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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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인 모리 마리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초입에 읽고 어쩐지 기가 질렸다. 짧은 문장들만 봤을 때는 '우리는 같은 과'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알게 되니 그녀와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로 표현되는 사람을 가성비와 포기의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담아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집안이 항상 어질러져 있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비워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 서로 다른 사람들. 플라스틱 컵을 쓰지 않지만 유리컵으로 분위기를 내는, 스테인레스 컵으로 보온을 강조하는 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맞닿을 지점이 있을까.

 

 " 괜찮아,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 " "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진다 "  "좀 곤란한 인생이지만 잘 먹겠습니다 " 와 같은 문구들은 어머, 당신은 나의 정신적 쌍둥이 아닌가요 붙들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호감이 갔다. 때때로 일기처럼 쓰던 블로그에 한 꼭지 정도는 뭘 먹었거나, 뭘 먹고 싶다는 얘기가 꼭꼭 들어갔던만큼 핸드폰 사진첩에 온통 먹을 것, 먹을 방법, 먹은 것 사진들이 폴더별로 정리되어 있는 만큼 나름 미식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열심히 발돋움하고 있는 만큼 '홍차와 장미의 나날'이 궁금했고 읽어보고도 싶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이 사람, 나와는 안 맞는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세이니만큼 저자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작용했다. 세대도 차이지고, 나라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실제로 만났어도 성향이 너무나 달랐을거라 생각되는 젠체하는 듯한 표현방식이 시선을 냉담하게 만들었다. 유복한 생활을 한 탓에 프랑스에서도 생활하고 했겠지만 '일본은 아시아의 유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나 "파리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미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p.38) " , " 나는 구두쇠에 욕심쟁이인 프랑스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p.227) "같은 표현은 '일본은 아시아의 그냥 아시아! 아시아 섬나라 사람!' 이라고 어딘가를 향해 소리치고 싶게 만드는 면이 있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녀의 솔직함. 그것도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독이었다. 주로 과거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것과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초면에 시종일관 천연덕스럽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긴자의 가게에도 취향이 고급스러운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멍청이 직원만 넘쳐나고 있는 모양이니 p.157 " 하는 부분이나 " 나는 엄청나게 애지중지 자란 아가씨라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 쪽으로 가서 하녀에게 "얼굴 씻을 더운물"하고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세면대가 딸린 삼첩방에서 더운물로 얼굴을 씻으시고 간식을 드시는 순서였다. p.131 " 이런 내용을 읽으면 떨떠름해진다.

 

 특히 이 삼첩방 더운물이 나오는 '애지중지 자란 아가씨' 단락의 내용에서는 그 앞에 "조센아메 (조선엿)" 라는 음식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시기적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수탈에 고통을 받고~' 하는 생각이 들면 내 안에 자리잡은 독립투사의 혼이 불쑥 솟구쳐오른다. 그럼 나도 모르게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쉽게 쓰여진 시_윤동주) " 하고 떠올리며 마음이 문득 고요해지는 것이다. 너무 나갔나 싶지만, 혹 누군가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모리 마리라는 사람이 밉살스럽기에 이러저러한 불평을 늘어놨지만, 다른 사람들이 평하는 그런데도 밉지 않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는 3 퍼센트 정도쯤은 알 것도 같다. 사랑만 받고 자라 물색없고 솔직하기만 한 사람이랄까. 의도없이 단지 느낀 그대로를 말하기 때문에 가깝고 싶진 않아도 나쁘게 평할 수는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체적으로 나는 앞으로 글을 쓰거나 말할 때 저렇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그 단호하고 확고한 취향을 에둘러말하지 않는 당당함이 부럽기도 했다. 굉장히 호감가는 첫인상이지만 의외로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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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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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전쯤 일이다. 갑자기 왼쪽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무거운 것을 들지도, 손목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파서 덜컥 겁이 났다. 주로 사용하는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 아픈 것도 이유를 모르겠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팔목에서부터 뼈에 구멍이 생기고 있는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덜컥 차를 얻어타고 아는 사람에게 들은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주차해서 접수를 하러 가니 교수님의 진찰을 받으려면 대기가 삼사개월은 넘어간다고 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그냥 돌아오고서 한동안 손목을 부여잡고 생활했다. 내 진료 대기 차례가 되자 통증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의 저자 김신회가 오른손에 통증이 생겨 강제휴업 상태로 들어간 계기를 통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읽고는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왼쪽 손목이 아팠던 나는 어땠던가.

