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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
엔도 슈샤쿠 저, ‘깊은 강‘을 다시 읽고
(0) 들어가며
재독의 유익 중 하나는 줄거리 파악에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세부사항은 기억이 안 나도 대략적인 흐름과 메시지를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하여 ‘깊은 강‘을 4년 만에 다시 읽었다. 덕분에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잇닿아 있는 오쓰의 신앙, 즉 작가 엔도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변증 하려는 무언의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좀 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모두 저마다의 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그들은 지구상 유일한 장소,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제각기 나름의 답을 얻게 된다. 설령 그것이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일종의 매듭 같은 걸 지을 수 있었다. 단순히 먼 이방 땅을 밟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상징하는 어떤 성스럽고 초월적인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각 인물들의 서사와 그들이 얻은 답, 그리고 그 답을 선사한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 대해 조금 끄적거려 볼까 한다.
(1) 이소베의 경우
첫 꼭지로 이소베를 위치시킨 건 엔도의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소베는 일본 남성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깊은 강'이 출간되기 전 엔도의 마지막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는 적지 않았을 테고, 그들 중 많은 일본 남성들은 이소베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말하자면 엔도는 일본 남성 원형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책을 시작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보편성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 보편성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소베의 아내가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말에 대한 이소베의 반응과 그 이후의 여정에 공감을 얻기 위한 엔도의 수 읽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만약 이소베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유언이라도 환생할 테니 꼭 자기를 찾아달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걸 제쳐두고 확실치도 않은 편지 한 통에 의지하여 인도까지 가게 되는 한 남자의 무게를 독자들은 쉽게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소베가 일본 남성의 원형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기이한 행동까지도 독자들이 기대감을 가지면서 끝까지 읽게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다른 독자인 나조차도 이소베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고, 심지어 바라나시의 허름한 골목에서 환생한 아내를 만나기를 내심 기대했던 걸 보면, 이소베가 상징하는 보편성은 비단 일본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아내와 일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한 노년 남자의 애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엔도는 이소베에게 환생한 아내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이 이소베의 경우를 읽으며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엔도가 그리고자 했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모든 인간, 즉 한 나라의 수상부터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수드라'에도 속하지 않는 카스트 밖의 존재들(아웃카스트)인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까지 모두 묵묵히 품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그곳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거나 환생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지극히 기적적인 상징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소베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죽은 아내가 환생했을지도 모를 한 소녀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쓰코와의 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소베는 아내가 이미 자기 안에 환생해 있다는 결론에 묵묵히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망각의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건 곧 아내의 환생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곧 환생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이소베에게 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갠지스 강이 존재하지도 않을 어떤 관념적인 이상이나 신비로운 환상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오감이 살아 움직이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이지 않나 싶다. 엔도가 바라보고 그리고 싶어 했던 '깊은 강'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2) 기구치의 경우
젊었을 적 미얀마에 파병되어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기구치. 한 전우의 헌신 덕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총칼의 위협이 아닌 치열한 생존의 위협으로 기억된다. 미얀마의 기후와 풍토병, 그리고 먹을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우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기구치에게 인육을 건네며 죽어가는 그를 살렸던 쓰카다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이 일부를 먹었던 전우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잖아도 전쟁 후 트라우마에 빠져 지내던 쓰카다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
기구치는 생명의 은인인 쓰카다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청년 가스통을 만나게 되고 그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쓰카다를 포함한 여러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쓰카다는 죽기 전 가스통에게만은 말을 터놓았다. 자신이 전쟁 중 인육을 먹었다는 고백을 하자 가스통은 기겁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은 채 안데스 산맥에서 발생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던 한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그래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희생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살아남아 구조된 이들이나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다른 사람들을 살렸던 자의 가족이나 모두 서로를 이해하며 인육을 먹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다. 쓰카다는 가스통의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에서 해방받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가스통이 상징하는 건 지극히 낮고 추한 곳에 위치한 죄인에게까지 찾아오신 예수와 꼭 닮아 있다.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스통은 유로지비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못했고 술조차 몸을 상하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던 쓰카다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가스통이었다. 가스통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마치 고해성사하듯이, 솔직히 고백한 이후에 쓰카다는 구원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구치는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목도했다. 그리고 인도 여행 중 가스통이 쓰카다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기구치는 갠지스 강에서 비로소 가스통이 쓰카다에게 했던 행동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은 가장 더러운 죄인마저 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친다.
