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마을이 있다?' 얼핏 서프라이즈나 생생정보통의 성우 톤으로 읽게 되는 단 한줄의 문구가 '타오르는 마음'의 거의 유일한 단서였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하나, 청부를 받아서 진짜 사람을 죽인다. 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꾸며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셋, 살인사건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대신 처리해서 돈을 번다. 이 세 가지 정도가 한줄의 단서를 가지고 내가 예상해 본 빈약한 마을의 비밀들이었다. 예상은 어느 정도는 맞았고 대부분은 틀렸다.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과 사건들 탓에 저 세가지 추측 정도로는 이 이야기의 어떤 축도 세우지 못했다. 책을 읽기 전 당신은 어떤 예상을 할 수 있을까?

 

"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오기와 내 조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멈춰 세우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달릴 줄만 아는 수레바퀴였고, 그 질주는 꼭 바퀴가 망가지거나 수레가 똥더미에 처박혀야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태져 똥더미를 향해가는 그런 사이. 하지만 마음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98) (413)" 

 

 밴나는 8년 전 있었던 살인 사건의 목격자다. 작고 쇠락한 마을인 비말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살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목격자이기도 하고, 용의자이기도 하고, 유가족이기도 하고, 추격자이기도 하고, 또 범인이기도 하다. 밴나는 과거의 이상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무시당하고, 행동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나조가 살해당하자 밴나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를 둘러싼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밴나 본인도 어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녀의 추적은 브레이크가 없이 질주하는 수레처럼 위태롭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숨기는 것 없이 다 보여주는데 왜 이렇게 길이 복잡하지 어리둥절했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 큰 판을 솜씨좋게 오려내 전혀 다른 순서로 끼워맞춰놓은 것을 정리하며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뒤집힌 수많은 카드들을 딱 두번씩만 뒤집어가며 같은 패를 찾아내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먼저 뒤집힌 그림들이 짝이 맞지 않는다면 다시 돌려놓되, 그게 뭐였는지 기억해야 게임에 유리하다. 기회를 놓치면 내가 뒤집어 확인해놨던 패를 저자가 먼저 맞춰 들이미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봐야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먼저 맞추는 경쟁은 아니지만, 무심결에 지나쳤던 대목이 나중에 결정적으로 다가오면 눈치채지 못했던 게 아쉽다.

 

 읽는 동안에는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언제나 이유는 참 별 것 아닌데 사건은 크게 벌어진다 싶었다. 소설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사람의 마음이 타오르기 때문에, 분노나 고통이나, 정확히는 욕망에, 그것들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이럴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읽을 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건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다수의 억압이 소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가장 무서워보였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마피아 게임을 하는데 아무도 내가 시민임을 믿어주지 않고 몇 판 내리 시작만하면 무조건 죽인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좀 이상한 비유같지만 비말의 분위기도, '범인'을 잡는 축제의 게임도 그 이상으로 가혹했다.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의 차이점도 실감했다. 결국 살아남는 자는 진짜뿐이었다.

 

 무대는 별 것 없는 쇠락한 마을인데 축제 시기와 겹치면서 너무 복잡하게 많은 일들이 생겨난 것도 난감했지만, 읽으면서 가장 몰입이 어려웠던 부분은 '깡'이란 의성어들이었다. 이쯤되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몰입이 확 깨져버렸다. 비운의 망곡이었던 비의 '깡'이 갑자기 밈화되어 이렇게 되살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도배된 깡들을 바라보며 이게 다 몇깡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모르 파티'라는 말의 뜻이 마음에 들어 문신으로 새겼는데, 갑자기 김연자 선생이 노래로 불러 문신을 볼 때마다 난감해졌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 산 사람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굴절된 자아의 투영이나, 집요한 소유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 우둔함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그렇듯 우둔하게 살다가 우둔하게 뒈지는 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축복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인간은 인간의 쓰레기통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감정의 배설을 쏟거나, 진짜 배설물을 쏟는다. 그들은 그렇듯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다 죽는다. (76) "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설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과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누구보다도 사랑을 집요하게 해체하려 들었다니. 그런데도 책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고 공감됐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정신없이 끝을 향해서 내달리듯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오로지 끝이 궁금하다는 마음에 서둘러 읽어내느라 지나쳐버렸던 것들이 눈에 밟혔다. 자꾸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의심해볼걸, 이 사람이 한 말이 뭘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을텐데! 하며 아쉬웠다.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더라도 꼼꼼히 살피며 천천히 한번에 읽어내거나, 성격이 급해 달리지 않고는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은 사람은 필히 한 번 더 읽어야 만족스러울 것이다. 끝을 알아도 서두르느라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내 이걸 왜 놓쳤지?! 하며 곱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결국 죽음의 사막을 뚫은 것은 돈과 신앙이었다. (10) "

