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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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4012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 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쓴 것 같은데, 세계문학을 읽다 보면 각 나라마다 어떤 특성같은게 느껴진다. 독일은 좀 냉철하고, 남미는 좀 환상적이고, 프랑스는 좀 낭만적이고, 우리나라는 좀 착하고, 일본은 좀 특이하고....


그렇다면 러시아는? 러시아는 뭔가 순박하고 순응적인 느낌이다. 러시아 남자들은 맨날 보드카 마시고 그래서 좀 거칠거란 선입견이 있는 한데, 책을 읽다보면 러시아 남자들처럼 여자에게 순종적이고 순애보적인 사람도 없다...


결이 다르긴 하지만 ‘안드레이 마킨‘의 <어느 삶의 음악> 앞 부분에서 화자는 한 기차역에서 기차가 연착되는 걸 당연시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호모 소비에티쿠스‘ 라는 단어를 경멸적으로 떠올린다.

[간혹 발생하는 기차의 연착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이 사는 나라는 천국이라고. 느닷없이 확성기에서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냉혹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대도 이 무리는 몸을 털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쟁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고통과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누추한 이 기차역, 철로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이든 죽음이든 삶이든 그 모두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P.19



˝호모 소비에티쿠스˝라는 단어는 아이러니 하게도 소련의 철학자이면서 소련에서 추방되어 독일로 망명한 철학자 ‘알렉산드르 지노비예프‘가 발명한 신조어라고 한다. 아, 러시아에 대한 내 생각이 단순한 편견은 아니었던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샘이다...



<어느 삶의 음악>은 피아노 연주자인 주인공 ‘알렉세이 베르그‘가 레닌-스탈린 시대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반체체 인사로 낙인찍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목숨마져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는데,


우연히 목격한 전투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망자 ‘세르게이 말체프‘를 발견하고, 그의 군복을 입고 그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군인이 되고,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공을 세우지만 결코 자신의 위장신분을 밝힐 수 없어서 괴롭게 살아야 했던, 음악을 할 수 없었던 ˝호모 호비에티쿠스˝ 피아니스트의 이야기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났기에, 어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자신을 숨길수 밖에 없었고, 전쟁에 참가해서 타인을 죽여야 했고, 신분이 탈로날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살아야 했던 주인공 ˝알렉세이 베르그˝. 그의 위장은 언제까지 숨겨질수 있을가? 언젠간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처음 읽었을 때는 ˝호모 소비에티쿠스˝라는 단어가 단순히 러시아인에 대한 조롱을 의미하는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두번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 어원 자체는 조롱이었을지 몰라도, 작가인 ‘안드레이 마킨‘은 ˝호모 소비에티쿠스˝라는 단어를 통해 어떤 시련을 당해도 묵묵히 참아내고 결국은 이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러시아인을 위로하려고 했던게 아니었을까?

주인공인 ‘알렉세이 베르그‘가 화자인 ‘나‘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의 작품인 <어느 삶의 음악>은, 초반부의 난잡한(?) 기차역 배경만 잘 통과하면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다. ‘알렉세이 베르그‘에게 음악이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주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본다.


Ps. 요즘 1984BOOKS 책들에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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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2-25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라별 문학 너낌... 공감합니다.
저는 북유럽... 북유럽 쪽이 뭐랄까, 김빠진 탄산수(콜라X, 사이다X)같고요, 아프리카는 식초 두세방울 넣은 알로에 주스 같아요ㅎㅎㅎ

새파랑 2024-02-25 20:1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식초 넣은 알로에 주스라니 왠지 어떤 느낌일지 알것 같습니다~!! 전 그나마 프랑스랑 러시아가 취향에 맞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4-02-25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라별 정리가 깔끔해서 좋네요.^^

새파랑 2024-02-25 20:20   좋아요 0 | URL
좀 더 다양한 나라를 정리했어야 했는데~~ 이 책 완전 괜찮습니다~!!!

페넬로페 2024-02-26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 문학 마니아답게 새파랑 님의 각 나라 문학의 분석은 날카롭고도 정확합니다.
안드레이 마킨,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읽어봐야겠어요.
러시아 문학 좋아하잖아요 ㅎㅎ~~

새파랑 2024-02-26 12:40   좋아요 1 | URL
...날카롭고 정확한가요? ㅋ 러시아가 요즘 하는건 별로인데 문학은 좋죠~!! 이 작가는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인데, 그래도 러시아 배경에 러시인 출신이니까 러시아문학으로 봐도 될거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고전중 가장 재미있음.

