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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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들은 별것 아닌 일로도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되기까지 하지 않던가. - p.31 7년 5개월 후 "

 

 더이상 미룰 수 없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날의 아침, 늘 틀어놓는 아침 뉴스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여자화장실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둔기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을 접했다. 사회를 뒤흔든 '강남역'의 사건이 절로 떠오르는 뉴스였다. 묻지마 폭행이 의심되는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피해자를 스토킹하던 남성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여지도 함께 보도되었다. 이 뿐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은 피해자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아물지 못한 사건들 사이에서 '용서의 나라'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아우르며 다가온다.

 

 독특하게도 '용서의 나라'에서 톰과 토르디스의 관계는 종종 희생자와 치료사의 모습을 띈다. 그것이 독특하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강간 피해자인 토르디스가 그들 사이에서 치료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p.247) 그녀 역시 분노하고 좌절하고 상처입은 영혼으로 표현되지만, 역설적이게도 톰 역시 자기 연민에 빠진 상처입고 후회 가득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토르디스 앞에서 섰다. 그리고 그것을 두 사람이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책의 표지에서 발견한 '성폭력 생존자'라는 표현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토르디스는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중의적인 의미로 생존해 낸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토르디스가 처음부터 용서를 시도하고, 상대방과 마주하길 결정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신이 평범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듯이, 수많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를 가졌었음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로 표현한 바로 이 감정과 고통들은 피해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가 털어놓은 자책과 상처가 '공감'되어 다가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였던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나는 술 먹고 취했을 뿐만 아니라 '강간을 자초한' 여자이기도 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 강간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서 내가 습득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조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시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톰의 어깨에 책임을 지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 p.104 "  우리는 옷가짐을 정숙하게 해야하며,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해야하고, 늦은 시간에 외진 곳에 있어선 안되고, 누군가 나를 성폭행하려 하면 무조건, 죽음의 위협에 맞서 강력히 저항해야만 한다. 어느 하나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성녀가 아니라 창녀의 위치로 전락하여 비난과 의심을 받게 된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가는 문제의식들 뿐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들이 날카로운 위트를 보인다는 점도 좋았다. 굉장히 솔직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신 내부의 변화를 세밀하게 공개했다. 여자의 삶과 인종에 대한 시각, 더불어 그녀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얻게 된 몸의 변화까지도 들어있다. 미경험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출산시 회음부절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으며 (p.244) 토르디스의 솔직함에 조금 더 감화되었다. 처음 '용서의 나라' 를 읽으며 문체가 다소 장황하거나 극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에 비해, 뒤로 지날수록 지나치게 많은 부분에 꼽아둔 표시들이 생겨났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토르디스가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에 대해 말하길 멈추지 않고, 거기에 그녀 자신이 서있는 또다른 위치까지도 의식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 택시에 올라타니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으로서 내가 누려온 부인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한 죄의식과 혐오감이 찾아들었다. - p.113 " 이런 부분인 것이다. 인종적인 문제까지도 서슴없이 화두에 올리길 주저않는 점이 독특했다. 그것이 그녀를 단순히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게 할지도 모름에도. 그리고 인종적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점은 꽤 만족스러운 요소였다.

 

 "내가 막 침묵을 깨려는 순간 지저분한 스웨트셔츠 차림의 이 빠진 남자가 급히 다가오더니 동전을 구걸해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돕고 싶어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마음이 아팠다. 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남자는 포기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무릎 위에 보온 담요처럼 놓여 있는 내 기득권의 무게를 쳐다봤다. - p.77 "

 

 이 책이 누군가에게 깊은 감명과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개인적으로는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다만 다른 이들에게 어떤 강요나 섣부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해결에 정답은 없고, 수많은 자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에 맞는 해결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용서의 나라'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더 내밀한 어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읽는 내내 떠올랐던 짧은 시에 대해 함께 옮긴다. 출처는 ena ganguly라는 이름으로 업데이트 되는 한 SNS이고, 영어로 쓰여진 시를 한글로 옮긴 내용이다.

