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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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이언이 윈스턴 스미스에게 준 “그 책”을 나는 지금 읽으려는 참이다. 문학소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제목도 없고, 표지도 없지만, 그것이 오세아니아국가에게 매우 치명적인 내용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책은 오세아니아의 빅 브라더의 숙적인 골드스타인이 만든 서적이 아니라, 오브라이언이 직접 만든 도서였다. 그는 똑똑하고 치밀한 내부당원이었고, 그의 함정에 말려든 윈스턴은 외부당원으로 오세아니아 관료였다.

 

사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 책은 다른 도서로 통해 알아본 결과 레온 트로츠키의 <배반당한혁명>이란 고전이다. 1936년 트로츠키가 망명 도중에 저술한 것으로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한 것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가한 책이다. 당시로는 모두에게 멸시받던 그였지만, 트로츠키가 죽고, 스탈린이 죽고, 어느덧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로는 그의 서적과 사상은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 책은 비록 오브라이언이 만든 것이나, 오브라이언은 그 세계 자체가 틀린 것도 알고 있었으며, 그게 잘못된 것을 알아도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완벽한 감시망을 갖춘 비밀경찰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영토는 대부분 유럽과 인접한 것이고, 이 국가는 동아시아와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사이와 말고도 유라시아라는 국가가 있었다. 이 세계는 단 3가지 국가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1984의 세계는 전쟁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데, 국민들은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정확한 정보를 모른 채 텔레스크린으로 비추어지는 영상으로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판단한다. 이 텔레스크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 지금으로 따지자면 컴퓨터로 이용한 화상전화기를 보는 기분이다.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 것에 모자라 이쪽이 아닌 저쪽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른바 aura라는 것을 뛰어넘은 것이 되어 버렸다. aura는 누군가 자신을 촬영한 영상물을 계속 복제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 상대방도 같이 자신의 전달메세지에 동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1984의 세계는 aura의 관념을 넘어선 극사실의 결정체였다. 문제는 그 현실세계는 모든 것이 감시와 미행이었다. 주인공 스미스는 그런 통제된 공간에 왠지 모를 의문과 박탈감을 시달렸다. 그 의문은 과연 빅 브라더는 살아있을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존재에 대해 영상을 시청하며 누가 그 대상이 되든지 증오의 분출은 막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증오의 대상 1위는 당연히 골드스타인이다. 책에서 보면 스미스가 본 그의 인상은 “그 유태인의 얼굴을 야위었는데, 후광처럼 넘실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염소수염까지 기르고 있어서 쾌 지혜롭게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선천적으로 비열한 듯한 일상을 풍겼다. 게다가 길쭉한 코끝에다 안경을 걸친 모습에는 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우매함마저 서려 있었고, 얼굴과 목소리는 영락없이 염소를 닮아 있었다. 골드스타인은 여전히 당의 강령에 독설을 퍼붓고 있었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과정 되고 신랄해서 어린아이도 그 속내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미스가 상주하는 오세아니아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나, 적어도 골드스타인의 인상은 영락없는 트로츠키였다. 그가 <1984>를 발표하기 전에 명작소설인 <동물농장>을 내놓았다. 그런 다음에 <1984>를 내놓았으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조지 오웰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의 아픔과 1940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에서 트로츠키의 무고함과 비참함을 다시 담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조지 오웰이 그려간 미래의 정보사회는 유토피아라는 기술의 혜택이 인간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였다, 전자동 통제방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서 만약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게 될 경우 오세아니아 당국에 의해 그의 존재는 없어진다. 현재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마저 사라지게 되는 점이다. 새로운 신어를 개발 중인 사임은 자신의 능력과 영민함에 집착하게 되어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문제는 같은 사무실에 존재해도 그 사람이 없어지는 자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런 기본적인 인식조차도 불감증이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것은 이제 서로를 망각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그런 심각한 증세는 윈스턴 옆집에 살던 파슨즈의 일화다. 그는 자기 집에 어린 아이가 2사람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열렬한 빅 브라더의 지지자다. 어린 아이인데도 수상한자가 있으면 미행하여 고발하고, 심지어 아버지가 잠꼬대를 열쇠구멍으로 들어 감시국에 고발할 정도다. 빅 브라더에 대한 불만을 누구 입에서 나오면 바로 잡아가는 공포정치인 것이다.

 

이런 일들은 소설이라고 하나, 마치 주변에 있었던 일처럼 보인다. 한국이든 혹은 모든 대부분 나라이든 국가가 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하여 그것이 하나의 이권으로 변질될 경우 국민에 대해 감시와 처벌을 내린다. 몰래 도청하고 미행하여 그들을 납치 후에 감금, 폭행, 성추행, 살인 등과 같은 행위를 아무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최근에 민간인 불법사찰에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일들도 있었다.

 

예전에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개인정보가 적법한 절차나 보호도 없이 노출되고, 거리의 감시카메라는 개인의 사생활마저 침해한다.

