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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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정말 TMI 대방출이다. 아, 나는 예술-예술가에 대해서 이 정도까지 알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약간의 지적허영심 정도만 채운다면, 책을 들고 아는 이름을 발견하고 본 적 있는 그림을 눈도장 찍고 널리 알려진 일화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면 된다. 그런데 이 사람-줄리언 반스-은 전에 요리할 때도 그랬지만 날 순순히 놔둬줄 요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알아 괴로운 것들을 너에게도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손해라는 듯이 뛰어난 글빨을 이용해서 살살 사람을 꾀어낸다. 그냥 예술에 대해 아는 척 하려는게 아니라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 것을 너에게도 말해주지 않고는 못배긴다는 듯이 털어내놓았다. 그러면서 미끼를 던진다. '읽어봐, 재미는 있잖아'

 

 문제는 재미있다는 거다. '저는 솔직히 미술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요?' 라고 자신을 방어한다고 해도 이 사람이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그런 것 쯤은 상관없게 만드는 읽는 재미를 준다. 다만 그 재미란 것이 드가의 '성적 수단의 부실함'(183)을 언급하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콘돔을 샀다는 주장이 제기 됐건 말건 알고 싶지도 알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tmi 파티라는걸- 모르고 드가의 그림을 본다면 참 좋을텐데, 책을 읽고나면 이제 앞으로는 드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음, 영 좋지 못한 능력이지만 콘돔을 샀긴 했다지'하고 떠올리며 감상하게 될 것이다. 이것든 드가와 내 사이에 일어난 불행인가 이해인가 아리송해하면서.

 

 사실 미술관에 다녀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소문난 전시회라는 곳에는 일부러 찾아가도 보고 도록이며 도슨트 설명이며 찾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다소 미술작품들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은 그 시간들이 나한테는 아무런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이 잘 그렸다, 예쁘다 같은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림을 보고 그 이상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면 아마 계속 작품들을 보려고 노력했을텐데, 누군가 떠먹여주어서 알게되는 것 외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알고나니 미술과 예술이란 것들이 더 멀게만 느껴졌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을 읽는 일도 두려움이었다. 이 사람의 아는 척만 열심히 들어주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책을 덮을 일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사적인'이란 단어를 간과했던 것일까, 넘쳐나는 tmi들이 예술세계를 지질한 인간세계로 끌어당겨 준다. 읽다보니 작가에게 차라리 예술은 예술의 세계로 남아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쿠르베가 '항문으로 18리터' 대신 '복수 흡입'으로 수종을 치료하려 했다(102)는 것이나, 보들레르와 들라크루아의 기싸움, 그들이 남긴 일기 내용 같은 것, 보나르가 죽은 아내그림을 집착적으로 그린 것(216), 피망을 특히 잘 그리는 발로통이 친구 모랭에게 들은 "내 친구들을 보면 총각일 때는 성격이 좋았는데 장가든 뒤로는 고약해지더군."(265)이란 조언이나, "결혼을 예술의 적으로 간주하는" 예술가들의 강력한 전통(191) 같은 걸 읽다보면 차라리 그들의 삶을 모르고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미술작품일텐데, 하는 아쉬움이 불쑥 든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얘기만 늘어놓는 우스운 책은 아니다. 읽다보면 줄리언 반스는 이 많은 예술가들과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는걸까 의문이 들 정도로 미술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이쯤되면 요리 정도는 그냥 손대지 않아도 됐을텐데 음식에 대한 에세이(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도 냈었지,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걸까 작가에게도 벽이 느껴진다. 새알을 바라보며 새의 그림을 그리는 마그리트를 두고 양이 있는 지역을 지날때면 양갈비를 떠올리며 "저녁거리네"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314) 웃으면서 재밌게 책을 읽다가 근본적인 관념수준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물론 읽으면서 얕은 희망도 느꼈다. 나도 영 못쓸 인간은 아니란 듯이 그래도 책을 읽으니 미술에 대한 이해가 좀 생겼나 싶은 때도 있었다. 보나르에 대한 단락을 읽으며 욕조 안에 있는 사람의 하반신 그림을 보았다.(217) 선뜩하게 칠해진 색감을 두고 내심 '왜 저렇게 시체처럼 그렸담' 하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그가 진짜로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다는 내용을 보게 된다. 물론 그녀가 죽은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았던 것은 아니지만, 죽은 사람처럼 그렸다고 생각했던 상황과 비슷하게 시기가 엮여가니 '내가 그림을 본건가' 싶어지는 때였다. 정말 그림으로 뭔가를 전달할 수 있고 그걸 수신할 수 있는게 무려 나에게도 조금은 있다고? 어쩌다 하루에 두번은 맞는 고장난 시계같은 감이지만 잠깐 맞았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어떤 부분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듯 읽었다. 특히 '15 이것은 예술인가?' 부분이 그랬다. 이게 바로 예술입니다,하고 반박조차 받지 않을 작품들도 보는 눈이 없다며 스스로를 한탄하는 와중에 '예술인가?'하는 미술품에 대해서 무엇을 어쩌겠는가 하는 배짱이었다. 나 역시 최대한 따라가려고 노력하며 읽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놓을 건 놓아가며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에 대한 부담감을 접고 약간의 호기심만으로도 이 책을 충분히 시작할 수, 끝맺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해 잘 안다면 아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테지만 거기까지는 나도 볼 수 없는 영역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놓겠다. 나도 생과 사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더 맞겠다. 앞으로 이어질 시간들, 그것을 견뎌내는 일에는 때로는 이유가 없지만 때로는 의미를 찾고 있다. 특히나 "화가들은 결코 자기들이 정확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지 못하고 죽는다.(109)"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우리 모두의 삶도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걸어야하는 것이다. 아래 옮겨놓는 문장은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추모이며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버티는 삶들에 대한 염려이다.