 

 "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해진다 / 왜냐하면 / 우리는 내내 가르침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폭력을 부르는 미끼이며 / 우리의 입술은 유혹적이고 / 우리의 허벅지는 죄로 역하며 / 자라나는 우리의 굴곡은 아저씨들의 눈과 손을 낚는 덫이라고 / 우리는 이 한 가지 가르침을 받는다 / 남자들 앞에서 우리의 몸은 우리를 배신한다는 것 / 우리는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이를 배운다 / 몇 번이나 이 가르침들은 우리를 옭아매는데 / 남자아이들은 그저 아이로 남는다 - ena gangu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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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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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를 읽으며 낯선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타인의 일기장 안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저자인 김동영 작가는 처음 보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알기 전에 그 사람의 세상에 갑작스럽게 들어서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열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거리감있게 받아들여졌다. 저자는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거리를 좁히려고 하는데, 막상 읽으면서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온 낯선 사람에게서 느끼는 부담을 떠올렸다. 혹시 저자의 다른 책을 먼저 만났다면 이런 느낌이 덜했을까.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색한 것일까.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감에 당혹스러웠다는 것이다.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조각을 모으는 일 같다. 산책하듯 페이지마다 이리저리 흐트려놓은 타인의 조각들을 살펴보다 때로 마음에 드는 조각을 발견하거나, 나와 닮은 조각이 있다며 반가워하는 정도의 시간을 보낸다. 이 에세이는 때로 개인적으로 쓰던 블로그에 올려놨던 나의 조각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 날의 어떤 순간에 대해서, 혹은 좋아하는 무엇이나 싫었던 것에 대해 이래저래 적어놓았었다. 장문의 글이 세줄로 요약되길 바라는 흐름에서 블로그가 SNS로 대체되는 변화에서 점차 사용을 줄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몇 달 째 아무것도 쓰지 않고 방치해두었다. 어쩌면 과거의 누군가는 그곳에 남겨놓은 나의 조각을 보았으리라. 그랬다면 어땠을까 책을 읽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읽으면서 상실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면 좀 더 찬찬히 살폈다. 서열 1위였던 케루악에 대한 이야기는 해피엔딩은 아니어도 꽤 따뜻하게 다가왔다. 볼품없고 약한, 슬퍼보이는 모습에 못내 손길이 갔다는 점도, 줄줄이 맞이한 모리씨와 오로라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앞발 펀치로 서열 정리를 끝냈다던 이야기도 아기자기했다. 그리고 그래도 먹어야지 하며 냉장고 앞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지나보낸 어머니와의 이별 이야기는 충분히 마음이 아팠다. 상실을 경험한 이후로 상실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저자의 에피소드가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에 가라앉혀둔 두려움이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상실이라는 것이 필연적이면서 어떻게든 지나보내야 하는 삶의 영속성 위에 있음을 새삼 의식하게 된다.

 

 아파서 절에 들어갔던 날들, 입원했던 병실에서 들었던 엄마를 찾는 치매 노인의 부름처럼 고통과 연민이 점철된 내용도 있고 여행을 떠나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담아놓은 내용들도 있었다. 여행지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단 의견에 잠깐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생각해보니 그의 말대로 영어에 대한 과신이었고 오만이었다. 그러던 중 종현에 대한 부분이 나와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조금은 도드라지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인연이 닿았다는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가 맞겠지. 시기적으로 공교로웠을지, 아니면 나름의 추모를 위한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갑자기 맞닥뜨린 그의 등장에 약간의 의문과 애매함이 남았다.

 

 좀 더 감성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극히 일상적이고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감성적이다. 제목이나 분위기, 에세이라는 장르가 주는 인상이 감성적인 내용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게 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의 감성은 감성적이기 위한 감성을 드러내놓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감성적이다. 아, 뭔가 설명할수록 같은 단어만 반복되서 더 모를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개인적인 내용들이 많은데 또 이상하게도 내밀하진 않다. 자신을 드러냈지만 날 것을 드러내진 않은 느낌이다. 자신을 일정부분 가리고 포장하여 드러낸 것처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여지기 위함을 의식한 내용이라 느껴졌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적당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책이라 생각된다. 무엇이 되고, 되지 않고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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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멍키 - 혼돈의 시대, 어떻게 기회를 낚아챌 것인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즈 지음, 문수민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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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 때문에 월가는 싸구려 여인숙과 닮은 구석이 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보너스를 두어 번 받고, 1월 중순경 통장에 찍히는 목돈을 보고 나면, 그런 돈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된다. 월가에 자리 잡은 은행의 경영진은 그런 심리상태를 조장한다. 월가의 투자은행가가 개라고 가정한다면, 주인의 진짜 의도가 뭔지 깨닫지 못한 채 값비싼 목줄과 가죽끈을 '사회적 위치'라며 과시하는 셈이다. 내 목줄은 전반적으로 볼 때 가느다란 편이었지만, 그래도 목덜미가 쓸려 쓰라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p.47 혼돈을 향한 행진"

