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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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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지영 저,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21세기 현재, 나와 동시대를 살며, 같은 하늘과 같은 해와 달을 보며 아침과 밤을 맞이하는, 게다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의 글이어서 그랬는지, 문학 고전을 읽을 때나 신학이나 철학 책을 읽을 때와는 책이 성큼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결코 크진 않았지만, 소신이 뚜렷한 움직임이었다고 해야 할까. 공감해 달라고, 감동해 달라고, 아니면 교훈을 발견하라고, 은유 속에 숨겨놓은 깊은 뜻을 찾아내라고 하는 요구도 없었다. 그냥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마치 그 어느 것보다 내가 더 공감할 거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정말 그랬다. 별 생각 없이도 뭘 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이 책은 그냥 일상의 한 토막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어느 가정에서 일어나는 딱히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다. 이혼을 세 번이나 한 여자가 엄마로 등장하지만, 책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화자는 위녕이라는 딸이다. 작가는 위녕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다분히 여성스러운 색채가 진하지만, 담담히 그려낸다. 우리 시대에서 일상 속에 깊숙이 만연해 있는 암묵적이고 구조적인 부조리로 책 곳곳에 은근히 드러내기도 하고, 또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상처도 받고 아파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가족의 의미와 사랑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견뎌내고 극복해내며 그 일상을 다시 성실히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책이 남겨 준 잔상을 음미하려니 내 얼굴에선 웃음이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위로도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곧 흩어져버릴 잔상을 붙잡아 두려고 노트북에다가 글을 써내려 가고 있지만, 확실히 다른 책과는 다름을 또 느낀다. 분석할 차가운 머리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읽고 반응할 (때론 눈물도 함께 흘릴) 따뜻한 가슴만 있으면 된다.

왜 이 책이 따뜻할까 생각해 보니, 요즘 있었던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와 어쩌면 내게 부족했던 사랑이나 어떤 감정 같은 것이 이 책을 다른 책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위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 내겐 때맞춰 찾아온 고마운 선물 같은 책이다. 추천해 주신 ByungJoo Kim 집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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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아이 (양장)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홍종락 옮김 / IVP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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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초월일까, 독선일까, 아니면 그저 무관심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 사람은 교만하다든지, 반항적이라든지, 아니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각 진영으로부터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진리를 향한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특히 기독교 안에 있는 교파들과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고, 그럴 의도조차 없으셨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전해온 약속의 성취요,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물든 창조세계를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하신, 열방에 복을 주시는 구원 계획의 완성이시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그 동일한 복음을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특히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생겨난 이후, 동일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여러 교파가 생겨났고, 서로 분쟁까지도 일으키며 여러 조각, 여러 모양으로 분리되었다 (이 부분에선 교회 일치 운동을 생각해 볼 여지를 남김,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지지하는 입장임).


우리 주위엔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추어 개인구원론에 치중하는 우파의 신앙도 있으며, 예수님의 신성에 관련된 부분보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삶의 모습과 자세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만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좌파의 신앙도 생겨났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0세기 중 후반에 일어난 이러한 미국 기독교 내부 변화의 산 증인이다).


카톨릭,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성결교, 루터교, 초교파 교회... 이러한 굵직굵직한 이름들 아래는 또 수많은 작은 가지들이 있다. 본의 아니게 여러 교단을 접해봤지만, 솔직히 말해서 각 교단이 왜 다른지, 왜 달라져야만 했는지, 난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뿐, 모두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이야기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의 책 '한나의 아이'에서 밝힌다. 자기는 어느 교파나 교단에도 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는 자신이 개신교도이며 감리교 소속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조각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단 그것들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답 없는 시대에 살아남는 법이라고까지 말한다.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자신이 '한나의 아이'를 쓰면서 배운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냐며 감탄하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신학자로서 자신을 규정하면서도, 신학이 할 일은, 인생의 복잡성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려면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는 단어들이 필요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자들이 그런 단어들을 쓰기 두려워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긴다면 그들의 소명을 배신하는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임과 동시에 인생의 복잡성이라고 하면서, 근대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발언'과 '인생의 복잡성'을 분리하려고 시도한 것에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그 분리 시도의 결과 그들 신학의 핵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정말 필요한지 불분명해진다고 역설하면서 말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학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윤리학이란 신학적 진술의 실천적 특성을 드러내는 학문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한나의 아이'가 그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나는 책을 읽어 내려가며 하우어워스 내면에 자리잡아 가는 신앙의 변화와 성장과정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너무나 솔직 담백하여 (어떻게 보면 신비감 완전 제로),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고 가식이 없었다. 그는 특권층에 속하길 거부한다. 그가 신학대학원에 간 이유도 목회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을 좀 더 알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그 이유였다. 교수가 되거나 학과장이 되거나 총장이 되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텍사스 플레전트그로브 출신이자 벽돌 쌓는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듯) 생각까지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회고록은 보통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법인데, '한나의 아이'는 그런 면에선 '정통' 회고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과거 인생을 온통 친구들과 가족들의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는 관찰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가짜' 주인공들과 함께 모든 곳에 존재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며, 모든 것을 종합해냈다. 그 종합은 어떤 이미 유명해진 회고록 저자의 모습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글 읽고 쓰는 걸 좋아하며 어느 진영에도 정치적으로 속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겸손한 신학자의 모습이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우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던 그의 내면세계를 잘 반영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백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일을 해내고 그 결과로 인류에 공헌까지 해서 자타가 인정하는 유명인이 되고 난 이후에 하는 영웅담과도 같은 과거 완료형의 간증이 아니라, 그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하나님에 관한 언어로 일상을 설명해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직접 끊임없이 설명해 내고 있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친근한 일상의 간증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었으며, 내가 틀린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영웅담 간증은 싸구려 자기계발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의심이 생기고 그래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읽고 어느 답이 맞는지 알기 위해 발표와 토의를 경험하는 방법이 결코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날처럼 답 없는 (어쩌면 답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정상적이며, 나아가 아주 바람직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난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점점 되어간다는 것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일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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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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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저, “용서에 대하여”를 읽고.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존 바턴의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 다음으로 읽어서 그런지 존 바턴이 강조했던 '자연법’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이 책 “용서에 대하여”에서도 나에겐 읽혀졌다.