 " 이는 모든 것을 팽개쳐버리는 예술가들이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혹은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화가들보다 훨씬 큰 감동을 주는 본보기다.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 대담한 자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일하고, 끊임없이 분발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고,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을 파기하는 일이 잦으며, 작품이 타락하지 않도록 반드시 타락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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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까만 단발머리
리아킴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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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아킴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익숙한 사람이었다. 정말 '들으면 알만한', '내노라하는', '유명한' 수식어를 달아도 어색하지 않은 유명한 가수들의 춤선생님이자, 노래의 안무를 담당한 댄서다. 소녀시대, 선미, 트와이스, 24시간이 모자라, TT 등. 책을 두른 띠지에는 '춤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가 사랑한 것이 춤이었으니 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니 전부다. 삶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 이런 주제들도 결국은 다 같은 방향을 향해 있으니 이건 리아킴의 이야기이자 춤에 대한 이야기다.

 

 춤같은 일에는 담을 쌓고 사는터라 건너다보듯 읽었다. 어렴풋이 갖고 있는 선입견, 춤추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돈을 잘 못 번다던데 관절쓰는 춤을 많이 추면 나중에 고생한다던데 하는 고루한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실제로 책에서 만난 그녀는 성공했고, 당연히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여유있을만큼, 매일 아침 사과와 생강, 시금치를 간 주스를 마시며 자기관리를 한다. 내가 아무렇게나 떠올렸던 생각들처럼 누군가도 내 삶을 잘못 해석하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졌다. 리아킴에 대해 읽으며 다시 머리속으로 말을 건넨다. '반갑습니다, 제가 오해했네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누군가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게 된다.

 

 책의 흐름이 좋은 편은 아니다. 갑자기 이런 내용이 왜 들어가있지, 싶은 부분도 있고 좀 더 확실한 주제로 잡아 묶였으면 좋았을 것 같은 내용도 있었다. 특히 가수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안무를 짰던 일들이 들어간 4장이 그랬다. 아이돌들에 대한 얘기와 자신에 대한 얘기가 뒤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다 여자아이돌와 남자아이돌을 가르칠 때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굳이 넣었어야 하는 내용인가 싶었다. 춤추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깨려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 본인도 비슷한 틀을 갖고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게 참 많이 아쉬웠다.

 

 계속 이유를 찾으며 읽었다. 이 책이 나온 이유가 뭘까, 하고. 쉽게 이유가 어딨어, 꼭 이유가 있어야만 나오나.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싶었다. 이만큼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을때에는 꼭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역사적 사명이라도 가진 그런 거창한 이유가 나오진 않았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어느 한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찾아 헤맨 이유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리아킴이 이루어낸 성취들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오히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더 가깝다.

