약점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약점들을 무거운 가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으면 그걸 피해가며 청소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환상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 먼지가 쌓이겠지만 손님들 모르게 지나갈 수 있기만 하면 참고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허락도 없이 가구를 옮겨버리면 모든 게 만천하에 드러난다. 먼지와 긁힌 자국. 쪽매널 마루에 영원히 남은 흠집. 하지만 그쯤 되면 이미 되돌릴 방법이 없다.(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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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단 1~3 세트 - 전3권 (북케이스 포함)
제뉴 지음, 주영하 원작 / 다산코믹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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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계단은 계속된다!

전 3권이라고 되어 있어서 3권으로 내용이 다 끝나는 줄 알고 읽었는데, 3권을 다 읽어가는데 중요한 요소들이 풀어질 생각을 안하고 있어서 초조했다. 결국 3권은 끝나고 내용은 끝나지 않았다. 전3권은 무슨 말일까. 1-3권까지 세트인데 그래서 이 한세트가 전3권이라는 의미일까? 이 다음 세트는 4-6 세트가 또 나온다는걸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시간이동물이다. 시간 이동을 한번만 하는게 아니라, 몇번이나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현재의 상황도 달라진다. 맙소사, 그럼 저는 우선 로또를 좀 사겠습니다. 하지만 만화의 주인공은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주식 좀 사려다가 돈 없는 학생이라 실패하고 경제적인 부분은 그냥 현생을 유지한다. 나같은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시간 이동이 거의 데스노트 급 악마의 재능으로 묘사되는 범죄물로 흘러가겠지만, 시간의 계단은 나름 알콩달콩 첫사랑 추억물이다.

 

 말랑한 표지 그림에 홀려서 햇살이 기울어가는 학교 복도, 밤의 운동장, 여름 바닷가 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두근두근 밀당 하이틴 로맨스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미스터리한 과거와 함께 답답하고 뒤가 구린 인물들이 환장스럽게 조합되어 있는 고구마 덩어리였다. 간만에 남의 사랑으로 대리 설렘 좀 느껴보려고 드릉드릉 시동걸고 있던 덕후의 마음에 작은 상처가 났다. 하이틴 로맨스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건 나뿐인가. 요즘은 그런거 아무도 안 파고 안 사는건가.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을 만화로 다시 그려낸 거라 내용적 부분에 있어서 보이는 쎄함은, 어쩔 수 없다고 감안하며 읽어야 했다. 남주가, 별명이 지랄견(...) 여주는 이년아. 둘 다 성격도 쎄고 남주는 아마 일진급인듯한 느낌. 학교에서 쪽쪽대고 서로 딴 사람이랑 얘기만 해도 질투하는 엄청 유명한 커플인 설정인데 어쩐지 민폐스런 느낌이 난다. 친구들이 이걸 참아주나 싶은데, 그때는 십대고 어려서 잘 모르고 지나갔다는 표현으로 뭉개는 부분들이 좀 나온다.

 

 근데 주인공들도 그렇지만 주변인물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라 각자 나름의 입장과 사정이 있는 걸로 나오지만 인물 설정이 하나같이 답답해보인다. 여주가 원조교제한다는 화려한 소문이 온 학교를 감싸는데 친구들이 소문도는거 알면 상처받는다고 여주한테 절대 비밀로 하고 안 알려준다. 심지어 이 소문 때문에 죽고 못살던 남친이랑 헤어지고 전교생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엔 사고나서 학교까지 자퇴하는데 그 후로 14년간이나 아무도 말은 안해준다.

 

 이 일로 흑화한 남주 또한 갑자기 여주에 대한 천년의 사랑이 팍 식어서 민폐끼치고 다니던 지랄견에서 미친개로 진화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게다가 그때 꼬인 여주의 팔자는 현생에서도 의사 남편이랑 결혼해서 신분상승하려는 욕망에 지옥에서 온 예비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등쌀에 쥐어터지는 헬게이트를 제손으로 열려고 노력한다. 그 헬게이트도 차마 열지 못할 팔자라 다니는 직장에서는 유부남과 만나는 불륜녀 소문도 뒤집어써서 파혼과 실직 위기에 처한다. 

 

 이런 알찬 고구마 정보만으로는 읽던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겠지만, 우리의 긍정 여주는 시련과 상처를 딛고 과거로 돌아가 조금씩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엔 끔찍했던 학창시절의 과거를 바꾸려고 사고로 죽은 첫사랑과 다시 얽히지 않으려고 하지만,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마음이 바뀐다. 안좋아하려고 해도 다시 보니 또 좋은 첫사랑 때문에 14년 전 오해와 서투름으로 놓쳐버린 잘못된 순간들을 고치고 과거를 바꿔보려 한다.  

