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하려던 말들 - 예수의 비유에 관한 성서학적·철학적 사색
김호경 지음 / 뜰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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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담고 있는 깊고 풍성한 진리의 말씀 맛보기

김호경 저, ‘예수가 하려던 말들’을 읽고

문장은 짧고 간결하며 거침이 없다. 그래서인지 힘이 느껴진다. 읽고 나면 마음도 시원해진다. 권력 혹은 재력의 눈치를 보느라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는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극단적인 주장을 펴지도 않는다. 단호한 문장들 뒤에 묻어나는 저자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호소력이 짙다. 이 책은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진리로 둔갑한 비진리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급진적인 진리를 말하던 그 누군가를. 예수다. 예수일 것이다. 저자의 글은 어딘지 모르게 예수의 말과 닮았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들은 많은 비유로 이루어졌다. 일상을 소재로 하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오묘한 비유다. 전복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지 비유.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비유. 나는 바로 여기에 예수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의 말들. 누구에게나 귀가 있지만, 진짜 귀가 있는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그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말들. 예수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제목 ‘예수가 하려던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 김호경은 이 책에서 많은 비유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말들이 가진 참 의미를 풀어준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신학 석/박사 학위를 소지한 신약학 교수답게 글을 풀어나가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다. 신학이 가지는 필연적인 딱딱함이 문학적 내공으로 인해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여느 신학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가독성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도 쓸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수준의 묵상이나 성찰의 에세이도 아니다. 열아홉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각 장은 충분히 훌륭한 한 편의 설교로 읽힐 수 있을 정도의 깊이를 가진다. 각 장은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를 하나씩 다룬다. 독립적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길 권하고 싶다. 책 전체에 걸친 논리와 이야기의 전개가 여러 장에 걸쳐 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신학만이 아니다. 저자는 각 장에서 다루는 예수의 비유에 적합한 철학적인 개념을 하나씩 소개하며 예수가 하려던 급진적인 말들의 의미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풀어준다. 이를테면, 1장에서 저자는 회개를 설명하면서 후설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를 소개한다. 회개는 여태껏 몸담아온 세상의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회개는 회심의 시작이다. ~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8장에서는 들뢰즈의 ‘리좀’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중앙집권적 체계가 아닌 ‘천 개의 고원’으로 이루어진, 개별적인 모든 존재의 차별 없는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한편, 13장에서는 아렌트가 발견하고 정리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을 소개하며,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악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통찰해 낸다. 이외에도 저자는 베이컨, 레비나스, 소크라테스, 니체 등의 철학자가 정립한 핵심 개념들을 쉽게 풀어주면서 예수가 비유로 말한 메시지들의 의미를 해석해 준다. 문학과 신학과 철학의 하모니. 수작이다. 

사복음서를 지금까지 수십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말씀들이 있다는 건 언제나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나의 부주의함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개별적이고 상황적인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가 말한 비유들이 가지는, 신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힘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은 더 정리된 기분이다. 물론 저자의 해석 역시 진리가 아닌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해석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다음에 사복음서를 읽을 때 다시 들춰보며 내 부족한 신학적 지식과 좁은 생각 때문에 해석에서 제자리 걸음하거나 방황할 때 길잡이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뜰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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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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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창백한 마음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저, ‘창백한 말’을 읽고

첫 페이지만을 읽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본 시람에게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이를 감히 축복이라 부른다.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토록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보며 참조해야 할 작품이라고 믿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말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닳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혹시라도 절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미리 여러 권을 소장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천사를 쓴 정지돈 작가가 인생 소설이라 하고 필사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는 이유를 알 듯하다. 

