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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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읽고 쓰는,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고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의 태동과 함께 드디어 시작된 나만의 소소한 프로젝트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는 예전에 한 번 읽고 감상문을 남겼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출간 순으로 다시 읽고 다시 감상문을 남기는 과업이다.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 앞으로 약 2년 간 지속될 예정이다. 그 첫 작품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정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문단에 데뷔시킨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작품처럼 화려한 데뷔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묵묵히 전진하고 싶은 마음이다. 

3년 전 초독할 때의 나와 지금 재독을 마친 나 사이엔 수백 권의 문학, 철학, 신학, 인문학 책과 그 일부를 글로 남긴 150여 편의 감상문, 세 권의 저서와 한 권의 번역서, 그리고 짧은 글이 소개된 두 권의 책이 있다. 모두 작가로서의 가시적인 열매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과연 나의 성장과 성숙을 이뤄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다만 나는 읽고 쓰기가 일상으로 잦아든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성실히 지속되는 ‘읽기와 쓰기’는 지금의 나를 빚은 조물주의 손의 일부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초독 땐 ‘가난’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재독 때 내 시야는 확장되었다.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 혹은 ‘독서’ 혹은 ‘읽기’에 주목했다. 가난 때문에 극빈층에 속한 두 사람이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화들을 애절하게 편지로 주고받은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 빠짐없이 등장하는 책이라는 매개체에 내 관심이 집중되었다. 감상문을 쓰기 위한 밑작업으로 책에 밑줄 그은 부분을 추려보니 거의 모두가 책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돈이 아닌 책, 경제적 위기가 아닌 문학적 빈곤 (이 표현은 번역을 담당했던 석영중 교수가 사용한 단어이다)으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읽기, 그러니까 내가 주목한 책에 관련된 부분은 세 군데다. 첫 번째, 바르바라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뽀끄로프스끼의 방을 몰래 찾아가 그가 사들인 책들을 보며 느낀 충동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다음과 같다.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꼭 그렇게 하고 말리라며 그 자리에서 마음을 먹었다. 나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나는 그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아야 그와 우정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바르바라를 통해 묘사한 이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어떤 한 사람을 마음에 품는 충동적인 순간을 매개하는 것이 책이라니! 그 사람이 읽은 것을 모두 읽고 싶고, 그 사람이 아는 것을 모두 알고 싶은 그 마음. 그래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마음. 아, 이를 광기가 아니면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런 마음에 공감이 가는 걸까. 이성 혹은 지성을 대표하는 책이라는 것이 광기 어린 감정의 폭발 장면에 고스란히 쓰이다니! 책을 사랑하는 나 같은 사람의 마음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모두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나의 다짐도, 그리고 그 작품들을 재독하겠다는 다짐까지, 이것들 모두는 어쩌면 이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 아닐까. 

두 번째, 바르바라가 어머니 옆에서 병간호를 하던 중 뽀끄로프스끼가 빌려준 책을 읽던 소회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처음 나는 잠이 들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진지하게, 그리고 나중엔 책 속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느낌들이 거센 물결처럼 한꺼번에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런 흥분이 거세어질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황스럽고 벅찰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이 그 낯선 느낌에 빠져 들었고, 그 느낌은 점점 더 달콤하게 내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책이란 존재가 영혼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나 역시 한때는 바르바라였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되며 눈이 떠지는 과정, 그리고 바로 그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그 순간의 감흥을 나는 감히 기적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며, 동시에 타의에 강요되지 않은 자발적인 깨달음만이 그나마 약간의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변화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 번째, 뽀끄로프스끼의 죽음 직후 그의 아버지가 집주인으로부터 아들이 소장했던 책들을 무작위적으로 확보하는 장면, 그리고 그렇게 주머니에 넣으면서 확보한 책들이 아들의 관을 싣고 가는 마차를 따라가는 동안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아버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노인은 그녀와 말다툼을 하고 소란을 부리면서 뺏을 수 있는 만큼 책을 빼앗아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에 모두 쑤셔 넣고, 모자 안에도 넣고, 그 밖에 넣을 수 있는 곳에는 다 넣었다. 그리고 사흘 내내 그렇게 가지고 다녔다. 심지어는 교회에 갈 때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 그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바보라도 된 것처럼 비정상적인 분주함을 보이며 관 주위를 줄곧 왔다 갔다 했다.”