 

 이 에세이는 몇 퍼센트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꽤 생생하다. 정말 너무나도 가까웠던 지인과 일년을 함께 살고 난 뒤에 어색해졌다는 단락에서는 불편함마저 느껴졌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집 한 켠을 내어줄 정도로 살가웠던 지인이 데면해졌다면 그 이유가 어디서부터 왔을지! 그리고 본인은 왜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인지! 게다가 이런 내용을 글로 써도 되는 것인지! 까지 걱정이 앞섰다. 날 것 그대로의 내용은 아니겠지만, 원래 작가들은 자기의 모든 것들을 이렇게 내놓는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일까. 이런 상황의 자신에게는 모두에게 다 사랑받을 수 없으므로 관대해지고, 스타벅스 계산대 앞에서 무슨 음료를 마실까 가벼운 고민을 불특정 다수에게 묻는 결정장애의 타인의 삶에선 움츠리면 나아갈 수 없으니 변화해보자고 말하는 것도 어색했다. 맞는 말이고 좋은 충고이긴 한데, 관대함의 범위가 나와 타인에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은 초반 부분을 읽으며 주로 들었는데, 사실 이런 날카로운 반응이 돋아나는 것은 저자의 탓이라기 보다는 내 개인적인 일들이 에피소드와 반응해 떠올랐기 때문이 더 컸다. 워낙 생활감이 묻어나는 주제들이어서 비슷한 경우가 나에게도 하나씩은 있었다. 이유를 잘 모른채 멀어지게 된 관계나 속으로만 삼키고 끊어낸 관계도 있었고, 밀떡과 쌀떡에 대한 선호도나, 다소 어려운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생각, 사야된다고 생각하면서 몇번이나 무슨 제품으로 살지 간만 보고 사지 못한 물건들, 선물에 대한 관점을 토론했던 기억도 있었다. (선물을 할 때 실용적인 물건을 고르는지, 필요하지 않아도 있으면 좋을만한 물건을 고르는지 혹은 내가 받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고르는지,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고르는지 에 대한 토론) 그런 일상적인 내용들 사이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생각은 나와 다른데? 왜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다 '사과의 타이밍'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날선 마음이 점차 공감하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변해갔다. 자연스럽게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에서 저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하며 달라졌다. 그러자 그때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구나 하고 가볍게 저자의 일상을 듣듯이 편안하게 책이 읽혔다. 시선이 좀 더 관대해졌을 뿐인데, 타인의 시선과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자 내 것도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며 스스로에게도 '그럴 수 있어'하며 관대해졌다. 처음엔 저자는 손이 아픈 동안 이 책을 위한 준비를 했는데, 나는 손목이 아픈 동안 대체 뭘 했었지?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 그때 아팠지. 좀 더 잘 쉬었어야 했는데 팔목을 너무 썼어. 하고 생각도 해본다.  에세이라는 분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나름 좋은 마무리로 잘 읽어냈던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책 속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사람이 아닐수도 있고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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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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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함께하는 시간도 유한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사실을 절절히 깨닫는다. 추억을 함께한 때만이 서로를 기억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제대로 사랑하는 법밖엔 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추억을 쌓으려면, 혈육일지라도 관계를 단단히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관계는 서로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럴 때 인생은 더 깊고 숭고해진다. p.7 _ 프롤로그 "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며 정신없이 회전문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는 기분을 맛봤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그 책에 대한 전체적인 호불호를 가늠하게 되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두권은 시집을 읽어보기로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시와 얽혀진, 그것도 오랜만에 읽게 되는 에세이를 마주하게 되어 내심 시도 읽고 편독하는 장르인 에세이도 읽게 되니 일석이조구나 계산했다. 다만 그것이 꼭 마음에 든다는 법은 없었다. 에세이는 개인의 내밀한 체험이나 생각이 녹아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세대적으로나 관점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게 와닿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 살다 보면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의견 차이를 다툼으로 끝내는 관계를 보면 서로를 더 이해하면 친해질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들 자존심이 철근같이 세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자존심도 양파 껍질처럼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깨지는 원인을 잠잠히 들여다보면, 거의가 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p.63 _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 "

 

 주로 딸과의 관계,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 집중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폭 넓고 깊이 있는 내용들도 발견한다. 의견 충돌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관계를 더 쉽게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먹으면 친구 사귀기도 힘들다' 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느껴진다. 세월에 따라 어느 정도 정립된 세계와 패턴이 타인으로 인해 유연해지기 힘든 것이다. 때문에 내가 남을 끊기도 하지만 남이 나를 끊어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은 시기에 읽었던 터라 인상깊었던 부분이었다.