(3) 누마다의 경우
죽을 수도 있었을 폐 질환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동화 작가 누마다. 그는 투병 중일 때 아내가 사준 구관조에게 유일하게 모든 솔직한 말을 털어놓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실패할 확률이 큰 수술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구관조가 갑자기 죽었다. 누마다는 구관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누마다가 인도를 찾은 것도 야생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누마다의 이야기는 갠지스 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누마다가 해방을 맛본 곳은 갠지스 강이 아닌 인도의 정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를 놓고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의 양극을 모두 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고 정결하게 해 주는 갠지스 강의 상징적인 의미와 맞닿아 있다. 비록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던 구관조와 같지는 아니지만 누마다는 자신이 구입한 새를 방생함으로써 은혜로 입었던 삶을 돌려준다. 말하자면 은혜를 흘려보낸 것이다. 'Pay it back'이 아닌 'Pay it forward'를 실천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와 중첩된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전달되는 은혜의 선순환. 갠지스 강이 갖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
나름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자처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던 미쓰코.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여기며 미쓰코와 함께 무리를 짓던 이들을 절대 동지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쓰코는 그 어느 영역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늘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코의 내면은 공허했고 그녀의 눈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학생들을 고리타분한 바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날 무리들의 소개로 오쓰를 유혹하기에 이른다.
오쓰는 스스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의 내력을 따른 가톨릭 신자였고, 내세울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나약한 사람이었다. 미쓰코의 육체적 유혹에 넘어갔고, 얼마 후 미쓰코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오쓰와 미쓰코가 다니던 대학은 오쓰가 가게 된 프랑스의 수도원 관할이었다).
다른 남자와는 달리 오쓰는 미쓰코의 마음에 어떤 묘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잘 나가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 신혼여행을 프랑스로 가서도 미쓰코는 홀로 그곳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여정을 밟고 있는 오쓰를 만나러 간다. 오쓰는 여전했다. 여전히 숙맥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도 여전히 어떤 경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경계는 신앙의 유무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 지극히 서양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류'의 신앙관, 그리고 그것에 대립되는 범신론(이라 쓰고 범재신론이라 읽는다)적인 자신의 신앙관 사이에 난 경계였다. 오쓰는 둘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고뇌하고 있었다.
허무와 냉소로 가득했던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의 삶이 껍데기만 남은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쓰코의 삶이 껍데기의 삶이었다면, 오쓰의 삶은 정반대의 알맹이만 남은 삶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쓰코와 오쓰는 마치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은 서로가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부재한 모습이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싶다.
프랑스에서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오쓰는 인도의 바라나시로 떠밀려 왔고, 그곳에서도 가톨릭 성당이 아닌 힌두교 소속의 공동체와 생활하며 불가촉천민들이 갠지스 강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으며,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쓰가 꿈꾸던 일도 아니었다. 오쓰는 자신을 받아주는 유일한 공동체에서 머물렀을 뿐이고, 그 시간 그 공간(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했음직한 행동들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의 짐을 지고 함께 먹고 마시며 고통을 공유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는 오쓰의 모습으로부터 미쓰코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다 가진 것 같았으나 공허와 냉소만이 남아 있는 미쓰코, 다 잃은 것 같으나 어떤 충만함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오쓰. 소설이라는 극단적 설정이 가미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쓰코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충만함을 오쓰의 삶으로부터 처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오쓰의 삶은 말하자면 사랑의 실천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연민, 희생, 헌신. 그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오쓰의 삶은 스스로 자신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미쓰코의 삶의 정확한 여집합이었다. 미쓰코는 자신에게 부재했던 유일한 알맹이, 즉 '실천적인 사랑'을 인도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에 와서야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5) 마무리하며
엔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낸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은;
(1) 이소베의 경우를 통해, 이상과 환상의 공간이 아닌 오감이 살아 있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장소였다.
(2) 기구치의 경우를 통해,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며 가장 더럽고 추한 죄인마저 끌어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3) 누마다의 경우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흘려보내며 생명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를 통해,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을 섬기는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두 번 읽은 나는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이 인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거하는 모든 현장으로 스며들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엔도의 '깊은 강'에 대한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엔도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7. 내가 버린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2064
* 엔도 슈사쿠 다시 읽기
1.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