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노라 에프런 지음, 김용언 옮김 / 반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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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 에프런'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이름보다 먼저 그녀가 쓴 영화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녀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유브 갓 메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줄리&줄리아' 등의 영화를 쓴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 낸 작품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도 다시 깨닫는다. 깜짝 놀랄 정도로 고령이 된 그녀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말한다. 우리에게 철들어도 변치 않을 판타지를 심어주었으면서.

 

 "저녁 늦게 욕실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한 시간 반 동안 이빨에 시금치를 붙이고 돌아다녔다는 걸 깨닫고 나면 너무나 슬퍼진다. 위험 수위가 훨씬 더 높은 파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친구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할 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도 슬프다. 특히 이빨에 시금치가 붙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상처받게 된다. 그냥 "이빨에 시금치 붙었어요."라고 말해주면 그만인데."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그녀가 몇 살인지 잊고 만다. 1941년 생인 그녀가 마치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 남자아이를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한 시간 반 동안 시금치를 붙이고 다닌 자신을 보고 상처받는데, 왜냐면 그것을 말해주는게 사실 너무나 쉬운 일인데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게 엉뚱하다. 성인의 관계에서는 그게 굉장이 미묘한 문제로 느껴지는 일 아닐까. 지적한다면 상대방이 민망해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고춧가루를 위험하게 여기는 데 비해 파슬리를 걱정하는 문화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내 생각에 현대인의 삶에 있어 진정한 기적 중 하나는, 극장에 들어가 신용카드를 기계에 갖다 대면 미리 예매했던 바로 그 좌석의 표가 바로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이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소리 지르고 싶다."

 

 이것도 좀 다른 부분인 것 같다. 신용카드를 기계에 읽혀 예매한 표를 찾는다는 방식은 처음 들어서 특이하게 생각됐다. 이 뒤로 바뀐 예매발권 방법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표하는 내용이 이어지는데, 우리나라 극장도 매번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녀의 이런 '변화에 대한 불만족'에 공감했다. 그녀만큼의 나이는 아니어도 변하기 전 것에 더 애착이 가고 가슴이 뛴다고 생각하는 건 같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표를 줬는데, 지금은 얇디 얇은 영수증으로 끊어져 나온다. 그건 극장이 주는 메리트에서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날 본 영화와 그에 얽히게 된 추억, 그리고 남은 표. 이 표도 버려야 할 판타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테플론 제품을 제조해온 듀퐁사는 최근 미국환경보건국으로부터 165만 달러의 벌금 제출을 명령받았다. 아마 듀퐁사는 테플론이 건강에 유해한다는 사실을 쭉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미국적이고도 진부한 내용이다."

 

 환경과 사람에 좋지 않은 행위를 한 거대 기업이 사실은 그 유해함을 알고 있었으나 숨기고 있었고, 그것이 밝혀지자 기업이 숨기고 있던 비밀까지 폭로된다는 내용은 매번 이슈가 되면서도 사실은 꽤 흔한 뉴스다. 그녀가 그 점을 '미국적이고도 진부한 내용'으로 꼬집은 점이 재미있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거침없고 유쾌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얘기를 언급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솔직한 내용도 있다. 거기다 이런 얘기를 언급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자질구레한 내용도 있다. 사실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버리지 못한 판타지가 그대로 묻어나고 판타지를 버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그녀처럼 유쾌하게 나이든다면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이런 종류의 로맨스가 끝장날 때에는 어떤 변명이든 늘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세부사항들만 조금 다를 뿐 이런 이야기는 항상 똑같이 진행된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을 우상화한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을 따라다닌다.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여성을 받아들여 준다. 젊은 여성은 나이 든 여성이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이야기 끝. 젊은 여성이 작가라면, 언젠가 그 나이 든 여성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세월이 흐른다. 젊은 여성이 나이가 든다. 그리고 로맨스가 그렇게 끝장난 것에 대해서만큼은 사과하고 싶어지는 순간을 맞는다. 지금 쓰는 글을 바로 그런 종류의 사과문이다."