"그렇다면 자만심이라고 할까요. 코벨랑 신부님께서는 자만심은 치명적인 죄라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자만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랑에 너무 깊이 빠져서 달아날 수 없을 뿐입니다. 동시에 살고 싶습니다. 죽은 자는 사랑할 수 없으니 까요. 그러므로 술라코는 승리자 몬테로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 P270

남녀 사이에 우정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은 이른바 드쿠의 온건한 유물론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단 하나의 예외를 인정했는데 그것이 그 절대적 원칙 을 더 공고히 해준다고 주장했다. 남매 사이에는 우정이 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우정이란 다른 인간 앞에서 생각과 감정을 기탄없이 털어놓는 것을 의미하며, 한 인간의 내밀한 삶이 아 무런 목적도 없이 진심으로 다른 존재의 깊은 공감에 작용하는 것이다. - P278

"그렇다면 하느님이 나를 가엾게 여기시겠지! 하지만 그 일에서 언젠가 네게 닥칠 후회 말고도 뭔가 네것을 챙길 수 있도록 해라." - P317

우리가 지금 운반하는 이 은을 갖고 이 해안의 100킬로미터 이내의 어디든 상륙한다면 칼끝에 맨가슴을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내게 맡겨진 이 물건은 치명적인 병이나 다름없어요. 사람들이 이걸 찾아내면 난 죽은 목숨이죠. 당신도 그렇고요, 나와 함께 있으니. 이 은만 있으면 한 지방 전체가 부자가 될 수 있어요. 도둑놈과 불한당이 득실거리는 원주민 부락 정도는 말할 것도 없죠. 그들은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목을 벨 겁니다. 이 난폭한 해안가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의 그럴싸한 말이라도 믿을 수 없어요. 보물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즉시 순응하더라 도 우리 목숨은 부지할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더 자세히 설명할까요?"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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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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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4011 사랑에 대한 문학적 백과사전과 같은 작품.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냥 사랑에 빠졌을 뿐인데, 질투했을 뿐인데 거기에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었다니. 약간 작위적인 느낌도 들긴 하지만 거슬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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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21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승우
작가 이름만 봐도 왜 마음이 아프죠?
작위적인 느낌?
궁금한데요?!
이 책은 잘 몰랐는데...저장합니다~

새파랑 2024-02-21 09:57   좋아요 1 | URL
그냥 좀 소설 느낌보다는 에세이 느낌이 강합니다 ㅋ

확실히 재미는 있습니다~!!
 
흰옷을 입은 여인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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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4010 ‘보뱅‘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려간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 그녀의 시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순수하고 아름다운 작품일거란 확신이 든다. 보뱅이 선택했으니까, 보뱅이 좋아했으니까. 한번 읽었을때는 별로였는데 두번 읽고나니 너무 좋았다. 문장과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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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21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패터슨‘이란 영화 봤는데...
<패터슨>이란 책 때문에요
‘애밀리 디킨슨‘ 하고 ‘아하!‘라는 말이 계속 맴도네요

새파랑 2024-02-21 10:02   좋아요 1 | URL
패티슨 검색하니까 로버트 패티슨 만 나오는군요 ㅋㅋ 디킨슨과 패티슨 ㅎㅎ

보뱅은 사랑입니다~!!

그레이스 2024-02-21 10:06   좋아요 1 | URL
죄송요
오탈자 고쳤어요
패터슨요
유명한 영화던데...ㅠ

새파랑 2024-02-21 10:10   좋아요 1 | URL
패터슨 ㅋ 영화 평이 대단히 좋네요. 시를 다룬 영화라니 궁금합니다~!!

그레이스 2024-02-21 10:12   좋아요 1 | URL
시 쓰고 싶어질 정도로 ^^ 좋았어요
혹시 보게되시면 에밀리디킨슨과 아하! 찾아보세요.
뭉클한 장면이예요.
전 넷플로 봤어요
 

다른 보뱅의 작품에 비해는 별로였다. 그래도 보뱅이니까 문장은 좋았다.


쉰다섯 살, 우린 최대한 얼굴을 숨긴다. 어머니의 시선을 받을 수 없는 우리는 하느님의 시선만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다 죽음을 맞는다. 뒤이어 처음 온 아이가, 꿀벌이 윙윙대는 풀밭 위를 항해하는 우리의 관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의 죽음을 바라보는 낯선 이가 늘 있게 마련이다. 무사태평인 이 목격자 덕에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주일 나들이 복장을 한 평화로운 사건이 된다. 수수께끼처럼 이어지는 소박한 날 들에 끼어드는 하나의 사건. - P13

나중에 에밀리는 천사의 난폭함을 보이며 털어놓게 된다. 자신은 한 번도 어머니를 가져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란 ‘우리가 불안에 사로잡힐 때 의지하게 되는 분‘이 아니겠냐고. 어머니란 무엇인가에 대한 완벽한 정의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결핍보다 나은 것이 없다. - P17

헝클어진 태양 같은 민들레를 귀걸이로 삼던 이가 생기 없는 안락한 삶 속으로 멀어져 갈지언정 민들 레의 영광은 남는다. 내리치는 가을비에 시달리는 꽃, 일상의 굶주림에 속박당한 암소들에게 뜯어 먹히는 꽃. 그럼에도 이 꽃들은, 그 비와 암소들을 이야기하며 사랑하기도 하는 언어를 사방으로 퍼뜨린다. 말은 불멸의 태양이다. - P59

에밀리는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안다.
우린 한 줌의 사람들밖에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것. 이 한줌의 사람들 역시, 죽음의 무구한 숨결이 불어오면 민들레 갓털처럼 흩어지리라는 것. 그것 말고도, 글은 부활의 천사임을 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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