“노인은 궂은 날씨도 느끼지 못하는지 마차 이쪽저쪽을 번갈아 달리면서 울부짖었다. 그의 낡은 프록코트 자락이 날개처럼 바람에 펄럭였다. 옷에 달린 주머니에서는 온통 책들이 비어져 나왔다. 그가 내내 꼭 쥐고 있던 커다란 책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가여운 노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주머니에선 계속 책들이 빠져나와 진흙탕 속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멈춰 세우고 떨어뜨린 물건을 가리켜 보였다. 그는 그것을 주워 들고 다시 관을 쫓아 달렸다.”

이 장면을 읽는 동안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버지의 그 처절한 모습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아들을 먼저 보낸 그 마음으로 가득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남긴 책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책을 사수한다는 건 곧 아들의 명예를 지킨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았을까. 그런 책들이 진흙탕 속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것을 주워 들고 다시 아들의 관을 쫓아 달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잃는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나중에 아들을 묻고 아버지는 그 책들을 어떻게 다뤘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진흙이 묻어 더러워져도, 찢기고 구겨져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책은 이미 책을 넘어 아들의 흔적, 아니 아들 그 자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바르바라의 경우처럼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기도 하고, 뽀끄로프스끼의 경우처럼 그 사람 자체를 대신하기도 한다. 비록 사물이지만 하나의 힘을 가진 존재자로서의 의미까지 가지는 책.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책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깊이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단돈 몇 루블에 인생이 지옥과 천국을 오갈 수 있을 정도의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책은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이 되기도 하며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의 성장과 성숙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이 작품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극빈곤층에 속한 바르바라와 마까르, 그리고 뽀끄로프스끼에게서 가난이 아닌 책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책 말미에 바르바라와 결혼을 하게 되는 비꼬프의 경우는 비록 수중에 돈은 있어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만 책이 없는 삶을 살며 책을 무시하고 악마화시키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곧 책이 인간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도스토옙스키의 장치이지 않았을까. 가난하지만 살아있는 삶,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삶.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내고 싶은 걸까. 이 질문 앞에서 쉽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도스토옙스키가 든 두 가지 유형이 너무나도 극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책도 원하고 돈도 원하는 욕심 많은 내가 내 안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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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행복학 개론
서진교 지음 / 글과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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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인가

서진교 저, ‘예수행복학 개론’을 읽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앞부분에 소개되는 몇몇 대표적인 내러티브를 예수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며 소설의 형식을 빌려와 약간의 주해와 해석을 가한 서진교 목사의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 40절로 수렴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는 저자의 첫 저서 ‘작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간증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저자의 일상적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혹은 읽기 전이나 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제목으로 쓴 ‘누가 예수인가?’이다. 이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구별된다. 후자는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에 반해 전자의 대답은 바로 이 책과 이 책의 저자 서진교 목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그 답을 ‘작은 자’라는 단어에서 찾는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예수행복학’도 ‘작은 자’로부터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 주위에 있는 작은 자들, 이를테면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그리고 장애를 가진 자 등의 사람들을 섬기는 삶, 즉 예수가 보여주셨던 본을 따라 우리도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 아, 과연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는 이 질문 때문인지 마지막 페이지에 쓰인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와 함께 이 땅에서 만났던 예수를 이야기할 것이다’라는 문장은 내게 긴 여운을 남긴다. 서진교 목사의 사역을 응원한다.


#글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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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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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자유를 찾는 여정, 지금도 계속되는 싸움


타라 웨스트오버 저, ‘배움의 발견’을 읽고

소설로 보이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어판 표지에선 알아채기 힘들다. 한국에서 붙인 제목 ’배움의 발견‘을 봐도, 부제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를 읽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원서 표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원제 ‘Educated' 오른쪽 아래에 'A MEMOIR'라고 쓰여있다. 그것도 대문자로, 별다른 설명 없이, 덩그러니.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회고록’이라는 뜻의 ‘Memoir'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 대한 독법의 시작점이라고.

