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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오브라이언이 윈스턴 스미스에게 준 “그 책”을 나는 지금 읽으려는 참이다. 문학소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제목도 없고, 표지도 없지만, 그것이 오세아니아국가에게 매우 치명적인 내용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책은 오세아니아의 빅 브라더의 숙적인 골드스타인이 만든 서적이 아니라, 오브라이언이 직접 만든 도서였다. 그는 똑똑하고 치밀한 내부당원이었고, 그의 함정에 말려든 윈스턴은 외부당원으로 오세아니아 관료였다.
사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 책은 다른 도서로 통해 알아본 결과 레온 트로츠키의 <배반당한혁명>이란 고전이다. 1936년 트로츠키가 망명 도중에 저술한 것으로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한 것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가한 책이다. 당시로는 모두에게 멸시받던 그였지만, 트로츠키가 죽고, 스탈린이 죽고, 어느덧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로는 그의 서적과 사상은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 책은 비록 오브라이언이 만든 것이나, 오브라이언은 그 세계 자체가 틀린 것도 알고 있었으며, 그게 잘못된 것을 알아도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완벽한 감시망을 갖춘 비밀경찰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영토는 대부분 유럽과 인접한 것이고, 이 국가는 동아시아와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사이와 말고도 유라시아라는 국가가 있었다. 이 세계는 단 3가지 국가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1984의 세계는 전쟁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데, 국민들은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정확한 정보를 모른 채 텔레스크린으로 비추어지는 영상으로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판단한다. 이 텔레스크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 지금으로 따지자면 컴퓨터로 이용한 화상전화기를 보는 기분이다.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 것에 모자라 이쪽이 아닌 저쪽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른바 aura라는 것을 뛰어넘은 것이 되어 버렸다. aura는 누군가 자신을 촬영한 영상물을 계속 복제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 상대방도 같이 자신의 전달메세지에 동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1984의 세계는 aura의 관념을 넘어선 극사실의 결정체였다. 문제는 그 현실세계는 모든 것이 감시와 미행이었다. 주인공 스미스는 그런 통제된 공간에 왠지 모를 의문과 박탈감을 시달렸다. 그 의문은 과연 빅 브라더는 살아있을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존재에 대해 영상을 시청하며 누가 그 대상이 되든지 증오의 분출은 막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증오의 대상 1위는 당연히 골드스타인이다. 책에서 보면 스미스가 본 그의 인상은 “그 유태인의 얼굴을 야위었는데, 후광처럼 넘실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염소수염까지 기르고 있어서 쾌 지혜롭게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선천적으로 비열한 듯한 일상을 풍겼다. 게다가 길쭉한 코끝에다 안경을 걸친 모습에는 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우매함마저 서려 있었고, 얼굴과 목소리는 영락없이 염소를 닮아 있었다. 골드스타인은 여전히 당의 강령에 독설을 퍼붓고 있었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과정 되고 신랄해서 어린아이도 그 속내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미스가 상주하는 오세아니아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나, 적어도 골드스타인의 인상은 영락없는 트로츠키였다. 그가 <1984>를 발표하기 전에 명작소설인 <동물농장>을 내놓았다. 그런 다음에 <1984>를 내놓았으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조지 오웰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의 아픔과 1940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에서 트로츠키의 무고함과 비참함을 다시 담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조지 오웰이 그려간 미래의 정보사회는 유토피아라는 기술의 혜택이 인간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였다, 전자동 통제방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서 만약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게 될 경우 오세아니아 당국에 의해 그의 존재는 없어진다. 현재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마저 사라지게 되는 점이다. 새로운 신어를 개발 중인 사임은 자신의 능력과 영민함에 집착하게 되어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문제는 같은 사무실에 존재해도 그 사람이 없어지는 자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런 기본적인 인식조차도 불감증이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것은 이제 서로를 망각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그런 심각한 증세는 윈스턴 옆집에 살던 파슨즈의 일화다. 그는 자기 집에 어린 아이가 2사람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열렬한 빅 브라더의 지지자다. 어린 아이인데도 수상한자가 있으면 미행하여 고발하고, 심지어 아버지가 잠꼬대를 열쇠구멍으로 들어 감시국에 고발할 정도다. 빅 브라더에 대한 불만을 누구 입에서 나오면 바로 잡아가는 공포정치인 것이다.
이런 일들은 소설이라고 하나, 마치 주변에 있었던 일처럼 보인다. 한국이든 혹은 모든 대부분 나라이든 국가가 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하여 그것이 하나의 이권으로 변질될 경우 국민에 대해 감시와 처벌을 내린다. 몰래 도청하고 미행하여 그들을 납치 후에 감금, 폭행, 성추행, 살인 등과 같은 행위를 아무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최근에 민간인 불법사찰에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일들도 있었다.
예전에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개인정보가 적법한 절차나 보호도 없이 노출되고, 거리의 감시카메라는 개인의 사생활마저 침해한다.