처음 만난 사빈코프의 글은 혁명과 테러의 중심에 선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따르기 때문인지 무거웠다. 그의 글은 고독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는 주인공이 이끄는 테러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리더 위치에 서 있는 주인공 조지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동료들만이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고독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섯 중 셋은 목숨을 잃는다. 글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성격 탓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일기이기 때문에 객관적 서술보다는 주관적 서술과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는 화자의 내면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소리 하나 지르지 않을 정도로 화자는 일반적인 감정 수준을 이미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살인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여러 복잡한 내면의 갈등마저도 그는 이미 초탈한 듯했다. 이미 그에게 테러는 어쨌거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동료 넷의 목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함도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죽인 후 달라진다.

총독을 암살하는 계획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조지는 기쁘지 않다. 그의 삶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타겟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대의로 포장한 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일까. 목표 달성 후에 느껴지는 한없는 공허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총독 암살은 대의로 포장할 수 있다. 테러라는 말조차 반대편에서는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즉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총독 암살이 성공리에 끝나고 작품 속 화자 조지는 연모하는 옐레나의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옐레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후 조지는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총독 암살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괴로워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그 사람만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도 죽였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가서 그는 고백한다. 더 이상의 테러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도 필요 없고 나는 혼자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대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이 살인을 행한 조지.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아가,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작품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조지는 아마도 가을밤에 홀연히 권총으로 자살을 실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든 소의든 살인을 행하고 난 뒤 그는 결국 모든 걸 잃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비록 살인자이지만 나는 조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 편의 소설이 남기는 흔적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가을밤마다 혹시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행여나 내게 깃들지 않길 나는 바라게 된다. 하늘도 창백하고 내 마음도 창백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빛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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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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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낯설지만 매력적인 작품

윌리엄 포크너 저, ‘곰’을 읽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 현대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나는 이 작품 ‘곰’으로 처음 만났다. 포크너보다 5년 뒤에 태어난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나 ‘생쥐와 인간‘에서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기를 다뤘다면,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그보다 수십 년 앞선 19세기말, 노예제도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시대상을 담아낸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은 영원성을 갖게 마련이고, 문학사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두 작가는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포크너는 1949년, 스타인벡은 1962년에 상을 받았다. 참고로, 또 다른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 역시 노예제도로 얼룩진 흑인들의 아픔에 역사성을 부여하여 ‘빌러비드’라는 작품을 남겼고 199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읽은 미국 현대소설 대부분이 미국의 어두운 역사와 그것이 남긴 아픈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문학이 가지는 공적인 위치와 그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역사, 허구성이 깃들은 역사가 실제 역사와 공명하여 이야기가 되고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이 메커니즘을 나는 신비라 부른다. 특히, 내 나라도 아닐뿐더러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와도 무관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현실에 대해서 나라는 사람은 이 책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역사에 대해서 바늘 만한 정보조차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을 것이다. 문학이 가지는 강력한 힘을 나는 사랑한다.

처음 만난 포크너의 문체는 친절하지 않았다. 짬 시간에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다루는 주제의 무게 때문인지, 작가의 목소리 무게 때문인지 나는 이 길지 않은 작품을 읽으며 꽤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4장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길을 잃기도 했다. 시대와 문화라는 콘텍스트가 나와는 너무나도 상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이야기 전개만이 아니라 포크너의 문장은 맺고 끝냄에 있어서 명확한 구두점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읽어내는 데에 더 어려웠던 것 같다. 