 

 '카오스 멍키'는 다소 난해했다. 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즈는 그 자신 그대로 난잡한 사고를 일으키고 다니는 원숭이처럼 느껴졌고, 저자의 느낌 그대로 문체도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소설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는 부분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모든 것이 저장된 대화를 그대로 발췌했으며 곡해된 부분이 없이 전달하도록 노력했다고 하지만, 누구도 모든 것을 날 것 그대로 옮겨놓을수는 없기 때문에, 또한 문체에서 느껴지는 과장됨이 계속해서 의심을 눈을 거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경이 되는 실리콘 밸리라는 무대가 낯설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최첨단의 수트를 입고 재기를 뽐내는 아이언맨의 모습을 보는 듯한 저자의 글은 자신만만하고 공격적이다. '성공하면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생각이 근간에 깔려있는 성공한 사람을 봤을 때 느끼게 될 약간의 불쾌감이 부러움과 시기에 버무려져 느껴진다. 성공하는 소수의 사람들 중 비상한 머리와 감각으로 세상이 무엇으로 돌아가는지 깨닫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를 보면 그는 분명히 그 구조와 헛점을 알고 있고, 가장 크고 탐스러운 송이를 움켜쥐진 못했어도 떨어진 바나나를 챙겨가질 정도의 능력을 가졌음이 느껴진다. 이런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삶과 동떨어진 느낌에 어떤 감명을 받진 못했다.

 

 특히나 sns를 하지 않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는 편이라 페이스북의 시스템이나 기능에 대해서도 생소했다. 간혹 시선을 끄는 부분들은 보일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일화들에 대한 짧은 언급이었다. 때로 누가 남긴 스파게티를 먹었는가를 두고 날선 모습을 보이거나 사내 연애에 대한 시도는 단 한 번의 기회로 제한, 여직원은 '동료직원에게 방해가 되는 옷을 입지 말 것'이라는 지침이 있다는 부분들은 사소한 것엔 신경쓰지 않으며 새로움과 돈이 되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기민하게 시도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평범하고 완고한 규제였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매우 단편적이고 주된 내용은 전문적인 업계 내용이다.

 

 무엇보다 '카오스 멍키'를 읽으며 잠시 다른 사람이 몸담고 있는 사회생활이 어떤지 들어서 체험해 본 기분이 들었다. 때로 친구들과 술을 한 잔 마시며 오늘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경쟁하듯 푸념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아예 차원이 다른 리그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엿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IT업계에 관심이 있거나 새롭고 빠른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SNS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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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 울었다 - 비로소 혼자가 된 시간
권미선 지음 / 허밍버드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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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오글거린다'는 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그 말이 쓰이게 된 뒤로 감성적인 글들이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쓰이게 되면서 감성적인 것들은 좀 촌스럽거나 우스운 일로 치부되어 버리는 일들이 생긴 것이다. 물론 때로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셀카를 찍어 올리는, 감수성이 지나친 혹은 포장된 감수성을 이용하는 면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공감을 하고 투박하더라도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좋은 글들도 있었다. 그 자리를 냉소적이고 감정을 배제한 문장들이 채우고 그만큼 사람들이 더 메마르게 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요즘, '아주 조금 울었다'의 등장이 감성적 충족을 위한 단비가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그녀는 매니큐어가 형편없이 벗겨진 / 친구의 손톱을 보더니, 말했다. -p.44 너에게 상처 주지 마"

다른 내용들보다도 이 부분이 눈에 띈 이유는 손톱과 발톱을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네일이나 패디같은 경우는 '너 말고는 아무도 니 손톱에 신경안쓴다', '남자들은 안 봐', '그냥 자기만족이지'라는 말로 많이 평가절하 당한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손을 쓸 일이 많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했기 때문에 잘 관리된 손톱도 신경쓰이는 부분 중 하나였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을 더 들이더라도 직접 관리를 하는 편이지만, 이 수고는 말할 것도 없고 샵에 다니는 다른 동료들의 네일 관리는 시간과 비용이 동시에 드는 일이다. 자기만족의 한 일환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경우에는 일하다 벗겨진 매니큐어 자국을 자기관리 부족으로 지적당하는 일도 생긴다.

