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02 - 멋진 신세계, 2021.1.2.3
문지혁 외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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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픽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도전이 궁금했다. 문예 계간지라니. 곤궁한 인맥 때문일까 문예지와 계간지를 혹은 그 둘 모두라 할지라도 찾아 읽는 사람을 본 적이 그리 없다. 더 솔직히는 책 읽는 사람마저도 보기 어렵다. 책을 읽는 것이 내밀한 취미생활이 되어버렸는지 인터넷에서는 책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데 실생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은 미용실에서도 핸드폰을 하지 잡지는 잘 안읽는다. 우리는 하루씩 '읽기'와 멀어지고 있는데, 어쩌면 그 안에서도 확고한 취향이 존재하는가 싶은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서사 중심의 문학잡지!라는 기조를 내세워 창간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에픽이 어떤 색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에픽의 필진들과 그들의 글을 보면서 불현듯 21세기에 되살아난 살롱문화를 떠올렸다. 에픽은 아마 기획자들이 꿈꾸는 살롱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이 살롱에 초대받은 자들이 자유롭게 각자가 가진 교양과 지식, 재능을 펼쳐내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조금 낯설고 또 흥미로웠다. 어떤 글이든 그렇겠지만 에픽 안에서 만난 글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래서 확신의 수요가 있을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사교모임의 장을 열고자 한 느낌이다. 에픽이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지게 될 것인지, 협업과 기획으로 분야를 넘나드는 플랫폼이 될 것인지 앞으로가 기대된다.

 

 '모든 텍스트는 문학이다'라는 문구가 강렬한 이 문예지를 읽으며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평소 다른 분야의 글들보다는 소설 읽는 것을 가장 편하게 느끼는데 에픽 안에서는 오히려 논픽션 쪽의 글이 더욱 흥미로웠다. 몰랐는데 나 르포 좋아하네. 여성 노숙인의 이야기를 다룬 구술생애사 최현숙의 글이나 응급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남궁인의 글이 가장 인상깊은 꼭지였다. 솔직히 이 두 글의 방향성이 어떠하리라고 예상한 정도의 범위안에 있다는 점('여성' 노숙인의 현실을 통해 여성주의 담론으로 확장되는, 응급실 근무의 어려움, 사명감 그리고 노동자들의 처우 같은)은 아쉽지만, 그래도 매번 타인의 삶 - 그것도 쉽게 경험해보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건너볼 수 있다는 것은 매번 흥미를 끈다.

 

 그렇다고 해서 픽션이 마냥 열세였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글의 강렬함이야 제목부터 남다른 김홍의 '이인제의 나라'를 넘어설 수는 없겠지만, 아니 애초에 왜 '이인제'일까. 개인적인 감상이야 어찌되었든 암튼 이 제목을 이인제씨가 좋아합니다. '이인제의 나라'라니 정치인에게는 정치 인생의 꿈같은 제목 아닌가. 그리고 필진 중 가장 익숙하고 반가운 이름이었던 황정은 작가의 글도 기대되었었다. 공교롭게도 '기담'에서 " 남자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현관 안쪽으로 안쪽으로 뒷걸음질하면서 알고 있다고, 아이가 많이 뛴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저도 아이를 혼내고는 있는데요, 그래도 생각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 게요...... 이 이상 아이를 컨트롤하려면 때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뭐라고요? 제가 아이를 때릴 수밖에 없어요.(320) " 요즘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층간소음과 폭력 모두를 내포하고 있는 내용에 깜짝 놀랐다.  

 