소설과 회고록의 차이는 허구와 실제의 차이다.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는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회고록 화자의 이야기는 역사성을 띤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그녀 자신의 이야기다. 저자의 머리만이 아닌 온몸과 온마음을 통과한 인생 이야기인 것이다. 

보도자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기로 읽어도 무리는 없다. 진부하지만, 한 시골 소녀의 극적인 성공기 (a.k.a.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이야기)로 읽어도 된다. 광고 카피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소녀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기까지” 그러나 그렇게 그녀의 사적인 성장 (혹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처사가 되리라는 게 내 지론이다. 내가 제안하는 이 작품에 대한 두 번째 독법은 카피에 현혹되어 단순히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 (혹은 성공) 결과에 집중하는 대신 그녀가 자란 환경, 그중에서도 그녀의 가족, 그중에서도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진행되었던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이야기는 저자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인 우물을 벗어나며 수치를 극복하고 자기 객관화를 이뤄내며 마침내 자유를 찾은 대서사이기에 단순한 외적인 성공이 아닌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타라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아니더라도 이 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한국어판 부제에 쓰인 ‘자유의 이야기’라는 표현은 옳다. 이 책은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는, 누리도록 보장된, 그리고 누려야만 하는 내/외적 자유를 막고 통제하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로 대표되는, 경도된 사상과 이념 및 신념에 대한 가슴 아픈 고발이기도 하다. 낯설기만 한 문화 속 이야기에 우리가 이토록 공감할 수 있는 이유 역시 비록 상황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우리 주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비슷함은 일차적으로는 제목에 나와 있듯 교육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도 공유하고 있는 깊숙한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아이다호 출신이다. 아이다호는 미국을 이루는 50개 주 중 북쪽으로 캐나다와 국경을 이루면서 북동쪽으로는 몬태나, 남동쪽으로 와이오밍, 북서쪽으로 워싱턴, 남서쪽으로 오레건, 서남쪽으로 네바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유타, 이렇게 총 6개의 주와 접하고 있는, 미국 전체에서 볼 땐 북서쪽에 위치한 주이다. 캘리포니아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을 가졌지만 인구는 캘리포니아 인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은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미국에서 11년간 살면서 나는 아이다호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사 먹은 감자는 대부분이 아이다호산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저자의 문체에 강하게 이끌렸는데, 그건 아마도 아이다호만이 가진 천혜의 자연, 특히 인디언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거대한 산맥, 그중에서도 저자의 집이 위치했던 벅스피크 주위의, 황량함이 느껴질 정도로 여백이 풍부한 공간에 대한 묘사와 그로 인해 떠오르는 원시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녀의 가족 모두가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장면이 묘하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공감각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다호가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아이다호로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재해석된 아이다호의 벅스피크는 두 가지 사뭇 상반된 이미지를 띠게 되었다. 하나는 프롤로그에서 느꼈던, 미개척된 원시림의 이미지였다. 그곳은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나 그랜드 캐년 앞에서 느꼈던 자연의 웅장함과 연결되는 동시에 인간의 미약한 존재를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기회만 된다면 나도 타라처럼 벅스피크가 만들어내는 계곡이나 산기슭에 발을 딛고 눈을 감고 바람과 산과 하늘과 물을 느껴보고 싶다. 다른 하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그곳에 정착하여 오래도록 대를 이으며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생성되는, 어쩌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타라의 환경은 몰몬교라는 종교다. 물론 이 책은 신학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몰몬교의 신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이 글에선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대신 몰몬교 신자들이 주로 하는 행위, 사고방식, 생활습관들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 대변되며 타라의 자유를 억압했던 사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원제를 빌려 이 실체를 표현하자면 ‘Uneducated’라고 할 수 있을 그것은 바로 무속적인 신념, 근본주의적인 신앙, 극단적인 세대주의 종말론, 일루미나티 음모론, 정부와 병원 등을 사회주의나 악마적인 존재와 동일시할 정도의 확증편향 (그래서 타라 가족은 아무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죽기 직전에 가도 마찬가지다. 예방 접종은 외계인 혹은 간첩들 혹은 공산당이나 하는 짓거리일 뿐이다) 등이 제멋대로 짜깁기된 그 무엇이다. 타라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조울증과 정신분열증까지 더해진 가부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평생 자기가 믿어왔던 안전한 우물만이 안전지대라고 믿고 가족들이 그 안에서만 살길 원한다. 평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을 대비하며 비상식량과 비상무기 등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타라의 성장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는 여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외적인 아버지와 내적인 아버지는 육과 영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시도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타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것을 해낸 것처럼 보인다. 내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그녀는 외적인 아버지를 재해석한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었던, 그러나 벅스피크처럼 너무도 거대하여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었던 아버지라는 깊은 우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동정의 대상이다. 그녀는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일곱 남매 중 타라를 비롯하여 집을 탈출한 리처드와 타일러는 대학 및 대학원 교육을 받았고, 나머지 넷은 정도만 다를 뿐 끝까지 아버지의 법 안에서 조금씩 위치를 바꿔갈 뿐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한 상태로 아버지와 함께 제2의 아버지처럼 살아간다. 타라는 그 간격이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타라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1986년생이고, 현재 서른일곱이며, 이미 관계가 단절된 그녀의 아버지는 물론 가족 모두가 여전히 살아있다. 타라가 용기 내어 시작한 이 뜻밖의 여정이 나는 타라뿐만이 아니라 타라의 가족을 포함한 제2, 제3의 타라의 아버지들에게 부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모두가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제2, 제3의 타라가 되길 바라게 된다. 타라의 아버지가 타라가 되는 여정이 그들 모두에게서 시작되길 기원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대부분 타라의 위치에 나를 대입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흔여섯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나는 나를 타라의 아버지 위치에 대입하기도 했다. 타라와 타라 아버지 사이의 싸움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지금도 현존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해 있던 깊고 거대한 우물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타라이기도 하고, 그런 타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계속 우물 속에 가둬두려고 하는 타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둘 사이의 싸움은 내 안의 두 자아 간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본성과 모순 가득한 인간의 심리를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고전문학이 아닌 생판 모르는 아이다호 출신 한 여자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된다. 뒤늦게 읽은 감이 있지만, 이 책을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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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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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푸시킨