 

 한때 빛났던 사람의 빛을 바라보고 그 빛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젊게 빛나는 동안은 그 빛을 자랑스럽게 내뿜으며 한때 빛났던 자의 스러짐을 바라본다. 자신의 빛이 다 스러지고 나서야 나이든 자가 스러지고 난 빛의 여운을 남기고 있음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영화 '은교'가 떠오른다. 소설은 아직 다 못 읽었기 때문에 영화부터 떠오른다. 나이 듦이 나이 든 자의 잘못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젊은 자의 젊음이 그들이 가진 특권이 아니라는 내용의 대사가 있었는데, 이 부분도 늙음이 오기 전의 젊음이 저지를 수 있는 착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은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비록 제자가 먼저 죽어서 이런 사과문은 나올 수 없었겠지만. 누군가를 존경하고 동경한다는 건 그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상이 자신의 이상과 부합하는 인물이라면 좋겠지만 글쎄, 이상적인 인물 그대로 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곤 하지 않는가.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상대방을 자신보다 높게 보고 존경하고 동경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하곤 한다. 누군가를 자신이나 남보다 높게 생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로인해 대상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좀 씁쓸한 일인 것 같다.

 

 "얼마 전 내 친구 그레이든 카터가 뉴욕에 레스토랑을 열겠다고 했다. 나는 그 계획에 대해 경고했다. 식당 경영이야말로 모두가 철들면서 버려야 하는 보편적인 판타지의 일종이라는게 내 지론이다. 그러지 않으면 식당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된다. 식당 경영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따라붙는다. 주인 스스로 매일 거기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건 가장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식당을 열겠다는 판타지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심리학자 피아제의 인지 발달 단계의 최종 심급이다." 

 식당 경영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게다가 동의한다. 주위를 보면 특히 '카페'를 경영하고 싶어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그렇게도 카페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여유롭고,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을 꿈꾼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생을 느긋하게 커피향 맡으며 즐기는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렇게 된다면 곧 경영부진으로 문을 닫게 될 것만 같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그렇다. 그런데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미국에도 보편적으로 있다니.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피아제의 인지 발달 단계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말이다.

 

 노라 에프런의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는데, 그녀는 약 일주일 전 죽었다. 이제 막 그녀의 영화 뿐 아니라 그녀도 사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그 기분은 다 느끼기도 전에 애도를 해야할 순간부터 찾아왔다. 그녀에게 이빨에 붙은 시금치에 대해 미처 말해주지 않은 친구들도, 그녀를 몰라도 영화만은 좋아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죽음을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녀 식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더이상 개봉되지 않는다는 것이 서운하다. 우린 철이 들었어도 아직도 많은 판타지를 그러안고 지내고 있고, 또 지내야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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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인 부모가 된다는 것 - 세계적인 교육학자 루돌프 드라이커스의
루돌프 드라이커스.비키 솔츠 지음, 김선경 옮김 / 우듬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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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인 부모라는 말이 시작부터 쉽지 않다. 변화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네의 전통적인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민주적인 형태를 띄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부모에게 권위를 바라고 아이에게 순종을 바라는 사회에서 살고 있던 것이 아닌가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언뜻, 이상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권위와 순종은 바람직한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부모와 아이가 동등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사회라는 말은 사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 정서에도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곧이어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에 그런 걸 따지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민주적인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는 민주적인 삶의 방식을 가져왔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들은 더 이상 권위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권위는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우위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평등한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

 

 책에서 부모는 이제 권위의 역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와 어떤 관계로 자신의 위치를 형성해야 하는 것일까? 책을 읽다보면 분명 아이에게 규칙이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적절히 지켜야할 선을 알려주는 역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아이를 무섭게 종용하거나 소리지는, 협박, 폭력 따위는 사용되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아이와의 힘겨루기에서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엄격할 필요는 있지만 그 엄격함을 아이를 굴복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데에는 다른 요인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이상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기력한 아이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부분이 많으며, 여러 상황에서 어른보다 더 슬기로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처럼 평등의 개념이 아직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이미 우리 문화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못견뎌한다. 그것이 아이가 자신의 몫을 다 해내지 않았다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반항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타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올려세우려는 행동과 다름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도 자신만의 재능과 개성을 가진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함을 말한다. 아이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어야 만족하거나, 모든 것을 대신 해주고 싶은 욕구가 드는 부모입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고, 모든 것을 도와주고 싶은 만큼 아이의 자율과 가능성 또한 지켜주어야 한다.