 에픽을 처음 읽어본 나로서는 확실히 낯선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이 유료회원으로 가입한다던 살롱문화 같은 것인가 싶기도 했고, 새로운 문예계간지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첫만남으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창간호와 그 다음호에 들이는 각오가 흔들림없이 이 다음 에픽에서도 유지된다면. 우리에게 이것이 부재했고, 이것이 필요했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진다면 앞으로도 에픽의 계절을 기다리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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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일 - 재수 x 오은 그림 시집
재수.오은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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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일'은 독특하다. 요즘 시와 그림이 접목된 책들을 종종 만나곤 하지만, 그게 그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가 연결되는 모습이 대부분인데 '마음의 일'은 그림이 시고 시가 그림이다. 그래서 시툰이 아니라 그림시집이라고 되어 있다. '마음의 일'을 읽으면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시를 읽으면서 영상을 보게 되고, 그림을 보면서 어느새 시를 읽어낸다. 이 느낌은 영화 '러빙 빈센트'와 비슷했다. 그림을 보는 것과 영화를 보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한 시간들. 종이 위에서 공감각적 체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음의 일'이 독특한 것은 이 책을 내기 위해 협업한 두 작가가 친구사이라는 점이다. 오은 작가의 에필로그에 " 친구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란 뜻인데, 친구라고 칭하기에는 거리와 시간 모두 한참 모자란 상황이었다. 어느 날, 그것을 단숨에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함께 책을 내는 것.(234) "란 내용이 있었다. 오은 작가는 학교 다닐 때 조별과제를 해본 적이 없었던걸까 먼저 궁금해졌다. 재밌자고 떠나는 여행도 친구사이를 갈라놓을지 모르는데 하물며 협업이라니. 어쩌면 본심은 재수 작가와 한번 찐하게 얽혔다 끊어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는 조별과제 용 명언도 있는데, 친구가 되기 위해 협업을 꾀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협업은 의미있는 결과물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오은 작가의 감성적인 문장과 재수 작가의 섬세한 그림이 괜찮은 조화를 이룬 한권의 책을 만났다. 책 안에서 책을 펼치는 느낌(22)을 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가끔 그렇게 그 면을 온전히 들여 표현한 장면들에 마음을 뺏기곤 한다. 어린시절 읽었던 만화책 중 하나에도 펼쳐진 두 면이 그저 까만색으로만 표현된 장면이 있었는데, 온 페이지를 할애해 비중있게 표현하는 인상깊은 구성이라 이번 장면도 마음에 들었었다. 특히나 책의 초반부에서 책을 읽는다가 아니라 책 안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어서 좋았다.
 
 시와 그림으로 구성된 내용이니 금방 읽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한 부분 한 부분 그냥 넘어가는 책이 아니었다. 한참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이 예민한 시기에 '마음의 일'을 읽는다면 아마 더욱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성인 독자들도 충분히 몰입할만한 섬세한 감성을 다루고 있지만 특히나 청소년기의 독자들이 많이 공감할만한 내용이다. "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에 이 그림시집을 접했다면 이 겨울밤 동안 책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때가 있었는데, 싶은 아련함이 더 컸다. 평생 그 감성 그대로 안고 살까봐 걱정했었는데, 지나고보니 그럴수가 없었더라. 아직 감성의 여운이 남았나보다.
 
 이 두 작가가 다시 또 찐하게 얽히려들지 모르겠지만, 연령대별로 그림시집을 더 내줘도 좋을 것 같다. 마음의 이, 마음의 삼, 사... 이렇게. 요새는 자꾸 중장년-노년층의 인생이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들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한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낮부터 저녁까지 한바탕 눈이 펑펑 내렸고, '마음의 일'을 읽으며 감성을 마저 채웠다.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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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현대 편 - 대공황의 판자촌에서IS의 출현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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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히 좋은 모임은 못되겠지만, 성공한 사람의 대단하고 반듯한 성공기를 듣는 것보다 실패한 사람의 그래서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는 바람에 이렇게 됐느냐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더 마음도 편하고 재밌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자, 여기 손. 쌤통의 심리학같은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성공한 사람의 '야, 너두 할 수 있어, 분명 나처럼 노력도 해야되고 운도 좋아야되고 환경도 비슷해야 되고 이런저런 요인이 있겠지만.' 을 내포하는 성공담의 은근한 부담을 느끼면서 희망을 찾기 보다는 '아, 이런 식으로도 실패를 하는구나. 실패해서 꼭 망하는 것만은 아니네, 혹은 내 실패는 저 정도에 비하면 내 속만 좀 쓰리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회복가능한 정도네.'하고 타산지석 삼기 위해서다. 솔직히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역사와 인물 얘기는 어린시절 위인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위인전 다 읽은 우리들은 흑역사로 세계를 읽는 눈을 길러보자.

 

 미리 밝히자면 이 책은 고대-근대 편과 현대편이 있다. 두 권 중 어떤게 더 재미있을까 그리고 깨알 상식을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현대편을 읽기로 마음먹었는데, 맙소사 두 책이 분리는 되어 있지만 번호는 연번이었다. 51번 흑역사부터 시작한다. 목차는 과감히 생략하고 펼치자 마자 초코칩쿠키 먹고 싶어지는 51번 흑역사를 마주하고 당황했다. 1번부터 50번은 어디갔죠? 잃어버린 번호들을 찾아서 앞으로 넘겨보니 뛰어넘었던 고대-근대편이 거기 있었다. 내용자체는 이어지는 부분이 없지만 번호가 이어지는 것이 영 신경쓰인다. 뭐든지 시작부터 차근차근히 해야 되서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만 풀다가 수포자 된 사람들은 착실히 고대-근대편부터 읽도록 하자. 거기에 1번과 근본이 있다.

