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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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내 시집 선택 기준은 지나치리만큼 간소하고, 또 어떤 의미로는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우선, 제목을 기준으로 선택한다.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이 어리석은 독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으로 읽을 책을 선택하는지 잘 드러나는 방법이다. 그리고 잠깐, 작품들을 살펴본다. 자세히까지는 아니고 어떤 분위기로 쓰여졌는지 확인해서 마음에 들면 집으로 가져오고,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면 다시 서가로 돌려놓는다. 그 두번째 선별 과정은 특정한 기준이 없이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에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할 수 있겠다. 두두 시집은, 제목이 주는 특별하면서도 단순한 어감이 재미있어서, 그리고 시집 안의 시편들이 짧고 간결한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두두 시집의 제목을 보고 느낀 것들을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시집 두두의 제목인 두두는 두두시도 물물전진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뜻은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심오한 뜻을 가졌다. 아마 이 말을 알았더라면 어감을 재미있게 생각했다니,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두두 시집을 읽으면서 실험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되기 어려운데, 어떠냐면, 전체적으로 시가 굉장히 짧다. 단순히 짧다기 보다는 짧은 글귀들 사이로 기나긴 내용의 의미를 정제해놓은 함축적인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서사가 느껴지고, 넘치는 느낌이 전해진다.

 

 

나무와 햇볕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무엇과 무엇이라는 두 대상을 두고 쓰여진 시가 많다. 일상적인 모습을 시로 표현했으면서도 그 교차점이 일상적이지 않은, 시인만의 눈을 거친 표현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분이 어떻다고 짚어말하기 어려운데, 새와 날개를 두고 보면, 날아가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을 땅에 끌리어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낸 점이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연이어 옮겨놓은 세편의 시들은 다 그러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들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페이지의 뒷편을 시인이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겨울 a

 

 

콩새가 산수유나무 밑을 뒤지고

오목눈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에서 풀씨를 뒤질 때

 

 

식탁 위의 감자튀김(올리브유에 튀긴)

내가 뒤지는

 

 

이 시는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옮겨놓았다. 오목눈이들이, 콩새가 먹이를 찾는 모습을 시인에게로 또, 나에게까지 확대되어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시였다. 식탁 위의 감자튀김을 뒤지는 행위를 일상적이게 느끼도록 하면서 더 넓은 범위의 행동으로 확장시켜놓은 것도 같았다. 올리브유에 튀겼다는 디테일까지도 재미있었고. 시인의 유고 시집이었다고 한다. 뒤늦은 부음을 들은 셈이다.

 

 

** 두두시도 물물전진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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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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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올해의 시작을 알리게 될 시집으로 송찬호 시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골랐다. 지인들이 알았다면, 아마 취향이 마음껏 드러나는 선택이라 고개를 저었을 것 같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한껏 담아 제목으로 먼저 고르고 서가에서 살짝 살펴본 내용이 또 나쁘지 않아 정했다. 참, 마음에 든다. 어떤 공간의 어떤 시간의 어떤 느낌인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제목이, 제목을 떠올리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내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특히 더 그런건 아니고,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다.

 

송찬호 시인의 시집은 처음 읽는데 부드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앞으로 시인의 다른 시집을 찾는다면 또 읽게 될 것 같다. 가장 먼저 전문을 소개하는 시는 표제작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정경이 눈에 그려지는 좋은 시였다. 읽는 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찔레꽃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수 년, 삶이 그렇데 징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 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사랑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읽은 몇 편의 소설들이 이런 분위기를 띄고 있었던 것 같다. 스티븐 킹의 신작 11/22/63에서도 이런 애조를 띄는 사랑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고, -원했던 것은 좀 더 드라이하고 스릴이 넘치는 서스펜스였지만 - 일본 소설이었던 리턴이라는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두 소설 모두 재미있게 읽었으니 찔레꽃과 비슷한 느낌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읽어도 좋겠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더 좋았다. 리턴은 2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정서상 맞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다른 시를 보면,

 

 

코스모스의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이 구절에 머물렀을때, 나는 다른 시는 모르겠고, 이 구절만큼은 나의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인생의 오후라는 지점까지도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날은 분명 올테고 그때 돌아보는 젊은 날이 지금이 되겠다. 지금, 지금. 지금이 비록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시에서 인생을 만난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울린다는 것,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접어놓았다. 물론, 마음으로.