범죄를 방지하고 예방해야할 국가조직이 오히려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은 1949년에 발표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낯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간에 빅 브라더와 빅 브라더가 행방도 모르면서 오세아니아 슬로건 3가지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강요하듯이 외치고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전쟁으로 평화를 지키고, 자유를 봉쇄하는 것이고, 지식을 없애는 것이야 말로 강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조지 오웰이 살거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던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이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최헌 교수의 <부시맨과 레비 스토르스>에서 부천경찰서사건을 예로 든 것이다. 그것은 원래 사건의 본질을 감추고 단순히 경찰서에 있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경찰서에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성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권인숙이란 여성에 대해 2차례나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통 여성들도 성폭행 사건을 말하기가 그러하나 25년 전이라면 더 심각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여성의 성적인 부분을 이용하여 경찰과 국가를 농락하는 행위라고 힐난을 했다. 하지만 문귀동이란 경찰관은 불법적으로 성폭행한 것이 사실이었고, 당국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권인숙 성폭행사건을 언어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부천경찰서사건으로 바꾸었다. 조지 오웰이 말한 <1984>의 신어는 바로 그런 것과 같은 목적을 담은 통제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단어만 말하게 하여 사고와 관념을 멈추게 한다는 것은 곧 생각할 수 있는 범주가 짧고, 정해진 것만 실행하는 인간이 되는 점이다.

 

인간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통제는 막대한 것이다. 언어는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은 다시 언어를 생산하고,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기도 한다. 결국 언어, 지식, 권력을 모두 통제하여 일부 지배특권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독재국가의 모든 정당성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독재조차도 그것이 정말 독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오세아니아의 그런 과격한 통제와 폭력은 윈스터인 오브라이언의 계략에 고문당한 모습에서 보다시피, 2+2는 무엇이냐는 것에서 우리는 분명 4라고 하나, 오브라이언은 5라고 한다.

 

윈스턴이 4라고 말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내내 심각한 고문을 가한다. 그의 고문의 마지막에선 윈스턴의 몸무게는 25㎏라고 말해준다. 머리는 모두 빠지고, 치아는 모두 너덜너덜하며, 등을 휘었으며, 온몸이 멍과 상처로 쌓인 채 살아있는 인간보단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있었다. 윈스턴은 자기가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으나, 오브라이언은 죽이지 않았다. 죽인다는 사실은 죽은 사람이 그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배반심이 있다는 점이고, 그의 이단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통해 그 사회의 현존성에 문제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과거 프랑스의 앙상 레짐을 보면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왕을 시해하려던 남자는 왕과 비슷한 위치로서 그 형을 받는다. 온갖 고문으로 천천히 죽이는 것이다. 그는 생체적으로 인간이나 지위적으로 왕과 대등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오브라이언은 그렇게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앙상 레짐의 시대는 사형수가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혹은 그 느낌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어느 사형수의 사형집행에서는 군중들이 몰려와서 사형을 방해하고, 사형수를 구출했다고 한다.

 

<1984> 세계는 그런 게 통용되지 않았다. 죽을 것이든 죽지 않을 것이든 모든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양심고백으로 통해 그 사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죽어가야 했던 것이다. 즉 죽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차라리 죽음을 요구하게 만든 것이다. 심각한 고문은 그 사람을 억지로 없는 거짓말로 통해 진실인양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고문을 가하는 그 자체가 고문의 이유다. 폭력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양심이 있든지 말든지 말이다. 윈스터은 자신과 동물처럼 성행위를 나눈 줄리아를 폭로하면서 그녀와의 만남과 성행위, 대화까지 모두 오브라이언에게 털어놓는다.

 

마지막에 그가 제일 싫어하는 쥐가 나올 때 그는 자신의 몸을 쥐가 먹는 것보다 줄리아가 대신 먹히기를 바란 것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그 공포로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무력화한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랑의 배신은 줄리아 역시 그렇다. 다시 재회한 줄리아의 모습을 본 윈스턴은 아름답고 건강한 그녀가 아니라 다른 느낌인 그녀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성행위를 하려고 해보았으나, 그것마저 되지 않았다. 오세아니아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금지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통제에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소한으로 성행위를 해야 하고, 그것을 하는 순간 불쾌한 존재고, 게다가 아이들은 여자가 낳는 것이 아니라 인공 수정한 시험관에서 나와야 하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애정이 생기면 가족마저 고발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들끼리 서로 통제하고 감시하는 세계에서 디스토피아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 행위를 속이려고 하는 것까지 눈치 채고, 가장 소름 돋는 부분은 원스턴이 비밀일기를 적은 후에 누가 볼까봐 석회가루로 표시했는데, 그 석회가루까지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다. 게다가 그 사진까지 찍어 윈스턴에게 보여주었으니,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 보인다.