 

 흑역사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단순 실수로 생겨난 사소한 발명같은 얘기나 권력층의 판단 오류가 불러온 대공황, 전쟁같은 끔찍한 비극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흑역사라는 말을 지우고싶은 졸업사진이나 어린시절 치기어린 행동 같은데에 흔히 쓰기도 하고 가장 처음 나온 51번 흑역사가 '초코칩 쿠키'의 등장같은 내용이어서 대략, 냉면을 뽑으려다 기계를 잘못맞춰서 쫄면이 만들어졌네! 삼겹살을 자르려다 기계를 잘못맞춰서 대패삼겹살이 만들어졌네! 같은 은혜로운 흑역사의 세계 버젼이 좀 나오려나 싶었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월드급 흑역사들은 스케일이 남달랐다. 대공황, 스탈린,히틀러... 그러니 각 번호마다 두어장 정도의 짧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에 따라서는 무게감도 함께 느껴지는 구성이다.

 

 외래산 유해종들 때문에 우리도 고생한 기억이 여럿 있고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미국에서 '칡'이 꽤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54번째 흑역사는 전에 인터넷에서 짧게 본 적이 있어 여기서 자세히 읽으니 더 재밌었다. 칡의 생존력이 강해 제거가 어렵고 다른 식물들을 타고 올라 죽이며 번져나간다는 얘기를 듣고난 뒤로 가끔 차를 타고 가다보면 덩쿨식물이 나무들을 타고 올라 뒤덮은 것을 볼 때 혹시 칡인가 염려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런데 종종 거대한 칡 뿌리를 캤다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중년의 아저씨들과 인터넷에 칡만 쳐도 연관검색어로 칡의 효능과 요리법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염려가 쏙 들어가곤 한다. 특유의 묘한 맛을 지닌 칡차를 즐겨마시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우리 산림과 건강을 위해 칡을 먹읍시다.

 

 또 하나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 선한 사람이 설 자리는 없다 "는 95번 흑역사의 내용이다. 요즘 중국의 행보가 워낙 문제적이라 중국과 중국인이라고 하면 상종하고 싶지 않아지는데 95번 흑역사는 중국 내에서 입밖으로 내지 못할 '천안문 사태'를 담고 있다. 오늘도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각한 수준까지 퍼져나갔다는 우려를 보았고, 일본에 이어 중국마저도 김치를 자신들의 식문화로 만들려하는 갖은 시도를 목격할 때마다 분노와 피로가 함께 쌓인다. 중국에 정말 선한 사람이 설 자리는 천안문 사태 때 사라진 것일까. 지금 중국의 이 파렴치한 행보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인지, 언젠가 다시 의식있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흑역사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도 많지만 자세한 내용을 매번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끔 이런 책을 읽으면 또 늘 새롭고 짜릿하고 재밌다. 살짝 똑똑해지는 그런 느낌. 지루하지 않게 또 한번에 꼭 흐름을 놓치지 않고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짧은 호흡으로 나눠읽기에 좋은 구성이기 때문에 여유 시간에 잡지를 보듯이 하나씩 읽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충분히 긴 방학동안 세계사에 관심도 불러일으켜 줄 겸 추천해주기에 좋은 책이다. 물론 어른이 읽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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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오늘을 살다 -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학
가토 다이조 지음, 이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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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씻기 전에 세면대 앞의 거울에 서서 시간을 들여 얼굴을 뜯어보았다. 때때로 거울로 얼굴을 살피곤 하지만 보통은 잡티가 늘었는지 혹은 주름이 깊어졌는지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다. 이번은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 ! 그럴 수 있을까- 보려고 했다. '불혹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Abraham Lincoln "After 40 every man gets the face he deserves.")는 말이 있다. 가토 다이조의 "기꺼이 오늘을 살다"에도 인용(43)된 말이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얼굴은 어떤 모습이지 지금껏 이 얼굴로 살아왔으나 새삼 책임을 물으니 여직 철이 없어보이는 얼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요즘 다양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치유계열의 응원책, 이를테면 -해도 괜찮아, 쉬어도 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쪽으로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다. 읽어보니 생각보다 강경한 어조에 자신이 일궈낸 삶의 성숙에 큰 만족을 드러내는 분위기로 치유보다는 조언계열에 가까웠다. 솔직히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성공한 인생은 인간관계로 결정 난다(74)' 같은 내용이 있어서 그랬다. 읽어보면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둬야 한다는 정도의 내용이긴 하지만 다소 공격적인 어조다. 인간관계로 결정나버리는 성공이란 뭘까.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초반의 거부감은 점차 줄어들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삶을 '매일매일 86400이라는 동등한 선물이 주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 "편안한 인생 같은 건 애당초 없다(6)" 고 단언하는 것처럼 삶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지워지는 짐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127)에 대해, 자신의 생존 비법을 알려주듯이 쓴 글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여러 상황적으로, 특히 주변 환경같은 문제들로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의 내용에서 좀 더 와닿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3장과 4장의 내용들이 1, 2장보다는 더 괜찮았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가장 집중해서 읽은 것은 맺음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속으로 생각한 내용까지 그대로 읽힌듯한 문장은 " 내가 아무리 '인생의 짐을 짊어져라.'라고 써도 많은 사람들은 '그건 싫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할 게 뻔하다(224) " 마치 돗자리를 편 것처럼 예리한 통찰이었다. 이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왕도를 벗어나지 못한 소재들을 썼을까 싶다가도 결국 인생을 얘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겠구나 깨달았다. 얕은 불평은 그만두고, 보기 싫어 외면한 곳을 곁눈질하듯이 나는 내 인생을 책임지고 살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무겁고 무거운 짐이다. 사람들이 다 그런 고민을 떠안고 살고 있는걸까.