 

 

초원의 빛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은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멀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한낮의 열기 속에서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질주하는

한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이 시를 읽으면서 동백꽃을 떠올렸다. 당신이 나를 슬쩍 밀어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다는 표현이, 무엇엔가 떠밀린 것처럼 동백꽃밭 속으로 넘어진, 그 알싸한 향기에 취하게 되었던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이야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다는 구절만 봐도 얼마나 마음에 와 닿는지. 동백꽃을 떠올리게 된 것도 그렇지만, 바로 그 구절 때문에라도 이 시를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으로 꼽아 놓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어쩌면 우리는 도망쳐야 하는 그것에 붙잡혔기 때문에 늘 사랑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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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 삽화집 - 익숙한 그 집 앞
유희열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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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희열, 이름도 어쩐지 외설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이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무한대의 호감으로 2-30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래부터 그의 음악은 늘 사랑을 받아오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라는 인물 자체가 사람의 마음에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런 희열옹에게 마치 숨겨두진 않았으나 숨겨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삽화집이 있다고 하니 읽어보지 않고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노래처럼, 라디오처럼, 방송되고 있는 늦은 밤의 음악 프로처럼 느껴지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과거형이 되었다.

 

99년 세기말적인 감성과 그보다 훨씬 더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그림솜씨로 이루어진 삽화집을 나는 두 손에 쥐고 희열옹의 지금보다는 훨씬 더 순수했을, 약 십여년 전의 과거와 마주했다. 그는 아마도 뿌듯한 한편 떠오르면 새벽에 쓴 편지를 다음날 아침에 다시 읽어보는 수줍음을 이 책에게서 동시에 느끼지 않을까. 더하면 자려고 누웠다 이불을 걷어찰 하이킥을 할지도 모를 일이고.

 

90년대 감성이 눅진하게 녹아든 이 삽화집에는 상당히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있으면서 더불어 그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모습, 그의 일부만이 보여지지고 있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도 절제된 일부만을 받아들일 밖에 도리가 없는 절단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 한 권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적은 부분만을 보여준 것 같아 약간은 섭섭하달까. 별점을 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희열옹이라 드리는 별이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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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43
이윤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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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집은, -이라고 하지만 매일 읽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오늘 읽었던 시집은- 이윤학 시인의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이다. 역시, 제목에 한번 잠깐 살핀 시집 안의 내용에 두번 짧은 심의를 거쳐 손 안에 들어온 책이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언어 사용의 감각적임은 어느 부분에서 어떤 부분까지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같은 표현을 살짝 바꿔놓은 작은 움직임에도 전혀 다른 것으로 되어버리는 말의- 혹은 글의, '아 다르고 어 다른' 사용법을 시집 안에서 단단히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표제작인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였다. 나는 뭐든지 주인공 격인 인물을 좋아하는 히로인 타입이었지. 그래서 늘 표제작이 마음에 드는 축에 드는건지, 아니면 역시 좋은 시여서 표제작이 되었던 것인지 잘 구분을 못하겠다. 어쩌면 누구나 듣고 아, 이 노래 괜찮네. 하고 생각하는 보편적 기호를 반영하는 노래가 있듯이, 내가 꼽는 시들이 다 그런 보편적 기호 아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시의 전문이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오른손 검지 손톱 밑 살점이 조금 뜯겼다.

 

손톱깎이가 살점을 물어뜯은 자리

분홍 피가 스며들었다.

 

처음엔 찔끔하고

조금 있으니 뜨끔거렸다.

 

한참 동안,

욱신거렸다.

 

누군가 뒤늦게 떠난 모양이었다.

 

벌써 떠난 줄 알았던 누군가

뜯긴 살점을 통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아주 작은 위성 안테나가 생긴 모양이었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었다.

 

 

그 뒤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황혼의 아스팔트' 중 일부 [아는 사람들 해마다 줄어든다/ 아는 사람 없는 세상을 살지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작년부터 올해 겨울까지 두번의 장례를 치렀다. 십년 전만해도 대문밖을 나가면 익숙한 어르신들 고개숙여 인사드리기 바빴는데, 해가 지나면서 시나브로 인사할 일이 없어졌다. 장례를 치르면서 이렇게 점점 다들 돌아가시는 구나 혼자 생각했었는데 시인의 시를 보면서 섬뜩한 익숙함을 느꼈다. 나이들어 홀로 남겨진 세상을 적막해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하는.

 

 

아직은 버찌가 연분홍일 때

 

 

조약돌을 더듬는 시냇물이 흘러갔지.

 

유채꽃밭은 목욕탕에서 방금 나온

젖은 머릿결 샴푸 냄새를 흘렸지.

 

내 마음 샴푸 냄새로 후끈 달았지.

 

더는 길이 나오지 않는 길을 걸었지.

 

피아노를 치는 너의

가느다란 손가락

솜털 끄트머리를

나는 바람으로 매만졌지.

 

 

이 시는 그냥, 느낌이 좋아서 꼽아놓았다. 곧 다가올 봄이 먼저 기다려지는 느낌.

