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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ㅣ TURN 6
정이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처음 책의 표지를 보고 한동안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이 어떤 내용일까 의아했다. 절반은 사람의 얼굴을 절반은 나무의 형태를 한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그림은, 사람이 나무가 되어가는건지 나무가 사람이 되어가는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판타지같은 얘기처럼 보였다. 환경 오염에 대한 미래 세계의 얘기일까, 신화나 전설같은 판타지일까.
" 감정이 금지된 겨울의 학교를 녹이는 돌연변이 소녀들의 봄빛 연대와 여름빛 사랑 "
책 뒷편에 적힌 문구를 보며 가을이 섭섭하겠단 생각을 하다가 가을의 결실과 성취는 독자에게 남겨진 몫이라 생각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얻을 수 있을지 시도해보자.
온통 옅은 보랏빛으로 가득한 책을 읽고선 라일락의 꽃말을 찾아보았다. 순결과 순수, 첫사랑, 우정. 이브와 같은 연보랏빛의 라일락에는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꽃말이 있었다. 그 모든 의미가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안에 담겨 있었다.
" 캐모마일, 산딸나무, 에델바이스 우리의 사랑은 역경을 극복한다. 아마릴리스, 목련, 시계초, 산사나무 우리의 존엄에 자부심을 가져라. 난초, 동백, 물망초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달리아, 오렌지 꽃, 글라디올러스, 라일락 불멸하는 사랑으로. 154"
왜 다른 수많은 꽃과 나무 중에서도 라일락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라일락 향을 맡아본 사람은 분명 그 향에 매료되어 왜 라일락이어야 했는지 납득하게 될 것 같았다.
기후 위기가 찾아온 미래의 지구. 각지에서 절망과 불만이 쏟아져나오고 인간의 DNA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생체코드 기술을 활용해 열성인간을 우성인간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독재자와 그 측근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 여자아이들의 사랑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 불안정한 존재들을 취약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랑이에요. 세상이 지금처럼 어지러운 이유죠. 낭만이나 동성애 따위를 좇는 쓸모없는 행위에 빠져드는 것도 대부분 여자애들이잖아요. 아름답기만 하면 금방 취해버리는 저 나약하고 가냘픈 영혼들을 통제해야 합니다. 14"
독재자는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의 화살을 돌리는 방법을 알았고 기후 위기의 현상을 우성과 열성 인간의 선별과정으로 포장했다. 세상을 우성과 열성으로 나누어 차별해야 마땅함을 내세우는 주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조했고, 계엄령을 선포해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상 필드 통제 구역에 수감했다. '잿빛라일락법'이 선포되고, 사랑을 말하는 소녀들을 열성 인간으로 분류해 끝없는 겨울이 계속되는 가상 필드에 수감시키는 소녀원이 생겨났다.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은 그 곳에서 일어난 저항에 대한 이야기다.
독재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 그리고 계엄령.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소녀들의 연대와 사랑, 책을 읽으며 지난 24년 12월을 떠올렸다.
" 식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독재자가 경호를 받으며 나타났다. 나는 드디어...... 그의 얼굴을 목격했다. 삭막한 철제 의자에 앉은 아이들을 뒤로한 그가 연단에 올랐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었다. 말투도 아둔했고 언론에서 칭송하는 카리스마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잔인한 힘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혹자들이 의탁한 욕심이었다. 그가 리수와 피로 맺어져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염된 강물처럼 탁했고, 제 탐욕을 채우는 행위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무딘 인상이었다. 242"
12.3사태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도 수긍하게 될 정도로 비슷했다. 말도 안되는 주장을 앞세워 난데없는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부터 탄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금껏 뻔뻔한 얼굴로 죄의식도 없이 활보하고 다니는 인물과 계속해서 그를 옹호하는 아둔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행태까지 같았다. 그리고 계속되던 추운 겨울날에 갇혀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타오르던 연대와 사랑, 새로운 계절과 시작을 맞이하던 지난 봄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항을 책과 함께 되새길 수 있었다.
" "언젠가 네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네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작은 존재인지 알게 될 거야. 사랑하는 이의 고통 하나 덜어줄 수 없는 게 인간이야. 네가 아기일 때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었어. 그 작은 몸이 아프다고 엉엉 우는데, 난 그 고통의 반도 가져올 수가 없었지. 그 자리의 한계를 자각하는 게 사랑이야."
"그럼 사랑은 굉장히 쓸쓸하고 초라한 것 아닌가요?" 104"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은 사랑을 마냥 좋고 행복하기만 한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랑을 하며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들 중 씁쓸하고 외면하고 싶은 짙은 감정들도 함께 보여준다. 은주에 대한 이브의 마음은 어떤 빛깔을 가질까, 리수와 은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런 감정도 사랑이 맞을까, 사랑은 어떤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가슴속에 사랑을 품고 온 마음으로 세상의 다채로움을 받아들이는 소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사랑은 성실함이자 신뢰라는 말을 곱씹었다. 사랑이 불멸하는 건 매일의 자리에서 연속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얼어붙지 않았다. 매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하여 계속 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리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브의 얼굴을 빚었다. 155"
겨울만이 계속되는 고립된 학교에서 펼쳐지는 소녀들의 저항은 어떻게 피어날까. 처음 다소 낯설었던 설정에 익숙해지고 나니 안에 숨겨진 다양한 코드들이 하나둘 흥미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은주가 남긴 플로리오그라피 코드, 아이들의 비밀 게시판인 낙원과 가드너, 저항의 상징인 이브의 존재, 은수를 적대시하면서도 주시하는 리수의 비밀, 이브를 향한 은수의 동경과 은수가 가진 비밀의 정체가 한데 얽혀 꽃이 가득한 새로운 세계 안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을 읽는 동안 지나가버린 짧은 봄을 떠올렸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겨울이 지날 무렵 제 순서를 기다리며 차례대로 피어나던 꽃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피었다. 약간은 느지막히 진항 향기를 담아 꽃망울을 터뜨리던 라일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을 읽는동안은 코끝에 다시 그 향이 맡아지는 듯 했다. 언제나 짧아서 아쉬워했던 라일락이 피는 계절의 한 가운데로 초대하는 소설,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