 

 "형제가 세 명인 가정에서 한 때 '아기'라는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했던 둘째 아이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 '중간'이라는 위치에 놓이는 경우에 이 아이의 입장은 특히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는 이제 큰 아이가 지니는 이점도, 아기로서 누렸던 특권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둘째 아이는 위아래로 압력을 받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만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인생도, 사람들도 모두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더욱 정당화하기 위해 일부러 도발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행동의 지침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가 쉽도록 해놓았는데, 그 중에서 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잡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이들은 소속감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요새는 아이가 하나인 가정이 많고 많아야 둘 정도겠지만, 형제가 많던 시절에는 보통 둘째들의 개성이 강한 편이었다. 왜 그런 특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비교적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답을 내놓고 있는 부분이라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서 좋았다. 아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가족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하고 부모와 주변의 관심을 받기 위한 것이 많았다. 그 점을 가장 주의깊게 여겨야할 것 같았다.

 

 "아이가 실수를 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지라도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일이 잘 안 돼서 정말 안됐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아서 어떡하지?" 하고 아이와 아이의 행동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패는 단지 기술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가치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요새 아이들은, 자존심만을 알고 자신감, 자존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가진 가치에 대한 확신, 가능성을 믿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실수, 실패를 아이가 한 행동의 결과물로 문제삼기 보다는 그 일 자체의 결과로 봐주어야 한다는 얘기가 공감이 됐다. 자신의 가치를 믿고 자기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해줄 마음을 가진 사람은 생각 외로 많지 않다. 매우 중요한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의 도전을 염려하기 보다는 응원하고 실패를 탓하기 보다는 인정하고 또 다음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하는 수단이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언어가 더 비효과적일 때가 많다.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부모 자신의 행동부터 살펴야 한다. 부모가 하는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니면 단순히 귀찮은 행동을 잠시 털어 버리는 것에 불과한지 잘 살펴야 한다."

 

 "아이가 편명한 선택을 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실수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아이들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지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관심을 얻기 위해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기지를 발휘한다. 그것이 부모가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모습이든, 부정적인 모습이든 타인의 관심만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아이에게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매번 같은 방식으로만 행동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은 아이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착한 행동만을 하려고 스스로를 억누르고 부담을 줄 수도 있고, 온통 비뚤어진 행동으로 상처입으면서 관심을 받으려는 무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힘겨루기나 관심받으려는 아이의 노력들은 너무나도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가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임이 분명한 만큼 부모의 말과 행동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우리가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들이 이 책 속에 녹아있다. 우리는 보통 그 덕목들을 나와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세련된 행동 양식으로 생각한다. 우리보다 미성숙한 존재인 아이는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필요치 않다고 여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숙한 행동 양식이 필요한 것은 아이와의 관계인 것 같다. 아이는 마치 거울처럼, 그리고 무섭도록 부모의 행동과 말에 집중하고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성적인 호기심과 장난 등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도 있었는데 큰 문제가 없는 한 아이를 훈육하지 않고 지켜보는 정도로 두도록 조언한 점이 특이했다. 부모의 입장에서 다소 난감하지만 관여하기 껄끄럽게 여겨지는 문제라서 요새는 성적인 부분에 대한 교육적 내용이 담긴 책, 만화, 연극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아이의 행동을 제지시키거나 직접 주의를 주는 대신 자율적으로 두면 스스로 충분히 조절이 가능한 문제로 보고 있다. 