 

 

시집을 읽으면서는 거의 꼭꼭 마음에 들었던 시들을 꼽아놓곤 하는데, 글쎄 어떤 시집은 몇 편이나 전문을 꼽기도 하지만 이윤학 시인의 시집에서는 다수의 편이 꼽히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또 시집을 읽고 난 뒤에 느낌이 어땠는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썩 마음에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요상했다. 이거다! 하고 꼽히는 시는 많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시들이 많았겠지 하고 혼자 납득한다.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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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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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을 처음 접한 것은 2011년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 왜, 책으로 읽는 것보다 영화로 보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게 작품의 내용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을 이용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비록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 스스로를 여기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원작이 주는 깊이를 다른 것은 따라올 수 없다고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 책으로 이 작품을 먼저 봤어야 평소의 행실에 걸맞는 일이겠지만. 그때만큼은 가벼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화를 보면서 강렬한 화면에 끌린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책의 표지 역시 노란 해바라기의 뒷모습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새삼 이미 알고있는 내용의 책을 다시 본다는 것은, 특히나 고백처럼 숨겨진 진실을 향해 인물들의 결말을 향해 점점 접근해가며 몰입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자칫 시시한 일이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본지 오래되어서 그런건지 영화의 장면은 그저 책 속의 내용에 구체성을 심어주는 스틸 컷 정도로만 여겨질 뿐 몰입이 떨어지거나 흥미가 덜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정교한 책의 서술에 점점 더 깊이 빠질 수 있었다.

 

 백은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 주된 인물들의 독백과, 작문으로 그 내용이 이어지게 된다. 한 사람의 호흡으로 전개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을 법한데 딱 알맞을 만큼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다음 화자로 차례를 넘기는 점이 마지막 장을 향해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유코의 충격적인 고백을 통해 마나미를 희생시킨 소년 A와 B의 정체와 그들를 향한 복수의 과정까지 단숨에 첫장에서 밝혀내고 난 뒤, 다른 인물들의 시선에 놓여진 사건을 다시 묘사하고 있다. 한 가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라쇼몽'을 떠올리게 한다.

 

 술 뿐 아니라 그 소재 마저도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것이다. 발행 당시에는 충격적인 소재란 칭호가 어울렸을 것이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세태를 반영한 문제작이란 말이 더 걸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법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갈수록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면모를 띄는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고백도 끔찍한 일이지만, 더 끔찍한 것은 현실의 문제들이란 생각이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따라왔다.

 

  작품이 이토록 '강렬하고 충격적'이란 수식이 잘 어울리게 된 데에는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에서 비롯된 힘이 크다. 교사인 유코는 일견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고 사리도 분명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 마나미를 잃은데에 대한 복수의 방식이 도리어 냉혹하고 교묘하기 그지없다. 읽는 동안 소년 A와 B의 행태와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며 유코의 행동에 카타르시스와 당위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 유코라는 인물을 생각해보았을때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 역시 어딘가 결여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년 A는 그야말로 어린 나이의 아이가 가질만한 미숙한 동기에 똑똑한 머리가 만나 잘못된 방향으로 재능을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다. 중요한 인물이긴 하지만 내면에서부터 풍겨나오는 악의의 깊이는 덜했다.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의 비뚤어짐은 이미 어디선가 만나본듯한 인물과 재회한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신, 소년 A로부터 시작되는 도덕성 결여에 대한 문제 의식은 다른 인물들에게 까지 이어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년 B의 모습은 차라리 소년 A에 비하면 현대적인 가정의 모습, 그 중에서도 드러나기 어려운 병폐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었다. 소년 B의 어머니부터 아집과 맹신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인물이 등장한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찔한 현실성과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방관자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소년 B의 아버지는 없는 인물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누나들 역시 문제적 가정에서 도망치듯 벗어나는 방법을 택했다.

 

 겨진 소년 B에게서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옹호, 기대 속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되지 않을 자신에 대해 좌절하는, 하지만 자만심은 강한 소심한 인물에게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정 환경에 비해서는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살인'이라는 사건에 휘말려 순간의 감정으로 사건을 '완성'하는 인물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생각과 행동의 반경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그럴 법 하다고 느껴졌다. 그 외에도 소년 A와 잠시 동조하는 듯 했으나 루나시가 곧 자신이라고 믿었던 가련한 여학생, 반장이 있었고 에고에 빠진 단순무식한 느낌의 교사 베르나르도 있었다.  

 

 

 

 쉬웠던 것은, 탄탄한 서두와 중반부에 비해 후반부 마무리가 좀 급하게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광기에 휩싸인 소년 A가 폭발물을 만들고, 자신의 고백을 인터넷에 올린다. 그리고 그를 단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유코가 등장하게 되고 그녀의 복수가 마무리된다는 것은 치밀했던 소설의 리얼리티를 한순간 사라지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확실히 소설의 재미와 함께 독자의 머리속으로 옮아온다.

 

 백은 읽는 이를 여러번 놀라게 만드는 작품이다. 구성도 잘 되어 있고, 작품 자체의 몰입도도 재미도 좋다. 거기에 저자 미나토 가나에의 처녀작이란 점이 한번 더 독자를 놀라게 만든다. 숨죽였던 봉오리가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느낌으로, 이렇게 강렬하게 자신을 피어내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 영화도 소설도 모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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