알렉산드르 푸시킨 저 ’눈보라‘를 읽고

미천한 상식으로, 학창 시절부터 내게 각인된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그저 외국 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비롯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들려진 푸시킨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라는 위상을 넘어 러시아 문학을 있게 한 근원 같은 느낌이랄까. 러시아 국민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숱한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푸시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는 푸시킨으로부터 뻗어 나온 지류의 깊고 풍성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녹색광선 책으로 드디어 푸시킨을 읽게 되었다. 녹색광선 책은 어떤 작가를 처음 접할 때 아주 탁월한 가이드가 된다. 길지 않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 소개글을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해주는 여러 사진과 그림들은 작품을 읽기 전에 입맛을 다시며 메인요리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훌륭한 전채요리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눈보라‘라는 제목의 작품을 표제로 하는 단편집이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이 책은 ’벨킨 이야기‘로 러시아에서 출간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벨킨이라는 작가가 쓴 것처럼, 마치 푸시킨은 그 글을 받아 간행만 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벨킨은 가공의 인물이고 실제 저자는 푸시킨이라 한다. 푸시킨의 첫 소설집이라는 이유, 시대 정황이라는 이유,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푸시킨에게 벨킨이라는 이름 뒤에 숨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다섯 편을 모두 읽은 지금 하나의 해석을 더하자면, 이 시도조차 푸시킨의 기발한 장난기어린 창의력과 상상력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다. 푸시킨이 썼든 벨킨이 썼든 작품을 즐기기에는 별 상관없지만 말이다. 