 

오세아니아의 국가 체계는 <1984>를 읽은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 뻔뻔하고도 어이없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의미와 위선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고, 진리를 찾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며, 사랑하는 것이 오직 자신들의 사랑만 존재하고 다른 영역의 존재들은 모두 배척되고 있으며, 풍요롭다고 말하는 사회는 역으로 가난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오로지 TV나 선전물에서만 아이러니 겉만 완전하다. <1984>에서는 개인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으나, 국가의 공유화에서 그 권력관료들이 그 물질적 혜택을 당연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층민들은 여전히 착취로 당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1984>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또 어디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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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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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속에 묻힌 자들은 영원한 것일까? 영원하지 못할 존재인가? 방미진 작가가 이번에 선보인 괴담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좋은 이미지만 보이려다 속으로는 갖은 칼날을 넣어 서로를 향하여 던지려는 존재들 말이다. 이 책에서 평소 내가 느끼던 인간의 추악함 모습이 보인다. 이면에 가린 모습, 혹은 그 가면에 벗겨지는 이상 멈출 수 없는 추악하고 더러움!

 

그렇다. 나는 인간이 상당히 이성적이라고 여기고 있으나, 이성이란 감정 중의 하나이다. 인간에게 가진 냉소적 태도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친구가 옆에 있어도 과연 친했는가? 혹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관계까지도 말이다. 이 책은 상당히 현실적인 감각이 묻어 나온다. 말투를 보면 온갖 욕설과 비속어가 살짝 맛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학생일 때나, 혹은 지금 거리의 중고등학생을 보나 말이다.

 

단지 여학생의 입이 내가 다닐 적에는 그렇게까지 더럽지 않았다. 지금은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비슷하다. 아마 욕을 하는 것은 남녀평등이 되었는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아이였다. 아니 그 여자아이의 자매와 어머니일까? 딸은 어머니를 닮아간다고 하는데, 이 작품의 최고로 냉소적 소녀인 연두 역시 그렇다. 허황된 꿈과 사치에 빠진 어머니, 그러나 여기에 반해 우뚝하고 침착한 여동생 연지, 연두는 예쁘고 머리도 좋지만,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도 그런 그녀 곁에 보영이란 소녀는 엉뚱하고 귀여운 아이는 사차원이라 그녀 옆에 있어준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모두 떠날 것 같지만, 이 책을 보는 내내 친구 믿어도 돼? 혹은 괴담은 결국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견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서인주라는 소녀, 매우 마르고 볼품없는 외모나 목소리 하나는 천상이었다. 하지만 가난하고, 가난으로 기초도 없었다. 그런 그 소녀가 자살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보통 침울하고, 슬퍼하는 것이 맞으나, 그 소녀와 같은 합창부인 지연과 연두는 기뻐했다. 속으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연은 마음 속 한편에 슬픔이 있었고,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아니 인주 생전에 그녀가 부른 아름다운 소리에 자기 스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주인공 같지 않은 인주, 그녀가 주연이 아닌 밤의 여왕을 부를 때 인주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누군가 주인공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는 계속 희생되고 사라져 가야 하는가?

 

그런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이 동경과 숭고라는 이름 아래 뒤틀리고 다시 또 뒤틀린다. 그리고 미남 학생 치한이의 형인 요한은 그런 뒤틀림에 굴복하여 거기에 맛을 들인 소녀들의 역겨움에 환호를 한다. 미술을 전공한 그가 초현실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 그 그림은 인간의 추함이고, 비극이고, 고통이다. 예술가인지 천재인지 인간의 삶에서 광학적으로 보았다. 추함이란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말이다.

 

이 책은 본문이 240페이지가 되지 않아 금방금방 읽으나, 조금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상황에 일상적인 대화에 환상적인 사건이 발생된다. reality를 추구하는 시간과 공간에 괴담은 분명 reality에 넘어서서 그것을 모순으로 변질시킨다. 사진에 찍혀버린 사람이 죽었고, 그 존재 역시 사람의 기억에 의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괴담을 지나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신화라는 제의공간에 누군가의 희생이 곧 과업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그 제의에 대한 대상은 언제나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 가장 그렇게 바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1순위란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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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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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쟁, 분쟁, 내전, 테러 등이 일어나는 절망의 세계와 혹은 작가인 조지 오웰, 도는 조지 오웰의 책을 읽는 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까지 이 문장은 한번 읽어보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은 조지 오웰이 스페인 카탈로니아에서 영국으로 귀국하여 자신의 저택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남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산뜻한 풍경을 지닌 고장일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 특히 임항 열차의 편안한 쿠션 위에 앉아 평화롭게 배 멀미로부터 회복되고 있을 때는,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본이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외진 풀밭에서는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감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잋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이 말을 보면서 영국이 아주 편안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그 속에는 엄청난 위기가 오고 있는데도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곳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에게 영국의 그런 모습조차 과거의 스페인의 일들을 잊을 수 없나 보다. 위 문장 뒤에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모든 위험과 위기가 없지만, 그런 것조차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지 오웰의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다. 카탈로니아의 전쟁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이며, 아픔이다. 아마 1937년은 여러 모로 위기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이 창궐했으며, 스페인에도 프랑코라는 독보적인 독재자가 1975년까지 스페인을 좀 먹었다. 그런 주제에 자유라는 이름을 들먹였으나, 사실 그는 스페인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특히 무정부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과 같은 또는 가라타니 고진(일본 문화평론가 및 사상가)<근대문학의 종언>처럼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불리는 그런 공산주의가 아니라 노동문제를 넘어 왕이 지배하는 봉건사회에 도전하는 자를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일단 프랑스 혁명이든 러시아 혁명이든 모두 폭력적이고, 피를 뿌리지만, 기본적으로 봉건사회라는 기존 사회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계기이다. 그들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과거 봉건사회, 우리나라 같으면 조선시대 사대부 집권사회를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정치체계로서 지금 하면 좋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물론 전부 일반적으로 몰아넣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게 여기는 이상 그런 모순에 빠진다는 의미다.