 

 스스로 관리할 시간이 없도록 벅차면 단정히 짧게 자르는 것으로 대체하곤 했던 적이 있는데, 바쁘더라도 주기적으로 완벽한 상태의 손마저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라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그 관리가 무너져내릴만큼 여유가 없고 힘들었다는 상황이 이런 사소함에서 공감된 까닭이다. 그 경험 탓인지 아직까지도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톱이 잘 정돈되어 있으면 일부러라도 칭찬의 말을 건네는 편이다. 그 사람이 들인 시간과 비용, 어쩌면 필수적이었을 정돈됨을 위한 노력을 공감해주기 위해서.

 

 " "그래서 넌, 고백도 안 해 볼 거야?" / 그녀가 묻자 친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그 사람, 곧 결혼한대." -p.120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여자의 눈물이나 다른 내용들보다 가장 최근의 시기와 잘 맞는 부분이었다. 과거의 X였던 존재의 결혼 소식을 경험하게 되는 나이를 지나보내고 나니 메신저 프로필에 뜨는 웨딩사진, 결혼식 안내 문구,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아기 사진 등이 주는 느낌이 있다. 이미 예전에 끝난 관계지만 상대의 결혼 소식은 또 다른 형태로 찾아오는 결별임을 실감하게되는 내용이었다. 마치 확인사살처럼. 결혼소식은 헤어지거나 사랑이 식는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준다. 결혼 그 자체를 두고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네보내는 거리감을 준다. 과거의 X를 두고 우연한 재회를 꿈꾸거나 술마시고 전화하는 '진상'짓을 할 수는 있어도 기혼자에게는 이미 '간통죄'가 폐지됐다 하더라도 어떤 시도나 대상화 자체가 범법의 일환과 다름없기 때문이리라. 본문에서 느껴지는 단념, 체념적인 문답도 저런 맥락에서 온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한 편은 아니다.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눈물을 흘렸던 경험이 아주 오래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 울었다'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어떤 구절들은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 뭔가를 마음속으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감성적인 충족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라디오를 즐겨 듣거나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거나 소소한 위로를 주는 책을 읽고 싶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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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신회 지음 / 놀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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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보노에 대해 책을 낸 작가도 있는데, 보노보노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한둘일까. 이 책까지 열성적으로 읽은 마당에 보노보노를 좋아한다. 고 써봤자 키보드만 조금 더 닳아버릴 뿐 의미없다. 보노보노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 였다. 채널은 기억 안나지만, 티비에서 만화로 방영해주던 보노보노를 봤는데 정말 좋았다. 신선하기도 했고. 선명하도록 개성있는 캐릭터들도 그렇고, 내용은 잔잔하기만 할 것 같으면서도 재밌었다. 게다가 귀여웠다. 캐릭터의 모습도 행동도 더빙된 성우의 목소리도. 그래서 더이상 티비에서 방영해주지 않았을 때에는 동네 만화대여점으로 달려가 만화책도 쌓아놓고 빌려보기도 했었다. 친구들이랑 교과서와 공책에 찌그러진 보노보노 캐릭터도 그려보고 성대모사도 해보며.

 

 그러나 한동안 보노보노를 잊고 살았다. 보노보노가 아니라 만화를 잊고 살았다. 어른이 되었으니 흥미를 끌만한 더 자극적인 친구들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 영화나 미드 같은 것에 빠져들어 봤고 다들 아시다시피 등급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 영화와 미드의 세계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차원의 신천지였다. 때묻고 타락하였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이 또한 나를 성숙의 길로 이끌어준 자양분이니. 하지만 십수년의 세월이 지나 이제 다시 보노보노 앞에 서보니 내가 알고 있었으나 떠나왔던 세계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맞아, 연쇄살인사건, 과학수사나 성과 도시, 좀비 바이러스 같은 게 아니라 내 감수성의 근원은 바로 이런 것이었어! 하는 재발견을 한 기분.