추석을 맞아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기차 안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적당한 작품이었다. 손에 딱 잡히는 판형, 가볍고 튼튼한 양장본으로 한 작품이 기껏해야 20-30 페이지 안팎이라 전혀 부담이 없었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모두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식이라, 구두로만 존재하던 어떤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너만 알고 있어,라는 말을 먼저 듣고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완성된 작품 속에서 나는 21세기 현대소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이 가지는 특유의 기발함과 재치가, 물론 현대소설에서처럼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눈보라’에서 여주인공이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기다리던 신랑 대신 나타난 인물이 나중에 결국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게 되는 남자였다는 착상은, 비록 매끄럽진 않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였다는 생각이다. 시공간이 19세기 러시아였을뿐 푸시킨의 기발한 상상력은 시대를 이미 초월한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러시아 문학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공간이 달라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결국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오히려 더 빠져들게 된다. 다름 속에서 같음을 발견하는 과정,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과정, 통찰력은 이렇게 길러지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러시아 문학에 목이 마르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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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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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과 나약함 사이에서

엔도 슈사쿠 저, ‘바다와 독약’을 읽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추락하여 탑승원 12명이 모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중 8명은 서부 사령부로부터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때마침 생체실험용으로 제공해 달라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제안이 승인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끔찍한 실험동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만행은 실화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해 5월 17일부터 6월 2일에 걸쳐 실제로 벌어진 이 처참한 인권유린 사건을 역사는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이라고 기록한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은 이 작품 ‘바다와 독약’의 중심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1923년생인 엔도 슈사쿠가 자국의 수치이자 자국 역사의 오점 중 하나일 이 사건을 사건 발생 후 12년이 지난 1957년에 한 잡지에 연재하고 그다음 해에 단행본 소설로 출간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1966년에 출간되고, 폐렴으로 사망하기 3년 전인 1993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 ‘깊은 강’이 출간되었으니, ‘바다와 독약’은 그의 초기작이라 할 만하다.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한 지 4년 만의, 그러니까 그가 35세가 되던 해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엔도 슈사쿠의 평생 숙제였던 신의 존재와 부재에 따른 인간의 죄악과 나약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비록 ‘침묵’와 ‘깊은 강’에서처럼 기독교 색채를 정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으로써 현재 시점의 화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 ‘스구로’라는 한 의사를 매개로 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시공간은 생체실험이 자행되던 1948년 규슈대학 의학부에 맞춰진다. 비록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바른 독법은 사건 위주가 아닌 인물 위주여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 만행이었는지를 밝히거나 재조명하는 데엔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미 그걸 사실이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그 실험에 가담한 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심 의도일 것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한다. 스구로 의사 (사건 당시 의대생) 뿐만이 아니라 여러 등장인물들 (간호사 우에다, 스구로의 동료 의사 토다, 집도의, 조교, 장교들 등)이 이 실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로 선택하는 순간들, 실험이 자행되는 상황 가운데 이들의 심리 상태, 양심에 거리낄 뿐 아니라 인권을 유린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행되는 실험에 참여하는 장면들, 그리고 실험이 끝나고 미군 포로가 처참하게 살인을 당한 채 고깃덩어리가 되어 (장교들은 포로의 생간을 꺼내어 안주로 먹기도 했다는… 아, 이건 좀…) 쓰레기처럼 치워진 이후 스스로 내면의 괴리감을 처리해 나가는 장면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이었고, 그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는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본 인권유린 현장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였다. 이에 반해 ‘바다와 독약’은 가해자 국가의 국민 엔도 슈사쿠가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전쟁 중 황폐한 인간의 참혹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보여주고, 그 인간들의 심리가 시공간이 다른 곳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심리일 수도 있다는 점을 넌지시 짚어주기에는 더 적절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연민이 아닌 반성과 참회의 뉘앙스가 묻어 있는 바탕이 인간이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줄 수 있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을 잃고 길을 잃은 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의 모습이라는 해석은 이 작품을 넘어 저자 엔도 슈사쿠를 읽는 바른 독법이리라 생각한다. 이 독법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때,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 길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스구로의 모습은 ‘침묵’에서의 기치지로 냄새를 풍긴다. 나약한 인간, 인간의 나약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참혹한 현장 가운데 신은 어디에 존재했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셨는가, 등의, 하고 또 하고 심지어는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넘어서도 또 하게 되는 질문을 말이다. 아,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무겁고도 잘 잡히지 않는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할 때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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