 

 3권 내용이 끝이 맞는가 싶어 찾아봤는데, 여기저기 평도 좋고 이미 잘 알려진 작품이었다.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긴 한데, 선을 넘을랑말랑하는 요소들도 마음에 좀 걸리고 이상하게 요즘 느낌은 안드는 스타일이라 읽으면서 아쉽기도 했다. 원작이 좀 연식이 있는가 싶어서 찾아봤는데 19년 출간으로 나온다. 만화를 오랜만에 본거라 좀 어색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한번 시작하면 순식간에 끝까지 읽게 되는 자극적인 맛은 있다. 계단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다음 계단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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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로봇 - 우리가 지금껏 상상하지 못한 신화 이야기
에이드리엔 메이어 지음, 안인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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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눈에 어려울 것이 분명한 '신과 로봇'을 읽고 싶었던 것은 얼마전 '바그다드 배터리'라 불리는 가설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부를 장식한 그림과 조각들이 어떻게 제작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꽤 흥미로웠다. 피라미드 자체도 신비스러운 건축물이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내부에서 불을 사용하여 안을 밝힌 흔적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거울을 통한 빛 반사를 이용해서 내부를 밝혔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지만, 고대인들이 어쩌면 전기를 이용한 조명을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되는 그림과 비슷한 시기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출토물이 발견되어 과거의 기술력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발달해 있었음을 예상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신과 로봇'을 읽어보고 싶도록 만든 이 가설에 대한 내용은 책에도 나온다(317). 책 안에는 이처럼 신화 속의 사건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출토물들을 통해 흥미로운 내용들을 소개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각 장이 물 흐르듯 연결되어 있어 재밌게 읽힌다. 특히 역사와 과학이 신화를 만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시선을 통해 21세기와 과거의 묘한 일치감을 느끼게 만드는 점이 매력적이다. 신화라하면 신들이 하프 연주를 즐기며 사랑 싸움을 하는 내용이라 치부했는데(...), 현대 과학기술 아래에서 스케치되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모든 요소들(노화, 생명의 연장, 오토마타, 로봇,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불쾌한 골짜기와 복제 생명체)이 신화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 새로 생겼다는 '현대식 나이계산법'이란 걸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120살까지 산다는 전제하에, 전에 비해 노화가 천천히 진행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여 나온 계산법인데,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해 나온 숫자가 현대식 나이라는 것이다. 계산해보고 나면 마음이 흡족하고 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이십대가 지나고 나니 120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때에 그 절반도 안되는 약 30년 정도의 시간만 젊음을 유지하고 그 뒤부터는 오로지 노화만이 남은 인간의 삶이 참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더 오래산들 노년의 시간만이 길어질 뿐 아닌가. 때문에 '신과 로봇'에서도 수명의 연장과 유한한 젊음에 대해 다룬 내용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특히 늙어가는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에오스와 티토노스(98)에 대한 내용이 그랬다.

 

 의술의 발전으로 인해, 또 앞으로 발전한 기술에 기대어 더 늘어나게 될 인간의 수명과 대조되는 신체의 유한함이 우리의 티토노스 적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들었던 얘기 중 가장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이 지인이 일하는 회사에서 퇴사를 하게 된 삼십대초반의 직원 이야기였다. 글이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자꾸 업무를 깜박해서 성과가 떨어지는 걸 고민하던 그가 병원에서 청천병력같은 말을 듣게됐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 직원은 병이 진행되면 더 이상 근무하는 것이 어려워지니 치료 겸 휴식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에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질만한 무거운 병을 얻게 된 사람의 소식을 전해들으니 영화에서나 보았던 얘기가 단순 '소재거리'가 아닌 현실임을 새삼 무겁게 느꼈다.

 

 '너무 오랜 삶'과 '폐기 가능한' 소모품인 육체의 부조화를 극복하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인공장기와 로봇신체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을 규정짓는 조건은 어디까지일까. 사람의 팔을 기계로 대신하면 그는 사람인가 로봇인가. 그의 심장이 인공장기로 대체되어 있다면? 일부만 대체되었다면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까? 전부 대체되었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다면 사람으로 인정해도 될까? 혹은 노인의 뇌를 뇌사 판정을 받은 젊은 사람의 몸에 성공적으로 이식하였다면, 새롭게 눈을 뜬 젊은 사람은 몸의 주인 그 자신일까 혹은 노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노인으로 인정해야 할까. 이 질문은 '고대부터 보철물을 이용해 인간의 신체 능력을 확대하거나 강화하는 행위(123)'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영생불사를 구하는 일의 어리석음(107)'을 말하지만 우리 유한한 삶과 젊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오랜 꿈과 목표는 항상 변함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에는 불노불사의 존재인 신을 이야기했고, 그들에게서 불과 암브로시아를 훔쳐내기를 소망하고, 기계장치와 판도라를 만들어 낸다. 이는 유전자와 세포 연구, 인공장기와 로봇 기술로 이어진다. 간혹 SF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며 그들의 실험을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행위로 묘사하는데, 이는 더이상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앞에 다가온 현실이 아닌가. "과거 신화에 등장하는 몇몇 기적적인 인공 생명들이 발명가들에게 도전의식과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현대의 SF 작품들이 미래의 과학적 발견을 예견하고 때로는 기술 혁신에 영감을 주었다(354)" 는 내용에 공감했다.   

 

 알파고의 등장은 확실히 우리를 놀라게 만들고 좌절시켰다. 인공지능이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직관과 창의성은 그 능력 앞에서 무력했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각인시킨 인공지능과 로봇의 공포를 아주 정적인 바둑 대회에서 실감한 것이다. 이 공공연한 충격도 우리에게 깊은 각인을 남겼지만,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기술들이 음지에서 실험되고 있을 것임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음모론적인 상상만이 아니다. 이미 중국에서 유전자 변형 인간 배아 세포 실험을 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지 오래다. 신의 영역까지 뻗어나간 과학을 제어할 방법을 찾지 못한 현 상황에서 신화가 들려주는 결말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접접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역사, 과학, 신화' 키워드를 인상적으로 조합한 책이었다. 이들의 조합이 시너지를 일으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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