4장을 빼면 나머지는 한 소년의 성장기로 읽을 수 있다. 제목 ‘곰’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곰이다.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늙고 거대했던 올드벤이라는 이름을 가진 곰 한 마리. 소년을 포함한 일행은 매년 늦가을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목적은 사냥이지만, 실제 목적은 올드벤을 잡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는 일은 마치 사냥의 들러리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해를 거듭하며 사냥을 해도 올드벤은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전설이 되었으며, 이는 다음해에도 사냥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들은 올드벤을 잡고 싶어하는 동시에 잡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들이 매년 사냥을 나선 까닭은 어쩌면 올드벤이 여전히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주인공 소년이 여전히 십 대일 때 올드벤은 결국 사냥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소년의 성장기 혹은 사냥 성공기로 읽는다면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리라 생각한다. 난해하기만 했던, 그리고 여전히 다 이해할 수 없는 4장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4장에 대한 나의 얇은 이해에 기반할 때, 그것의 해석이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지 않나 싶다. 곰 올드벤이 죽으면서 사냥 모임은 해체되고, 숲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되기 시작하고, 소년은 성인이 된다. 4장에서는 땅의 소유와 숲의 개발과 파괴에 이어 노예제도와 흑인에 대한 차별 이야기도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데,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곰 올드벤의 죽음이 있다. 나는 이 점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키라고 생각한다. 이 키 이벤트의 철학적 혹은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변화로 인해 작가 포크너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처음 읽은 포크너의 난해함이 낯설지만,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책장에 꽂힌 ‘고함과 분노’라는 작품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포크너를 계속 읽어야 할지는 그때 가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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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기대는 시간 - 삶을 견디고 나를 마주하는 고전 읽기
정지우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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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외로움, 고독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내면의 성장

정지우 저,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읽고

페이스북을 통해 정지우 작가를 알게 된 지 5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그의 저서를 손에 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그가 페이스북 친구 중 가장 성실하게, 그것도 시선을 끌 만한 사진이나 단 몇 문장만으로 끝나는 글이 아닌, 몇 단락으로 이루어진, 완성도가 높은 데다 진정성까지 깃든 글을 포스팅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점에서 답을 찾는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이미 페이스북 포스팅을 통해 그의 글을 충분히 읽고 있다고 판단했었나 보다. 지난 5년간 그는 책을 여러 권 펴냈다. 그러는 동안 변호사라는 직업도 가졌다. 갓난아기였던 그의 아이도 제법 자랐을 것이다.

그의 저서 중 무엇을 읽어볼까 하다가 바로 이 책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고르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역시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의 포스팅에서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라고 썼던 게 불현듯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 나흘 간 나는 저녁 시간에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동태눈으로 세월아 네월아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을 쳐다보지 않고 즐겁게 정신을 팔 수 있었다. 

이 책은 열두 편의 서양 고전 문학 작품을 읽고 독자로서 그가 남긴 흔적, 그리고 불안하기만 했던, 그래서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던, 예비 작가 정지우의 이십 대 시절이 남긴 잔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잔상이라 함은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이 쓰인 시점은 그가 서른을 넘긴 이후다.

열두 편의 작품 중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은 세 편밖에 없었다. 그가 읽은 양에 비해 내가 읽은 건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을 터인데, 전체의 사 분의 삼이나 읽은 작품이 겹치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고른 작품이 상대적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헤세를 읽었고, 그르니에를 읽었으며, 카뮈를 읽었다. 릴케와 지브란에 빠지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가 책들과 보낸 이십대 시절은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이런 멋진 책을 써냄으로써 그는 뭇사람들이 거치는 과정에 ‘의미’라는 옷을 입혀 기념하고 기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을 펴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정서는 불안, 외로움, 고독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그만 그의 자취방. 세상과 단절된 듯한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의 깊은 만남을 가졌던 듯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점은 외톨이로도 충분히 보일 수 있을 만한 상황의 표면이 아닌 그 이면에 초점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등진 듯한 모습으로 외롭고 불안했지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깊은 심지를 영혼에 견고히 내렸으며 그러면서 내면의 성장, 성숙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통해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읽고 쓰는 삶’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작과 젊은 날의 정신적 방황, 그리고 그런 것들을 꿋꿋이 견디며 주관과 객관에 균형을 이루어나가는 현실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어나가며 그가 얻었던 위로와 평안과 만족을 느낄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미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나에겐 서른을 넘기며 이런 내면의 성장을 이뤄낸 정지우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마흔을 넘기면서 느끼고 깨달았던 많은 것들을 그는 서른을 넘기면서 모두 체험한 듯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느꼈던 그의 내공은 뿌리가 깊었던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도 살펴볼까 한다. 