 

 또 가족과 함께 하는 활동에 대한 부분에서도 텔레비전에 관한 얘기는 컴퓨터와 연결해볼 수도 있다. 과거에는 텔레비전이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우려했고 그것에서 아이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면 요즘은 컴퓨터나 핸드폰 등의 기기로 그 염려가 옮겨간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안에서 접할 수 있는 유해한 매체와 중독성은 과거 텔레비전이 주는 고민보다 더 큰 것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례들이 책 안에 있고 그 사례에 대한 원인 설명과 대처 방법의 제시가 상당히 자세하게 나와있다. 아이들이 생각 이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그 위치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놀랍다. 책은 매우 이성적이면서 엄격한 태도로 아이를 훈육하길 조언하고 있는데, 확실히 우리의 정서로는 쉽지 않은 길임이 느껴진다. 하지만 매우 유익한 길잡이가 될 책임은 분명하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있어 강압이나 귄위가 아니라 존중을 통한 자아실현을 도울 이야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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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흔아홉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2
김도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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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전작 목록을 보다가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눈에 띄었었다. 내가 읽은 책은 후지사와 슈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전 0시'였다. 탱고를 추는 장님여자와 온천 호텔의 종업원에 대한 얘기였는데 왜 헷갈렸는지도 모를 묘한 착각이었다. 책 '아흔아홉'은 세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애인이 함께 아흔아홉 대관령 고갯길로 소풍을 떠난다는 얘기다. 판타지 소설같지만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하나 아흔 아홉번째 고개 밑으로 떠밀려 떨어지는 치정 얽힌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생각 외로 드라이하고 산뜻한 이야기다. 생각 외로.

 

 "시트와 바닥을 배설물로 더럽히는 히치 하이커들에게 고함을 내질렀을 때 그때까지 조수석에서 얌전히 있던 고라니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와이프 사라진 거 알아요?" "......집사람이 왜 사라져?" "그건 저도 모르죠."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관령이 우리 운동장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고라니의 윤기 흐르는 까만 코와 동그란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아내의 죽음을 예감한 김첨지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술집에서 오기를 부리는 장면이 겹쳐 보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미 집을 떠나버린 아내를 두고 고라니와 대거리를 한다. 고라니와의 대화라니 좀 이상하지만, 또 생각 이상으로 자연스럽다. 그는 아내에게 답문이 왔다고 아내의 실종, 혹은 가출을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텅 빈 집에는 그만이 남았다.

 

 아내가 집을 떠난 뒤로 그는 아내를 찾으려고 하는 한 편, 애인인 Y를 부른다. 그녀와 아내가 없는 대관령 일대를 돌며 날선 대화를 나눈다. Y는 그와의 잠자리를 거부한다.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의 눈을 피해 몇 번이고 가졌을 일인데 아내가 사라지고 나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가 아내를 통해 성립된다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준다는 건 두 사람 모두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는 정작 두 사람 분의 몫을 충분히 받고 있으면서도.

 