진정한 용서는 단지 신의 명령에 순종함도 아니고 조건적이지도 않다. 책 전체에 흐르는 자크 데리다의 용서에 대한 사유가 말해주듯, “진정으로 가능한 용서는 불가능한 용서”라는 말이 내겐 첨엔 아이러니하게만 들렸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며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여러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하는 사랑의 행위 정도로 난 용서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엔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당한 그 특정한 사건을 통하여 갑자기 위상이 뒤바뀌어 (심지어 난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판사가 재판 결과를 선언하듯, 마치 갑자기 가해자보다 우위에 서서 가해자를 판단하고 가해자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조건적인 용서, 즉 용서의 윤리와 용서의 정치 사이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속하여 이상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추구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없인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 그래서 실수를 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용서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프레임 속에 갇힌,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을 왔다갔다하며 얽히고 섥혀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도 지녔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즉 존 바턴이 얘기한 인간의 존엄성이 용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점을 난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용서는 앞서 얘기했듯이 누군가의 명령이나 해야만 하는 의무라고만 해석해서도 안된다. 그건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공동체들 사이에 무언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모두가 선행 학습 없이 인지하고 있는, 마치 C.S. 루이스가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선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이나 ‘도덕률’과도 같은, 또 마치 존 바턴이 강조했던 ‘자연법’과도 같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단 용서라는 개념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는 본문 속의 문장도 맘에 와닿았다. 이어서 “값싼 용서”라는 가슴 아픈 용서에 대한 오용에 대해서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내겐 한편으론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다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소위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따로 떼어놓는 식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오용에서 등장한 개념이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사용한 “값싼 은혜”라는 개념과 함께 “값싼 용서”를 사유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은혜라는 것이 수혜자의 공로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진정한 은혜는 진정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은혜”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복음의 핵심은 용서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이자 진정한 은혜라는 사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진정한 용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할 수 있어서 아주 나에겐 유익한 책이었다. 좋은 책을 써주신 강남순 교수님께 감사를 뒤늦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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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 - Knowing God’s Creation
김민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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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 Rust Kim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일주일 만에 배송이 되어 (여긴 미국이다), 기대감으로 책을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너무나 맛있는 음료를 다 마셨는데도 계속해서 빨대를 빨고 있는 기분이랄까. 책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찐하게 남는다.

성인이 되어 만화책을 사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점심 시간에 카페테리아 구석진 곳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면서 키득키득대며 읽었는데 (옆 사람이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뭐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것따위 신경 쓸 겨를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게 책 한 권을 읽어본게 언제였던가 싶다. 김민석 작가의 실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책은 만화만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잘 살리고 있다. 말 풍선 안에 적힌 문장들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위에 언급한 두 책이 가진 텍스트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겠지만, 이 책이 전달하는 임팩트는 그에 못지 않다. 만화는 글뿐 아니라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그리고 인물들이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우리들은 글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의 감정을, 마치 브레인을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게다가 아주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실제 만화를 보며 우린 우리 자신을 그 만화 속 시공간에 배치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없고, 글과 그림의 차이로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만화만이 할 수 있는 유닉한 파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만화 작가의 입장에선 말 풍선 안에 담을 글을 최대한 요약할 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정확하고 좋은 문장을 선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름도 빛도 없이 묻힌 작가의 부단한 연구와 성실한 노력이 선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김민석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를 먼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대다수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두 책이 설명을 못한 게 아니라, 나의 롱텀 메모리 능력이 바닥이라고 그런 거임), 창조론 연대기를 보며 아주 선명하게 개념이 다시 기억이 나고 정리가 되었다. 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책 중간중간에 도표와 그림을 삽입시켰지만, 창조론 연대기에서 보여준 만화 속 정리는 정말 내겐 통쾌하고도 명쾌했다. 역시 만화만이 가진 매력이 분명 존재하는 거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지속적으로 만화를 매개로 하여 신학, 과학, 인문학 등을 지속해서 출판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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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
임택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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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Taeck Kyu Yim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먼저, 무크따를 먼저 읽고 아론의 송아지를 읽게 된 순서는 아주 바람직했던 것 같다. 출판된 시기가 그렇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두 권 모두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독서 방향에 있어선 하나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개인 교습으로 입문을 했다면, 이제 재미나고도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동반한 강연을 들을 차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론의 송아지”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매하고도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져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금 조각을 모두 모아 아론을 중심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 명하고 의지하게 되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그 기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을 이스라엘 백성에 대치시키고, 송아지 형상을 성경의 문자에 대치시킨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는 믿지만, 그 믿음이 너무나 근본주의적이어서 문자 그대로를 믿게 된 무속적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만들어낸 창조과학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성경에 씌여진 문자 속에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저자는 아주 적실하게 꼬집어 낸다.

이 책의 부제인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에서도 쉽게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책의 메인 타겟은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이다. 그 그룹에 속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하나님과 기독교를 스스로 보호한다고 할 만큼 영성이 지나치게 높은,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무속적인 면을 하나씩 파헤친다. 그러나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어도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을만큼 저자의 글쓰기는 탁월하다.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대충이라도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 책을 읽을 땐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제목부터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지레짐작하며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묵직한 주제를 저자가 가진 쉬운 번역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기술로 인하여 대중적으로 재미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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