 

당시 1937년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이 되어 스탈린이 모든 권력의 중심지고,,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처럼 1936~1938년 사이 스탈린의 폭력정치의 극단화를 보여준다. 파시스트에 대항하던 그들이 오히려 반파시스트에서 친파시스트로 돌아선 것이다. 인간의 모순은 그러하다. 조지 오웰 역시 초반에 스페인에 온 것은 독재자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파시스트에 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 영국에서 카탈로니아로 왔다. 처음 올 때는 체계도 없고 혼란스러워 보이나, 그 어디보다 자유스럽고, 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대가는 결국 피의 산물이다. 그가 전장에 갈 때 무기는 무척이나 노후 되어 총이 제대로 발사되어 적을 죽이기보단 총이 폭발하여 병사의 손과 얼굴을 다치게 했다. 총이 저절로 발사되어 사람의 폐를 맞추며, 물자는 부족하여 제일 중요한 문제는 땔감이었다. 추위는 아무리 겹겹이 옷을 입어도 방도가 없다. 부족한 것은 식량, 담배 등이고 늘 위기에 봉착한다. 조지 오웰은 이런 악조건에서 전투를 벌이고, 나중에 목에 총을 맞아 성대가 다치고, 경추신경이 손상되어 오른쪽 손가락이 마비되기 시작하였고, 검지 손가락은 감각이 사라졌다. 물론 그는 목숨을 담보로 하여 파시즘에 대항하였으나, 전장에서 돌아온 카탈로니아는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조지 오웰의 명작인 <동물농장>을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분명 소비에트 연방을 우화화 시킨 풍자적 소설이다. 스탈린이란 인물은 나폴레옹이란 사나운 돼지로 묘사하여 착취를 벗어나려던 그들이 더욱 착취당하는 모순이 빠진 점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그런 계기가 바로 카탈로니아를 찬가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점이다. 그는 무정부주의와 통일노동자당에서 활동했으나 이윽고 통일사회당과 경찰세력, 그리고 소비에트연방과 연줄이 보이던 공산당이라 곳은 오히려 파시스트에 대항하기보단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했다.

 

약소한 통일노동자당은 초반에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그 누구와 비교하여 가장 용감하고, 열의가 넘친 자들이었으나, 어느 순간 프랑코와 내연을 가지고 파시스트 5열이라는 오명과 특히 트로츠키주의라는 올가미도 씌워졌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참전했으나,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달리 일국사회주의가 아닌 연속혁명론을 주창했고, 식민지나 과다한 억압에 시달리던 민중을 해방하려 했으나, 도리어 그것이 스탈린에 의해 공격당한다. <동물농장> 소설에서처럼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는 힘도 없고 죽을 위기에 처해지고, 대항할 능력도 없어도 지상최고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문제는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최고의 정적,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독일주재 프랑스 대사관이 히틀러에게 찾아가서 트로츠키가 만약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가정을 듣자 히틀러는 큰 소리를 치며 두려워했다. 분명 그는 1927년 러시아에서 추방되기 전에 그것은 1924년 레닌이 죽기 전에 볼셰비키의 영웅이었다. 조지 오웰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트로츠키를 인정했지, 스탈린을 부정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언제나 목숨이 위기에 처해있고, 1938년 인터내셔널을 만들 때에는 스탈린에게 가장 큰 골치였다.