 "길고 깊은 겨울을 대관령 골짜기 외딴 집에서 홀로 보내는 동안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선택권을 그에게 떠넘기고 떠난 거였다. 그런데...... 그 간단한 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그의 마음을 휘감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글쎄,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경멸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미성숙을 보았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 몫의 선택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잔인함을 남의 손에 떠넘긴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사람이라 잘 알고 있다. 나쁜 역을 하고 싶지 않고 가능하면 좋은 입장에 서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 내 행동을 이해받는 위치에만 머물고 싶어하는 어림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니 도리어 그 위선으로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아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만의 추측으로 아내가 집을 나간 이유를 짐작해볼 뿐이다. 아내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돌아와서 진저리를 치며 집안을 청소하고 낯선 이의 흔적을 찾으려는지, 지우려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그저 잠시 떠나있었을 뿐이지만 그 전까지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선택권을 떠넘겼다는 표현을 쓰고, 그럼에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남자는 이렇게 나약할지도 모른다. 그를 경멸하거나 역겨워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로 사실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이렇게라니?" 그는 서둘러 침을 삼켰다. "......마음 없이." 그녀는 뒤늦게 시린 기운이 몰려온 듯 눈을 찡그렸다. 사랑이나 정이 없다는 말을 그 덕에 간신히 바꿔놓은 것처럼. "......어쩌면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아닐까. 영원한 건 없잖아." "믿음 없이." "......아기를 갖는 건 어떨까." "아기." 그녀가 밭은 기침을 토해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아내는 그에게 Y를 불러 함께 소풍을 떠나자고 제의한다. 심지어 먹을거리를 마련하겠다고도 한다. 그 제의에 Y는 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친근하게 주거니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는다. 이 기묘한 동행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일까. 그녀들은 왜 도로에 그어진 선 이편에도 저편에도 서지 못한 채 가운데 흰 선만 밟으며 길을 가려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걸까.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처럼 다 채워지지 않아 불안정해도 그로도 충분하게 느껴지는.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더 인상깊게 생각된다. 꼭 채워진 백이라는 수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아흔아홉으로도 충분하고 꼭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나가 모자라 더 제것처럼 걸맞는 느낌이다. 겹겹이 싸인 골짜기들 사이사이로 사람의 옆모습을 본 딴 골짜기가 숨어있는 표지도 재미있다. 대관령의 아흔아홉 골짜기 마다 사람이 숨어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만한 거리에 서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존재한다. 사람들의 삶은, 인생은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흩어져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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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 김별아, 공감과 치유의 산행 에세이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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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첫날과 둘째날의 마음이 달랐다. 처음에 읽으면서 눈에 띄는 표현들이 상투적이고 산부심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지 모르게 산에 대한 찬양인 것이 어쩐지 영 마음에 까칠하게만 닿았다. 부정적인 시선을 달고 있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기운의 제목부터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져서 갑갑하고 의식됐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밤 자고나서 뒷 부분을 연이어 읽어내려가다 보니 전날 느꼈던 불편한 마음은 전혀 없고 오히려 이 책이 좋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달라진 건 별로 없는데 다 읽고 나니 책이 온통 내가 붙여놓은 갈피들로 화려해졌을 지경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산을 오를때와 내릴때 마음이 달라지듯이 하루만에 내 마음도 어딘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설산 하나를 넘어 다시 설산, 깊은 겨울 속으로 서서히 빨려든다. 몰아치는 찬바람을 피하려 손수건을 둘러매어 입을 가리니 쌔근거리는 내 숨소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차가운 침묵, 순정한 고독. 이 또한 겨울 산이 마련해 둔 비밀한 축복이다."

 

 위의 문구를 시작으로 그녀의 글이 내 마음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을 든 첫날 많은 분량을 읽지 않아서 꽤 초반부터 울림이 느껴진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산행과 작가 김별아 그리고 에세이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녀도 책에서 표현했듯이 내려올 것을 무엇하러 올라가는지 잘 모르겠고, 이해하고 싶은 의지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산행이라면 손사래를 칠 정도로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산이라는 것이 멀리서 철마다 바뀌는 모습을 보는 용도 외에 내 삶속에 영향을 미친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의 불편함은 그곳에서부터 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발이 290이나 되는 다 큰 아들을 가진 그녀가 나와 매우 다른 사람인데 김별아라는 여리한 이름이 내 예상과 달라 무색한 인물인데 꽤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으로.

 

 책에 프랑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에 대한 언급이 있어 반가웠다. 개봉했을 당시 혼자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실화였다는 것을 알고 갔는지 모르고 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역시나 꽤 감동적인 이야기였다는 것과 그닥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또렷이 기억난다. 책에서 언급된 영화 외에도 각 부분을 마무리 짓는 어귀마다 시가 한편씩 실려 있는데 대부분 좋은 시들이어서 곁에 누가 귀라도 기울여 준다면 소리내어 읽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들이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산에서만 머물지 않고 그녀 주변의, 그녀가 읽은 책과 시와 수필, 세상의 소식들까지 다채롭게 번져있었는데 그 점이 더욱 마음을 끌었다. 마치 같이 산을 오르며 생각이 닿는 여러 이야기를 끌어다 부담없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대거리를 해야할까, 무슨 주제를 끄집어내야 할까 걱정없이 술술 흘러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말벗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마음을 다친 사람의 삶의 원동력은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나는 오랫동안 삶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불신하며 두려움과 불안을 앓아왔다."