 

 작년에 창비에서 돈황 실크로드 원정대를 모집한 적이 있었다. 컨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응모자를 뽑아 약 300만원에 해당하는 비용 지원을 해준다는 공고였는데, 능력이 안되어서 그렇지 한동안 너무 부러워서 공고 게시물을 찾아보고는 했다. 이때 돈황이라는 지명을 처음 유의미하게 인지했는데, 그동안 실크로드라고 하면 죽 이어진 길의 관념으로 생각했으나 도시 거점으로 이어진 것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자세히 깨닫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중국편의 시작은 꽤 큰 프로젝트로 느껴져 전부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자의 문학적 소양과 어우러진 '누란'의 소개부터 시작되는 3편도 즐겁게 읽었다. 

 

 처음엔 답사기라기보다 역사서에 더 가까운 설명들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세한 설명으로 실크로드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할 독자들을 이끌어주고 있지만 현장감이 부족하다고 할까. 하지만 쿰타르 사막의 전경이 나오면서 확실히 동경하는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사막의 모래언덕들이 겹겹이 솟아난 모습을 보니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커졌다. 이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모래산이 존재하고 있는 광활한 땅도, 또 그것을 사륜지프로 오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저런 곳에서 밤하늘을 본다면 어떨까, 불빛의 방해없이 보는 별길이 어떨까 궁금했다. 아주 짧게 등장했지만 저자도 쿰타르 사막에서의 풍광을 가장 감동적인 순간(72)으로 꼽았으니 언제고 사막에 가보리라 생각했다.

 

 읽다가 문득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전시실을 관람하기를 권하는 내용이 나오는데(141) 한국전쟁 때 소장하고 있던 벽화 파편들을 부산으로 피난시키며 보존하려고 노력한 일화가 나와 기록과 보존의 DNA를 가진 것이 분명한 한국인의 모습을 실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한동안 찾지 않았는데, 책을 읽은 김에 다녀와보고 싶어졌다. 이 유물들이 우리나라에 남겨지기까지의 과정이 참 씁쓸하지만 중국으로의 먼 길을 떠나지 않고 책에서 본 로프노르 호수와 소하 유적지, 누란왕국, 호탄, 쿠차 등 서역 각지의 유물들이 망라된 것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찾아가보는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달걀 모래찜 구이는 못 먹겠지만.

 

 아무래도 책으로 읽으면서도 넓은 땅덩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광활한 자연에 압도되는 순간들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천산산맥의 모습이나, 키질석굴, 키질리아(천산신비대협곡), 사막과 들판이 광대하게 펼쳐진 끝없는 대자연의 모습은 경이와 매혹을 일으킨다. 우리나라를 좋아하지만 압도적인 자연경관을 마주할 수 있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외국의 이런 장소를 향한 여행 욕구가 샘솟곤한다. 그래서 타클라마칸사막 여정이 나오는 부분은 특히 더 재밌게 읽었다. 3대가 공덕을 쌓아 사막의 비를 맞이한(310) 내용은 부럽기까지 했다. 언제고 어느 곳의 사막이든 한번쯤은 찾아가봐야지 마음먹었다.

 

 책을 읽으며 등장하는 화가(221)와 무용가(267) 지인들과의 후일담이나 망자의 치아를 살펴 생전의 나이나 건강상태를 짐작해 본 함께 간 치과의사(127) 분, 간간히 설명을 곁들여 준 최선아 교수(211),  만화가, 스님, 무엇보다 '답사학'으로서의 답사를 이끈 저자 등 함께 한 구성원들의 조화가 참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한 삶의 궤적만큼 여행의 색이 풍부해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낯설고 다양한 사람들과 여행을 나누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오죽하면 여행사 단체 관광을 기피 1순위로 꼽는 사람들이 있으려나 싶게, 언제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행이 있다면 배우는 마음으로 따라가고 싶었다.