 

그러다보니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의 명령을 듣는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조직으로서 트로츠키는 사실과 무관한 파시스트로 낙인이 찍혔고, 그는 1940년에 죽음을 당한다. 그런 과정에서 스탈린과 그의 일파들에게 동조하지 않은 자들은 트로츠키주의자이고, 모두 파시스트 내부 간첩으로 몰았다. 그렇게 오명을 받은 조지 오웰의 동료들은 스페인 내전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감옥에서 병들고 혹독한 환경 아래 총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조지 오웰은 스페인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정이 넘치고, 열정이 가득하며, 아가씨들은 머리가 검고 아름다우며 생기가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밝고 아름답고 멋진 미녀들이 모여 있을 것만 같은 카탈로니아는 때로는 최악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지로 되었다. 본래라면 많은 미녀들이 꽃밭에서 꽃으로 머리띠나 목걸이를 만들며, 올리브향이 가득한 기름으로 맛있는 요리들을 연인과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 진정 목표일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자연 속에 너나 할 것이 모두 인간다움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닌 악몽으로 다가와 모든 것을 망쳤다. 생각해보면 1939년 독일의 히틀러와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파시스트의 최강 나치가 존재하는 군대를 가장 타도해야할 볼셰비키 이였지만, 그들과 조약을 하고 권력을 삼키고, 파시스트의 살인과 폭력을 용인한 아이러니에 빠진다. 그래도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를 찬가를 부르며, 그곳의 스페인과 같이 참전한 외국인들, 심지어 파시스트군에 속해있는 병사까지 생각해준다. 그들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되었으니 말이다. 인상 깊은 조지 오웰이 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여 담배가 없어서 누구에게 달라고 하자 옆에 있던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의 담배를 모두 주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당시 담배는 매우 귀했고, 밀수품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그 두 명은 배급받은 일주일 분의 담배 전부를 조지 오웰에게 주었다. 정이 많은 그들에게 조지 오웰은 잊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기쁨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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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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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녕 나츠메 소세키 작자의 작품이렸소? 고양이가 세상을 보고,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고양이가 narrator로 변신하여 narrative를 이끌어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재미난 글이구나!

 

 

 

이런 엉뚱한 문체로서 이 소설의 감상을 열어가는 내 심정은 그 소설의 문체에 조금 동화되어 적어보려고 한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란 작가는 예전부터 조금 이름을 들어왔다. 예전에 일본의 아주 현명한 문학비평가 겸 사상가인 가라타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의 문학도 중에서 나츠메 소세키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실로 느끼게 해주었으니 말이로다. 물론 그 이전에 푸른 문학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고코로 즉 마음(心)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참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치밀히 묘사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원전은 보지 않음에도 애니메이션에 담론하고 있는 작품의 묘사력에서 영상효과도 중요하나 그 원래의 스토리라인이 엄청나게 탄탄한 것만은 사실이렸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 작품의 대작 중에서 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작가인 것을 한층 더 깊게 다가왔다. 문제는 매력적이란 사실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가 적은 것을 읽음이지,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마주본 사실이 없기에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모든 등장인물은 나츠메 소세키 자신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은 분리된 자신의 모습이다. 오로지 여기서 현명하고도 풍월을 제대로 외우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이름조차 없는 고양이다. 이름 없는 자가 어찌하여 인간살이에 그렇게도 상상 이상으로 관찰하고 풍월을 외운다는 말인가? 어째든 그 고양이는 바로 나츠메 소세키의 자아비판을 하는 목소리 중에 하나다. 이 소설은 매우 풍자가 강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게다가 고양이가 인격화되어 우화처럼 서술자가 되었으니 이 기묘한 조화는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단지 이 글을 보면 볼수록 재미와 더불어 가슴 한편에 왠지 모를 슬픔이 다가온다. 왜냐하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비록 소설에 가상의 인물들이 펼쳐가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나 그 모티브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부분은 모두 나츠메 소세키란 소설가를 반영한 것이다. 무척이나 우둔하고 겉멋만 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은 웃기게도 영어교사를 맡고 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과 미국 등과 같은 외국과 교역하면서 신문물이 들어오고, 거기에 당시 지식인과 기업인, 정치인들이 큰 변화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하오니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 역시 동경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니고, 영국에도 유학갈 정도로 수재였지만, 그 역시 구샤미군처럼 자신의 모순에 뼈저리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늘 말하듯이 주인은 책 1권을 들고 몇 장도 읽지 않은 주제에 잠만 탐하고, 주변에 메이테이, 간게츠, 산페이, 스즈키, 부에몬 등과 같은 인물이 오면 마치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츠메 소세키는 열심히 했지만, 그가 그렇게 함에도 그 자신은 구샤미군처럼 느껴질 것이로다. 당시 일본사회는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만든 화(和)를 중시한 시기는 지나갔다.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과거의 봉건국가는 지나가고, 전형적인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한 시기다. 러일전쟁을 거론하는 것부터 당시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물론 고양이는 자신이 일본인이고, 자신 역시 국가를 사랑하기에 전쟁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의 승기를 바란 것 같아도, 의연금을 내달라는 것에 구샤미군의 쓴 표정에서 전쟁 이후의 당시 상황에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음은 분명하다.