 

 우리는 요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며 '쉬어가도 괜찮아'하며 위로를 받는다. 노오력하는데 질려버린 사람들, 그 중에 나도 짐을 내려놓고 한껏 자신에게 관대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네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네 몫의 짐을 지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피해가려 했는지 보라고 말한다. '인생의 책임' 무엇보다도 던져놓은 그 질문 하나로 너무나 무거운 책이었다. 압박감에 불편한 마음이 들 때 그제서야 부제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을 지킨다고 한 것이구나 싶어진다. 한동안 치유계열의 책들로 위로를 많이 받았다면, 이번엔 이 책을 읽고 다시금 의지를 다져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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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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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그 매력이 다 드러나지 못하고 끝나버려서 책 읽고 나서 아주 아쉬웠다. 유명 관광지엘 가면 한동안 경성 콘셉트로 옷을 맞춰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시기를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화 감성으로만 향유하는 것이 문제라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은 많은 관심을 모았다. '1931 흡혈마전'의 배경도 딱 그 시기이다. 거기에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서로만의 서사를 쌓아간다는 관계성까지, 책을 읽기 전에 기대가 컸다.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희덕이 어째서 특별한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용기있고 착한 마음을 가진 인물인 것은 알겠지만 흡혈귀들의 힘이 왜 희덕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왜일까, 왜일까하며 읽었다. 왜 이 점에 주목하는가 하면 계월의 존재나 외모가 굉장히 특별하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희덕은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상을 주는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희덕의 그 단한가지 특별함이 너무나 평범한 희덕을 계월에게만큼은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계월에게 절대적인 인상을 주는 인물이 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또 '로맨스'를 떠올릴만큼 끈끈해진다. 모두가 날 기억에서 지우는데 단 한 사람만은 그게 통하지 않는다니. 로맨스물이었다면 '이게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면 난 친구없어'가 되는 것이다. 
 
 계월이 만주로 떠나는 길을 희덕이 함께 나섰으니 이 뒤에 또 함께할 모험이 있을 것 같아 뒷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게다가 처음 이 둘의 어색하던 호흡이 백작과의 사건을 함께 이겨내면서 다져진 뒤라 앞으로의 관계 변화가 기대되는 참이었다. 이번 이야기동안 학교 안에서의 적응, 일본과의 갈등,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한 자각이 주를 이뤘다면 앞으로는 전통적 여성관을 강요하는 가족과의 갈등, 새로운 땅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이 색다른 재미를 주지 않을까. 다음편 주세요. 
 
 아니면 슬쩍 흘리듯이 나온 계월의 과거. 정리하듯이 짧게 나왔는데 이정도 서사면 계월과 백작의 관계편도 애증 서사 맛집이 아닐리 없다. 계월이 처음 마신 피는 대체 누구의 것인가. 계월의 마음이 변했을 때 백작한테는 과연 아무런 심리적 타격이 없었을까. 둘이 함께 한 70년 동안 서서히 절대적 존재로 여겼을 백작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계월의 의식 변화도 그려냈으면 재밌었을텐데. 희덕과 계월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쌍방구원이지만 백작과 계월도 첫만남부터 구원서사였다. 흡혈귀한테 어떤 의미로는 죽음이 저주받은 삶을 마감하는 구원이기도 하니까 둘 사이도 흥미진진 맡아놓은 내용이니 전편도 주세요.
 
 이렇게 기대하는 바가 크고 더 파면 팔수록 큰게 나올 것 같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데, 뭔가가 피어날 듯 피어날 듯 채 피어나지 못한 느낌이 좀 아쉬웠다. 사건 해결도 생각보다 단순하게 끝나기 때문에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었다가 맥없이 풀려버린다. 해리포터처럼 한 사건으로 2-3권 정도의 분량 전개가 되어야 좀 더 끈끈한 내용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큰 규모로 책을 낸다는 건 모험이겠지. 그러니 이 책 인기가 많아져서 더 많은 희덕과 계월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 신선한 재미를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영어덜트 장르문학에 도전해보시길.
 

*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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