범죄를 방지하고 예방해야할 국가조직이 오히려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은 1949년에 발표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낯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간에 빅 브라더와 빅 브라더가 행방도 모르면서 오세아니아 슬로건 3가지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강요하듯이 외치고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전쟁으로 평화를 지키고, 자유를 봉쇄하는 것이고, 지식을 없애는 것이야 말로 강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조지 오웰이 살거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던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이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최헌 교수의 <부시맨과 레비 스토르스>에서 부천경찰서사건을 예로 든 것이다. 그것은 원래 사건의 본질을 감추고 단순히 경찰서에 있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경찰서에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성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권인숙이란 여성에 대해 2차례나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통 여성들도 성폭행 사건을 말하기가 그러하나 25년 전이라면 더 심각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여성의 성적인 부분을 이용하여 경찰과 국가를 농락하는 행위라고 힐난을 했다. 하지만 문귀동이란 경찰관은 불법적으로 성폭행한 것이 사실이었고, 당국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권인숙 성폭행사건을 언어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부천경찰서사건으로 바꾸었다. 조지 오웰이 말한 <1984>의 신어는 바로 그런 것과 같은 목적을 담은 통제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단어만 말하게 하여 사고와 관념을 멈추게 한다는 것은 곧 생각할 수 있는 범주가 짧고, 정해진 것만 실행하는 인간이 되는 점이다.
인간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통제는 막대한 것이다. 언어는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은 다시 언어를 생산하고,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기도 한다. 결국 언어, 지식, 권력을 모두 통제하여 일부 지배특권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독재국가의 모든 정당성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독재조차도 그것이 정말 독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오세아니아의 그런 과격한 통제와 폭력은 윈스터인 오브라이언의 계략에 고문당한 모습에서 보다시피, 2+2는 무엇이냐는 것에서 우리는 분명 4라고 하나, 오브라이언은 5라고 한다.
윈스턴이 4라고 말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내내 심각한 고문을 가한다. 그의 고문의 마지막에선 윈스턴의 몸무게는 25㎏라고 말해준다. 머리는 모두 빠지고, 치아는 모두 너덜너덜하며, 등을 휘었으며, 온몸이 멍과 상처로 쌓인 채 살아있는 인간보단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있었다. 윈스턴은 자기가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으나, 오브라이언은 죽이지 않았다. 죽인다는 사실은 죽은 사람이 그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배반심이 있다는 점이고, 그의 이단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통해 그 사회의 현존성에 문제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과거 프랑스의 앙상 레짐을 보면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왕을 시해하려던 남자는 왕과 비슷한 위치로서 그 형을 받는다. 온갖 고문으로 천천히 죽이는 것이다. 그는 생체적으로 인간이나 지위적으로 왕과 대등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오브라이언은 그렇게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앙상 레짐의 시대는 사형수가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혹은 그 느낌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어느 사형수의 사형집행에서는 군중들이 몰려와서 사형을 방해하고, 사형수를 구출했다고 한다.
<1984> 세계는 그런 게 통용되지 않았다. 죽을 것이든 죽지 않을 것이든 모든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양심고백으로 통해 그 사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죽어가야 했던 것이다. 즉 죽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차라리 죽음을 요구하게 만든 것이다. 심각한 고문은 그 사람을 억지로 없는 거짓말로 통해 진실인양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고문을 가하는 그 자체가 고문의 이유다. 폭력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양심이 있든지 말든지 말이다. 윈스터은 자신과 동물처럼 성행위를 나눈 줄리아를 폭로하면서 그녀와의 만남과 성행위, 대화까지 모두 오브라이언에게 털어놓는다.
마지막에 그가 제일 싫어하는 쥐가 나올 때 그는 자신의 몸을 쥐가 먹는 것보다 줄리아가 대신 먹히기를 바란 것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그 공포로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무력화한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랑의 배신은 줄리아 역시 그렇다. 다시 재회한 줄리아의 모습을 본 윈스턴은 아름답고 건강한 그녀가 아니라 다른 느낌인 그녀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성행위를 하려고 해보았으나, 그것마저 되지 않았다. 오세아니아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금지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통제에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소한으로 성행위를 해야 하고, 그것을 하는 순간 불쾌한 존재고, 게다가 아이들은 여자가 낳는 것이 아니라 인공 수정한 시험관에서 나와야 하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애정이 생기면 가족마저 고발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들끼리 서로 통제하고 감시하는 세계에서 디스토피아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 행위를 속이려고 하는 것까지 눈치 채고, 가장 소름 돋는 부분은 원스턴이 비밀일기를 적은 후에 누가 볼까봐 석회가루로 표시했는데, 그 석회가루까지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다. 게다가 그 사진까지 찍어 윈스턴에게 보여주었으니,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 보인다.
오세아니아의 국가 체계는 <1984>를 읽은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 뻔뻔하고도 어이없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의미와 위선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고, 진리를 찾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며, 사랑하는 것이 오직 자신들의 사랑만 존재하고 다른 영역의 존재들은 모두 배척되고 있으며, 풍요롭다고 말하는 사회는 역으로 가난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오로지 TV나 선전물에서만 아이러니 겉만 완전하다. <1984>에서는 개인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으나, 국가의 공유화에서 그 권력관료들이 그 물질적 혜택을 당연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층민들은 여전히 착취로 당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1984>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또 어디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