 

 

 

왜 그렇게까지 그래 생각함에 중요한 것보다는 왜 그리 되었나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분명 고양이가 보는 어느 영어교사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의 담화로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츠메 소세키의 슬픔과 고뇌가 담겨있다. 우선 구샤미군을 보면 그는 위장병을 앓고 있다. 왜 앓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특별히 술을 많이 마시거나 음식을 편식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는 위장병으로 늘 아픔을 느낀다. 그 모습은 마치 나츠메 소세키가 위장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에서 그렇고, 그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그의 젊은 시절에 신경쇠약증으로 무척이나 고생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풍자로 가득한 글에서 고양이가 풍월을 외우는 자들을 보고 자기도 외우고 있으렸다! 하고 있어도 역시 이 글은 풍자 속에 가려진 나츠메 소세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양이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고 2년 동안 살며, 산페이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고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을 때 고양이는 죽음에 대해 고통보단 오히려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형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라며 최후를 맞이하며 이 소설은 끝을 본다. 하지만 그 전에 고양이는 자기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타인들의 죽음을 예견한다.

 

 

 

주인은 조만간 위장병으로 죽는다, 가네다네 영감탱이는 욕심 때문에 이미 죽었다.” 이 소설의 하권이 1907년 나츠메 소세키기가 40세일 때가 창간되고, 그 후 나츠메 소세키는 1915년 향년 48세의 나이로 결국 위궤양에 의해 세상과 이별을 맞이한다.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은 자신이 쇠경쇠약으로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쓰러졌고, 게다가 위궤양이 지독한지 그의 운명을 재촉했다. 그래서 마치 구샤미군처럼 위장병으로 죽는다는 사실에서 자신을 구샤미군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그는 위장병으로 죽고 만다. 이 글귀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깊은 아픔과 허무함이 드리워졌다.

 

 

 

나츠메 소세키가 일본 근대문학에서 잊을 수 없는 작가고, 일본에서 그의 작품을 100년 동안 사랑한 것처럼 나 역시 그의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한국 근대작가 이상의 날개에서 나온 문구가 생각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나츠메 소세키는 그런 천재적 문학도인 자신의 우울과 그 우울함을 주는 세상에 대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츠메 소세키의 연대를 보니 그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다.

 

 

영문과에 다닌 점을 본다면 그의 문학적, 철학적 재량은 상당하다. 이 책에서 등장인물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거론하고 있다. 초인(超人)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넘으려고 하는 욕망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메이지시대의 엉터리지식인이라고 해도 정말 엉터리로 볼 수 있을까 이다. 등장인물 중 구샤미군은 무척이나 어리석고, 아둔하며,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심이 있었다. 비록 엉뚱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고양이가 어미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무참히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구샤미군의 집에 올 때 그 고양이의 생명은 구샤미군의 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초반에 이 집의 하녀인 볼이 넓은 오상에게 미움털이 박혀 위기에 빠지나, 그 생명을 살게 해준 것은 구샤미군 덕분이다. 비록 아둔하고 어리석어도 말이다. 고양이는 주인의 멍청함과 아둔함을 비웃으나, 한편으로 주인의 입장을 동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양이와 같은 나츠메 소세키이니 말이다. 당시 일본이 자본주의가 오고, 가네다 같은 영감이 득세하는 시기였다. 학문을 하는 자들은 모두 쓸모없는 자가 되기 시작했다. 간게쓰와 같은 인물은 충분히 영리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려 해도 받지 않은 채 가네다의 딸과의 혼사를 뒤로한다. 대신 산페이 군이 가네다의 딸과 결혼한다고 한다.

 

 

 

고양이가 죽은 것은 바로 왜 가네다의 딸을 간게쓰가 아닌 산페이로 하느냐이다. 이미 일본은 공부를 하고, 인격을 중시하던 과거의 마음을 모조리 버린 채 새로운 문화에 적응했는지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과거의 헤게모니적인 관직이나 권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관직과 재력은 유효하되 인간살이가 점점 삭막해져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구샤미군처럼 어리석고 현실물정은 모르는 자는 가네다와 같은 부자들에 대해 경외심이나 존경심은 없다. 나츠메 소세키가 이 소설을 집필 당시 분명 당시 사회나 혹은 지금까지라도 보통 일반인들은 가네다와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황금만능주의가 도래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 구샤미군과 고양이, 그리고 나츠메 소세키는 매우 좋지 않음이렸다. 하지만 세상을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고, 지식인들의 지식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고, 메이테이 같은 작자는 허풍선이만 늘어내고 있다. 그런데도 웃긴 사실은 그런 엉뚱한 세상에 묻혀버린 지식인들에게 교육받는 이들은 다시 그 지식인들이 원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네다와 같은 인물로서나 혹은 따르는 무리로서 가는 것이다.

 

 

 

이 소설처럼 구샤미군은 영어를 가리키는 교사이고, 나츠메 소세키 역시 교사와 교수를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교육관과 사회관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음에 대한 낙심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가네다 영감이 자신의 딸과 간게쓰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메이테이와 구샤미군에 대해 은밀한 공작을 펼친다. 구샤미군 집 옆에 학교가 있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네다 영감으로부터 뭔가의 지원을 받아 야구를 하고, 그 공들이 모두 구샤미군으로 향한다. 공이 날라 오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고, 귀찮아진다. 그래도 구샤미군은 중학생들 상대로 막무가내 행동을 하고, 엄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 집에 학생들이 와서 인사말로 “공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냥 대문 안으로 보내주었다.