 

 " 연습실 한쪽 다용도실. 간이침대에 몸을 뉘인 나는 왼쪽벽을 보고 누워 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 어둠속에서도 싱크대, 작은 냉장고, 선풍기,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수도세, 전기세, 연습실 관리비가 떠오른다. 이번 달 연습실 월세는? 생활비는? 지난달보다 수강생이 줄었으니 레슨비도 줄 것이고. 대회에서 탄 상금은 밀린 공과금과 카드값 메우는 데 써야 하고.... 복잡하다. 모르겠다. 나는 억지로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던 그때를. (p.102) "

 

 리아킴이 세계 대회에 나가 챔피언이 된 3일 뒤의 이야기다. 우리는 때로 삶에서 바라던 성취를 이루고 난 뒤를 생각하지 못한다. 목표와 그것을 향해가는 과정은 익숙하지만 거기에 집중해 그 뒤에도 인생이 계속되고 있음을 잊게 된다. 그런 시기를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의 까만 단발머리'에서 만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이고 매우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대회 성적 부진, 서툰 인간관계같이 그녀가 삶에서 겪었던 어려움으로 꼽은 일들보다 빛나던 순간은 짧고 현실은 계속된다는 사실. 삶이 눅눅하고 팍팍해질 때 가끔 그때 그 빛을 떠올리며 위로를 삼는다는 저 마음이 공감됐다.  

 

 책을 한 권 다 읽었는데, 여전히 리아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중간에 몇 페이지에 걸쳐 실린 그녀의 사진들처럼 단편적이고 짧은 순간의 모습만 조금 엿본 것 같다. 다만 앞으로 몇몇 노래들을 우연히 들으면 아마 유행했던 그 춤동작들과 함께 까만 단발머리의 깡마른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좀 아쉽지만, 그녀의 남은 삶이 앞으로 아쉬운 부분들을 더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난 뒤에 어쩌면 또 다른 에세이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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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민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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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다 졸리면 그냥 주무세요. " 라니, 그 말은 믿은 자신의 순진함을 반성했다. 아! 아직 나에게도 이렇게 순진한 면이 많이 남아있었구나 재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졸리면 자라니, 아저씨 너무 시끄럽다구요! 모리미 도미히코의 스타일을 몰랐던 내 탓일까 세상에 이렇게 뭐든지 할 말이 많고 수다스러운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 많다. 글에서도 수다스러운게 느껴질 정도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나. 다만 읽다 졸리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너무 말이 많은 사람 옆에서 그 수다스러움을 참아내고 있자면 자기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말이 많다.

 

 어쩌면 이렇게 하고픈 말이 많고, 떠오르는 생각이 많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글들이 담겨있다. 에세이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라 이 사람의 이 수다스러움은 감탄할 정도다. 남성작가라는 걸 의식하며 읽는데도 때때로 여성작가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섬세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어린시절 동생들에게 책을 읽어줬다는 얘기는 순간 장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헷갈렸다. 책을 읽어주는 오빠라니, 형사님 저는 그런 오빠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증언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진짜일까 자기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문학적 허용같은 거짓말이 아닐까. 작가가 될 떡잎의 오빠는 그럴 수도 있는건가 의심스럽다.

 

 아주 일본스러운 문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흥미로웠던 건 일본에도 '청춘18티켓 (p.148)'이란 상품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곧 대학생들의 여름방학 기간동안 '내일로'라는 열차 상품을 팔텐데, 일본에도 이런 상품이 있다니! 일본의 철도문화도 잘 발달해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몰랐던 사실을 알게돼서, 새삼 '내일로'를 이용했었던 과거의 기억이 함께 떠올라서 반가웠다. 내일로 말고도 성인을 위한 짧은 열차 상품을 팔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입석 여행을 즐길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서 내일로와 같은 상품은 과거 혈기왕성하던 때가 있었다는 추억으로 묻혀버렸다. 대학생분들 나이와 시간, 체력이 되는 한 여행을 떠나세요. 특히 나이와 체력.

 