#을유문화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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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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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따지기, 그리고 답이 되기

김기현 저, ‘욥, 까닭을 묻다’를 읽고

작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글쓰기 선생이자 철학과 인문학에 능통한 목사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김기현은 2016년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쓰며 자신이 통과했던 고난을 자발적으로 재방문하고 그로 인해 다시 아파하다가 끝내 치유를 경험했다. 하박국서를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고 개별적인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초월적인 하나님 관점으로 자기 삶을 관찰, 성찰한 뒤 고난 받은 경험이 있는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그 고난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열매를 따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냈다. 그는 그 시기를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때로 고백한다. 아마 그의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 역시 비슷한 고백으로 화답했으리라.

그랬던 그가 6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또다시 고난을 다루는 책을 펴냈다. 왜일까. 왜 또 고난일까. 하박국으로 충분하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 못한 말이 남아서였을까. 아닐 것이다. 고난과 인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인생 자체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어쩌면 둘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이 하박국서였다면, 이번에는 욥기다. 하박국처럼 고통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던 그가 이번에는 욥처럼 까닭을 묻는다. 

하박국과 욥은 공통점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고 저항하고 항거하다가 결국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고난마저도 노래하며 축복의 통로임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또 하나의 하박국이자 욥으로서 자신의 경험담을 매개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며 통과한 뒤 그 고난이 벌이나 저주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믿음이 감사와 찬송으로 변화되어 거듭난 인생을 비로소 살아내기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아름다운 증거가 된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이러한 결론으로만 압축된다면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작품이 되어버린다. 이번 책의 주안점을 나는 제목에서 찾는다. 특히 동사에 주목한다. ’노래하다‘가 아닌 ’묻다‘에서 말이다. 욥의 항변과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는 모습, 그러니까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론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 중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읽어야 전작과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노래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전,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묻고 따지는 행위. 유교와 무속신앙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무엇이 예수님의 사상이고 가르침인지조차 묘연해진 한국 기독교에서 이런 행위는 오만방자하다거나 교만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일 것이다. 욥의 세 친구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일 거라고 말한다면 과장이 심한 걸까. 

묻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 고난은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는 해결불가능한 영역의 일이기에 모든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묻고 따질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묻고 따지면 안 되는 것처럼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범한 우는 단지 묻고 따지기를 금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행위 이면에는 자기들만 하나님을 잘 안다는 선민사상과 교만이 내재되어 있다. 욥의 세 친구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묻고 따지는 욥을 나무라고 저주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주신다. 묻는 자에게 응답이 주어지는 법이다.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이유는 그들은 묻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신 그들은 자칭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했다. 묻고 따진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겸손한 땅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도 자연스러운 믿음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말하듯, 예수님의 가르침도 많은 부분이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비유와 상징에 능한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은 무수한 질문을 낳는다. 욥기의 말미에 등장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질문으로 일관하신다. 그러나 그 질문들이 곧 답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나아가 욥기를 읽는, 아니 모든 하나님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이 점을 절대 간과하면 안 되겠다. 

또한, 역시 저자가 간파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묻고 따지는 데에 있어 욥처럼 담대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비그리스도인들 앞에서는 답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민족으로 부르신 이유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방에 제사장 역할,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된다는 답으로 서기 위해 우리가 먼저 행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께 묻고 따지는 행위일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 그리고 열방에게 답이 되기. 전자는 후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열방에게 답이 되지 못할까. 혹시 하나님께 묻고 따지지 않아서이진 않을까. 하나님 말씀을 읽어나갈 때 좀 더 묻고 따지는 자세로 하나님과 대화해야겠다고 나는 마음 먹게 된다.

참고.
1.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https://rtmodel.tistory.com/379
2. 욥, 까닭을 묻다: https://rtmodel.tistory.com/1557

#두란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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