 

 

 

자신 역시 교사인데, 학생들은 교사인 자신보다 가네다 영감의 재력에 마음이 갔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재미난 풍자이나, 한편으로 보면 나츠메 소세키의 기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도 나츠메 소세키는 이런 세상이 모순으로 너무 가득한 것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은 분명하다. 본 작품에서 고양이가 주인은 위장병으로 곧 죽겠지만,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자라고 한다. 주인은 곧 죽는다 에서 지금은 죽지 않았고, 가네다 영감은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라는 말에서 풍월을 외는 시대에 뒤쳐진 자보다, 가네다와 친하게 지내는 구샤미군의 옛 친구인 스즈키의 말대로 “그런데 그 돈이라는 놈이 괴물이라서, 지금도 어떤 사업가한테 가서 듣고 왔는데, 돈을 버는 데도 삼각술(三角術)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의리도 없고, 인정도 없고, 수치도 없고, 이로써 삼각이 된다는 거야, 재미있잖아? 아하하하.”

 

 

 

저 삼각술에서 의리, 인정, 수치도 없이 돈만 밝히면 그 시대에서 인정받아 성공한다는 자체에 나츠메 소세키와 나츠메 소세키를 분리시킨 고양이와 구샤미군의 일행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 구샤미군이 위장병은 단순히 음식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구샤미군이 단순히 정말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는 구샤미군과 같은 사람이 멍청하고 어리석게 되어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 정신병원에 있는데, 이들은 평소에 멀쩡해도 가끔씩 자신의 재주를 부릴 때만 미친 인간이양 된다. 하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상대방이 정상인으로 볼 뿐이다.

 

 

 

아니 이 소설에서부터 뭔가 잘못 되지 아니한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타이틀로서 고양이가 어떻게 인간과 같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그것도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은 새끼고양이가 말이다. 온갖 철학과 문학적 지식과 더불어 과학의 지식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만하면 천재 중에 천재인 고양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서술하는 언어는 마치 화려한 꽃들이 이리 피고 저리 피어 구불구불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현상이렸다.

 

 

허나 고양이가 이토록 전지전능한 지식과 판단을 가지고 인간을 보니, 인간의 모습이란 그저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였다. 고양이는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지 않았기에 말이다. 대신 고양이는 술을 마시고 마치 춤을 추면서 항아리에 빠져 죽는다. 그래도 고양이는 죽음이 고맙다고 한다. 아니 죽음으로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절망 속의 희망을 품은 나츠메 소세키의 외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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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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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 주제나 의미에 대한 부분에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관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난해하여 보통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 매우 부적당한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너무 쉽게 적어 마치 이원화적인 대립관계만 내세우면, 그것은 단순히 한쪽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정치적 공세이지 그것 자체에 철학이란 단어를 수식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이나 혹은 그 이상의 서적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치와 철학에 대한 사고를 간단히 유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숲의 왕국”에서 이런 문제를 잘 고민했는지, 작가가 매우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풀어 넣었다.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한 곳은 인간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자연 숲속이고, 그 숲속이라고 하여도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처럼 숲속의 나무들이 동물들이 직접 인간처럼 행동하기보단 그 숲 자체의 나무로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움직인다. 물론 작품 중간에 나무들이 움직여서 땅을 메우고, 시냇물을 막고, 가시를 날리는 것은 상당히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나, 그 상상력에 대한 글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적은 작가나 그것을 바라보는 문인들 역시 이 소설은 우화(寓話)라는 점에서 숲속의 나무들을 인격을 갖춘 존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무들이 인격화하여 그들이 직접 사람과 교감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숲속의 주인인 원노인과 원노인 아래서 같이 일을 돕는 목상무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숲속의 기운이 좋고 나쁨을 알 수 있지, 그 이상으로 대화를 듣거나 직접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인간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보단, 자연의 나무들이 어느 특정 인간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대화능력을 소유한 원노인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다. 고등학교 시절 625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어 그의 마음은 아마 매우 수척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숲일지도 모를 돌산을 보며, 그곳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60년 동안 노력하고, 목상무는 원노인이 40년 전에 거둔 고아로서 함께 그 숲속을 가꾸게 하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 머리가 하얗게 된 노인과 중년의 남성이 되었다. 노인은 어느 제안을 했다. 숲속의 왕을 정하자고 말이다. 이때까지 잘 견뎌온 그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이 작품의 주인공인 노인은 사실 몇 년 전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 다행히 효험은 있었으나 그의 인생이 길지 않음을 노인 스스로 알고 있던 것이다.