 

 작가도 이런 소소하면서도 잡다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보노보노의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어 책 속에 풀어냈다. 가지고 있는 성향이 달라 공감이 안되는 부분도 조금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많이 기억에 남겨두려고 표시를 해놓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깊게 이해되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누었던 얘기는 시시콜콜하고 껄렁해서 좋고, 언니랑 나눈 대화는 조금 더 성숙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작가는 책의 여러 곳에 스스로를 소심한 편이라고 강조했는데 읽다보니 대범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갈 수 없었던 거 아닌가 싶게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진솔하게 적혀있어서 의외성을 발견하며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좋았던 몇가지 부분들 중 "별것 아닌 대화가 필요해" 의 내용에서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나 역시 문득 아버지와 나는 어떤가 생각해보니 얼마전 집에 들렀을 때가 떠올랐다. 엄마가 오라고 해서 집엘 갔는데 때가 맞지 않아서 집에는 아버지 뿐이셨다.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거실에서 아버지가 틀어놓은 '자연인' 티비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부엌에 들어가셔서 식탁을 차려주셨다. 밥을 같이 먹고는 다시 거실로 나와 '승윤씨'가 나오는 자연인을 마저 봤었다. 이렇게 나열하면 별 거 아닌 일 같은데 문득 나라는 인간이 아직도 아버지 식사 챙겨드리지는 못할 망정 챙김을 받고 왔구나 깨달았다. 다음에 갈 때는 내 친구관계 업데이트를 해드려야겠구나 생각하도 해봤다. 아, 나 친구가 없지...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는 왜 칭찬에 목숨을 걸까" 에서 나온 첫 부분이었다. " 예전에 함께 밥을 먹을 때, 외국인 친구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 웃는 게 예쁘구나." 갑작스럽게 날아든 칭찬에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지둥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니야." 그 말에 그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게 있어. 한국 사람들은 칭찬을 하면 딱 두 가지로 반응하더라고. '아니에요' 아니면 '내가 좀 그렇죠?'. 칭찬을 들으면 대부분 부정하거나 장난을 쳐." 그 말에 발끈해서 물었다. "그럼 너네는 칭찬을 들으면 뭐라고 말하는데?" 그랬더니 그가 그랬다. "그냥 고맙다고 하지." " 칭찬에 대한 리액션이 어떤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외국인이 우리의 반응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반응도 부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거니까.

 

 어린시절부터 칭찬을 들으면 '아니에요'라고 하는 일에 익숙했는데, 근래에 예사로 남에게 칭찬을 해줬을때 상대방이 '감사합니다' 혹은 '아 네 저 그런편이에요'하고 대답해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종종 있었다. 사실과는 상관없이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데 상대방이 겸양하지 않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니 기분이 좋았다면 다행인데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은 오래 남았던 기억이 있다. 한편으로는 저렇게 대답할 수도 있는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저런 상황을 몇번 겪어보고 나니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던 상관없이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 누가 나를 칭찬해주면 '어휴,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모두쓰기 기술을 쓰게 되기도 하고.

 

 공감이 좀 어려웠던 부분은 "나 상처받았어" 편에 나오는데, " 책임감이 부족하고 겁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방에게 공을 던지는 말을 자주 쓴다. "난 아무거나 다 괜찮아." "그럼 연락줘." "네가 정해줘." 그렇게 말하고 선택을 상대방의 몫을 돌린다. " 하는 내용이다. 내 주변에서는 저 말들을 진짜 상대방의 스케줄이나 입장을 배려해주기 위해서만 쓰기 때문에 원만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돌아가면서, 때로는 불편을 참아가면서 저 말을 쓴다. 아마 내가 너부리 성향이라 관계 유지에 소중한 배려의 말로 저 말을 사용하는 편이라 좀 다르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 것 같다. 보노보노 성향의 사람들은 저 말들을 다른 의미로 쓸 수도 있겠지.

 

 꼭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쓰게 되었다. 취향은 소나무와 같고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 법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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