 

 9장에 이르면 위구르 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최근들어서도 그들이 심한 격리와 산아제한 같은 비인간적인 처우를 당하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자 역시 위구르 민족에 대한 애정과 동정을 드러내었다.(388)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은 곤륜산과 향비묘라는 애칭을 가진 야르칸드한국의 '아바 호자' 가문의 공동능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둘 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들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중국보다는 이슬람 분위기가 강하게 엿보여 고성의 풍경을 그전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마침내 파미르고원 설산과 함께 펼쳐진 검은 호수의 풍경으로 답사가 마무리되었을때 깊은 몰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매력적인 답사였다.

 

 여행을 할 때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기록이든 혹은 기념이 될만한 것들을 남겨두는 사람들을 아주 부러워한다. 언제는 일지처럼 꾸준한 일기를 써보려고 했으나 저녁만 되어도 기억이 가물했고, 좋은 장소에 가면 그림을 그려볼까 했는데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지도며 영수증, 입장권 같은 것을 현지돈과 함께 모아둔 적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잉크가 이내 옅어져버렸다. 결국 전형적인 한국 여행자답게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으며 기념품가게에 들러 작고 저렴한 기념품이나 하나씩 사오는 것에 머물렀다. 답사기를 읽고 있자니 문득 지난 여행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세상이 전과 같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좀더 그때 그 순간에 충실할 걸 하는 생각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 반가웠다. 아는 것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좋아하지만, 시선을 완전히 바꿔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면 마음이 들썩인다. 작가 이름을 다시 잘 살펴봤다. 언제고 이 이름으로 다른 책이 나왔을때 놓치지 않고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를 때는 막연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인물이 나오겠거니 했는데, 그동안 봐왔던 심리와는 결이 달랐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참 무례하구나, 삶이 계속된다는 것에 대해 한번도 이해한 적이 없었구나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책속의 원이를 보면 그 생각을 풀어내는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십팔년 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너. 그때의 너를 떠올린다. 원이를 읽으면서 너를 겹쳐보는 일이 멈춰지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버텼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이렇게 또 너를 떠올려도 괜찮을까, 너 뿐만 아니라 모든 불운한 사고를 겪어낸 사람들은 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걸까. 그런데 그때는 나도 어렸고, 이런걸 몰랐었다. 알았더라면 어쩌면 너에게 '마스터 키'를 건네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고 끌어올려진다는 것, 인터넷에 박제된 얼굴로 남아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들은 인터넷 안의 기록물로 남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게 참 끔찍하게 여겨진다. 때때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그날을 품고, 너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이제는 이런 생각조차 다시는 떠올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유원'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보다, 어쩌면 그게 가장 예의바른 태도일지 모른다는. 사진 속에 남은 익숙한 얼굴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 책을 전해주고 싶다. 기억하니. 우리 잊자, 하고.

 

 내가 떠올리는 과거의 일과는 별개로 소설 속 원이가 겪은 화재는 몇년 전 의정부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다른 사건들도 많았을텐데, 왜일까 읽다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그러다 문득 작가는 어떻게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까. 왜, 무엇이 계기가 되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다 읽고 난 뒤에도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남은 이야기는 오랜만이다. 언제고 이 질문들의 답을 들을 수 있는 작가의 말을 읽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기왕이면 창비의 계간지에서 백온유의 인터뷰를 보게 된다면 좋겠다. 

 

 종종 청소년 소설을 찾아읽고는 하는데, 청소년 소설을 읽을때면 다른 소설들을 읽었을 때보다 더 자주 감동을 받는다. 정신연령이 청소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아니면 청소년 소설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같은 것- 계몽소설같은 의미전달이 취향을 저격하는 걸까, 그 애틋한 한뼘이 성장하는 순간들이 마음을 울린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뒷면에 쓰인 '위저드 베이커리, 완득이, 아몬드'를 잇는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몬드'만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유원'이 이들을 잇는 소설이라면 기꺼이 '아몬드'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지음 / 김영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지사지라는 말을 이렇게 알뜰하게 활용할수가 있을까.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입장이 되어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실제로 체험을 해 본 저자의 입에서 쉴 새 없는 간증이 튀어나온다. 어떤 내용은 공감도 되고, 어떤 내용은 이거 좀 과장된거 아닌가 싶게 절절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지 하루의 몇시간 뿐인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교육과정이 달라서 몰랐는데 요즘 애들은 '현장체험학습'이라는걸 한다고 해서 그게 뭔가 싶었는데, 체험이란게 생각보다 큰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구나 깨달았다. 라떼는 그런 거 없이 암기 위주로 공부해서 잘 몰랐지 뭐야.