 

노인은 그래도 아랑곳없이 그저 숲만 돌보고 숲에서 즐기고 많은 것을 나누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보단, 기독교에 대한 관념적으로 대하던 그는 정말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저 자신의 신이 정하는 것처럼 자연에 있는 숲속이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숲속에 이때까지 왕이나 계급은 없었다. 단지 노인만이 숲속의 주인이었다. 노인은 숲속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숲속의 나무와 그 나무를 찾아오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벌레와 시냇물까지 모두였다.

 

아름다운 숲이란 모두가 모여 옹기종기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갈등도 빚어도, 그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었다.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처음 나무를 심을 때 리기디소나무나 밤나무와 같은 큰 나무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나무를 심는다고 주변에 잡초와 잡목을 베자, 그만 홍수피해가 나버린 것이다. 잡초와 잡목들은 홍수가 오면 그 홍수를 막는 힘이었다. 숲속에는 언제나 크고 인간에게나 혹은 동물에게나 실용적인 나무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당장 쓸모없이 보인 것들이어도 노인에게 모두 소중한 생명이었다. 노인이 가꾼 숲은 전국의 유명한 숲이 되고, 거기에 오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였고, 나비와 벌은 춤을 추었다. 시냇물의 물맛은 너무 좋아 주변에 산짐승이나 아니면 원노인도 찾아와 갈증을 해소했다. 그 모든 작은 하나들이 이루는 숲이었다. 아마 그런 숲에서 원노인은 자신이 숲의 주인이 아니라 숲의 주인 중에 하나이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곳에서 말이다.

 

노인이 숲의 왕을 뽑고 싶은 것은 이제 자신의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다는 점과 동시에 이제 숲 스스로가 자신들을 가꿀 수 있는 능력이 된 것을 알았다. 노인은 숲을 믿었고, 숲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상무에게 숲을 부탁하고, 어디로 여행만 다닌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숲은 조용하지 않았다. 왕의 자격에서 누가 되는가에서 인간과 동물에게 실용적이지 못한 작은 나무들이 차례라 밤나무, 잣밤나무, 벚나무에게 찾아가나 계속 주소가 틀렸다. 하지만 탱자나무에게 갔을 때 탱자나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숲은 이제 나무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명령했다.

 

처음에 사람을 내쫓고, 동물을 내쫓고, 벌레도 내쫓자 숲은 마치 아무도 오지 않은 적막한 공간이 되었다. 이제 시냇물도 막고, 하다못해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는 것은 외로움과 괴로움, 아픔과 슬픔이었다. 시냇물이 막자 뜨거운 태양이 지면을 비추면 나무들은 목이 타들어가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비가 많이 오면 이미 삼림이 황폐해져 모두 토사에 밀려 피해를 보았다. 거기다가 진딧물까지 나무의 진을 빨았고, 숲은 신음에 가득했다. 그리고 숲속 밖의 인간들은 숲속 안의 나무들이 병들고, 열매도 못 맺고, 더 이상 즐거움이 없자 모두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과 남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이 그 남의 머리 위로 올라가고 싶은 심술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여 최악의 극단적 상황까지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들을 죽이고 멸종하게 하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들이 계산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자기 자신들이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들은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탱자나무 역시 처음에 인간을 멸시했으나, 그 역시 원노인의 정성 아래 이만큼 자라고 자란 것이다. 탱자나무는 처음에 자신이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으로 알았으나, 원노인은 탱자나무의 향이 좋다고 여겼다. 원노인에게 모든 것은 다 필요한 존재였다.

 

사랑받지 않은 존재가 없듯이 숲속의 나무들과 그리고 풀들은 모두 자신들이 이 숲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것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등과 같은 큰 나무들은 인간들에게 직접 열매도 주고, 좋은 경치도 준다. 인간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능력이 있는 재산가 내지 엘리트다. 하지만 작은 풀과 작은 잡목들은 당장 필요 없어 보이는 존재로 그들보다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심지어 사과나무를 심어보는 것이 이익이 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사소하고 작고, 별로 두각을 나타나지 못하는 나무나 풀 역시 숲속에서 바꾸어 말하여 우리 인간사회에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그런 작은 존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지? 혹은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너무 비관적인 사고에 빠져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며, 모두를 곤란하게 하는지가 우리 현실을 나무에 빗대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주 일어난 일이고, 또한 그런 문제로 숲속은 멸종을 맞이하나 다시 살아난다. 혁명이라든지 쿠데타와 같은 강제적인 폭력과 행위보단 조금씩 서로 대화와 토론을 거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모두 고생하고 모두 곤란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와 철학은 무엇일까?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인정해주는 관용이 아닐까?

 

원노인이 숲속에서 왕을 지정하게 되면 당연히 서로 다투고 난관에 부딪힐 것을 미리 예상했다. 하지만 원노인은 다 잘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서로의 힘으로 모두 서로 도우며 잘 살 수 있는 길을 말이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균형이란 중요하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고,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다. 그런 점들을 모두 같은 존재로서 인정해주면 왕은 소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왕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되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세계일까?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평탄치 않은 사실은 이 소설에서 잘 보여준다. 그것은 어렵고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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