 

 전권에서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읽어보지 못해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이 없듯이 그녀도 나름의 어려움을 디뎌가며 삶을 견뎌낸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러기에 저런 문구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일테다. 말미에 가면 함께 산행을 했던 아이들과 삶에 있어 고난이 어떤 의미인지 토론하는 부분이 짧게 나오는데, 그녀가 던진 반문에 아이들이 어리둥절했듯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고난이 꼭 심적인 문제는 아니더라도, 삶을 풍족하게 살아내려면 온 마음을 다 써야하는데 남의 것보다 내 것이 먼저 다 쓰고 없어질까봐 마음을 아끼고 사는 요즘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깟거 다 버리듯 훌훌 써버리면 어쩔까 싶어도 혹시나 마음을 다 쓰고나면 나도 빈껍데기처럼 텅 비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이를 먹을수록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마음을 다주고 다쳐본 적도 없으면서 다친 흉내부터 내고 산다.

 

 "어쩌면 립 서비스에 가깝긴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이따금 말하곤 한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를 손가락질하며 네게서 등을 돌리는 한이 있다 해도,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야. 나는 너의 마지막 사람이야." 내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은 온전한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는 부모에게서 받았던 것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을 뿐이다."

 

 아이와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여정을 담아낸 책이라 아이에 대한 사랑이 물씬 담겨있기도 하다. 몇개월간 성큼 자란 아이에 대한 애틋함도 담겨있고, 함께 산행을 하는 다른 아이들이 쓴 글들이 군데군데 들어앉아 있기도 하다. 새삼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느껴지는 모습을 느낄때면, 이런 삶을 살수도 있겠구나 생각해 볼 여지를 주었다. 휴일이건 남는 시간에 각자의 공간에 틀어박혀 지금 내 가족이 우는지 웃는지도 모르고 사는것보다, 이렇게 뭔가를 같이 한다는 것이 좀 덜 편할지는 몰라도 더 예쁜 모습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아마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는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열린 자아(open self)', 두 번째는 나는 모르고 남은 아는 '눈먼 자아(blind self)', 세 번째는 나는 알지만 드러내지 않아 남은 모르는 '숨겨진 자아(hidden self)', 그리고 마지막은 나도 남도 모르는 무의식 속의 자아인 '미지의 자아(unknown self)'이다."

 

 자아에 대한 얘기가 언급되어 있기에 마음이 쓰여 옮겼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대번에 나를 방해하는 것이 숨겨진 자아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눈먼 자아고, 내가 가장 어색한 것이 열린 자아고, 내가 모르는 것이 미지의 자아라고 생각되었다. 한심스런 생각이라 생각한 것을 옮겨와 쓰면서도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그녀처럼 산에 오르거나,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뭔가에 집중한다면 이런 구질함이 좀 벗겨질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그래도 한참 먼 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놓여진 여러 모습들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도 해보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렇게 책을 읽다가도 문득 이런 부분이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저 네가지 자아에 대한 부분을 읽고 각각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해졌다. 사람들 저마다 다 다른 생각을 할 것은 분명하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책, 참 특이했다. 첫인상이 별로였던 상대도 만나보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느끼게 된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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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km - 열입곱 살 미치루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다
가타카와 요코 지음, 홍성민 옮김 / 작은씨앗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떤 큰 결심이나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처럼 길고 먼 거리를 향해 한 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청소년 시절 직접 이 100km걷기 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고 한다. 30, 40, 50, 60, 72, 86,... 각 체크포인트마다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꽤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마디로 걷기를 통해 느껴지는 감각들이 꽤 실감난다. 이 100km걷기라는 것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생소한 얘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는 될 것이다.