 

 저자가 딸을 낳으며 느끼게 되는 모성과 관련된 부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그런지, 혹 '케빈에 대하여'나 '다섯째 아이'를 강렬하게 본 탓인지 좀 어색했다. 혼자 속으로 과연 모성이 모두에게 다 주어지는 것일까! 아이를 혼자 감당하기까지의 여건이 저자에게도 이리 어려운데 다른 처지의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애초에 선택도 못하지만! 등등의 궁시렁을 삼켰다. 저자가 전달하는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소중함, 삶의 지탱이 되는 자식의 의미, 여자의 삶에 의지가 되는 딸의 존재 등등의 내용은 공익광고 같은 장점의 극대화와 정보 전달의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이 계획이 없다는 사람에게 '낳아봐, 니 자식 낳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느껴지는 난감함이랄까.

 

 거기에 책의 마무리는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끝을 맺는다. 갑작스럽게 애국심이 등장하며 마무리 된 탓에 이렇게 끝난 것이 맞나 의아했다. 출산장려와 모성애, 모국어와 전통문화로 이어지는 애국심까지 진짜 요즘 시기에 사회가 원하는 공익광고의 내용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쓴 내용이라면 이렇게 건-전할 수 있다고 이해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을 날 것으로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나와는 감성이 좀 다른가보네, 하고 읽다가도 어떤 부분은 '그래 우리 삶에는 이런 결이 있었지, 서로 무늬는 달라도 삶을 살면서 같은 결을 나이테처럼 쌓아가고 있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부분들이 반복되면서 이 책 괜찮네 혹은 나랑은 좀 안 맞는 부분이 있네 하는 마음이 정신없이 회전문처럼 오갔다. 하지만 읽고 난 뒤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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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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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글들이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읽기에는 편한데 심적으로는 자꾸 속엣말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한두해 살다보니 책에 나오는 상황이나 감정들을 제법 겪어도 봤다. 그랬더니, 저자가 전하는 자신 스스로의 진정을 다한 조언이나 위로가 절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남을 위로해준 적도 없으면서 이 친절한 응답을 두고, '아니, 그건 아니지'하고 고개부터 가로젓고 보는 것이다. 사실, 한때는 이 다정한 위로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도 있다. 생각하기에 거의 시초가 될 법한 '그 남자 그 여자' 라는 책이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랬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내 고집이 생길만큼 때가 탄 것인지, 쉽게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이 싫다면 그건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뜻일 겁니다. 이때 너무 가까운 채로 그대로 있다보면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게 될 거예요.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거리까지 떨어져봐요. 타인으로서의 거리까지 떨어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다면, 곧 이별인거죠. - p17 이별의 완벽한 타이밍"

 

 거의 첫부분의 내용이다. 가장 첫번째 꼭지부터 생각에 생각이 꼬리물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결국 서로 다른 우주를 가진 타인이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타인의 거리에서 머물러야하고,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거리까지 떨어져서야 자신이 완성된다면/긍정한다면 이별이라니,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지만 너무 극단적 처방이 아닌가! 사실 남의 사랑문제에 있어 가장 쉬운 조언 중 하나가 "헤어져"일 것이다. 인터넷 고민 게시판에 올라오는 "헤어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들도 나 자신의 감정과 버무려지면 "그래도..." "하지만..." 하는 생각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때로 환멸이 나는 마당에 남을 사랑하는 일이 오죽하랴.

 

 이어지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걱정 마!(p19)" 를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이나, 콘돔 안쓰려는 남친에 대한 고민, 헤어지고 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개인의 성향 갈리는 문제들, 한때 유행했던 사랑의 유통기한 - 나때는 2년이었는데 여기엔 3년으로 나오는 그것에 대한 내용, 책에서는 '이별괴물'이라 표현한 안전이별에 관한 내용, 헤어졌는데 계속 눈물이 나요/힘들어요/돌아올까요 와 같은 질문 등등을 보면 이 책의 주 독자층이 십대에서 많게는 이십대 초반 정도까지 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그냥 과감히 헤어져라 하는 조언도 있으니 그런 부분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사랑에 대한 크고 작은 고민과 조언들이 전부 여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질만한 조언이 실질적으로 나오지 않았던 점도 그렇다.