 읽으면서 2-3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글이라도 이렇게 많은 글을 써냈다는 것이 무엇보다 대단하게 여겨졌다. 유명한 작가들의 작법 중 하나가 매일 같은 때에 정해진 시간만큼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를 읽으면서 이 많은 글을 쓰려면 아무래도 자신만의 글쓰기 규칙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엉뚱맹랑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 엄격함이 존재하는걸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새벽까지 밤새는 일을 밥먹듯이 하고 내키는대로 살면서 자유롭게 이리저리 글을 쓰는 러프한 타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일을 시작하는 법에 대하여 (p.342)'를 보면 글쓰는데에 있어서는 확실히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나 손을 뻗어 읽어도 부담없을만큼의 무게를 가진 책이다. 실제 책의 두께나 무게는 그렇지 않지만서도. 다소 내용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비유하자면 소금간이 절묘하게 짭짤한 비스켓같은 느낌이다. 언제 먹어도 무난하지만 가끔 느껴지는 짠맛이 포인트가 되고 자꾸만 당기는 느낌! 이미 유명한 작가이지만, 작가 특유의 색이 더욱 진하게 드러나는 이 에세이집은 아마 팬들의 얼굴에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을만한 신간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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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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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나오기 전에 어떤 제목과 표지로 나왔으면 좋겠을지 설문을 본 적이 있다. 표지야 어피치스러운 분홍분홍한 분위기가 다 비슷했는데, 제목이 후보 중에 하나였던 '너무 많이 사랑하는 습관이 있어' 였으면 했다. 아무래도 심정적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서정적인 느낌이길래. 결과적으로는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로 나왔지만 소제목으로 책을 읽다 다시 마주한 문구를 보고 문득 아쉬웠다. 내가 픽한 제목으로 나왔어야 했는데. 나와 같은 마음으로 투표한 국민 프로듀서 여러분들이 함께 아쉬워하고 있으리라. 어쩌면 편집부의 픽이 엉덩이 쪽이어서 편집픽 버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을 떠올려본다.

 

 이런 류의 책들-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보노보노나 곰돌이 푸의 캐릭터들이 한참 유행으로 나왔던 이 책들의 장르? 구분이 뭘까- 중에서도 어피치는 좀 늦게 나온 편이라 독자들이 서가에서 느낄 피로감에 엉덩이 제목의 더해지면 안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책의 표지 사진과 함께 부정적인 댓글이 써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찜찜했다. 아, 힐링에세이.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이런 힐링에세이 류의 책은 보노보노 뒤로는 딱히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지독했던 싸이월드 시기를 지나며 감성글과는 좀 거리를 두고 있는데,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를 반은 염려되는 마음 반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어피치가 쓴 것은 아니지만 왜 어피치를 달고 나왔는지 알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귤 작가가 인간 어피치로 빙의라도 한 모양인지 어피치스러운 글이었다. 적당히 감성적이고, 또 적당히 유쾌하다. 일상적인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진부하게 흐르는 것 같아도 경쾌한 감칠맛을 묻혀낸다. 유기농으로 차려낸 건강해지는 맛은 아닌데 msg 들어간 분식이나 불량식품을 먹는 느낌으로 은근히 손이 가는 책이다. 어피치의 귀여운 캐릭터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며 한장한장 가볍게 읽다보면 금방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한 꼭지당 분량도 많지 않아서 짬짬이 시간내어 읽기 편했다.

 

 " 내가 너무 많이 사랑하는 건, 말랑말랑 고양이 뱃살, ...중략... 그리고 너의 전부. (p.52)" 

 "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건데, 계속 모른 척하기야? (p.61)"

 이 책의 가장 감성적인 부분이 이런 느낌이라면 알려나. 옮겨 적으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볼과 턱의 이음부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학생시절 러브장 만들때라면 아마 한 페이지에 어피를 가득 그려넣고 따라 썼을만한 귀한 자료가 되어줬으리라. 요즘 애들은 러브장 같은 거 안 만들겠지. 러브장 아는 사람들 있으려나, 있으면 할매. 이 정도 감성만 잘 넘기면 다른 부분은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거다.

 

 '재회'나 '커피의 마약화에 대한 연구'는 깔끔하게 재밌다. '호그와트 예비 번호 받을 사람들'같은 어색한 느낌이 덜하다. 초반보다 뒤로 갈수록 내용이 더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피치의 세계에 내가 더 익숙해져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맨 뒤에 나와있는 카카오 프렌즈들의 소개를 읽으면서 제이지도 책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들어온 라이언이 왕위계승자 배경까지 달고 센터하는 것도 억울한데 '라이언, 내 곁에 있어줘' 책도 내고, 원년멤버 제이지가 비인기멤이라고 천대받는 사회는 이제 화가 난다 이거에요. 두더지라 무시당하는 건가 싶고. 