 

 여고생인 미치루는 부모님이 어린시절 이혼하여 엄마와 남동생 사토시와 지낸다. 엄마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입원한 이후 마치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듯이 변하고, 사토시는 위기에 처한 집안 사정은 나몰라라 철없이 지낸다. 막막한 때에 엄마의 동생인 외삼촌이 난데없이 100km 걷기 대회에 미치루를 참가하도록 신청해놓았다. 운동에 소질도 없고 끈기도 없다며 남동생이 놀리는 바람에 미치루는 어쩐지 욱하는 마음으로 걷기 대회에 참가했는데...

 

 " '그래, 내가 100킬로미터를 완보하고 나면 어쩌면 엄마도 달라질지 모른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을 받듯 이야기하며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겼다. '내가 100킬로미터를 걷는 것으로, 이렇게 고통스럽게 밤을 세워 걷는 것으로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만 있다면......' "

 

 미치루의 걷기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처음에 그저 나도 한다면 한다는 것을 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점점 걸으면서, 힘듦을 느끼면서 걷는 의미도 달라졌다. 내가 뭔가 어려움을 이겨내면 내 주위 환경도 달라질지 몰라, 이런 일들도 좀 변하게 될지 몰라 하는 바람이 헛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일들은 그렇게 해서 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변한다면 내 주위 환경도, 풀기 어려운 일도 나로 인해 달라지게 된다. 내가 도전한 일이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한 내가 변화되는 것이다. 뭔가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문득 왠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나카타 할아버지는 대회 중간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그 전까지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었던 생판 남인 사람이었다. 나이도, 성별도, 생활 환경도 전혀 다른 할아버지와 이곳까지 서로 의지해 가며 함께 걸어오다니...... 생각할수록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청소년들에게 소중한 이유는 이것인 것 같다. 나와 접점이 없던 남과 만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런 만남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만남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더라도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의지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과 세상은 모두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다른 나라에서, 옆 동네에서, 이웃집에서 누군가 아파하고 고통받는다면 그 고통이 곧 나에게도 전해질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걷는 내내 즐거웠던 추억부터 괴로웠던 기억까지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대로 죽는 것도 아닌데, 그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걷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자꾸 비장한 마음이 드는 거지?"

 

 한참을 걷기만 한다면 그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쉽고도 어려운 것이 바로 수없이 많은 생각일 것이다. 주인공 미치루도 그랬다. 안그래도 복잡한 가정사로 머리속이 어지러운데 힘에 부칠 때마다 안좋은 기억들, 묻어두었던 추억들이 이리저리 번져나간다. 막기에도, 떨쳐내기에도 어려운 생각들 틈에서 혼자 100km를 걷는다는 상황까지 겹쳐 자기 자신을 쓸쓸하게 여기는 미치루의 모습이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 '나는 나를 믿어'라는 말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감이 나에게는 없었다. 엄마는 늘 그것을 신조로 살아왔지만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싶었다. 그래, 지금이 바로 그때다!"

 

 주인공 미치루가 30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며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 한번도 아니고 삶의 자잘한 순간들마다 고루해지는 자신을 환기시킬 계기가 크고 작게 있어야 한다. 이 100km걷기도 그런 변화를 줄 수 있는 하나의 체험이 될 것이고, 이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독자들도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새로운 의지를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달라지고 싶었지만 달라질 계기를 잡지 못했을 때, 달라질 타이밍을 알 수 없을 때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최근에 읽었던 다른 책은 미국청년이 쓴 것으로 미국의 50개 주를 돌며 50가지의 직업체험을 해 낸 경험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도 현실이 주는 시련에 괴로워하던 때에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고싶다는 생각으로 그런 도전을 하게 된 것이었는데 이 책의 주인공인 미치루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도전을 이뤄낸 점이 비슷하다. 이 책을 접하는 많은 청소년,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감화를 일으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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