 

 책을 읽기 전에 띄지 뒷면에 있는 체크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를 믿는 것처럼, 일곱개의 항목에 어느 것 하나 어긋나지 않는 자신을 꼽아보면서 이 책이 궁금해졌었다. 같은 음식을 자주 먹으면, 마음에 드는 음악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으면, 계획 없이 돈을 쓰면, 일을 미루다 막바지에 이르러 간신히 하면, 귀찮아, 졸려, 지겨워 라는 말을 자주 하면, 편한 사람에게 거칠게 말하면, 낯가림이 있으면 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나만의 자리'를 찾아야 할 때일까! 난 원래 그런 사람으로 지내왔는데! 물론 씀씀이나 생활태도 같은 것들은 고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저 항목들이 죽어가는 연애세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 안에 답이 없었다는게 함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너무 메마른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된다. 사랑에 무덤덤해지고, 혼자가 힘들지도 않은 나이에 너무 빨리 이른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게 더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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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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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는 독특하다. 오래된 이의 고문을 옮겼다고 해서 다로 고루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여타의 소설보다 잘 읽힌다. 워낙 문장을 늘어지지 않도록 잘 옮겨놨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내용이 담백해서 읽기에 좋았다. 언뜻 제목을 봤을 때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끈 에세이 책이 떠올랐다. 내심 왜 제목이 굳이 비슷하게 나왔을까 염려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장의 온도"를 읽으면서 제목이 비슷한 것이 마뜩치 않을 정도로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혹 그 에세이를 읽고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문장의 온도"를 읽어보길 권한다.

 

 "문장의 온도"안에 수록된 문장들을 이덕무의 문집에서 한정주씨가 꼽아 번역해서 옮긴 것이다. 옮겨진 문장들이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함께 표시해놓았기 때문에 확인하며 읽을 수 있다. 옮긴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1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고, 2 내 눈에 예쁜 것, 3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곳, 4 세상에 얽매이거나 구속당하지 않겠다, 5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얼어붙은 세상을 녹인다, 6 온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 총 여섯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구분해놓았다. 때문에 관심사에 따라 어떤 부분은 단조롭게 읽히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깊이 공감하게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3번과 4번, 6번 단락을 읽을 때 가장 흥미로웠다. 3번과 4번 단락은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읽으면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특히 3번 단락에서 '세상의 기이한 일들 (p104)', '자연의 다양성 (p113)', '평양의 싱크홀 (p115)' 같은 내용들은 읽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어 읽으면 흥미로울 것이다. 4번 단락의 내용들은 지금과 가치관이 달라진 점이 있는지, 나의 생각과 입장은 어떤지 찬찬히 정리해보게 된다.

 

 6번 단락은 글과 책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뤄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그 중에서 '책을 빌렸다면 (p324)' 중 "무릇 서적이 있다면 비록 좋아하고 아낀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는 운장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랬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빌려준 책이 깨끗히 돌아오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임을 탓하는 동춘 선생의 일화가 함께 소개되어 새로운 관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예전 어느 면접 자리에서 받았던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 거의 마지막 질문이었을텐데, 그동안 읽은 책이 몇 권 정도 되는 것 같으냔 질문이었다. 남아수독오거서라는 말이 떠올라 애매하게 다섯 수레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답을 했더니, 한 수레에 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느냐고 또 물어왔었다. 결국 잘 모르겠다고 말았는데, 면접을 보고 난 다음에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계산법이 되었든, 지금의 추측이 되었든 아마 죽기 전에는 다섯 수레의 책을 다 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내용이 작위적이지 않고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책이다. 에세이같지 않으면서도 고문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세련됨이 보인다. 에세이 특유의 잠시간의 찰나, 센티멘털에 빠진 감상들에 대해 이리저리 늘어놓지 않았고 한문으로 점철된 숨막힘도 없다. 에세이 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읽을만한 내용이다. 속 안의 정갈함을 그대로 옮긴듯한 표지도 인상적이다. 날이 추우니,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덕무가 남겨놓은 "문장의 온도"를 가늠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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