 

 누군가에게 러브장 만들어주고 싶을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엉덩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위해서는 사양하겠지만 그래도 귀여운 맛은 있다. 칼퇴하고 집에 와서 샤워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를 하나 깠을 때 볼만한 것 없는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보다 '엉덩이'를 집어들어도 좋겠다. 몰입하거나 심각해질 필요없이 몇개씩 조금씩 읽고싶은 만큼만 가볍게 기분 플듯이 읽고 다음날 또 읽을 부분을 남겨두듯이 읽고 싶은 책이다. 책 안의 내용처럼 귀엽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힐링에세이는 그저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어피치가 귀여웠으니까, 라이언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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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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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와 요리라니. 좋아하는 드라마 시리즈가 몇 없는데 그 중 '크리미널 마인드'라는 미드가 있다. 거기에 로시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중년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FBI 행동분석 팀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 로시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인물임이 느껴지는 부분은 그가 요리를 하고 음식을 즐긴다는 점이었다. 대단치는 않아도 자기 자신과 대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내보일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이고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요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줄리언 반스를 보면서 좀 더 늙은 고든 램지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를 조금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요리를 할 줄 안다'는 키워드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요리가 대체 무엇이관대!

 

 본인은 어떤 타입이냐면 익숙해진 몇가지의 음식 말고는 대부분의 요리는 다 레시피를 보고 한다. 전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잘'도 붙일 수 없이 그저 좀 할 줄 아는 정도의 수준이다. 때로는 내가 한 음식은 그 자체로 특히 먹기 싫을 때도 많은 편이고.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그저 웃을 수 없는 부분이 좀 있었다. 38쪽의 잼을 만들기로 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도 1파운드 용량의 빈병으로 과일과 설탕의 분량을 잰 것이 왜 실패의 원인인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저 방법을 합리적 계산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깜깜한 사람이란 말은 아니다. 음식과 먹는 것에는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요리를 하는 것에는 약할 지라도 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자존심을 좀 세우고 싶다.

 

 '요리를 할 줄 안다'는 매력을 떠나서도 기본적 생존을 위해 추천사에서 나오듯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에 한 분야로 마땅히 요리가 들어가야 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 편의점, 배달 음식이 발달했어도 어떠한 경우에서도 할 줄 아는데 편의를 위해 선택하는 것과 다른 방법이 없이 이용하는 경우는 다를 것이다. 자기 먹을 것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은 배워서 어른이 되는 일이 남녀의 일에 구분이 없고 1인 가구가 더 늘어난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기본이 되야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중/노년층의 남성들 중 상당수는 기본적인 끼니를 위한 요리를 강습하는 지원 클래스가 있기도 하고, 반찬 지원이 들어가도 밥 챙겨먹는 일에 익숙치 않아 받은 반찬 그대로 상해 버리는 경우도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된단다. 적어도 이런 일은 없어야 할테니.

 

 첵을 읽다가 요리책이 몇 권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문득 멈춰섰다. 몇 권이나 있더라. 정확하게 떠오르는 건 한 권, 책장으로 달려가 살펴봐도 두 권 정도? 애초에 요즘같은 시대에 요리책이라는 것이 뭐 그리 필요하단 말인가. 인터넷으로 검색만하면 황금레시피나 백종원 표 같은 수식을 단 요리법들이 쏟아져나온다. 그것 뿐인가 줄글과 사진이 첨부된 요리법도 이제는 구식이다. 유투브같은 플랫폼에는 요리방법을 담은 영상이 나온다. 한꼬집이나 한소끔 같은 애매한 표현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영상으로 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하면 되니까. 요즘은 중장년층도 유투브를 많이 본다던데 책에 대한 연연이라니 줄리언 반스의 연식이 느껴지는 부분이구만, 하고 생각했다. 다만 요리하는 남자가 요리책을 갖고 있는 편이 조금 더 섹시하긴 할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어조가 시종일관 까칠하고 적나라해서 좀 웃으면서 읽었다. 가령 스테이크를 구울때 15초에 한번씩 뒤집으라는 내용이 나오면 (p.143) 굽는 시간이 8분이라면 한덩이 32번씩 4인분에 128번 뒤집으란 말이냐, 그동안 사이드는 누구더러 만들라는 거냐고 성을 낸다. 잡다한 주방기구를 넣어두는 서랍을 정리할 때면 뭔지 모를 기구들과 죽은 벌레, 말라서 발견되는 잡곡까지도 솔직히 밝힌다.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를 읽는 시간은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가가 내 안에서 지나치게 평범한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전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먹고 사는 일이 버거울 때, 마음먹고 차려낸 요리가 내가 먹어도 맛없을 정도로 망했을 때, 번거로운 요리과정과 냉장고에서 마르고 썩어가는 재료가 지긋지긋할 때, 사먹는 음식이 지겹게 느껴질 때, 혹은 그냥 줄리언 반스의 글이 땡길 때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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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2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테일님 리뷰보다 스테이크 부분에서 깔깔 웃었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테일 2019-05-30 01:46   좋아요 0 | URL
저 까칠한 부분이 좋아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