 

 체헐리즘이라는 말이 생소했는데 막상 그가 체험한 것들은 일상적이었다. 브래지어를 체험해본다는 가장 첫 체험부터, 육아, 노인, 동물구호, 취업준비생, 환경미화원, 집배원, 소방관, 심지어 땡땡이치기, 아무것도 안해보기,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보기 같은 것들도 그의 체험 목록에 있다. 언뜻 하루 체험해본다는 일이 어른판 키자니아 같은 것 아닌가 싶은데 확실히 '어른판'이라 군데군데 맵고 씁쓸한 것들이 심어져있다. 아닌가, 대부분 험난하고 아주 잠깐 숨돌릴 틈이 끼워져있던가? 타인의 삶에서 단 하루를 체험해본다는 것이 다름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꽤 꼼꼼하게 그 하루를 채워넣은 것을 보고 공감도 하고 이해도 하며 읽었다.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체험은 80세 노인의 하루(39)였다. 얼굴 뿐 아니라 몸에도 체험 기구를 달고 하루동안 거리를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저녁에 팔에 생채기가 잔뜩 남은 사진이 담겨있었다. 실제라면 없었을 생채기지만 노년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보여주는 자국같았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늙어 노인이 된다는 것은 내 앞에도 반드시 남겨진 '체험'이 될 것이라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 분장을 하고 폐지를 줍는 일도 함께 체험했다면 아마 저자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체험만이 구전으로 전해져 ,라는 비극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두 체험이 고되게 보이는데, 또 버젓한 현실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좀 무거운 내용이 될 수도 있는 체험들이지만 확실히 저자가 글을 잘 쓰기도 하고, 곳곳에 웃음코드를 흘려놓아서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분위기다. 육아체험에서 어머니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애를 낳지 않겠다고 하시자 '그럼 저는요....'하고(23) 묻거나 취업준비생체험에서 서류가 떨어지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85) 50번 거절당하기(232)는 거절의 목록을 살펴보면 그동안 억눌러왔던 저자 개인의 욕망을 체험이라는 핑계를 삼아 마음껏 질러본듯한 느낌이 물씬난다. 그리고 반려견 똘이에게 뽀뽀하기까지 처참히 거절당한다. 아주 솔직해서 재밌고, 매력있는 글이었다. 얼마만큼의 솔직함으로 완성되었는지 궁금할만큼.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 어떤 체험을 해보고 싶을까 진지하게 골라봤는데,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기(248)나 강아지와 하루를 보내기(275)가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니, 가능하다면 노인체험을 해보고 싶었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대비해야할지 도움이 될 것도 같고, 갈수록 심화되는 세대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더 세심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직업적으로는 책에는 없지만 빵공장, 꼭 빵공장 최소 과자공장에서의 하루나 오토바이 배달원의 하루를 체험해보고 싶다. 공장은 힘들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사심이 좀 들어갔고 오토바이 배달은 안전한 속도로 신호지켜서 배달하면 돈도 안되고 배달도 밀리고 고객들도 안 좋아한다고들 하는데 어떤지 궁금해서 해보고 싶다.

 

 책 출간 기념으로 저자가 진행한 유튜브 남형도 기자의 퇴근길 라이브를 봤는데, 생각보다 날씬해서 배신감이 들었다. 그냥 체격이 건장한 것일 뿐 뚱이가 아니었다. 말씀도 잘하셔서 책뿐만 아니라 유튜브도 재밌었다. 성도 남씨라 뭐라도 남길 수 있도록 남기자가 되어버린 사람이 온몸을 바쳐 전하는 체헐리즘의 정수, 같은 책이니 한번쯤 읽어볼만하다. 재미와 감동, 우리사회 톺아보기까지 알차게 담겨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